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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활사 30 - 창고의 역사(네이버캐스트 2012,5.2일자에 올린 글)

작성자김용만|작성시간12.05.02|조회수304 목록 댓글 0

인류가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된 것은 잉여물품 때문이었다. 잉여물품을 잘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다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 창고(倉庫)다. 창고는 개인의 창고에서 국가의 창고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삶과 다양하게 얽힌 구조물이었다. .

 

창고의 탄생

창고는 잉여물품을 일정 기간 보관했다가 필요한 때에 꺼내 쓰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구석기 시대에도 당장 먹고 남은 식량을 잠시 보관하는 곳이 있었으나, 본격적인 창고는 약 1만 년 전 농업 생산이 시작된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우리 역사에서도 신석기 시대 주거 유적지에서 창고가 등장한다. 평안남도 온천군 궁산 1호 주거지에서 집 가운데 화덕자리 옆에 구멍을 파고, 항아리를 파묻어 물건을 저장했던 저장공(貯藏孔)이 발견된 바 있다. 이 때의 저장공은 가장 초보적인 형태의 창고라고 할 수 있다. 평양시 삼석구역 남경유적 31호 주거지 내부에서는 갈돌 12개를 비롯한 다수의 석기류와 어망추 3천여 개, 토기 120개체 분이 발견된 바 있다. 이 정도 창고는 신석기 시대 마을 사람 전체가 함께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에도 마찬가지로 공동 노동의 비중이 큰 만큼, 창고 역시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청동기시대 후기 마을에서는 3〜6가구 정도의 주거군(住居群)이 창고를 공유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창고 소유가 마을 전체 차원이 아닌, 세대공동체로 하향되면서 창고의 숫자 또한 늘었다. 그리고 같은 마을에서도 주거지 내에 별도로 저장시설을 가진 집들도 등장하는데, 이는 독자적인 사유재산을 가진 부유한 자의 등장과 연관이 있다. 청동기 시대까지의 창고는 바닥이 평탄치 않은 저장 웅덩이가 다수였다. 그러나 초기 철기시대에는 땅을 파고 집을 짓는 수혈주거 외에도 귀틀집, 고상식(高床式) 건물 등 집의 건축 형태가 다양화되었는데, 이에 따라 창고도 차츰 귀틀집 형식으로 지어졌다.

 

고구려의 창고인 부경

덕흥리 고분 벽화의 부경 그림. 고구려 사람들이 사용하던 창고인 부경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물건을 꺼내오는 다락식 창고였다.

옥미창은 만주 집안 일대의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창고로, 옥수수 등의 곡물을 보관하는 데에 쓰인다. 고구려의 부경과 그 형태가 닮았다.

진(晉)나라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에는 고구려의 집집마다 작은 창고인 부경(桴京)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부경은 네발 달린 뒤주형 곡간(穀間- 곡식을 보관해 두던 창고)을 짓는데, 벽체를 뗏목 엮듯이 구성했다는 의미다. 고구려 마선구 1호묘에 보이는 2개의 창이 달린 창고와 덕흥리 벽화 고분에 보이는 창고가 부경이다. 부경은 바닥에서 띄워 놓은 다락식 창고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물건을 넣고 꺼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8세기 중엽에 만들어져 일본 왕실의 유물 창고였던 도다이사(東大寺)에 위치한 쇼소인(正倉院)이나 607년 경이 건립된 호오류우지(法隆寺) 안에 위치한 보물창고인 고오후우죠오(綱封藏)역시 고구려의 부경과 닮았다.

현재 만주 지역에서 현지인들이 옥수수를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는 옥미창(玉米倉) 또한 부경과 닮았다. 부경은 습기와 동물로부터의 피해를 막는데 효과적이므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국가의 등장과 창고

일본의 국보인 호오류우지(法隆寺)의 고오후우죠오(綱封藏)는 고구려의 부경과 마찬가지로, 아래를 띄워놓아 습기나 동물의 피해를 막는 데에 효과적인 창고였다.
고대국가에서 창고는 국력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되었고, 창고를 장악한 자가 곧 재물과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국가는 관료기구를 갖추고, 물자의 통제권 및 군대와 경찰조직을 장악한 권력자가 등장함으로써 성립한다. 다시 말해, 최고 권력자는 각종 재물을 보관하는 창고를 장악한 자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20년 신라의 사신으로 마한왕과 만난 호공(瓠公)은 신라가 국력이 강하다는 것을 창고가 가득 채워져 있음을 통해 말하고 있다. 서기 82년 파사이사금 3년의 기록에는 창고가 비어 나라의 위기라고 여긴 기록도 등장한다. 왕은 나라의 창고들을 장악하여, 창고의 물건을 채우고 빼고 하는 일을 주관한다. 창고에 물건을 채우는 일은 곧 조세를 거두는 것이며, 창고에서 물건이 나가는 것은 관리들에게 주는 급료 등의 보상, 군대의 유지비, 도로 건설 등 각종 사업에 사용될 때이다.

왕은 창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여야만 나라를 제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역대 왕들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심한 곤경에 처하면,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해야 하는 것을 의무로 여겼다. 하지만 모든 임금들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 역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농민반란은 백성이 굶어 죽는데도 임금과 관리들이 외면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배고픈 농민들은 관아를 습격하여 곡물을 먼저 나누어서 굶주림부터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관아의 창고는 백성들에게 마지막 남은 보루인 동시에, 원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진대법과 창고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179〜197)은 을파소(乙巴素)를 재상으로 기용하여 194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했다. 진대법은 봄철에 식량이 부족해 굶주리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정부에서 보관하는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기인 가을에 돌려받는 제도다. 진대법은 귀족들이 행하던 고리대금업으로 인한 폐단을 막고, 양민들의 노비화를 막으려는 목적으로 실시한 것으로, 고려시대 의창(義倉), 조선시대 환곡(還穀)의 시초가 되었다.

진대법이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전국에 걸쳐 나라에서 운영하는 창고가 있어야 한다. 물론 창고 관리의 주체는 관(官)이 된다. 따라서 진대법의 실시는 창고를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통치 질서를 확고히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창고에 물건이 들어오고 나가는 횟수가 늘어난 만큼, 이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문서 행정도 중요해졌다. 부여 쌍북리에서 발견된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라 불리는 목간(木簡)에는 백제 창고의 곡식 출납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위 관리가 맡았던 창고 관리

백제의 22개 중앙 관청에는 궁궐 안과 밖의 창고를 관리하는 내경부와 외경부가 있었다. 이들 창고는 내두좌평(內頭佐平- 1위 관등)이 직접 주관했다. 신라 최고의 관청인 집사부(執事部)의 전신은 품주(稟主)인데, 품주는 창고지기란 의미다. 고구려의 3위 관등인 주부(主簿)는 장부를 담당한다는 의미로, 물자의 출납 등을 관리하는 자이다. 창고 운영을 잘못하여 창고가 비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각국에서는 직급 높은 관리들이 창고 운영을 늘 점검했다.

251년 신라의 12대 왕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재위: 247〜261)은 글씨와 산수에 능하며 청렴한 것으로 명성이 높은 부도(夫道)란 자를 등용하여, 아찬(阿湌- 6위 관등)에 임명하여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업무를 맡겼다. 당시 신라에는 글자에 익숙한 자가 적었는데, 창고 업무만큼은 문서 행정이 능한 자가 필요했기에 파격적으로 등용한 셈이다. 또한 청렴한 자에게 창고를 맡긴 것은, 창고가 늘 부정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부정한 관리들이 넘보던 창

창고는 곡물을 보관하는 창(倉)과 옷감, 보물, 병장기 등을 보관하는 고(庫)로 크게 구분되나, 고려 중기 이후부터는 개념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다. 창고에 넣어둔 곡식은 쥐나 새들이 와서 먹기도 하므로,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곡물에 꼬리표로 달아놓은 목간에 쥐 잇자국이 난 것들이 발견되곤 하는데, 이는 신라 시대 창고에도 쥐가 들끓어 피해를 입었음을 알려주는 예라고 하겠다. 하지만 쥐 보다 창고에 더 큰 피해를 주는 것은 창고를 관리하는 부정한 관리들이었다.

627년 신라에 큰 기근이 들어 먹고 살기가 힘들어졌다. 이에 궁중의 여러 사인(舍人- 하급 관리)들이 작당을 하여 창예창(唱翳倉)의 곡식을 훔쳐서 나누어 가졌다. 이때 검군(劒君)이란 자가 홀로 곡식을 받지 않자, 여러 사인들이 그들의 행위가 누설될 것을 우려해서 음식에 독약을 넣어 검군을 죽이고 말았다. 재물이 있는 곳엔 사건사고가 많았던 법이다. 예나 지금이나 창고는 온갖 부정한 세력들이 넘보는 곳이어서 각별한 관리가 필요했다.

 

성 안에 있던 창고들

오녀산성의 창고 유적. 고구려 초기의 수도인 오녀산성에도 창고가 있었다. 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물자가 풍부해야 하며, 창고가 반드시 필요했다.


부정한 관리들도 문제지만, 창고는 도적이나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게 보존되어야만 했다. 663년 신라는 궁성인 월성(月城)의 남쪽인 남산신성(南山新城) 안에 창고를 지어 곡물 등을 보관했고, 서쪽에 위치한 서형산성(西兄山城)에는 소금창고(鹽庫)를 두는 등 창고를 궁성 주변에 두어 철저히 관리했다.

물론 창고가 수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 지역에서 필요한 물자 등은 지역별 관청이나 성(城) 안에서 군사들의 보호를 받기도 했다. 전쟁을 하는 당사자들에게 전리품(戰利品)을 얻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전리품을 얻기 위해서는 적의 성 안에 있는 창고를 열고 그 물건을 차지해야만 했다. 성을 방어하는 자는 특히 창고를 지켜야 먹을 것을 먹어가며 적과 대항할 수가 있다. 전쟁은 곧 창고 쟁탈전이기도 했다.

645년 고구려 요동성을 공략한 당나라 군대는 화공(火攻) 작전 끝에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포로 1만 명과 함께 곡식 50만 곡(斛)이나 되는 엄청난 식량을 빼앗았다. 성에 불이 났음에도 창고가 불에 타지 않고 식량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창고의 벽이 두껍게 지어져 화재에도 잘 견딜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672년 신라가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을 때 만든 군창(軍倉)이 최근 남한산성 행궁지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창고는 길이 53.5m, 폭 18m의 대형 건축물로 벽의 두께가 무려 2m나 된다.

현재 전국에 있는 많은 성들 가운데, 지방 통치와 직접 관련이 있는 군현성(郡縣城)에는 돌로 만든 벽을 가진 건물들이 많이 있다. 이런 건축물들은 대개 조세로 거둔 곡물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와 조선의 창고

고려와 조선의 창고는 크게 지역 행정단위별로 있는 주현창(州縣倉)과 조창(漕倉), 그리고 경창(京倉)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고려와 조선은 지방에서 조세로 거둔 곡물을 육상 교통로 보다는 뱃길을 이용해 수도로 운송해왔다. 조운선(漕運船)이 곡물을 운반하기 위해서 전국 각지의 물길 주변에는 인근에서 거둔 곡물을 모아두는 조창이 있었다. 덕흥창(德興倉- 충주에 설치된 조창), 흥원창(興元倉- 강원도 원주에 설치된 조창) 등 규모가 큰 조창 주변에는 창고와 관련된 상업, 숙박업, 운송업, 은행업, 시장 등이 발달해 그로 인해 지역도시가 발전하기도 했다.

조창에서 모아진 곡물 등은 개경, 한양으로 옮겨졌고, 수도에는 경창이 있어 물건을 보관했다. 고려는 좌창, 우창, 대창, 용문창, 운흥창, 신흥창 등 여러 창고들을 두어 물건을 나누어 보관했다.

 

분산 보관한 창고

경복궁 사정전 앞의 창고는 임금이 필요한 물건을 넣어두는 곳이었다. 궁궐 안의 창고는 사용처에 따라 쓰기 편하도록 여러 곳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정족산 사고(史庫). 실록 등 국가의 중요 기록을 보관했던 사고 중 하나로, 강화도 정족산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창고 관리는 호조와 군기감, 각 지역 수령 등이 담당했지만, 화재, 습기 등을 모두 다 예방할 수는 없었다. 특히 전쟁이나 화재 등으로 창고가 불탈 경우 귀중품을 하나만 보관하면 복원할 수가 없으므로, 중요한 자료의 경우 분산 보관을 선택했다. 특히 국가의 중요 기록물인 실록(實錄)은 4부를 인쇄해 궁궐의 춘추관과 충주, 전주, 성주 4곳에 보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주를 제외한 3곳의 실록이 불타 없어지자, 이후 사고(史庫)를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정족산 등 방어에 유리한 전국 각지에 분산 배치해 두었다. 이로 인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남아있을 수 있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선정될 수 있었다

궁궐 안에도 창고가 여러 곳에 분산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사용처에 따라 쓰기 편하게 하기 위함도 있었다. 궁궐 안에는 무기고, 화약고, 장고(장독대), 책고, 주고(廚庫- 부엌 창고), 어차고(御車庫- 수레 보관), 연고(輦庫- 가마 창고) 등 다양한 창고들이 있었다. 임금은 평소 정사(政事)를 처리하는 편전(便殿) 앞에 위치한 천자고(天字庫), 지자고(地字庫) 등에 넣어둔 물건을 신하들에게 하사품으로 내리기도 했다.

 

오래 보존하기 위한 노력

창고는 물건을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어야만 한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보관된 해인사 장경각(藏經閣)이나 얼음을 보관할 수 있는 석빙고(石氷庫) 등을 만든 우리 조상들은 바람의 대류현상을 활용해 습기와 온도를 조절하여 물건을 오래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고려시대 곡물 창고의 경우, 바닥은 흙으로 대를 수 척(尺- 약 30㎝) 이상 쌓고 풀을 엮어 멱서리(곡물을 담는 그릇)을 만들어 그 속에 쌀 한 섬씩을 담아 쌓아 올렸는데, 그 높이가 수 장(丈- 약 3m)나 되어 담장 밖으로 솟아 있다. 그리고 그 위를 다시 풀로 덮어 비바람을 막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조선의 조창 역시 이처럼 야외에 노적한 것처럼 되어, 창고 벽이 없어 곡식이 도난당하는 사례도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곡식을 저장한 것은 통풍을 원활하게 하여 두어 해가 지난 쌀이라도 새로운 것처럼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고려의 대의창(大義倉)은 본래 개경의 서문 안에 있는 300만 석을 보관하는 큰 창고였는데, 화재로 불타 버리자, 그 위치를 물길이 모이는 개경 서남쪽 장패문 부근으로 옮겨 화재를 예방하고자 했다. 화재를 예방하고자 조선시대에는 창고 주변에 인가를 철수시켰고, 담장을 높게 하고 아무나 창고에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물론 화재보다 더 막기 어려운 것은 외적의 침입이었다. 깊은 산에 배치한 사고(史庫)의 경우도 1592년 일본군의 침략으로 전주사고를 제외한 나머지 사고들의 책들은 온전하지 못했다. 또 나라가 망하면 창고에 보관된 물건들은 대부분은 외적에게 약탈당하고 만다.

 

창고의 진정한 가치

인류는 오래 전부터 창고에 다양한 것을 보관해왔다. 당장 사용하지는 않지만,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다음을 위해, 또 필요한 사람과 필요한 곳에 쓰이기 위해 물건을 창고에 모아둔 것이다. 창고의 기능은 보관이 아니라, 적재적소에 재물을 사용하여 물건을 가치를 극대화시키데 있다. 인류가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창고를 활용해 물건의 활용가치를 높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창고의 중요성은 계속 커져왔고, 미래에도 더욱 커질 것이다.

 

참고문헌: 권오영, [삼한사회의 구성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10집, 1995;주남철, [桴京考], [민족문화연구] 27집, 1994;김창석, [신라창고제의 성립과 조세운송] ,[한국고대사연구] 22집, 2001;김재명, [고려시대의 京倉], [청계사학] 4집, 1987;김흥섭, [한국전통창고의 건축특성에 관한 연구], 홍익대 박사논문, 2003;서정석, [산성에서 발견된 석축건물의 성격에 대한 시고], [백제연구] 42, 2010.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세상을 바꾼 수레],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등의 책을 썼다.

발행일 2012.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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