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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신라물해에 따르면, 일본 귀족들은 사향, 침향, 용뇌향 등의 향료(香料)와, 인삼, 감초, 가리륵, 육종용, 필발, 지초 등의 약재(藥材), 동황, 연자, 주사, 호분 등의 안료(顔料), 소방, 자근 등의 염료(染料), 각종 불교 용품, 거울, 가위, 소반, 젓가락 등의 식기류, 마구, 양탄자, 비단, 비단 담요, 잣, 꿀, 책, 병풍, 향로, 화로, 물병, 황금 등 122종의 신라 물건을 구입하고, 실(絲) 아니면 솜(綿), 실크(絹絁)로 값을 지불했다.
일본 정부는 김태렴과 일본귀족의 물품 거래 전반을 관리했다. 이는 귀족들 사이에서의 사적인 교역을 막고, 일본 왕실이나 정부 수요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고려하면, 귀족들이 구입한 물건보다 일본 정부나 왕실에서 매입한 물건의 양이 많았을 것이 분명하다.
김태렴은 신라에서 생산한 염료, 생활용품, 기물, 문화용품, 약제류 외에도 침향, 용뇌향, 가리륵, 육종용, 호분, 필발, 연자 등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중국에서 생산된 고가의 향료 등을 중개해서 팔기도 했다.
일본 왕실의 유물 창고인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는 752년 일본이 구입한 신라 물건이 많이 보관되어 있고, 이들 가운데 첩포기(貼布記)라 불리는 꼬리표가 붙어있는 것이 있다. 화전(花氈: 꽃문양이 있는 양탄자)과 색전(色氈: 자주색 장방형의 양탄자)에 붙은 첩포기에 쓰인 행권한사(行卷韓舍), 자초낭댁(紫草娘宅)은 일본 교역에 참여한 신라 진골귀족 집안의 이름(宅號)으로 볼 수 있다.
김태렴은 신라의 왕자였을까?
 [속일본기]는 김태렴이 신라의 왕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절단으로 위장한 귀족 상인집단의 수장이었을 뿐이다. 그들이 일본에 가져온 물건은 진상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장에 내다팔기 위한 물건이었다. 그는 신라 정부의 공식적인 표문을 지니지 않았고, 장사를 하기 위해 일본의 환심을 사려고 고겐천황에게 아부를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태렴은 [삼국사기] 등의 우리쪽 역사자료에는 전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언제 태어났는지도 알 수 없다. 그는 진골 출신이지만, 최소한 당시 신라 경문왕의 아들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왕의 먼 친척뻘임에도 왕자라고 대충 얼버무리며 일본에서 자신의 위상을 과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일본의 관계를 악화시키다
 그가 일본을 방문한 다음 해인 753년 1월, 당(唐) 조정의 신년 축하의식에서 신라사신과 일본사신은 자리 문제로 다투었다. 신라가 일본보다 높은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 일본이 반발한 것이었다. 일본은 김태렴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으나, 그것은 신라의 입장이 아니었다. 2월에는 신라에 온 일본 사신을 신라 정부에서 무례하다는 이유로 돌려보냈다. 일본 정부는 김태렴이 한 말이 장사를 위해 아부한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일본은 신라에 분노했고, 그 결과 758년 발해의 신라 공격 계획에 가담하기로 했다. 759년 일본은 배 500척을 만들어 신라를 정벌하려고 준비를 하였으나, 신라 공격이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일본이 이와 같은 행동에 나서자, 신라는 760년 9월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일본은 김태렴이 약속했던 예의, 조공품, 믿을 만한 사람, 그리고 분명한 말 4가지를 갖추어 오라면서 사신의 방문을 거절했다. 김태렴에게 한번 속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외교관계는 복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신라는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676년까지 당나라와 전쟁을 했다. 당나라와 전쟁을 치르면서, 신라는 일본과 당이 돈독하게 연결될 것을 우려해 진골 왕족이나 고위인사를 사절단으로 파견하는 등 일본을 우대해주었다. 하지만 차츰 당나라와의 관계가 호전되던 차에, 733년 발해와 당의 전쟁에서 당나라에 원군을 보내주었다. 이에 따라 당나라는 대동강 남쪽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었고, 신라는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의 희망과 달리, 신라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차츰 고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때문에 양국 관계는 더욱 꼬이게 된 것이다. 두 나라는 779년을 끝으로 사신교환을 단절하고 말았다.
스스로 시장을 개척하다
 김태렴의 아부성 발언은 분명 일본의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김태렴이 신라 경문왕과 미리 어떤 약속을 하고 일본에 갔는지, 아니면 경문왕의 외교 정책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행동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그의 행동이 양국 간계를 악화시켰던 것은 분명한 만큼, 비난의 소지도 없지 않다.
김태렴을 비롯한 8세기 신라 귀족들은 조선시대 양반들과 달리, 자신이 경영하는 수공업장을 갖추고 물건을 제조해서 제조 단계에서부터 판매까지 적극 관여했다. 그들은 신라 조정이 벌이는 일본과의 외교적 힘겨루기 때문에 중요한 상품 수요처인 매력적인 일본 시장에서 상거래를 못해 손실을 보는 상황을 참기 어려웠다. 따라서 상거래의 활로를 뚫기 위해 김태렴을 대표로 하는 대규모 상단을 꾸려 직접 일본에 가서 다량의 상품을 팔아치웠던 것이다. 외교적 명분보다는 실리가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명분에 얽매어 김태렴 일행에게 엄청난 선물을 주고 체류비를 부담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외교적으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일본은 비록 신라와 외교관계를 단절했지만, 이후로도 민간 무역만큼은 허락했다. 일본 역시 수입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당나라와 발해에 사신을 보내 수입품을 확보하고자 노력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다자이후를 창구로 다시 신라 물건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뛰어난 상품에 길들여진 일본 귀족들의 수요가 줄지 않았기에, 768년 일본에서는 신라 물건을 매입하기 위해 일본 귀족들에게 다자이후에 비치된 솜을 최고 2만 둔(屯)에서 최하 1천 둔까지 나누어 준 바 있다. 김태렴 이후 신라와 일본과의 교역은 계속 늘어났다. 828년에는 청해진(淸海鎭)의 설치로 당-신라-일본을 잇는 교역망이 형성되면서, 동아시아의 국제교역망은 더욱 활성화된다.
우리 역사에는 유독 상인에 관한 기록이 매우 드물다. 8세기 중엽 신라의 수공업과 상업이 발전하는 상황에서 등장한 김태렴은 한국사에서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그는 새로운 상품시장을 개척하고 막대한 이익을 얻은 빼어난 장사 수완과 과감성을 갖춘 뛰어난 상인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속일본기]; [삼국사기]; 이병로, 김용일, <752년 신라사김태렴의 방일목적에 관한 연구>, [일본어문학] 34, 2006; 근강호일, <경덕왕대 왕자 김태렴의 일본파견사정>, [한국고대사탐구] 5, 2010; 강은영, <8세기 중후반 일본의 내정과 대신라관계의 추이>, [일본역사연구] 31집, 2010; 윤선태, <752년 신라의 대일교역과 바이시라기모쯔게(買新羅物解)>, [역사와 현실] 24집, 1997; 박남수, <752년 김태렴의 대일교역과 매신라물해의 香藥>, [한국고대사연구] 55집, 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