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문화 프리즘
한국의 결혼풍습
최근 우리사회의 결혼 풍습이 급격히 변화되고 있다.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하랴”는 말은 옛말이 되어, 1990년대보다 처가살이 하는 남성이 3배나 급증했다. 처가살이의 증가는 육아 문제,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 향상 등 현대사회 변화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사를 크게 본다면, 처가살이가 최근 들어 급증한 특별한 풍습은 아니었다.
고구려 시대부터 존재한 처가살이
우리말에 시집(媤宅)가고, 장가(丈家)간다는 말이 있다. 시집가고, 장가가기는 엄연히 유래가 다른 풍습이다. 고구려 시대에는 혼인을 약속하면, 여자 집에서 본채 뒤편에 작은 별채인 사위집(婿屋)을 지었다. 저녁 무렵 신랑이 신부 집에 와서 신부와 잘 수 있도록 거듭 청하면, 신부 부모가 사위집에서 가서 자도록 허락한다. 자식을 낳아서 장성하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비로소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혼인 풍습을 장가가기의 한 형태인 서옥제라고 한다. 사위는 처가에 머무는 동안 노동력을 제공하게 된다. 처가에서 딸을 남자 집으로 보내게 됨에 따라 생기는 경제적 손실을 보상하기 위한 풍습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물론, 고려와,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결혼풍습은 장가들기였다. 그런데 조선은 중국에서 발전한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받아들인 나라였다. 특히 주자(朱子)가 만든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조선 사람들이 따라야 할 기본 생활 지침서가 되었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여자가 시집을 와야만 했다. 하지만 혼인예법만큼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식들이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라는 풍속 때문에 일가친척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게 된다고 장가기가 풍습을 비판했다.
1435년 신랑이 장인 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본가에서 혼례식을 올리는 방식인 중국식 친영례(親迎禮)를 왕실에서 솔선수범을 하며 풍속을 바꾸려고 시도했다. 친영례는 사대부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지만,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여성이 시집오는 풍습은 동옥저(東沃沮)의 민며느리제에서 시행된 적이 있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 지역의 풍습일 뿐이었다. 장가가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시집오기를 강요하다 보니, 16세기부터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처가에서 3일 정도 머물다가 시댁으로 가는 절충안인 반친영(半親迎)이 생겨났다.
하지만 반친영이 생겨났다고 해도 결혼 후 곧장 신부를 데려오지는 못했다. 율곡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결혼 후 처가인 강릉에서 19년을 살았다. 18세기 중엽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우리나라는 백 년 전만 해도 처가살이 풍습이 남아있어 외척이 본친과 거의 다름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남성이 장가들어 처가살이하는 풍습은 17~18세기 까지도 지속되었다. 이때에는 처갓집에 신부를 두고 남편이 본가와 처가를 왕래하는 경우도 많았다. 시집가기 풍습은 18세기 이후 가부장제가 확고해지게 되면서 정착된 그리 오래지 않은 풍습이었다. 한국사 전체를 통해 보면, 최근의 처가살이가 도리어 고유 전통에 더 가까운 것이고, 시집살이가 특별한 풍습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유롭게 재혼하던 삼국과 고려시대
결혼풍습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결혼에 대한 생각도 변해왔다. 최근 들어 결혼한 부부 대비 이혼한 부부의 비율이 40%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이혼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더불어 재혼하는 사람들도 크게 늘고 있다. 최근에는 재혼에 대한 인식이 크게 나아졌지만, 일부에서는 재혼을 꺼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선시대 때 여성의 재혼을 금지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국시대, 고려시대에는 여성의 재혼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고구려 9대 고국천왕의 왕후였던 우씨는 남편이 죽자, 시동생인 연우와 재혼하여 그를 10대 산상왕에 오르고 하고 그녀는 또다시 왕후가 된 적이 있었다. 고려 6대 문덕왕후 유씨, 25대 충렬왕의 부인인 숙창원비 김씨, 26대 충선왕과 혼인한 순비 허씨 등은 모두 재혼한 여성들이다. 특히 순비 허씨는 3남 4녀를 낳고 남편이 죽은 후 왕비가 되었는데, 그녀가 낳은 자식은 모두 왕자와 공주로 대접을 받았다. 남성은 물론, 여성의 재혼도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재혼 후 자식에 대한 차별도 없었다. 조선 초기에도 여성이 3번 혼인하는 것은 비판받았지만, 재혼은 금지되지 않았다.
삼국과 고려시대 여성들은 자유롭게 이혼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 원인의 하나는 여성의 경제적 능력이 조선시대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딸은 아들과 차별 없이 부모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있었고, 자유롭게 집 밖에 나가 장사를 할 수도 있고, 재산권 행사도 자유롭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아들이 부모의 제사를 받든다는 이유로 더 많은 상속을 받았지만,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딸들도 결혼 후에도 부모 제사를 받들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아들과 딸이 돌아가며 부모의 제사를 받드는 윤번제사, 제사를 나누어 지내는 분할제사 등이 가능했다. 따라서 남녀 차별이 적었기 때문에, 여성들도 결혼 풍습에서 큰 차별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유교적 가치관으로 변화된 결혼문화
조선은 유교적 가치관을 적극 전파하는 과정에서 남성들이 여성에게 정절(貞節)을 요구하게 되었다. 여성은 재혼하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낫고, 재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도 절의를 잃는 것이니, 재가한 자는 죄로 다스리고, 자손도 관리로 임용하지 말라고 요구한 사대부들의 요구에 따라, 1477년 ‘과부재가금지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은 여성의 행복추구권을 박탈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악법의 하나였다. 이 법에 따라 사대부 여성들이 재혼을 하여 낳은 자식은 과거를 볼 수 없게 됨에 따라, 자식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던 여성들은 재혼을 주저했다. 결국 홀로 사는 정절을 지키며 살거나 자살을 강요당하며 살아야 했다.
반면 남성들은 몇 번이고 새장가를 들 수가 있었고, 정식 아내인 처는 물론 첩도 여럿 둘 수 있었다. 또 처가살이를 하지 않음에 따라, 남성은 남성 부모에 대한 제사만을 지내게 됨에 따라 상속문제에 있어서 딸들보다 더 많이 분배를 받았고, 여성은 차츰 출가외인이 되어 경제적 능력을 상실해갔다. 이처럼 불평등한 혼인제도 탓에, 조선시대 여성에 대한 차별이 커져갔던 것이다.
조선시대 후기 결혼은 남성을 위한 결혼, 남성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절차의 하나로 전락했다. 얼굴도 모른 체, 가문의 체통에 맞는 억지 결혼이 성행했기에 많은 여성들의 희생이 뒤따라야 했다. 여성에 대한 폭압적인 과부재가금지법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관념에서 남녀 차별적인 결혼풍습이 사라진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혼이 상대의 희생을 바탕으로 나만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결코 행복한 결혼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다. 요즘 들어 젊은 청춘들이 결혼을 함께 고민하고, 개성 있는 결혼식을 연출하는 장면들은 대단히 보기 좋다. 하지만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하는 결혼이라고 할지라도 상대를 배려하며 함께 행복을 추구할 것을 굳게 약속하는 결혼이라면 그 또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
1. 혼서 : 혼서는 신랑집에서 예단과 함께 신부집으로 보내는 서간이다. 조선시대 혼인은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 등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중매를 통해 혼인 상대의 의중과 조건 등을 알아보는 의혼 과정을 거친 후, 서로 뜻이 맞으면 납폐함에 담아 혼서를 보냈다.
2. 초행 장면 : 혼인이 허락되어 날짜가 정해지면 신랑 측에서는 신부 측에 혼수와 혼서지를 보내는 납폐 과정을 한 후, 신랑이 혼인의식을 치르기 위해 처음 신부의 집으로 가는 것이 초행이다. 제일 앞에 청사초롱 2쌍이 앞서 가고, 기러기를 든 기럭아비, 그 다음 신랑, 유모를 비롯한 신랑 측 친척이 따라가게 된다.
3. 초례청장면 : 초례청은 주로 신부집의 대청이나 마당에 차렸으며 음양의 원리에 따라 신랑이 동쪽에, 신부가 서쪽에 서서 식을 행하였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서울시민대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