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김창엽 칼럼

자본주의와 교육의 닮은 꼴을 넘어서서

작성자(사)한국평생교육사협회|작성시간23.04.10|조회수44 목록 댓글 0

자본주의와 교육의 닮은 꼴을 넘어서서

 

자본(資本)의 사전적 의미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거나 효용을 높이는데 들어가는 밑천'이다. 자본을 말 뜻으로 풀어보면 ‘재물이 근본’이라는 의미이다. 자본주의는 '생산 수단을 가진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노동력을 사서 생산 활동을 함으로써 이익을 추구해 나가는 경제 구조'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본주의는 '이윤 추구를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하는 경제활동'으로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재화의 유통'을 기반으로 한다. 재화는 상품(goods)으로 대표된다. 자본주의를 말 뜻으로 풀어보면 ‘재물이 근본’이라는 것을 굳게 지키는 주장이나 방침이다.

 

자본주의는 이 상품과, 이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충돌하며 나타나는 다툼을 근간(根幹)으로 유지되고 확장되며 심화된다. 다툼은 인간에게 보다 많은 상품의 구매를 자극하는 유인의 산물로서 경쟁심리를 바탕으로 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경쟁심리와 욕망을 자극하여 상품 획득을 위해 다투게 한다. 상품을 조작하여 인간을 조종하고 자극을 강화한다. 우선, 얻기 어려운 재화를 내세우거나 얻기 어렵다고 인식하게 하여, 그 상품의 품귀현상을 끊임없이 조장하는 것을 통하여 이 자극을 만들고 유지하고 강화한다. 다음, 그 상품을 특정시키고, 이를 귀하게 만들어서 얻기 어렵게 만들고, 얻어야 한다는 욕망을 부추킨다. 특정 상품을 한정판으로 생산하고 이를 널리 알리는 것이 한 사례이다.

 

이러한 조종과 자극 강화를 통하여 인간을 끊없는 경쟁구조 속에 집어넣고 상품의 획득을 위한 다툼에서 스스로 소진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상품에 대한 획득 욕구가 심화되고, 상품 생산을 끊임없이 재촉하게 만든다. 이를 미끼로 자본주의는 생산을 지속하고 이익을 확보한다. 즉,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욕심이 날 만한 상품을 보여주고, 욕심을 내도록 조종한다. 이는 인간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고, 안정되지 못하게 하며, 중심을 잡지 못하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오직 자신만의 이익 추구에 매몰되며, 오직 경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술을 내면화한다. 많이 가진 것이 승리하고 생각하지만 끊없이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의 홍수에 질식하게 된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를 돌아볼 겨를이 없고, 상한 영혼과 병든 몸 외에 남는 것이 없는 ‘삶의 식민화’가 이루어진다. 어찌보면 이러한 삶의 식민화는 당연한 결과이다. 자본과 자본주의에는 인간이 중심일 수 없다. 돈이 중심이고 인간은 도구와 수단, 방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오직 이윤만 좇고 경쟁만 하는 수렁에 몰아 넣는데는 우상과 신화를 조작하고, 이 우상과 신화를 향해 모두가 다투도록 만드는 것이 첩경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특정 인물을 부각시켜 우상으로 만들고, 특정 담론을 신화처럼 유포한다. 과정과 상관없이 결과가 최고이고, 결과를 획득한 자가 어떻게 살았는가와 상관없이 이루고자 하는 삶의 본보기가 된다. 이런 것이 없으면 자본주의는 욕망과 경쟁으로 인간을 끊임없이 유인하는데 실패하게 된다.

 

지금, 여기의 교육은 자본주의와 그 속성 및 방식에서 매우 비슷하다. 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재화의 유통과 획득'을 목표로 하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속성으로 하는 경쟁을 당연시 하며, 부당한 방법과 수단을 통해서라도 상품을 취하면, 그 과정을 정당화한다는 부분에서 그렇다. SKY대학이라는 상품을 많이 획득하는 교육이 제대로 된 교육이고, 재벌기업에 많이 취직을 시키는 교육이 진짜 교육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과정에서 편법과 불의가 자행되어도 결과가 욕망에 부합되면 정당화되고, 그런 과정을 거친 인간이 어떠한 부정과 비리, 억압과 폭력을 행사해도 수용된다. 그러한 인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부러워할 대상으로 만든다. 이를 비판하는 것은 제대로 노력하지 않고 자질이 부족한 인간의 투정으로 치부해 버린다.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교육이 자본주의와 유사한 속성과 방식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자기만의 이윤 탐닉과 경쟁구조에 인간을 매몰시키기 위해 교육을 도구로 쓰고 있고,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교육이 자체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끊임없이 새로 생성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도구로, 수단으로 그 자리를 정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학교가 기업의 관점으로 판단하고, 기업의 기준으로 운영하고, 자금의 확보와 이익으로 교육의 성과를 가름하는 작금의 형국이 그러하다. 교육이 자본의 도구이며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으므로, 그 과정이나 행태가 자본주의와 유사한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한편, 이러한 자본주의와 교육이 조장하는 자신만의 이익 추구와 경쟁 몰입, 그리고 이를 촉진하고 문화로 만드는 우상화와 신비화는 자본과 관련된 엄청난 산업을 만들어낸다. 작게는 입시 관련 산업과 자기계발 산업, 취업 관련 산업이 있다. 요즘은 chatgpt 산업 등이 떠오른다. 이들은 현대 사회의 물질문명 전체 구조와 내용에 유기적으로 통합된다.

이 물질문명은 인간의 비인간화를 초래하는 건은 물론 지구환경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도구와 수단으로 스스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교육이 끝없는 욕망과 경쟁, 상품 획득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므로, 이들이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삶과 생명의 생태순환계를 이루기 보다는 서로를 파괴하고 소모재로 사용하고 있다. 인간의 소멸을 가져올 기후변화 위기, 인간성의 황폐화, 기계의 인간 지배, 자원의 고갈, 미증유의 세균과 병 등이 이미 삶과 사회 깊숙히 들어와 있다. 이전에는 수평선 너머에 있다고 본 것이 이제는 안방문턱을 넘어 들어와 있다. 지금 이 상태가 인류의 소멸을 가져올 것임은 너무도 분명하다.

 

이러한 자본주의와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수단과 장치가 마련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주목할 것은 자본주의라는 제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대체할 다른 제도만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만 바꿔서는 안 되고 방법과 수단만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교육이 문제가 있다고 해서 대면수업을 온라인 수업으로, chatgpt 활용방식으로 그 방법과 틀을 바꾸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자본주의와 교육이 이윤과 경쟁, 욕망과 다툼을 기본 축으로 한다면, 이를 위해 작동하는 제도와 방식, 수단을 다른 제도와 방식, 수단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와 교육의 문제를 풀어낼 수 없다. 기본 축을 바뀌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와 교육이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시키고 다투도록 하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처럼 이 욕망과 다툼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한다면 사회의 붕괴는 물론이고 인간 자체가 소멸된다. 이 욕망과 다툼 자체에 대해, 그 근본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생뚱맞게, 새삼스레 돌아보면, 현재의 자본주의와 교육이 파멸적 물질문명과 파괴적 가치관을 창출한 것이 사실이다. 파멸적 물질문명과 파괴적 가치관은 인간을 자신만의 나태와 안락을 확보하는 데 매몰되게 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경쟁의 질곡에 인간을 몰아넣는다. 이 근간을 바꾸지 않고 사회가 운영되고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과 제도만 바꾸는 것은 의미가 없고 이룰 수 있는 것도 없다.

 

인간과 사회가 생존과 자연과 문명이 바람직한 상태를 생성하도록 하기 위해 지금의 자본주의와 교육의 근간과 가치관을 바꾸어야 한다. 철저히, 지금의 자본주의과 교육과 다른 가치와 담론을 만들고 실천해야 한다. 지금처럼 가치와 담론을 생성할 수 있는 문화마저 자본에 종속시키고, 교육마저 자본에 맹종하게 만든다면,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 지금까지의 가치관과 담론을 털어버리고, 새롭게 생각하고, 그 생각을 실천해야 한다. CC티비의 효능을 말하고 활용방법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서서 CC티비 없어도 행복하게 잘 사는 삶과 사회를 꿈꾸어야 한다. 법을 지키고 법으로 다스리는 것을 강조하기 전에 법 없이도 더불어 두루 누리며 사는 삶과 사회를 그려야 한다. 자본주의와 교육이 근본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인간성을 되살려야 한다. 새로운 제도와 방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 전혀 다른 가치관과 담론을 만들고, 그 이후에 새로운 제도와 방식을 구축하는 것이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는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으로 해가 지지만, 극지방으로 가면 지금까지 마땅했던 해의 뜨고 지는 방향이 정당할 수 없다. 극지방으로 가서 새로운 판단 기준과 새로운 방식으로 사는 정도의 새로운 가치관과 담론, 그리고 이에 터한 제도와 방식을 생성해야 한다.

 

물론 새로운 가치관과 담론은 새로운 제도와 방식을 구축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고, 새로운 제도와 방식은 새로운 가치관과 담론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를 이룬 다음에 또 다른 것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가 통합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육이 해야 하고, 교육이 꿈꾸어야 할 것이다. 작금의 자본주의와 교육의 닮은 꼴을 넘어서야만 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