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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엽 칼럼

교육이 망쳐놓은 것을 교육으로 되살리는 길

작성자(사)한국평생교육사협회|작성시간23.05.03|조회수27 목록 댓글 0

교육이 망쳐놓은 것을 교육으로 되살리는 길

 

살면서 실천하기 어려운 것은 아주 쉽고 당연한 것을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어렵고 현학적인 말보다 평이한 말일수록 항상 실행에 옮기기 어렵다. 예를 들어 나의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말고,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노여움을 옮기기 않고 잘못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은 것은 엄청난 결단과 믿음을 요구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톺아볼 것이 있다.

 

내가 무엇인가에 화났을 때 그것을 그 무엇인가에 대해 정면으로 부딪혀 풀지 못하고 남에게 옮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화내는 것 그 자체의 의미가 없고 그런 존재가 없어야 한다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화내는 것은 대체적으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 그러한 모습으로 있지 않을 때 발생한다. 이미 어떤 도덕적 가치관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화남은 대부분 도덕적 분노요 심미적 분노이다. 주로 일상생활에서 인간관계로 인해 발생한다. 한 인간이 나에게 저지르는 당연하지 못한 사태로부터 나타나게 된다. 인간 감정의 원초적 에너지와 관련된다. 화를 내야 하는데 화를 내지 못하는 것은 느낌이 상실된 것으로서 인간이 인간답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화를 남에게 옮기는 것을 삼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 화를 남에게 옮기는 것이 타인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희(喜)노(怒)애(愛)락(樂)이 모두 남에게 옮겨질 수 있다. 그런데 화내는 것 즉 노(怒) 외 다른 것은 옮겨져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아무리 정당한 분노라도, 그 분노는 분노의 형태로 남에게 옮기지 않은 것이 좋은 것이다. 당연하지 못한 것을 깨달아 자각하고 노(怒)하는 것도 도덕적 본성이다. 반면에 그것을 깨닫고도 남에게 옮기지 않는 것도 도덕적 본성이다.

 

둘째, 수직적 분노와 수평적 분노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살면서 이런저런 부당한 처우를 받거나, 정의롭지 못한 상황을 목도할 수 있다. 화를 내야 한다. 그러나 그 대상이 강해서 자칫 그 대상에게 화를 내면 자신이 피해를 입거나 다칠 수 있다고 판단되면 화를 내지 않고, 화를 내지 못한다. 대신 내가 만만하게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해도 나에게 대들거나 나를 다치게 하지 못하는 대상이라고 판단되는 수평적 관계의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 부당한 처우와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 처했어도 정작 그 원인 제공자에게는, 화가 나지만, 화를 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화를 옮긴다. 매우 비겁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인간됨에 상처를 입히게 되고, 타인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는 것도 마땅하지 않다. 인간은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아무리 뛰어난, 위대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잘못이 있고 허물이 있다. 잘못과 허물이 없어야 하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잘못과 허물이 있을 때 이를 살피고 고쳐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잘못과 허물을 살피는데 있어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잘못과 허물을 어떤 범주에서 판단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잘못은 사전적 정의로 ‘잘하지 못한 일, 또는 옳지 못하게 한 일’이다. 허물은 ‘저지른 잘못’을 가리킨다. 그런데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우선, 이러한 잘못과 허물이 개인 차원에서 자기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마음 먹었는데 제대로 하지 못하였거나 그 과정에서 실수를 한 것 정도 만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음, 잘못과 허물을 개인의 범주에 국한시켜 판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인간이 더불어 두루 누리며 살아가는 도리와 모두에게 이로워야 하는 이치를 전제로 잘못과 허물을 판단해야 한다.

 

둘째, 잘못과 허물을 스스로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잘못과 허물을 스스로 잘못과 허물로 느끼고 깨닫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이로운 결과를 가져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의 생각과 행동이 잘못이고 허물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자기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지난 번과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두고 잘못과 허물을 반복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너무 얕고 그릇된 것이다. 잘못과 허물을 잘못과 허물로 인지하지 못하므로 타인과 다른 세계에게 피해를 주고, 자신을 해치며,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잘못과 허물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를 자신의 이익 또는 유불리를 따져서 아예 잘못과 허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과 판단은 사람과 삶, 사회를 왜곡시키고 오염시키는 힘에 대하여 겉으로는 비판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가져야 할 본보기로 삼고 그러한 힘을 가지기 위해 암암리에 또는 결정적 순간에 행동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부분에서 심각하다.

 

교육의 흐름을 짚어보면, 근대 이후의 교육은 지식, 기술, 태도 등의 전수에 집중하였다. 이 교육의 속을 헤집어보면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을 도구와 수단으로 제작하면서 자본의 이익에 기여하는 구실을 주로 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느끼고, 질문하고, 배우고, 익히는 공부가 크게 부족했다. 인간으로서 무엇이 마땅하고 당연한 것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하는 것을 생각할 여지를 오히려 박탈하였다. 혹시 힘있는 쪽에서 던져줄지도 모를 이익을 갖기 위해 눈과 귀를 가리고, 느낌과 판단도 버리고, 오직 힘있는 쪽이 시키는 대로, 원하고 있는대로 소리내고 행동하는 것이 근대 이후 교육의 구체적 성과일 수도 있다. 평생교육 마당에서 지역평생교육진흥원의 이름이 이상하게 변경되어도 당사자들은 말이 없고, 기후위기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어도 절박하고 적절한 반응이 없고, 교육의 꿈이 잠들어 버리기 전에 먼저 잠들어도 느끼지 못하고, 외면하는 것이 그 결과일 수도 있다. 나의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고, 잘못과 허물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같은 잘못을 거듭 저지르는 것이 교육의 작용이다.

 

현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들여지고, 마비되고, 왜곡되고, 눈과 귀와 입 그리고 마음을 닫도록, 그리 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강제하는 것을 교육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지식과 기술, 태도를 전수받는 것이 공부를 하는 일차적인 까닭일 수 없다. 공부를 하는 까닭은 화내야 할 때 화를 낼 줄 알고, 자신의 잘못과 허물을 잘못과 허물로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나의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말고,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는 것이 공부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이다. 교육이 망쳐놓은 것을 교육으로 되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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