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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6월 설교 시리즈 – 필작어세(必作於細)]3.큰 배를 조종하는 매우 작은 키!<야고보서 3장 2절>

작성자2.8%vision|작성시간26.06.18|조회수122 목록 댓글 0

2026년 6월 21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6월 설교 시리즈 – 필작어세(必作於細)>3. 큰 배를 조종하는 매우 작은 키!

본문 : 야고보서 3장 2절(1~12절)

 

우리는 다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새번역>

 

 

역사상 가장 큰 배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그 배의 이름 ‘자르 바이킹’으로 가장 긴 선체와 무거운 화물 적재중량을 자랑했었던 선박으로 화물을 가득 실으면 배수량이 657,019t에 달했으며, 모든 배를 통틀어 가장 무거운 배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크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파나마운하나 수에즈 운하 모두 항행이 불가능하여 현재는 운행하지 않는 배입니다.

 

현재 운행 중인 가장 큰 배는 자랑스럽게도 삼성중공업에서 만든 ‘프렐류드’라고 합니다. 길이는 무려 488m, 높이는 110m입니다. 가격 또한 모두를 놀라게 할 정도였는데 체결 금액이 무려 126억 달러로 현 시세로 하면 약 20조원 정도입니다. 2026년 우리나라 국방예산이 약 66조이니 얼마나 대단한 비용인지 체감이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큰 여객선은 무엇일까요? 바로 세계 최대 크루즈 선박 ‘아이콘 오브 더 시즈’호라고 합니다. 365m의 크기로 최대 7600명이 탑승할 수 있는 20층으로 이루어진 배라고 합니다. 배 안에는 총 2805개의 선실이 있고, 워터파크, 레스토랑, 엔터테인먼트, 스파 등등 도시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거의 다 있기에 ‘바다 위에 도시’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보통 얼마나 큰지를 설명할 때 사실 축구장 몇 개를 붙여 놓은 크기라고 하지만 잘 실감이 나지 않아서 제가 실제적으로 말씀을 드려보자면 프렐류드는 저희 교회에서 일직선으로 이디야 문형점까지의 거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저희 예배당이 가로로 약 16m정도인대 약 31개 정도의 예배당이 붙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하튼 저는 가장 궁금한 점이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배가 어떻게 바다에 가라앉지 않고 떠 있을 수 있는지 정말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큰 배라도 그 배를 움직이는 타륜이나 키는 상대적으로 아주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최신 기술이 집약된 디지털 모니터와 컨트롤 시스템으로 되어 있어 타륜이나 키의 크기 자체를 묻는 것이 의미가 없지만 옛날에 제조된 배에서는 배의 키를 움직이는 손잡이가 달린 바퀴의 모양의 장치인 타륜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타륜을 통하여 키, 즉 배의 방향을 조종하는 장치를 움직였으니 말입니다.

 

2022년 11월에는 나이지리아에서 스페인까지 배의 키(방향타, Rudder)에 매달려 11일간의 항해에서 세 남자의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세 명의 남자가 겨우 앉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가 바로 배의 키의 크기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배에 대한 지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비유를 들어 아주 중요한 기초에 대한 ‘필작어세’를 긴 시간 많은 이들에게 또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배도 그렇습니다. 배가 아무리 커도, 또 거센 바람에 밀려도, 매우 작은 키로 조종하여, 사공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야고보서 3장 4절, 새번역>

 

야고보는 야고보서 3장을 시작하면서 교회에 작심한 듯한 발언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신 감동으로 쓰여졌기에 야고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다름이 아닌 교회 안에 선생이 되려고 하는 자, 가르치려고 하는 자가 많아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선생이 되려고 하는 자나 가르치려고 하는 자가 직분 상으로 생길 수밖에 없긴 하지만 그들 역시 사실은 계속해서 배워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지금 직분 상이 아니라 자신들이 다 배웠다고 생각하고, 잘난 체하면서 선생이 되려하고, 가르치려고만 하는 이들이 행하고 있는 실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가장 먼저 인간은 연약하기에 실수를 많이 저지르는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네. 맞습니다. 인정합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실수를 참 많이도 저지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실수는 모두가 공감하듯이 바로, ‘말실수’입니다. 그래서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라고까지 야고보는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말에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바로 ‘혀’의 움직임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몇 가지 예를 들기 시작합니다.

 

첫째로, 야생마의 입에 재갈을 물려 말을 타고 다닐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충분한 예시가 아닌 듯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곧이어 두 번째로 배의 키를 이야기합니다. 모두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커다란 배가 아주 조그마한 키에 따라 방향이 움직인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라면, 그 키와 혀를 비교하는 것에 당연히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아주 작은 혀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고작 그 작은 혀로 인하여 생각하지도 못하는 큰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교회가 이 작은 혀로 인하여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었는지 야고보는 이 혀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혀도 몸의 작은 지체이지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웁니다. 그런데 혀는 불이요, 혀는 불의의 세계입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지체이지만, 온 몸을 더럽히며,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결국에는 혀도 게헨나의 불에 타버립니다. <야고보서 3장 5~6절, 새번역>

 

그리고는 길들여지지도 않고, 길들일 수도 없는 혀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렇게 빗대고 있습니다.

 

들짐승과 새와 기는 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은 어떤 종류든지 모두 사람이 길들이고 있으며 길들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7~8절, 새번역>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얼마나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야고보는 우리 신체의 일부를 이렇게까지 표현해야만 했을까요? 그저 호들갑일까요? 너무 과한 표현일까요? 야고보는 엄살을 떨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가까이 부르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태복음 15장 10~11절, 새번역>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온다고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태복음 15장 18절, 새번역>

 

야고보는 지금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일들이, 그 중에서도 혀로 인하여, 말로 인하여 실수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 마음에서 나오고 있음을 고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도, 말의 실수를 막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의 혀가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또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야고보서 3장 9~10절, 새번역>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마음을 가졌기에 찬양하는 마음, 사람들을 저주하고 싶기에 저주하고 싶은 마음, 그 두 마음이 두 가지로 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마음에는 많은 방들이 있기에 그 마음에 따라 혀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을 향해 야고보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록합니다.

 

샘이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있겠습니까?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짠 샘은 단 물을 낼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3장 11~12절, 새번역>

 

그리스도인이라는 샘이 있습니다. 그 샘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샘에서는 좋은(단) 물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기에, 예수님이 흘려보내고 싶어 하시는 좋은(단) 물이 흘러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옛 사람이 가진 나쁜(쓴) 물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되었으면 무화과를 맺고, 포도나무가 되었으면 포도나무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다운 혀로, 말로, 행동으로, 삶을 열매로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다운 언어가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이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나누고 싶습니다. 실질적으로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필작어세’ 여기 작은 언어의 실천으로부터 큰 일을 막을 수 있고, 큰 일을 해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 수 있다는 그런 각오로 함께 이 말씀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마태복음 7장 1절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공동번역>

 

인간은 남을 판단하는 재미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들입니다. 어찌 그리 남을 판단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이 판단 받는 것은 끔찍이도 싫어합니다. 실제로도 남을 많이 판단하는 사람은 그만큼 다른 이들로부터 판단을 받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진리입니다. 남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의 판단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키가 될 수도 있습니다. 비록 존경까지는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존중해 주는 말과 태도는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마태복음 5장 22절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새번역>

 

상대방을 무시하고 깔보는 사람의 태도를 모두 모아놓은 것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형제자매에게 성을 내는 사람, 자기 기분이 나쁘다고 상대방을 얼간이라고 표현하거나 바보라고 말하는 자들은 공의회에 불려가고 지옥 불 속에 던져질 만큼의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계신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라도 ‘존귀하게’ 대할 줄 아는 겸손을 가지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역시 하나님이 너무도 사랑하시는 한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그 사람을 무시하거나 얕보거나 하잖게 대할 수 있는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아니 같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도 그럴 권리는 없습니다. 특별히 이 구절은 메시지성경으로 한 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너희는 옛 사람들에게 주어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형제나 자매에게 화만 내도 살인을 범한 것이다. 무심코 형제를 ‘바보!’라고 부르면 너희는 법정으로 끌려갈 수 있다. 생각 없이 자매에게 ‘멍청이!’라고 소리치면 지옥불이 너희 코 앞에 있다. 가장 단순한 진실은, 말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 21~22절, 메시지성경>

 

말이 살인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경계하도록 강력하게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셋째, 누가복음 10장 5절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새번역>

 

예수님이 잡히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제자들은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들도 잡혀 갈까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저녁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요한복음 20장 19절, 새번역>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마음, 그 것은 바로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예수님의 평화가, 죽음마저 이기고, 모든 것에서 승리하신 그 위대한 평화가, 하늘 위로부터 내려오는 평화가 우리의 소유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자신을 이 땅에 보낸 것처럼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한 번 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복음 20장 21절, 새번역>

 

그래서 제자들은 이제 어디를 가든지 ‘평화’를 전하는 신을 신게 된 것입니다. ‘Peace Maker’가 되어 어딜 가든지 평화를 보여주고, 평화를 만들어주고, 평화를 빌어줄 존재로 예수님은 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느 집에 가든지 ‘평화’를 빌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향하는 모든 곳에, 그 곳에 평화가 있기를 빌어주어야 합니다. 기왕이면 마음에서 우러나와 기쁨으로 고백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곳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당신이라고 하는 축복의 통로를 통해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실질적으로 여러분이 평화를 빌며 하게 되는 행동과 받게 되는 대접이 달라질 것입니다. 평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넷째, 로마서 12장 14절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새번역>

 

혹시라도 가장 어려운 일입니까? 차라리 침묵하라 하시지 왜 축복하라고 하시는 이해가 가지 않으십니까? 저주까지는 하지 않을 테니 그저 침묵하라고 하셨으면 그나마 그 것은 실천해 볼 텐데 도저히 축복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맞습니다. 충분히 공감합니다. 사실은 위에 나누었던 3가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위 3가지까지는 충분히 실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3가지를 포함하여 이 네 번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다른 품격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보이셨고, 스데반이란 믿음의 선배가 이미 보인, 수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왜 다른지를 보여준 품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누가복음 23장 34절, 새번역>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사도행전 7장 1절, 새번역>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결코 보일 수 없는 품격이 무엇입니까? 당연한 것에 대한 반전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 반전이 우리의 삶 가운데 너무도 중요하게 발현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회심의 계기를 만들어 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박해한 이가 오히려 당신의 축복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계기를 만들어주는 품격 있는 말과 행동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이 말씀을 이루는 삶이 될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로마서 12장 21절, 새번역>

 

 

다섯째, 시편 150편 6절

 

숨쉬는 사람마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새번역>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개역개정>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호와를 찬양하라! <현대인의 성경>

숨을 쉬는 모든 것들이여, 여호와를 찬양하십시오. 여호와를 찬양하십시오 <쉬운 성경>

 

찬양하십시오! 노래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 <이사야 43장 21절, 새번역>

 

그리스도인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자 여러분! 동역자 여러분!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 주권을 인정하도록 하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집중과 주목과 관심과 선택이 바로 ‘찬양’입니다. 찬양이 기도입니다. 찬양이 예배입니다. 찬양이 신앙고백입니다. 찬양이 말씀을, 나의 신앙을 이 땅 가운데 선포하게 만드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왜 감옥에 갇혀서도 찬양했습니까? 왜 광야에서도 찬양합니까? 도무지 찬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왜 찬양합니까?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한 고백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을 주목하고, 하나님께 관심을 드리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방법입니다. 내가 만들어진 이유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나를 그 이유에 합당한 삶으로 인도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통하여 수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삶으로 연결되어 질 것입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복음 5장 16절, 공동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동역자 여러분! 예배자 여러분! 필작어세, 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의 혀와 말을 돌아보는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큰 배를 조종하는 매우 작은 키의 비유를 들며 우리를 권면하는 야고보의 권면에 귀를 기울여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갈 혀와 말에 대해서 조정하고 변화시키고자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살리는 언어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인다운 언어 5가지를 나누었습니다.

 

첫째, 비난의 말을 멈추어야 합니다.

둘째, 무시하고 경멸하는 말을 멈추어야 합니다.

셋째, 평화를 빌어주어야 합니다.

넷째, 박해와 저주에는 축복이란 용서의 반전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다섯째, 찬양해야 합니다. 그것이 존재의 이유입니다.

 

설교를 마무리하며 야고보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남깁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보서 1장 22절, 새번역>

 

결단 찬양 - 시편 19편 + 예수님 목마릅니다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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