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2022년 1월 2일 주일 설교
제목 : 사망의 골짜기에서 희망을 노래하다!
본문 : 시편 23편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편 4절, 개역개정>
Happy New Year!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새해에도 하나님 주시는 복 많이 받으시길 소망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설레임과 기대로 가득찬 2022년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기왕이면 펼쳐질 앞으로의 시간들이 부디 행복하고 평안했으면 하는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 2022년도도 역시 맡겨 드리고자 합니다. 주신 말씀을 따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푯대를 향하여 열심히 달려갑시다! 화이팅!
오늘 2022년 첫 번째 주일에는 시편 23편 4절을 본문으로 하여, ‘사망의 골짜기에서 희망을 노래하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먼저 준비된 말씀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눈 감고도 외우시는 말씀이시죠?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편 4절, 개역개정>
저는 개인적으로 2022년 한 해 동안 신앙의 ‘짜릿함’을 좀 느껴볼까 합니다. 아마 ‘짜릿함’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있으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좋은 의미로서 바라보면 ‘흥미진진’ 해 보이고, 조금 돌려보면 위험해 보이기도 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짜릿함’이라는 단어가 신앙과 합체하면 그 의미는 온전히 긍정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짜릿함’은 바로 오늘 읽은 본문에서 다윗이 느끼고 있고 고백하고 있는 깊은 신앙의 정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윗 그는 실로 ‘신앙의 짜릿함’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망의 골짜기에서 희망을 노래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짜릿함’이란 바로 ‘사망의 골짜기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면 응당 부족함이 없도록 푸르디푸른 풀밭에 우리를 누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들의 영혼에 다시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두고서라도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여기까지만 딱 인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솔직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까지만 인도하실 생각이 없으신 듯 보입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두고 갑자기 캄캄한 골짜기로 나를 데려가십니다. 그것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불리는 곳으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성경 표현 그대로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로 나를 끌고 가십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끌려가는 것이라 표현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는 인도하심이지만 이런 골짜기는 끌고 가시는 것이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여기서부터 ‘신앙의 짜릿함’을 느낄 시작점이 펼쳐집니다. 여러분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다음 구절을 써내려 가시겠습니까? 다윗처럼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포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더 이상 나를 인도하지 않는 거 아닐까?’ 라고 두려워하시겠습니까? 혼란스러워집니다. 다윗처럼 고백하고 선포하고 싶지만 내 안의 두려움이 자꾸 나를 머뭇거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조금 더 깊숙이 말씀 속으로 우리를 초청합니다. 진짜 뜻을 발견한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기분과 감정을 너무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길에 ‘신앙의 짜릿함’을 느낄 시작조차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감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짜릿함’은 바로 더 깊은 말씀으로의 초대에서 찾아옵니다. 다시 시편 23편 4절을 개역개정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시편 23편 4절A, 개역개정>
여기서 ‘다닐지라도’라는 단어가 우리를 멈추어 서게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생각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마치 우리를 그 곳으로 끌고 가신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나는 절망을 원한 적이 없고, 나는 아픔을 원한 적이 없고, 나는 슬픔을 원한 적이 없는데, 나는 이런 팬데믹 상황을 원한 적이 없는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게 하신 하나님에게 그래서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좀 더 깊은 의미로, 번역되기 전에 기록된 원래의 본뜻으로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공동번역으로 번역된 성경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시편 23편 4절, 공동번역>
‘지날지라도’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지나 더 좋은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향하기 위하여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숨겨진 ‘희망의 찬가’입니다. 이 골짜기가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나는 중입니다. 지나서 더 좋은 곳으로 갈 것입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서 더 좋은 풀밭과 더 좋은 물가로 연결해주는 다리가 바로 ‘음산한 사망의 골짜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골짜기를 지나 결국에는 당신의 집으로 우리를 데려가시려는 것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 6절, 개역개정>
최종 목적지, 도착지인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기 위하여 우리는 음침하고 캄캄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야 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홍해도 건너야 하고, 광야도 건너야 하고, 불신앙도 건너야 하고, 헛된 습관들도 건너야 하며, 요단강도 건너야 합니다. 누가 출애굽 후에 바로 가나안이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성경은 단 한번도 ‘건너야 함’에 대해서 SKIP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면, 건너고 나면 펼쳐질 곳에 대해서는 너무도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가나안’이란 최종적인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 도착하기 위하여 ‘지나가야’ 할 순간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 누이실 때는 미처 몰랐던 사실을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새삼스레 발견하게 됩니다. 푸른 풀밭으로 나를 데려가실 때도, 쉴만한 물가로 누이실 때도,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한 가지 동일한 사실이 있었음을 말입니다. 우리가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 사망의 골짜기에 눈이 팔려 있을 때, 그 때에도 우리의 손을 꼭 잡고 함께 하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분을 그렇게 제대로 바라보지를 못했습니다. 그 어떤 상황보다 중요한 것이 주님과의 동행임에도 불구하고, 환경이 바뀌고, 내 마음이 바뀌면 그 분의 동행 유무에 대한 나의 믿음은 아주 쉽게 변덕을 부리게 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카멜레온 하나님으로 바꾸는 나의 시선입니다.
여기에서 더 ‘신앙의 짜릿함’을 깊이 느끼실 수 있어야 합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서보다 사망의 골짜기에서 주님의 동행이 훨씬 더 와 닿는다는 것입니다. 그 절망의 상황에서의 동행이 훨씬 더 은혜롭고, 훨씬 더 안정적이고, 훨씬 더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기쁠 때는, 평안할 때는 몰랐습니다. 그 분의 동행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노래하긴 했지만 사실 전심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감사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사망의 골짜기에서는 절대적입니다. 그 분이 없으면 안 됩니다. 나 혼자서는 도저히 이곳을 통과해 낼 수가 없습니다. 한 발짝도 떼기가 어려운대 옆을 보니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나를 보고 빙긋 웃으십니다. 그 미소를 보면 절로 신앙의 고백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짜릿합니다. 이 찬송가를 부르고 있으면 등에서부터 무엇인가 느껴지는 은혜로 인해 ‘신앙의 짜릿함’이 느껴집니다. 주님을 보고 있다면 ‘조건’은 그저 ‘조건’일 뿐입니다. 조건은 결코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은 하나님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분의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와 막대기가 세상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하게 느껴집니다. 그 어떤 원수의 공격도 두렵지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 동행을 믿기 시작할 때, 이 동행이 나의 신앙 고백이 될 때, 바로 그 때가 사망의 골짜기라는 두려움의 순간이 ‘신앙의 짜릿함’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이제부터는 오히려 사망의 골짜기를 즐기게 됩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은 더 환하게 빛나는 법입니다. 신앙은 평탄할 때가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더욱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은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서가 아니라 사망의 골짜기에서 더욱 뚜렷해집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풀밭의 푸르름과 물가의 쉴만함이 좋아 그 곳에 시선을 빼앗긴 순간보다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사망의 골짜기가 그래서 더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의 골짜기가 더 좋다니, 이건 정말 ‘신앙의 짜릿함’을 느껴보지 못한 분들은 정말 공감하기 어려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022년에는 부디 이 짜릿함을 모두가 경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와 함께 이 ‘신앙의 짜릿함’을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저 역시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사망의 골짜기뿐만 아니라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도 인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 곳 역시 잠시 있다 지나치는 곳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망의 골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골짜기도 지나치는 곳입니다. 결국은 다다를 곳 아버지 집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환경도 아니고, 조건도 아니고, 눈앞에 보이는 현실도 아닙니다. 그 것에 매몰되어 시선이 좁아지면 절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이것이 ‘희망’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본다. <미가 7장 7절A,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2022년에도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삶의 연속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별반 다르지 않는 것이 삶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여전히 변함없이! 신실하게!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게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이와 깨닫지 못한 이만 있을 뿐입니다. 깨달은 자만이 알 수 있는 순간순간의 ‘신앙의 짜릿함’이 그들만의 것으로 소유되지 않도록 여러분들도,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이 ‘별반 다르지 않은’ 사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지금 ‘사망의 골짜기’에 머물고 계시는 중이라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묵은해가 지나고, 새로운 해가 밝아왔지만 여전히 어둠 속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머무는 중이 아니라 지나는 중입니다. 조금 더 깊은 말씀의 세계로 나아가 보십시오. 말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위로가 될 것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입니다. 바라보아야 할 것은 골짜기와 어둠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바로 이 ‘신앙의 짜릿함’을 발견함으로 회복하시고, 소유하시고, 살아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2022년 첫 번째 주일을 보내며 ‘사망의 골짜기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시편 23편 4절, 공동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