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가), (다)에 들어갈 인물을 순서대로 쓰시오. 그리고 (나)에 들어갈 명칭을 쓰고, ‘테테스’들이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얻은 밑줄 친 ‘정치적 혜택’의 내용을 쓰시오. [4점]
교사 : 이번시간에는 인물들의 업적을 중심으로 그리스 민주 정치의 발전 과정을 살펴봅시다.
<그리스 민주 정치의 발전 과정>
( 가 ) : 재산에 따라 시민을 4등급으로 구분하여 정치적 권리를 차등 배분함.
1등급 - 페타코시오메딤노이(대귀족)
2등급 - 히페이스(중소귀족)
3등급 - 제우기타이(자영농)
4등급 - 테테스(빈민)
페이시스트라토스 : 귀족정을 무너뜨리고 ( 나 )을/를 수립함.
( 다 ) : 도편추방제 도입. 모든 사람을 네 개의 부족 대신에 열 개의 부족으로 분산시킴.
페리클레스 : 공직추첨제와 공무수당제 도입.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 역할을 인정받게 된 테테스들에게 정치적 혜택을 부여함.
<해설>
(가) 솔론 (나) 참주정 (다) 클레이스테네스
정치적 혜택
<서개 69> 시민권 가진 성년남자 전원이 참석하는 민회의 권한 강화. 5백인회 축소
<서양고대사강의 30, 31> 배심원 수당 도입하여 하층민의 재판 참여 유도
<교학사 2014 세계사 p48> 아테네는 처음에는 왕정이었으나 귀족정으로 바뀌었다. 기원전 7세기경부터 상업과 무역이 발달함에 따라 부유해진 평민들이 중장 보병이 되어 구대의 주력을 이루었다. 평민들이 정치 권리를 요구하며 귀족과 대립하자 솔론이 재산에 따라 시민을 4등급으로 나누고 정치 권리를 차등 배분함으로써 이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솔론의 개혁은 귀족과 평민 모두의 반발을 샀고, 페이시스트라토스가 평민들의 반발을 이용하여 무력으로 귀족정을 무너뜨리고 독재 정치를 실시하였다.
기원전 6세기 말 클레이스테네스는 부족제 개편, 도편 추방제의 실시 등을 통하여 민주 정치의 기반을 닦았다. 기원전 5세기 중엽 페리클레스가 공직 추첨제, 공무 수당제를 도입하면서 아테네 민주 정치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아테네의 민주 정치는 노동과 생산을 담당한 노예들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서양사개론 58쪽> 아테네에서 귀족에 대한 평민의 도전이 격화된 것은 기원전 7세기 말경이었다. 이 무렵 半전설적인 드라콘이 중벌주의로 유명한 법전을 만들었으나(기원전 621), 부채로 인한 자유상실을 규정함으로써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 기원전 594년에 아르콘으로 선출된 솔론은 아테네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부채를 말소하고, 부채로 인하여 노예가 된 자유민을 해방하였으며, 부채로 인한 인신의 예속화를 금지하는 동시에 상공업을 장려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시민을 재산소유에 따라 대지주귀족, 기사(중소귀족), 농민(중장보병의 도시민 포함), 노동자의 4계층으로 구분하고, 정치참여의 비중을 다르게 규정하였다. 즉 아르콘이나 아레오파구스회의의 의원은 여전히 상위 두 계층에 한정하였으나, 최하층에게도 민회에 참석할 권리를 주고, 새로 설치한 시민법정에도 계층의 구별없이 추첨으로 참석하게 하였다. 그리고 새로이 각 부족으로부터 100명씩을 골라 4백인회를 만들어 민회에 제출한 안건을 마련하게 하였다.
이러한 솔론의 개혁은 종래의 귀족지배를 존속시키면서, 당면한 긴급한 문제를 우선 과감하게 해결하고, 하층시민에게도 불완전하나마 정치에 참여할 길을 열어 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조정자'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솔론의 개혁은 귀족이나 평민, 그 어느 편도 만족하시키지 못하였고, 따라서 귀족과 평민 사이의 대립과 분쟁이 재발하였다. 이러한 내부문제를 안은 채 아테네는 인접한 메가라와 싸워 살라미스를 획득하였다. 이 전쟁은 아테네로서는 최초의 대외전쟁으로서 최하층민을 포함한 시민 전체가 참가하였다는 사실에 큰 뜻이 있었다. 이 전쟁의 군사지도자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기원전 561년에 빈농층을 포함한 평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참주가 되었다.
<서양사개론 62쪽>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목표는 종전의 혈연적, 지연적 유대나 경제적 이해관계를 배제하고, 아테네의 전시민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먼저 새로운 행정 구획을 마련하였다. 중심시를 포함하여 앗티카지방에 산재하는 촌락을 단위로 기본적인 행정구를 마련하고, 노예와 재유외인을 제외한 모든 구민을 등록하게 하고, 등록된 구민에게는 핏줄이나 재산 또는 직업에 관계없이 동등한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서양사개론 63쪽> 클레이스테네스의 국제는 기원전 502년에 발효되기 시작하고, 이로써 아테네는 결정적으로 민주정치로 발전하게 되었다. 유명한 도편추방은 클레이스테네스, 또는 그의 정신을 계승하여 그 이후에 제정된 것으로 참주가 될 위험이 있는 인물의 이름을 도편에 적게 하여 그 수가 6,000개 이상에 달하면 해당인물을 아테네로부터 10년간 추방하는 제도로서, 민주정치를 지키는 보완적인 성질의 것이었다.
<서양사개론 67쪽>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페르시아전쟁 후 한층 더 발전하게 되었다. 그 첫 시도로 기원전 462년에 급진적인 민주주의자였던 에피알테스는 귀족정치의 잔재인 아레오파구스회의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여 실질적으로 유명 무실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는 다음 해에 원인모르게 살해되고, 그 뒤를 이어 아테네의 지도작 된 명문출신의 페리클레스시대에 민주정치가 완성되었다.
페리클레스시대에 완성된 아테네 민주정치에 있어 먼저 주목되는 것은 시민권을 가진 성년남자 전원이 참석하여 발언할 수 있는 민회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는 반면, 5백인회의 권한이 민회에 제출할 의안의 준비와 민회에서의 결정사항을 집행하는 정도로 축소되었다는 사실이다. 외교정책,전쟁 또는. 식량공급 등 중요한 국책은 민회의 결정을 거쳐야 하며, 민회는 자유로운 발언을 통하여 입법에도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10명의 장군 권한이 확대되어 아레오파구스회의를 완전히 누르고 최고정무위원회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의 내각에 해당한다고 하겠으며, 모든 내외정책의 수행이 그들의 수중에 집중되었으며, 그들의 정책이 성공하는 한 매년 민회에서 재선되었다. 페리클레스가 30년 가까이 아테네를 지도할 수 있었던 것도 장군으로서 매년 민회에서 거듭 재선되었기 때문이다. 그들 밑에 아테네나 해외에서 근무하는 관리들이 있었는 바, 그들은 추첨에 의하여 임명되고 임기는 1년이었다.
사법관계는 각 부족에서 600명씩 추첨으로 임명되는 배심원 6,000명으로 구성되는 시민법정이 유일한 것으로,실제는 500명 내외의 위원회로 나누어져서 재판을 담당하였다. 동맹시의 소송도 취급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건이 폭주하는 경우가 많았고,따로 법관이 없었으며 판결은 단순한 다수결로 결정되 었다.
제국으로의 발전에 따른 경제적 번영과 동맹시로부터의 공납금으로 국고가 윤택해진 페리클레스시대에는 배심원과 5백인회 위원, 기타 공직자에게 보수를 지급할 수가 있었고, 이러한 수당제는 후에 민회의 참석자와 연극관람자에게까지 확대되어 빈곤한 시민도 실질적으로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수당제의 확대와 더불어 국고부담을 조금이라도 감소하기 위하여 페리클레스는 부모가 모두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만 시민권을 한정하는 시민권 제한법을 마련하였다.
국고에 의한 수당제의 확대와 철저한 추첨제, 그리고 1년 임기제는 시민으로서 원한다면 누구나 공직을 맡을 수 있게 하는 것이며, 민회의 권한 강화는 시민 누구나가 직접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