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랑공 전인권 묘갈명(正郎公 諱 仁權 墓碣銘)

작성자한강의 언덕(전과웅)|작성시간18.08.24|조회수68 목록 댓글 0

정랑공 전인권 묘갈명(正郎公 諱 仁權 墓碣銘)

[1360.03.09---1441.03.15]


()은 신라조(新羅朝) 봉 정선군(旌善君) () ()의 후손(後孫)이다. 선조의 휘() ()가 관동안찰사(關東按察使)로 있을 때 스스로 명주(溟州)는 사대부(士大夫)의 기북(冀北)으로 여기고 이로 인()하여 이 고을에 살았다.


()의 휘()충의(忠義)이니 통의대부 행 상의봉어동정(通議大夫 行 尙衣奉御同正)이요 비()는 옥천이씨(沃川李氏)이니 동정(同正) ()의 따님이다.

천성(天性)이 인후(仁厚) 강직(剛直)하며 항상 대덕(大德)을 지녔다.


공민왕 경자(庚子) 39일에 공()이 탄생하였는데 휘 인권(仁權)이요. ()는 이지(履之)니 호()는 임금이 성취옹(醒醉翁)으로 지어주었다.

()은 재예(才藝)가 출충(出衆)하고 문필(文筆)을 일찍이 승습(承襲)하여 아주 잘 하였으며 문 갑과(文 甲科)에 급제하여 관()이 이조정랑(吏曹正郎)에 이르렀다.

려말(麗末)에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節介)를 지켜 길야은(吉冶隱)과 나(원천석)와 함께 벼슬하지 아니하고 물러나 강릉(江陵)에 들어갔다.

위로부터 명() 받들어 관심정(寬心亭)을 강릉(江陵) 경포(鏡浦) 남록(南麓) 모안곡(慕顔谷)에 짓고 조석(朝夕)으로 서경(西京)을 향하여 절하고 망국(亡國)의 한()을 달랬다.

중양가(重陽歌)를 지으니 원근(遠近)에 전파(傳播)되었고 스스로 시주(詩酒)를 좋아하여 음송(吟誦)함을 그치지 않았다.

강릉(江陵) 향교(鄕校) 창건(創建)할 때는 아들 우정(遇禎)과 함께 전자(篆字)를 쓰고 위판(位版)을 감조(監造)하는데 참여하였으며 그 때에 현유(賢儒)들이 수임(首任)으로 추대(推戴)하였음을 임영지(臨瀛誌)에 실렸고 또 자손(子孫)에게 계언(戒言)을 남겼다.

세종 신유(辛酉) 315일에 졸()하시니 향수(享壽)82세라


()은 흥해배씨(興海裵氏) 이판(吏判) 상지(尙志)의 여()를 취()하였는데 지정 신축(辛丑) 53일에 출생하시어 영락 을미(乙未) 95일에 졸()하시니 1남을 두셨는데 우정(遇禎)이오. 영락 신묘(辛卯)에 진사하고 군수 최덕유(崔德濡)의 여()를 취()하니 경흥부원군 필달(必達)의 후손(後孫)이다.


3남을 두었는데 장의 ()은 문과에 올라 구례현감(求禮縣監)이요. 연일 정씨(延日鄭氏) 생원(生員) ()의 여()를 취()하니 포은(圃隱) 몽주(夢周)의 후손이다.

차왈(次曰) ()이니 봉사(奉事). 영해이씨(寧海李氏) 양무(良茂)의 여()를 취()하였고 차왈(次曰) (+)니 무과에 급제하여 군수로 강릉김씨(江陵金氏) 대길(大吉)의 여()를 취()하였다. 이제 강릉(江陵) 경포(鏡浦) 증산(甑山) 임좌원(壬坐原)에 합장(合葬)하였다.


()는 조사(早死)하고 손() ()이 이제 공()의 명()을 청()함이 재삼(再三) 그치지 않으니 나 천석(元天錫)이 그 조공(祖公)의 영명(榮名)을 가상(嘉祥)하고 인()하여 비문(碑文)을 짓고 그 명()을 하여 가로대


()이 날고 봉()이 춤을 추는 하늘이 이 산을 지었도다.

땅이 살찌고 샘물은 달아서 태양의 언덕이로다.

()이 두터이 흘러 빛남이 사후 편안히 극락왕생하시고

자손들이 만년(萬年)이 가도록 복록(福祿)이 길이 이을지어다.


정통8(서기 1443) 계해 방춘

[正統8年 癸亥 芳春]

성균생원 문하성 주서 운곡 원천석 찬

[成均生員 門下省 注書 耘谷 元天錫 撰]

통훈대부 행 구례현감 만퇴당 륜 전

[通訓大夫 行 求禮縣監 晩退堂 崙 篆]


正郞公 全仁權 遺稿


경포 호숫가에서


호수의 수면이 맑고 둥글어 거울에 비기니

맑은 물결 호수속이 고요하여 티끌 하나 없도다!

다만 어부들이 물속에서 노는 고기떼를 엿보면서

마치 어여쁜 여인이 몸을 단장하여 물속에 비친 것 같도다

바람과 달 강산이 모든 대자연이 옛과 같이 의연한데

피리불고 노래하며 시를 읊고 술 마심을 몇 번이나 지냈는고?

이정자 이경치의 무궁한 극치를 비길 바 다함이 없으니

흥겹게 놀며 즐김을 맛봄은 값없는 무한한 보배로다.



< 鏡 湖 詩 >


水面圓淸比鏡稱

明波湖裏靜無塵

但看漁夫窺漁面

豈照佳人粧影身

風月江山徜依舊

笙歌詩酒幾經新

此亭此景用無盡

遊賞遊人無價珍


길야은(吉冶隱)

길재[吉再]

본관 해평(海平). 자 재보(再父). 호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 충절(忠節). 금주지사 (錦州知事) 원진(元璡)의 아들. 구미 출생. 1363년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처음 글을 배웠으며, 1370년 박분(朴賁)에게 논어》 《맹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하였다.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生員試), 1383(우왕 9)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하였다. 1389(창왕 1)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여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였으며, 고향으로 가는 길에 장단에 있던 이색(李穡)을 만나기도 하였다. 1390년 계림부(鷄林府)의 교수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죽음을 듣고 마음으로 3년상을 행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정종 2)에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1402(태종 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 가례(家禮)를 따랐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이 학맥을 이었다. 청풍서원(淸風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야은집》 《야은속집(冶隱續集),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길재 [吉再] (두산백과)


원천석[元天錫]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이다. 정용별장을 지낸 열()의 손자이며 종부시령을 지낸 윤적(允迪)의 아들로,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진사가 되었으나 고려 말의 혼란한 정계를 개탄하여, 치악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부모를 봉양하고 농사를 지으며 이색(李穡) 등과 교유하며 지냈다. 조선의 태종(太宗)이 된 이방원(李芳遠)을 가르친 바 있어, 1400년 태종이 즉위한 뒤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종이 직접 그를 집으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이에 태종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에게 선물을 주고 그의 아들 형을 현감에 임명하였는데, 이 계석을 태종대(太宗臺)라고 부른다.

운곡시사(耘谷詩史)에 실려 있는 회고시 등을 통해서, 그가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년에 야사(野史)6권을 저술하였으나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를 두려워한 증손이 불살랐다고 한다. 전하는 작품으로는 망한 고려를 회상하며 쓴 회고가가 있다. 강원도 원주의 칠봉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천석 [元天錫] (두산백과)


전우정(全遇禎)

강릉(江陵) 향교(鄕校) 위판(位版) 감조(監造) 기록


40

仁鍊

仁權

41

遇禎

遇一






배상지[裵尙志]

본관 흥해. 호 백죽당(柏竹堂). 사복시판사(司僕寺判事)를 지냈으나, 정국이 혼란하여 머지않아 변혁이 있을 것을 깨닫고 사직하였다. 고향에 돌아가 영가군(永嘉郡), 즉 지금의 안동 금계촌(金溪村)에 은거하면서 집 주위에 백죽(柏竹)을 심었는데, 백죽당이라는 그의 아호(雅號)는 여기서 유래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에 수차 출사(出仕) 명령이 내려졌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숙종 때 사림(士林)의 상소로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배상지 [裵尙志] (두산백과)


최필달[崔必達]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강릉최씨 충무공파의 시조이다.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 건국에 기여한 공으로 918(태조 1)에 삼중대광 삼한벽상 찬화공신(三重大匡三韓壁上贊化功臣)에 훈봉되었다. 학문이 뛰어나고 교육을 통해 학문을 크게 일으켜 세워 해동부자(海東夫子)’라 불려졌다. 벼슬은 영첨의 좌정승(領僉議左政丞)을 지냈으며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에 봉해졌다. 강릉시 운정동(雲亭洞) 황산사(篁山祠)에서 매년 음력 3월 정일(丁日)에 제향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필달 [崔必達] (두산백과)


이양무(李良茂)

영해이씨 이세육효지려[寧海李氏二世六孝之閭]

영해이씨의 효자각에는 6기의 비가 보존되어 있다. 6기의 비석은 이성무(李成茂이선무(李善茂이춘무(李春茂이양무(李良茂) 4명의 형제와 이당(李堂)과 이민 2명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비이다. 4형제는 모두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돈독하였다. 하루는 병석에 누운 어머니가 잉어를 드시고 싶어 하자 4형제는 엄동설한에도 개울가에 나가 잉어를 찾았다. 4형제는 잉어를 구하지 못하자 하늘을 우러러 애소(哀訴)하였다. 그러자 얼음판이 깨지면서 큰 잉어가 튀어나와 그것을 어머니에게 먹여 병이 낫게 하였다. 그중 효성이 지극한 이성무는 강릉 향현사에 배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해이씨 이세육효지려 [寧海李氏二世六孝之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윤(全崙)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成宗 2, 1(1470 庚寅 / 명 성화(成化) 6) 125(甲辰) 5번째기사

창원 부사 홍계용·풍기 군수 진극충·구례 현감 전윤이 하직하다

昌原府使洪繼庸豐基郡守陳克忠求禮縣監全崙傳曰: “予未得引見, 承政院其以前日面諭守令條件, 開諭遣之自是, 守令拜辭時不引見者, 必命承政院諭之


晩退堂 전윤(全崙)의 시()


관심정(寬心亭)


좋은 계절 아름다운 경치에 온갖 꽃들이 만발하니

기로당 앞에서 옛 회포를 이야기하네.

봄바람 속에 만취하여 아직도 끝낼 줄을 모르니

천세를 비는 장수 술잔 또 한 잔을 권하네.


良辰美景百花開

耆老堂前話舊懹

爛醉春風猶未罷

壽盃千歲勸千盃


[출처] 최여림묘표(崔汝霖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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