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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宗史) 연구실

해사일기[海槎日記] 서문

작성자전과웅 (55세/정선)|작성시간22.03.31|조회수101 목록 댓글 0

해사일기[海槎日記]

 

서   문

김동명(金東溟) 세렴(世濂)이 글을 잘 쓴다고 청을 올려서 따라갔다.

 

 

나는 탐라(耽羅 : 제주도)에 건너간 적이 있었는데 바다 가운데 이르렀을 때 하늘과 물이 서로 닿아있고 사방이 끝이 없어, 초연하게 박망후(博望侯)처럼 두우성에 닿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동쪽으로 바라보면 일본 땅이 가장 가까워서, 구름과 노을이 점점이 있고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여 잡힐 듯한데, 한 번 돛에 바람을 받아 서복(徐福)이 갔던 옛길을 따라가고, 이주(夷州)와 단주(亶州)를 건너가고, 일광산(日光山)에 올라 내 마음과 눈을 상쾌하게 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양쪽 겨드랑이에 바람을 타고 가볍게 오르는 일을 못 하고 있다.

 

어느 날 전생(全生) 중극(中極)이 선조 두암공(斗巖公)의 『해사일기(海槎日記)』를 모아서, 내게 서문을 청하였다.

아! 공은 궁벽한 곳에 사는 일개 포의(布衣)로서 고래와 악어 같은 파도가 넘실대는 위험을 무릅쓰고 큰 새를 보좌하여 소요유(逍遙遊)를 이루었으니, 직접 구만리를 날아갔다 내려와서 마의(磨蟻)의 방을 배회하는 것은 진실로 술동이 속 초파리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공은 뛰어난 재예(才藝)를 지니시어 안류(顔柳)를 능가하고, 수만 장의 종이에 쓱쓱 글을 써서 곧바로 부상(扶桑)과 밝음을 다투셨음에랴. 또 동명(東溟)이라는 거장의 지기가 되고 이국땅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사람이 있음을 알게 하여, 일이 기이하고 행적이 위대하니 공은 이 세상을 헛되이 산 것이 아니라 할 만하다.

 

아! ‘오랑캐 배가 중원에 이르면 천금으로 미원장(米元章)의 글씨를 샀다’라고 들은 적이 있으니, 외국에서 인재를 아끼는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풍속은 매우 편협하여, 비록 공을 공경 사이에 나가서 노닐게 하더라도 한경홍(韓景洪)의 앞줄이 되는 것에 불과하였다.

공은 이에 아프게 깨닫고, 곧 먼 바닷길에 나섰다가 돌아와 빈궁한 집으로 자취를 거두어들이고 유학에 전념하여, 더욱 돈독히 가업을 이었으며, 기예로 이름이 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더욱 높은 점이다. 더욱이 또 폐물을 물리치고 은화를 던졌으니 늠름하게 고인의 지조가 있음에랴.

 

만약 공이 다행히 중국에서 태어나 사절을 따라 황하의 근원을 다하게 했더라면 반드시 공착(邛笮)과 염방(冉駹)의 기이한 보물로 윗사람을 사치로 이끌어 변방에 틈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은 불행히 구석진 나라에 태어나 건너가 본 곳은 날치(捏齒)의 국경뿐이요, 지킨 것은 자한(子罕)의 보물일 뿐이었으니, 애석하도다!

 

일기는 본래 2책이었는데, 모두 공이 직접 쓰신 것이지만 절반이 없어졌다. 반드시 신물의 보호가 있어서 필경 후손에게 돌아갈 것이나 지금 우선 볼 수가 없어 마침내 어루만지며 감탄하고 쓴다.

 

무오년(1858) 수요절(秀葽節) 만귀산인(晩歸山人) 이원조(李源祚)가 삼가 쓰다.

 


 

@ 해사일기[海槎日記]

두암(斗巖) 전형(全滎)이 쓴 일기임

위의 글은 해사일기 서문을 이원조(李源祚)가 기고한 것임

 

두암 선생 글씨

 

@ 전형(全滎)

[진사] 인조(仁祖) 26(164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三等) 70(100/100)

[인물요약]

UCIG002+AKS-KHF_12C804D615FFFFB1609X0
자(字)달보(達甫)
호(號)두암(斗巖)【補】
호(號)매은(梅隱)【補】(1)
생년기유(己酉) 1609년 (광해군 1)
졸년경자(庚子)【補】(2) 1660년 (현종 1)
향년52세
합격연령40세
본인본관전주(全州)
거주지초계(草溪)

 

@ 전생(全生) 중극(中極)

濯溪 宗家 世系圖 ()

16代祖-全 絪 (從仕郎)

15代祖-全致遠(濯溪) . 致水

14代祖-全雨(睡足堂) . . . . .

13代祖-全昶 . . . (斗岩) . .

12代祖-全氣中(新溪)

11代祖-全聖弼 . 聖基

10代祖-全命錫 . 命恒

9代祖-全垓

8代祖-全弘悳 . 弘遇

7代祖-全宅源 . 宅溟

6代祖-全一驥 . 一魯

5代祖-全中極

高祖-全錫鳳 . 錫麟

曾祖-全洪燁

-全相淳 . 相霖

-全皓烈

[출처] 탁계종가 세계표

 

@ 이원조 [ 李源祚 ]

1792~1872 본관은 성산(星山), 초명은 영조(永祚),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 1809(순조 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7(헌종 3) 정언으로서 기강이 문란하여져 사족(士族)들의 사치가 극도에 달하였으며, 이와는 달리 계속된 흉년으로 민중들의 간고(艱苦)가 형언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음을 들어 쇄신책을 실시할 것을 극간하였다. 1850(철종1) 경주부윤에 오르고, 1854년 대사간에 이어 공조판서를 지냈다.

 

@ 김동명(金東溟) 세렴(世濂)

1593~1646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 22세에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16년 증광 문과에서 장원 급제하였다. 예조 좌랑·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등을 지냈다. 폐모론을 주장하는 자들을 탄핵하다가 유배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기용되어, 헌납(獻納교리(校理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1635년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조선과의 성신(誠信) 외교를 위해 쓰시마 도주 소 요시나리(宗義成)를 시켜 통신사를 요청하여, 이듬해 163610월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정사 임광(任絖종사관 황호(黃㦿) 등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다. 이때 해사록(海槎錄)사상록(槎上錄)등을 남겼다. 만년에는 경서 연구에 전력하였고, 문장과 시문에 능하였다. 저서로 동명집(東溟集)이 있다.

 

@ 박망후(博望侯)처럼 두우성에 닿고

한(漢)나라 때 박망후에 봉해진 장건(張騫)이 뗏목을 타고 황하(黃河)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은하수(銀河水)에 이르러,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나고 왔다는 이야기가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에 실려 있다.

 

@ 서복(徐福)

서불(徐市)이라고도 한다. ()나라 낭야(琅琊)출신의 방사(方士), 진시황(秦始皇)의 명에 따라 동남동녀(童男童女) 수천 명을 이끌고 장생불사약을 구하려 바다에 들어갔다가 소식이 끊겼다. 漢書 卷25

 

@ 이주(夷州)와 단주(亶州)

이주는 후한後漢때 동이東夷의 하나로, 임해(臨海) 동남편에 있어 눈과 서리가 없고 초목이 시들지 않으며,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단주는 섬으로, 서복이 신선을 찾기 위해 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後漢書 東夷傳》 《史記秦始皇紀

 

@ 일광산(日光山)

일광산(日光山, 닛코산)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개창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묘가 있는 곳으로, 1616~1617년 사이에 2대장군 히데타다(秀忠)가 축조한 일광동조궁(日光東照宮)의 소재지이다. 3대장군 이에미쓰(家光)가 기존의 사전(社殿)을 완전히 철거하고 다시 대규모로 수축했는데, 병자통신사가 에도에 도착하기 8개월 전인 16364월 완성했다. 1636년 병자통신사행 때 일본은 막부의 권위와 정통성 고양이라는 정치적인 목적 달성을 위하여 쓰시마도주를 통해서 통신사행의 일광산 유람과 참배를 요청했다. 통신사행은 국서개작사건 이후 쓰시마도주의 입장을 세워주고 일본과 평화유지를 공고히 한다는 대일(對日) 기본원칙 때문에 일광산 유람(遊覽)’만을 승낙했다. 일광산 유람에 대하여 귀국 후 특별한 문책성 논의는 없었다. 1643년 계미통신사 때는 일광산 유람이 치제(致祭)로 변경되고, 조선 측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사행강정절목(使行講定節目)안에 치제 문제를 명문화하였다. 그리하여 동조궁에서 유교식 제례에 의거한 격식 있는 치제가 이루어졌고, 아울러 국왕 인조의 칠필 편액(扁額), 제문(祭文), 시문책(詩文冊), 동종(銅鐘), 향로, 촉대(燭臺), 화병 등 제구(祭具)가 막부의 요구로 전달되었다. 이 중 동종을 제외한 물품들은 1812년 동조궁 수장고의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1655년 을미통신사행 때는 1643년과 마찬가지로 일광산 치제를 거행하였다. 1682년부터는 치제가 폐지되었다.

 

@ 소요유(逍遙遊)

장자소요유(逍遙遊)대붕(大鵬)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적에,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 창공으로 날아올라 간다. [搏扶搖而上者九萬里]’라고 하였다.

 

@ 마의(磨蟻)

맷돌 위의 개미. 해와 달이 하늘이 도는 것에 따라 운행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晉書 天文志 上

 

@ 안류(顔柳)

당나라 때의 뛰어난 서예가 안진경(顏眞卿)과 유공권(柳公權)을 가리키는 말이다.

 

@ 미원장(米元章)

미불(米芾, 1051~1107), 자는 원장(元章)이다. 북송 때 저명한 서예가이자, 감정가, 수장가(收藏家)이기도 했다. 벼슬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성품상 잘 어울리지 못하고, 서화와 수석에 빠져 지내, 세상에서 미전(米顚)”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한경홍(韓景洪)

한호(韓濩, 1543~ 1605), 본관은 삼화(三和),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청사(淸沙)이다. 1567(명종2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글씨로 출세하여 사자관(寫字官)으로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고,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서사관(書寫官)으로 파견되었다. 벼슬은 흡곡현령(歙谷縣令)과 가평군수(加平郡守)를 지냈다. 해사일기저자 전형(全滎)이 글씨로 이름나 능서관(能書官)으로 김세렴을 따라갔으므로, 명필로 이름난 석봉 한호에게 비유한 표현이다.

 

@ 은하를 던졌으니

1636년 사신 일행이 도쿠가와 막부의 태평을 축하하고 돌아올 적에 쓰고 남은 일공미(日供米) 수백 섬을 왜인에게 돌려주자 왜인이 그것을 황금으로 바꾸어 주므로 다른 나라의 물건은 받을 수 없다고 하여 강물에 던져 버린 일을 가리킨다.

 

@ 공착(邛笮)

한나라 때 서남쪽에 있던 오랑캐 공도(邛都)와 착도(笮都)를 가리키는 말이다.

 

@ 염방(冉駹)

한나라 때 서남쪽에 있던 나라인 염국(冉國)과 방국(駹國)을 가리킨다.

 

@ 날치(捏齒)의 국경

일본을 가리킨다. 이를 검게 물들이는 풍습이 있어서 이른 말이다.

 

@ 자한(子罕)의 보물

탐내지 않음을 가리킨다. 자한(子罕)이 자기에게 옥을 바치는 사람에게 거절하면서, “나는 탐내지 않음을 보물로 여긴다.”라고 했던 말에서 연유하였다.

 

@ 수요절(秀葽節)

아기풀이 패는 절기, 4월을 가리킨다. 시경(詩經)칠월(七月), “사월에는 아기풀이 패며, 5월에는 말매미가 운다. [ 四月秀葽 五月鳴蜩 ]”하였다.

 

[출처]  해사일기[海槎日記]  전형(全滎) 지음   구지현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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