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ㅡ 보수와 진보의 논쟁 종식
조문부ㅡ 제주대 명예교수
제주대 前총장
한국 현대 정치사의 한 특징으로써 오랫동안 다투고 있는 것이 보수와 진보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나 일본은 정권이 바뀌어도 집권 정당이 보수적 정당이니
진보적 정당이니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은 집권당이 바뀌면서 보수적 정당이니
진보적 정당이니 하여 대립적 논쟁을 전개한다. 물론 한국은 국토와 민족이
분단된 이유 때문에, 국민생활만을 대상으로 국정 방향을 논하는 다른 나라와는 다르다.
국민생활의 현실과 이상을 논하는 대국민관계 외에, 대북관계를 고려해 국가안보적 차원과
함께 통일을 주도하는 위치에서 국제적 조류와 민족적 정서를 감안해 논해야 하는 이유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논쟁인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라는 것과 진보적이라는 개념을 실제로 비교하면, 보수적이라는 것은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보다도 익숙하고 친밀한 것을 좋아하는 것,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보다도 시도해본 것을, 신비롭거나 이상적인 것보다는 현실적인 사실을,
미래에 가능성이 있는 것보다는 현실에 실현된 것을, 무제한적인 것보다는 한도가 있는 것을,
멀리 있는 것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것을, 넘칠 만큼 많은 것보다는 충족할 정도의 것을,
이상향(理想鄕)에 있는 지복(至福)보다는 현재의 웃음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진보적이라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가 될 것이다.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은 현실에 바탕을 두면서 미래의 이상을 설계해 준비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미래의 이상이 불확실하고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거나 손실 위험성이
클 것으로 감지될 때에는 미래를 버리고 현실을 택하는 보수적 성향으로 행동할 것이며,
미래의 이상이 확실하며 실현 가능하고 현실과 비교해 이득이 될 때에는 이상을 택하는
진보적 성향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즉 보수적인 사람일지라도 진보적인 성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진보적인 사람이라도 보수적인 성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는 한 인간의 머리와 마음속에서 상호 협력해 보다 유익하고 행복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지, 각기 개별화해 갈등을 야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청년기에는 진보적 성향이 보다 농후하나, 장년기 이후에는 보수적 성향이
농후한 것일 뿐이다.
정치에서 보수주의나 진보주의도 인간의 행위에 관한 보수적 성향과 진보적 성향의
양면과 상응해 대칭을 이루는 것이지, 대립착종(錯綜)하는 관계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정치란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는 국민의 현재와 미래의 사익적 욕구를 수용하면서
공익적 현실과 미래의 이상을 조화롭게 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에서 보수는 경제적으로 생산적 현실에 보다 역점을 두고, 안보와 통일면에서는
민족적 정서보다도 국제환경에 역점을 두는데 비해, 진보는 경제적 분배에 역점을 두어
이상을 추구하고, 안보 통일면에서는 국제환경보다도 민족적 정서에 역점을 두는 것 같다.
국제환경은 자원이나 기술에 의해 좌우될 국제적 경쟁력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여하히 개발해 고양시키고, 국제적 이득을 통한 재 생산체제의 구축과 갈등 극복을 위한
계층간 격차의 감소를 이루는 분배를 여하히 하느냐는 것이 대내적, 정치적 합리주의의
과제라고 한다면, 보수나 진보가 수용해야 할 변화의 외부적 요인은 정보와 기술 획득이
전제가 되는 안보와 국제적 교역이 될 것이므로 이를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것이
대외적 정치적 합리주의의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적 합리주의를 추구하지 않는 한, 보수와 진보의 논쟁은 무의미한 것이
되기 때문에 종식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보수와 진보의 논쟁으로 인한 대립 갈등과
이로 인한 국가사회적 역량 낭비는 자명한 것이 될 것이며, 정치적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의
요소가 혼재해 있는 보수와 진보의 아집은 자기모순에 빠져 헤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보수와 진보의 논쟁을 종식하고, 양자 모두가 정치적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의
분석을 통한 국가사회의 발전역량을 극대화하기를 바란다.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
대악마는 거룩한 승(僧)으로 되어 부모, 형제 등에게 붙어서
사람의 후세를 막는 것이니 아무리 말할지라도 법화경을 버리라고
속이려 함을 받아들이시지 말지어다. (어서 1497쪽)
통해
대악마는 거룩한 승이 되어 부모나 형제 등에게 붙어서 사람의 후세를
방해하고 불행으로 떨어뜨리려고 한다.
설령 아무리 말하더라도 법화경을 어떻게든 버리게 하려고 속이는 것을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 ◇
일단은 묘법(妙法)에 귀의했지만 염불을 마음속에서는 버리지 않은 난조 씨를
'일족의 사람이 염불을 권하는 언동에 결코 분동 되어서는 안 된다.
법화경을 버리게 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악마가 성불을 방해하려는 것이다.'
하고 엄하게 훈계하신 글월이다.
가족의 언동으로 보면 확실히 당사자를 위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정사(正邪) 판단이 반드시 옳다고는 말할 수 없다.
특히 니치렌 대성인 불법(佛法)에 관해서는 사람들이 불법을 충분히 이해한 뒤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성불의 법은 대성인 불법 이외에는 없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게 하려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빼앗으려고 하는 마(魔)이며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대성인은 난조 씨에게 '주위의 그러한 마의 언동에 현혹되지 말고 당당하게
신심(信心)을 관철해 인간으로서 진실하고 행복한 길을 활보하세요.'하고 말씀하신다.
난조 씨는 그때까지 세법에 집착해 염불을 버리기가 힘들었지만
대성인의 절대적인 확신과 깊은 자애에 염불을 단호히 버리고 가족도 묘법에
눈뜨게 해 훌륭하게 신심을 완수했다.
난조 씨의 모습에 부인과 도키미쓰 등의 자녀들, 그리고 친척까지도
묘법의 신심에 커다란 확신에 섰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신심은 결국, 마와 하는 싸움을 통해 성불의 실증을 나타내는 것에 있다.
따라서 우리도 신앙에 면려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장마(障魔)가 다투어
일어나겠지만, 결코 분동되지 않고 강하고 순수하게 신심을 관철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시에 대성인이 난조 씨를 격려하셨듯이, 우리는 신앙심이 약하고
주위 사람들의 반대로 괴로워하고 있는 동지를 따뜻하게 격려해야 한다.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