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 앞에서 맹세한 청년부 '정예 10만' 결집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이케다 SGI회장의 투쟁은 거친 세간의 파도를 타고넘어
새로운 창가학회의 시대가 되었음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입정안국'과 제2무로토 태풍.
'오사카 사건'의 재판이 한창일 무렵, 이케다 회장은 '입정안국'의 일대투쟁을 시작했다.
반전공세를 펼친 법정투쟁, 태풍 피해로 고생하는 오사카 벗에 대한 격려 …….
그것은 모든 것을 '승리'로 이끄는 미증유의 싸움이었다.
"'국사훈'처럼 우리에게는 10만명의 결집을 이루어야 할 숙명이 있다."
1957년이 저물 무렵 《젊은 날의 일기》다. 직제자는 '10만 결집'을 자기 '숙명'이라고
결심했다. 결심했으면 완수한다. 이것이 제자가 제자답다는 증거다.
직제자가 결심하고 4년이 지난 1961년, 청년부는 세배로 증가해 50만의 진용이 되었다.
청년부에게는 10만 결집을 머지않아 달성한다는 기세가 넘쳐흘렀다.
약2만명이 회장의 강의를 듣기 위해 활기차게 참석했다. 어서는 <입정안국론>이다.
전해에 열린 강습회에서는 회장이 <닛코유계치문>을 강의했다. 스승이 돌아가신 후,
참된 제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회장 자신의 각오를 피력한 강의에, 참석자들은
사제의 깊이에 눈이 뜨이는 듯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입정안국론>. 회장은 굳이 안국론을 교재로 택했다.
거기에는 '입정안국'을 실천하는 대투쟁이 시작됐다는, 예사롭지 않은 결의가
담겨 있었다. 은사가 돌아가시고 3년 후, 직제자는 은사의 구상을 실현하고자
'입정안국'의 대투쟁을 일으켜 나라의 숙명까지 전환하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닛코 상인이 국가에 간효하기 위해 <입정안국론>을 다시 제출하려고 움직이신 때도
연조 대성인이 입멸하시고 3년 후였다. 마침 니치렌 문하가 군력에 탄압받는
가마쿠라 법난이 일어난 때다.
입정안국은 세계평화를 위한 투쟁이다.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권력의 마성'과 벌이는 싸움이다.
광선유포를 전진시키려면 창가의 정의를 확립하고 마의 준동을 쳐부술 수밖에 없다.
이케다 회장은 권력의 마성과 싸우는 한복판에 있었다.
그것은 사실무근한 죄를 뒤집어 쓴 '오사카사건'의 법정투쟁이었다.
당시 청년부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하계강습회 교재가 <입정안국론>으로 결정된 때는 7월 상순이었습니다.
마침 오사카사건의 중요한 재판이 열리는 때였습니다. 무죄를 입증할 수 있을지 어떨지.
이케다 회장은 반전공세를 펼치는 싸움에 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케다 선생님이 이사실 간부에게 엄한 어조로 하신 말씀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번 하계강습회에서는 <입정안국론>을 연찬하겠습니다. 지금이 바로
입정안국의 투쟁을 단호히 펼칠 때입니다.'
선생님이 어떤 심정으로 학회를 지휘하시고 있는지 진지하게 귀담아들었습니다."
회장이 강의하는 대강당 앞에는 이미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오후 5시 반, 문이 열리자 장내는 금세 가득 찼고 참석자는 로비까지 넘쳤다.
오후 6시 반, 회장은 강의를 시작했다. 범위는 <입정안국론>의 결론부분
(어서 30쪽 16행부터 끝까지)이었다.
이케다 회장의 늠름한 목소리가 대강당에 울려 퍼졌다.
"대성인의 일생은 '<입정안국론>으로 시작해서 <입정안국론>으로 끝난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니치렌 불법은 '입정안국'을 지향하는 종교입니다.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권력의 박해도 이 글을 상정(上程)한 데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마성'은 인간존엄과 생명존엄을 유린했습니다. 이 마성이, 국토에 끝없는
'투쟁(鬪諍)'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말법이라는 시대의 본질입니다.
대성인은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려면 사람들의 정신에 근본적인 정의를 확립하고
마성의 준동을 분쇄하는 길뿐이라고 확신하셨습니다.
바로 그래서 당시 최고권력자에게 감연히 이 글을 제출하신 것입니다."
강의는 열렬한 확신과 기백이 넘치고 있었다.
마키구치 초대 회장이 감옥에 들어가신 해(1943년) 봄,
"지금이 바로 국난을 구할 때다."라고 외치며 강의를 시작한 것도
<입정안국론>이었다. 그해 6월 종문은 '신찰'을 받으라고 강요했다.
겁이 많은 종문은 권력에 굴복해 보신으로 치달았다.
그때 초대 회장은 외쳤다. "지금이 바로 국가간효를 할 때가 아닌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투옥당한 초대 회장은 이듬해 서거했다.
안국론을 몸으로 읽은 옥사(獄死)였다. '스승의 원수를 갚겠다'라며 일어선
도다 제2대 회장과 처음으로 이케다 회장이 만난 좌담회.
그곳에서 은사가 강의하던 어서도 안국론이었다.
이케다 회장은 당시를 술회하며 이렇게 지도했다.
"도다 선생님을 처음 뵌 곳은 도쿄 오타구에서 열린 좌담회였습니다.
선생님은 <입정안국론>을 강의하고 계셨습니다…. 대성인이 이 <입정안국론>을
당시 최고 권력자에게 제출하여 국주간효를 하신 1260년 7월 16일은 아마 당시
서력인 율리우스력으로는 1260년 8월 24일에 해당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8월 24일이 내게는 대성인의 가르침대로 '입정안국'을 실현하는 출발의 날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케다 회장의 인생 또한 <입정안국론>으로 시작했다.
이케다 회장은 어서를 토대로 강의했다.
"'만약 우선 국토를 평안케 하고 현당(現當)을 기원하고자 원한다면
지체없이 정려(情慮)를 두루 하여 빨리 대치(對治)를 가하시라.' (어서 31쪽)
우리가 이 원리만은 일본 지도자나 정치가, 교육가, 세계의 지도자에게도
소리 높여 가르쳐야 합니다."
"'국토가 혼란해지려 할 때는 우선 귀신이 혼란하고, 귀신이 혼란해지는 고로
만민이 혼란해지느니라.' (어서 31쪽) 이것도 중요한 방정식입니다.
국토가 혼란한 근본원인은 귀신, 즉 사상이 혼란하기 때문입니다.
아견이 소용돌이쳐 모두 '내가, 내가'하며 증상만이 되는 모습입니다.
그 결과 나라가 혼란해지고, 민중이 불행해진다는 원리입니다."
도호쿠의 남녀 청년부총회에 이케다 선생님을 모신 지 채 한달도 지나지 않아
하계강습회에서 다시 선생님 강의를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늠름하고 의욕에 찬 목소리로
"창가학회가 바로 <입정안국론>의 정신을 근본으로 광선유포에 일어설 사명이 있는
유일한 단체입니다. 앞으로 청년부가 그 중심이 되어 투쟁해야 합니다."라고 역설하셨습니다.
나는 도호쿠에 지도 차 오신 선생님에게 이동하는 열차 안에서 질문한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결핵으로 한쪽 폐를 잃고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광선유포에 도움이 될까요?" 하고 질문했습니다.
선생님은 지긋이 저를 바라보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도 몸이 약했습니다. 그러나 도다 선생님이라는 위대한 스승을 만나 오로지 스승을 따라
투쟁해온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나를 따라 오십시오.
나와 함께 싸웁시다. 반드시 복운이 쌓입니다. 건강해집니다. 열심히 하십시오."
감싸안는 듯한 격려였습니다.
(이케다)선생님 강의를 듣고 감동한 저는 어서에 빨간 줄을 긋고 선생님 지도를 메모했습니다.
지금도 어서를 펼치면 그때 그은 빨간 줄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대는 빨리 신앙의
촌심(寸心)을 고쳐서 속히 실승(實乘)의 일선(一善)에 귀(歸)할지어다.
그러면 즉 삼계(三界)는 모두 불국(佛國)이니" (어서 32쪽)
"실승의 일선에 귀할지어다."라고 줄을 그은 옆에는 '입정'이라고,
"삼계는 불국이니라." 부분에는 '안국'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전 세계가 반드시 불국토가 된다고 하는 것보다 반드시 불국토로 만들어야
한다고 읽어야 합니다."라고 지도하셨습니다. 대성인 법리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선생님은 사력을 다하고 계셨습니다. 깊이 감동받았습니다.
하계강습회에는 전국에서 청년대표 약 5000명도 참석했다.(중략)
이케다 회장은 청년들 속으로 들어가 간담도 나눴다.
"베를린 문제를 두고 그 문제점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동양의 나라들 중 스무 나라 이상 나라이름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일본의 3대 일간지 사설을 읽고 있는 사람은?" 회장은 청년들에게 잇달아 질문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청년부는 일본과 세계의 정세로 시야를 넓히고, 특히
일본의 정치는 신심을 근간으로 한 예리한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며
정치의 부패와 타락에는 청년다운 분노를 느껴야 한다."
간담 중에 청년들도 왕성하게 질문했다.
한 청년부원이 말했다.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해 가르쳐주십시오."
회장은 답했다. "민주주의는 간단하게 말하면 자유, 평등, 존엄입니다.
그러나 부처의 경애 이상의 '자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아래 모두 '평등'합니다.
또 부처만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존재는 없습니다. 이것이 '존엄'입니다.
최고의 불법이 곧 진정한 민주주의입니다."
간담 중 이케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10만 결집은 도다 선생님 유언이므로 당연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집만으로 모두 끝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세계광포의 선두에 서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러므로 이 10만 결집에 모인 청년들이 나와 호흡을 맞춰 세계광포의 투쟁에 임했으면 합니다.
그것이 앞으로 펼칠 투쟁입니다. 사제일체라면 어떤 일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성취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청년부의 책임이자 사명입니다."
다가올 국립경기장의 국사 10만 결집을 앞두고 그 일에만 급급하던 우리에게 선생님은
'단순한 숫자싸움으로 끝나면 안 된다. 스승과 호흡을 맞춘 청년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케다 회장의 <입정안국론> 강의는 전국 회원의 확신이 되어 넓혀졌고, 경이적인
확대의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8월 한달 동안 8만 세대를 크게 돌파하는 절복성과를
이루었다. 특히 청년부의 활약이 눈부셔 전체의 50퍼센트에 미치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세이쿄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올해 들어 이케다 선생님은 '올해는 청년의 해다.'라고 말씀하셨고,
또 '40만의 청년들 한가운데로 들어가 폭풍같이 전진하겠다.'고 외치신 사자후에 응해,
청년부는 감격과 환희에 넘쳐, 긍지와 사명에 가득 차 대전진했다.
…11월에는 간토의 청년들만 남자부 정예10만명, 여자부 7만명이 결집해 남녀 청년부총회를
열기로 했다."
그 총회의 대성공을 목표로, 9월 초에는 남녀 간부회가 열렸다.
우선 여자부가 4일 저녁, 도쿄 다이토체육관에서 9월 간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여자부 약 1만명이 환희하며 모였다. 간부회에서는 8월의 여자부 절복성과가
'1만 3230세대'라고 발표되었다. 체육관을 가득 메운 속에 박수가 터졌다.
지금까지 낸 최고성과는 8000세대였다. 사자분신과 같은 이케다 회장의 지휘에
호흡을 맞춰 투쟁한 결과였다.
9월 남자부간부회는 9월 5일 저녁 다이토체육관에서 열렸다.(중략)
간부회에서 청년부 간부가 인사했다.
"1959년 12월에 100개 부대 달성을 계기로 이케다 선생님 슬하에서 힘찬 전진을 시작했습니다.
그 100개 부대를 달성했을 때 이케다 선생님은 다음 목표는 300개 부대로 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에게서 부대기를 받고 오늘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남자부 결성 이래 10년,
도다 선생님의 '나라에 10만의 국사가 있다면' 이라는 말씀을 실현하는 때가
바야흐로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케다 회장은 10만 결집을 목표로 이렇게 피력했다.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는 대성인 제자답게, 청년답게, 지용보살답게 스크럼을 짜고
평화를 향해 당당하게 전진합시다."
그 며칠 후, 학회본부 2층에서 도쿄 남자부 부대장회가 열렸다.
이케다 회장은 질문회를 열었다. 한 부대장이 질문했다.
"미소 양국이 핵실험을 재개했는데 학회 청년부로서 이 문제를 놓고 어떻게 싸우면 좋을까요?"
회장은 답했다. "근본은 절복입니다. 대화입니다. 한 사람을 절복하는 일이 전부에 통하는
법입니다. 관념적으로 '반대다, 반대다.'라고 명예를 구걸하듯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지만
무엇도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 어본존을 수지하고 전 인류의 행복을 원해 밤낮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일념은 '일신일념(一身一念)이 법계(法界)에 널리 미침이라.'이며
전 우주에 통합니다. 여러분이 신심을 확고하게 확립하고 한사람 한사람의 이웃을 구하고
어본존에게 기원하면, 수천만의 지도자가 평화를 논하고 행복을 호소하는 것보다 백천만억배나
힘이 있으며 사실상 평화를 이끌고 있음을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9월도 청년부간부회가 열리고 일주일 후인 9월 11일, 첫 '청년부 합동추선법요'가 열렸다.
'10만 결집'의 남녀 청년부총회가 있기 두달 전이다. 발원주는 이케다 회장이었다.
8월에 열린 여자부간부회에서 이케다 회장은 한가지를 제안했다.
"광선유포 도상에 요절한 동지를 위해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고 정성스럽게 대간부와
청년부 대표로 추선공양을 하면 좋겠습니다."
누구도 생각한 적 없는 제안이었다. 회원을 생각하는 마음, 동지를 잃은 슬픔이
회장은 누구보다 강했다. 자애어린 스승이기에 비로소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법요에는 회장의 부름을 받고 수도권의 남녀 부대장도 참석했다.
학회가 시작된 이래 획기적인 법요였다. 법요에는 이케다 회장의 초청으로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남녀 청년부의 유족 40여명이 모였다. 법요는 오후 7시에 도쿄
이케부쿠로에서 열렸다. 이사, 지부장, 남녀 부대장 등 400명이 참례했다.
근행과 간부의 추모사에 이어 유족 대표가 감사 인사를 했다.
"이케다 선생님의 자비로 추선공양을 할 수 있어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광선유포 도상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들도 얼마나 기뻐할까요. 저희도 언제까지나 강성하게
신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케다 선생님이 인사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몸이 몹시 약했고 입회한 후에도 은사 도다 선생님에게 몹시 걱정을 끼친 몸입니다.
부모님도 제 건강을 무척 걱정하셨습니다. '도저히 서른을 넘기기 힘들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병약했습니다. 지금 몸이 약한 것만으로도 부모님이 매우 걱정할 텐데, 하물며 귀여운 자식을 잃은
부모의 비애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그 아픔을 느꼈습니다.……"
법요에서 이케다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광선유포를 지향하다 돌아가신 동지는 반드시 대복운을 쌓고 또 새로운 젊은 생명의
활력을 받고, 이 세상에 생을 받아 우리 동지와 함께 다시 투쟁하리라는 것은
어서에 비추고, 어본존에 비추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디까지나 생명은 영원합니다."
이 한마디가 가슴 깊이 울렸습니다. 지금 투쟁하는 동지와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 영원히
투쟁할 수 있음에 환희를 느끼며 깊이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명에 끝까지 살아가자고
다짐했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비단 저 한 사람뿐이 아니었습니다.
청년부 합동추선법요가 열리고 사흘 후, 이케다 회장은 도쿄대학교 학생을 만났다.
은사는 도쿄대생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도쿄대학교 법화경연구회도 결성했다.
은사는 '일고기숙사가(歌)'를 좋아했다. 1958년 3월, 은사가 쉬고 있는 리쿄보 1층에서
이 노래를 여러번 불렀다. 왜 일고기숙사가를 노래했는가. 이케다 회장은 말한다.
"일고(一高)는 '가장 높다'는 말이니까 세계 최고지도자를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일찍이 일본을 움직여온 도쿄대 출신을 의미하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보잘 것 없는 사고방식은 안 됩니다. 청년부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되자는
결심으로 노력하십시오."
그러나 1961년 당시 도쿄대학교 법화경연구회는 용두사미격이 되어 있었다.
은사의 구상을 실현해야 제자다. 9월 14일 오후, 이케다 회장은 학회본부 회장실에서
도쿄대학교 재학생 몇 사람을 만났다. 왜 그들을 만났을까.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학회의 장래를 응시하며 진실한 사제 정신을 이어받아 본격적으로 제자를 훈육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또 한 사람, 학생운동에 몸을 던진 정열적인 도쿄대2학년생이 있었다.
때마침 미군이 일본 주둔을 승인한 미일 안전보장조약 개정을 둘러싸고 사회는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많은 학생이 캠퍼스가 아닌 시위에 나갔다. '사회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이른바 '60년 안보투쟁'이다. 1960년 6월 15일, 시위대가 국회로 돌입했다.
그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해 도쿄대생 간바 미치코 씨가 사망했다. 도쿄대2학년생은
그 시위에도 참가해 부상당한 친구를 비호하면서 투쟁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현재의 하라다 회장이다.
제가 도쿄대학교에 입학한 때는 1960년입니다. 이른바 '안보투쟁'을 둘러싸고 승패를 가린
해였습니다. 권력의 횡포를 직접 목격한 대학부인 우리 생각으로는 한사람 한사람의
'인간혁명'을 통한 민중구제는 멀리 돌아가는 길처럼 느껴졌고, '사회혁명'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에서 수업은 거의 하지 않았고, 많은 동창생이 시위에 주력했습니다.
당시 저도 그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보투쟁'은 실패해서 희생자를 냈고, 훗날
학생단체에 유입된 부정자금도 드러났습니다. 결국 권력의 앞잡이노릇을 한 셈이었습니다.
사회를 바꾸는 것은 국회 돌입이나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무력감까지 느낄 무렵
이케다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생님을 바로 옆에서 뵐 수 있었습니다.
(이케다)선생님 모습에 압도당하는 기백을 느꼈습니다. 마음을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응시하셨습니다. 엄부(嚴父)와 같은 자애도 느꼈습니다. 선생님은 30분 정도 말씀해주셨습니다.
세계의 지성을 훨씬 능가하는 깊은 이야기였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괴테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위대한 문학에는 위대한 철학이 필요하다.
위대한 철학은 위대한 종교에 의할 수밖에 없다. 위대한 종교에는 불타오르는 신앙이
필요하다.' 톨스토이도 그러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창가의 생명철학을 지녔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위대한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 근저에는 역시 타오르는 듯한 신앙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인간을 변혁하는 길 이외에 사회를 바꾸는 방법은 불가능하다는 원리를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이때 학생운동과 결별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선생님을 따라 가자고 제 인생을 결정했습니다.
이케다 회장이 도쿄대생들에게 이제 막 발간된 《묘법연화경 병개결》을 증정했다.
거기에는 날짜와 "ㅇㅇ학형"이라고 씌어 있었다. 하라다 청년이 받은 법화경에는
'구도부진(求道不盡)'이라고 씌어 있었다. '스승을 구도하는 길을 생애, 끝까지 걸어라.'는
의미였다. 10만 결집이라는, 도다 선생님과 맺은 서원을 완수하는 투쟁을 총마무리하는 동안
인재는 이케다 회장을 구도하고자 모여들었다. 도쿄대생인 그들도 그러했다.
학회 미래를 짊어질 인재를 이케다 회장은 규합하고 있었다.
이튿날인 9월 15일, 이번에는 본산에서 만난 연장자들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 격려했다.
어서강의가 끝난 후 이케다 회장이 대강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세이쿄신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갑자기 나타나신 이케다 선생님은 '오늘은 '경로의 날이므로
70세 이상인 분들에게 기념품을 드리고 싶다.'고 했고, 모두 엉겁결에 큰 박수.…200만 세대
달성기념 메달을 건네면서 '나는 여러분의 손자뻘 되는 사람입니다. 이 메달을 달고 있으면
어느 회합이나 오실 수 있습니다.'라며 선생님은 연장자를 격려했다."
회장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었다. 가족을 잃은 유족을 격려하고,
지성의 학생에게 지침을 주고, 존경하는 선배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9월 19일, 회장은 다음날인 20일에 시작되는 오사카사건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오사카에 있었다.
재판은 제74차, 75차, 76차 공판이 사흘 동안 진행되었다. 재판의 초점은 검사의 취조에서
이케다 회장이 죄를 인정한 진술조서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하는 점이었다.
제74차 공판부터 재판 양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검사가 제출한 진술조서의 증거능력에 대해
재판관이 의구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이케다 회장을 조사한 검사가 증인으로 출석해
그에 대한 심문을 시작했다.
제76차 공판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이케다 회장은 오사카시 니시요도가와를 방문했다.
그것은 '제2 무로토 태풍'의 피해지역이었다. 9월 22일 오전에 방문했는데,
이케다 회장이 공판에 참석하기 전이라 정말 중요한 때였다. 이케다 회장은 자신의 재판보다
재해를 입은 동지를 격려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했다. 이것이 이케다 회장의 신념이고
삶의 자세였다. 서민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겼다. 이런 불법 지도자가 또 어디에 있을까.
9월 16일 오전 9시 40분, '제2 무로토 태풍'은 고치의 무로토곶에 상륙했다.
초대형 A급 태풍이었다. 최대풍속은 66.7미터. 일본 전체가 강풍권내에 들어갔다.
피해는 심각했다. 사망자는 194명, 부상자는 400명이 넘고 침수된 가옥이 38만채가 넘었다.
특히 오사카에 피해가 컸다. 간사이 창가학회는 청년부를 중심으로 구조본부를 만들어
어느 곳보다 신속하게 구조활동을 펼쳤다. 이케다 회장의 지시였다.
당시 사상 세번째로 큰 대형 태풍이었다. 해일로 인해 오사카시 서부에서 중심부까지
31제곱킬로미터가 물에 잠겼다. 특히 해발 0미터인 니시요도가와구의 피해는 심각했다.
이케다 회장은 괴로워하는 벗에게 발길을 옮겼다. 격려하러 다닌 곳이 다섯 군데에 이르렀다.
입회한 지 얼마 안 된 저는 신심을 몹시 반대하던 남편 때문에 어본존을 모실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당일 이케다 선생님이 위문 차 오신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남편에게 "다녀와도 돼요?"라고 허락을 구했더니 "친척조차 위문하러 오지 않는데
창가학회 회장이 올 리가 없어. 네가 속고 있는 거야."하며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용기를 내어 동네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굉장히 활기찬 모습으로
선생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을 품어 안 듯이 격려하셨습니다.
"재해에 지면 안 됩니다. 변독위약해야 합니다."
갓 입회해서 불법용어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고난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신심이라고
배웠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멤버를 격려하시는 선생님 곁에 남편이 있었습니다.
제가 학회에 속고 있는 모습을 끝까지 확인하겠다는 생각에 온 것이었지요.
"이번에 큰 일을 겪으셨군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환자분은 안 계신가요?"
한사람 한사람을 격려하시는 선생님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본 남편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인을 위해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이 사람을 평생 따라가겠다." 그때까지 어떤 누구의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 않던
완고한 남편은 그날 이후로 불단을 구입해주었습니다. 수해는 당했지만
남편이 신심을 하게 된 일이 저에게는 무엇보다 큰 변독위약이었습니다.
공판에서는 이케다 회장을 취조하고 조서를 꾸민 주임검사가 증인으로 법정에 나왔다.
회장 측 변호인이 주임검사에게 심문한 뒤 이케다 회장이 직접 주임검사를 심문했다.
회장이 반전공세를 펼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회장은 자신이 가짜 조서를 인정하면
학회본부 수색이나 도다 제2대 회장을 체포하지 않겠다고 주임검사가 약속했다는 사실을,
그때 주고받은 말로 명확하게 증명하며 하나하나 추궁했다.
회장의 심문에 시치미를 떼는 주임검사, 애를 태우던 판사는 주임검사를 다그쳤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까?" (공판기록)
그래도 말을 얼버무리려는 주임검사에게 이케다 회장은 당당하게 연거푸 심문했다.
주임검사는 시종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에 없다."고 답변을 피하며 판사 앞에
추태를 부릴 뿐이었다.
이케다 회장이 직접 펼치는 투쟁으로 정사(正邪)가 명확해지고 있었다.
사실을 왜곡해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려고 하는 권력의 마성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끝까지 싸운다. 그러나 비탄에 잠긴 민중은 어디까지나 자비의 마음으로 끝까지 지킨다.
이것이 광포 지도자의 진정한 자세였다.
법정투쟁과 태풍 피해자의 격려 등, 격투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대백련화 10월호 권두언
"지부장 지구부장에게 바란다."를 썼다. 문장에는 강한 확신과 자애가 자연히 나타났다.
"투쟁에 임하면 신명을 걸고 엄연하게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말고 사자왕과 같이 투쟁해야
한다." "지부나 지구회원을 대할 때는 형이 동생을 귀여워하듯 항상 따뜻하게, 친절한
포용력을 지니고 마음껏 신심수행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하기를 바란다."
이케다 회장은 10월 4일부터 20일간에 걸쳐 유럽 9개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회장은 그 다망한 준비 속에 짬을 내어 10월도 남녀 간부회에 참석했다.
남자부간부회는 10월 2일, 도쿄 니혼대 강당에서 열렸다. 간부회는 11월에 열리는
'10만 결집'을 이룰 제10회 남자부총회를 목표로 열리는 회합이었다.
남자부 간부가 인사에 나섰다. "이 총회는 단순한 총회가 아니라 '사제상대(師弟相對)의
일대행사'이자, 광선유포의 대서원을 완수할 총회입니다. 제1부대장이던 이케다 선생님은
제2회 총회에서 은사 도다 선생님에게 다음과 같이 서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도다 조세이 선생님의 유일무이한 친위대임을 자각하고 어떠한 전선에
나가더라도 절대로 동지를 배신하지 않고, 우리 사명을 완수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선생님의 이 정신을 이번에는 우리 제자가 선생님에게 맹세를 드리는 제10회 총회로
하고자 합니다."
여자부간부회는 다음날 10월 3일, 도쿄 다이토체육관에서 열렸다.
이케다 회장은 유럽으로 떠나기 전날 밤이었지만 참석했다. 다이세키사에 있는
은사의 묘 앞에 유럽 방문을 보고하고 곧바로 온 것이다.
제자에게 은사는 영원한 존재였다.
스승에게 보고하고, 스승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광포를 전진시키도록 지휘했다.
여자부간부회에서 회장은 여자부원들에게 역설했다.
"대성인은 경문에서 광선유포 도상에 반드시 삼류강적(三類强敵)이 출현한다고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현재도 평론가나 종교가, 정치가 등이 창가학회를
몹시 비판하고 있습니다. 나는(이케다 선생님) 광선유포를 할 때가 점점 무르익은
증거라고 마음으로 남몰래 기뻐하고 있습니다."
회장의 늠름한 목소리가 참석자에게 신심의 확신을 불러일으켰다.
(이케다)선생님은 유럽방문 직전이었지만 청년부간부회에 참석해
"청년부에게 학회의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라고 기대를 보내셨습니다.
한번은 유럽방문을 수행하는 멤버들이 선생님과 간담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일행 중 한명이던 저도 참석했습니다. 그때 저는 선생님에게 여쭤보았습니다.
"왜 이번 방문에서는 학회원이 한 사람도 없는 나라들을 방문하시나요?"
선생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없으니까 가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십시오.
내가 걸은 발자취를 따라 학회원이 꼭 생깁니다. 이것이 지용의 정의(定義)입니다.
반드시 각지, 각국에 있는 지용보살이 용출합니다. 그래서 내가 온 것입니다.
20년 후, 30년 후에 반드시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세계광포로 웅비할 인재를
만들고자 나는 지금 그 '호흡'을 아는 청년을 규합하고 있습니다."
국사 10만 결집에 그러한 의미가 있었음을 처음으로 알고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
10월 4일 오후 10시 25분, 이케다 회장 일행은 도쿄국제공항에서 유럽으로 가는
북극항로에 올랐다. 20일간에 걸친 방문이었다. 그동안 청년부는 맹세한
'10만 결집'을 향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청년부의 '10만 결집'. 그것은 종교사상 공전(空前)의 사건이었다.
'진심이 있는 청년' '투쟁하는 청년'이 10만명 모이면 사회가 바뀐다.
당시 정권을 지지하는 여당 활동운동원도 전국에서 10만명이었다.
한 청년부 수뇌는 이렇게 말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스승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위대한 인류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사제의 길을 관철하는 청년을 모을 수밖에 없다.'고 말이지요."
10월 23일 밤 11시, 이케다 회장 일행은 유럽방문의 마지막 방문국, 이탈리아를 출발해
북극항로로 도쿄국제공항에 도착했다. 20일 동안 유럽9개국을 순방하고
5개국에 조직을 만들어 유럽광포의 길을 열었다. 그와 같은 격무를 수행하고
역사적 위업을 달성한 이케다 회장을 기다리던 것은 다시 오사카사건 재판이었다.
하루도 쉴 수 없는 격투가 이어졌다.
재판은 드디어 최종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공판에서는 선거위반의 증거로 꾸민 경찰조서, 검찰조서의 진위가 초점이 되었다.
증인으로 이케다 회장을 조사한 주임검사가 출석했다. 이케다 회장은 제76차 공판에 이어
직접 주임검사를 심문했고 점차 진실을 밝혔다. 회장은 주임검사를 독촉했다.
"참고를 위해 꼭 들었으면 합니다." 이케다 회장이 구치소에서 나오는 날의 상황을
주임검사가 이렇게 증언했다. "아침부터 학회원 8000명이 중앙공회당에 모였고,
그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검찰청에 한꺼번에 몰려와 검찰청 복도가 새까맣게 될 정도였다.
그런데 피고가 한마디 명령을 내리자 잠깐 사이에 해산했다."
놀랄 정도로 사실무근한 날조였다. 이케다 회장은 주임검사에게 물었다.
"구름처럼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가 내가 신호하자 일제히 해산했다고 하는,
검찰청 조사에 엄청난 압력을 가한 듯이 증언하고 있는데 그것은 언제 있었던 일입니까?"
(공판조서) "당신이 석방되기 직전이었던 것 같습니다."(同)라고 답하는 주임검사에게
회장은 추궁했다. "내가 석방되기 직전이라는 것은 언제입니까?"(同)
"17일이지 않습니까."(同) 회장은 계속해서 물었다. "어디에서 몇명이나 왔다는 말인가요?"(同)
"정확한 인원은 나도 잘 모릅니다."(同) 그러자 회장은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내가 어디에서 신호를 했단 말입니까? 그와 같은 말을 ㅇㅇ검사나 그리고 ㅇㅇ검사도
단 한번도 증언한 적이 없습니다. 착각인지, 그렇지 않으면 거짓인지 둘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同) "그것은 사실입니다."(同)
주임검사는 아연실색하며 고작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누가 봐도 주임검사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진실은 가장 강력한 무기다. 정의로운 목소리가 바로 사악을 쳐부수는 보검이다.
다음날인 11월 1일, 제80차 공판이 열렸다.
마침내 이 자리에서 이케다 회장에게 진술하게 한 네통의 검찰조서는
"강요에 따른 자백이라는 의구심이 든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로 전부
기각되었다. 재판은 이케다 회장의 사실무근쪽으로 급진전하는 양상을 보였다.
'10만 결집'을 달성하는 제10회 남자부총회 4일 전이었다.
교토분실을 시찰한 이케다 회장은 현지 간부에게 지도했다.
"사흘 후에는 국립경기장에서 국사 10만명이 결집합니다. 나는(이케다 선생님) 이 모임을
학회의 영원한 승리를 여는 사제의 의식으로 하고자 합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100년,
학회 청년부가 출발하는 날이 옵니다!"
다음날인 11월 3일, 교토분실의 완공식이 열렸다.
여기에는 이케다 회장의 배려로 은사의 유족도 초청받았다. 교토분실의 준공식이
끝난 뒤, 이케다 회장은 분실의 뜰을 산책하고 은사의 유족과 기념촬영을 했다.
그때 회장은 유족에게 말했다. "드디어 모레, 도다 선생님이 유언하신
'국사 10만'을 결집하는 남자부총회를 개최합니다. 이것이 제가 참모실장으로서
해야 할 마지막 일입니다. (도다)선생님도 기뻐하시리라고 믿습니다."
11월 5일, 은사의 유언을 실현하는 맹세의 아침이 밝아왔다.
"30년 후에는 반드시 이 베를린장벽이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이케다 회장.
그 말대로 1989년 장벽은 무너졌다. (1961년 10월 8일, 독일)
사제승리를 위해!
창가의 대승리를 위해! (2008년 9월,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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