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ze=3>제자백가의 사회적 배경
춘추시대 말기부터 전국시대에 걸쳐 독창적인 사상을 지닌 많은 학자들이
출현하였다. 이들을 일컬어 제자백가(諸子百家)라 한다. 그 이전까지는 사상가라 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고, 개인적인 저서 또한 별로 없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기존의 봉건적 사회질서가 무너지면서 그 때까지 간부(官府)나 귀족이 독점하고 있던 학문과 지식이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상의 자유와 지식의 확대로 인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신분상승을
실현코자 하는 강력한 사회적 욕구가 분출될 수 있었다. 또한 학자를 우대하는 풍조를 들 수 있다. 전국시대 각국의 경쟁은 자연히
부국강병의 추진으로 이어지고, 이에 따라 능력있는 학자[士人]를 우대하는 풍조가 팽배하였다. 게다가 각국의 분립이 사상의 다양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국가권력이 강력하면 사상과 학문을 통제하기 쉬워 다양한 사상의 발달은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각 파의
학설이 쉽게 용인되었으며, 또 사실상 이것들을 모두 하나로 통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정치적 혼란이 도리어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제자백가의
분류
1. 사마담(司馬談)의 제자백가론
역사가들 중에서 제자백가의 분류를 맨 처음 시도한 인물은 사마천(司馬遷)의 부친 사마담(司馬談 :
∼B.C 110)이다. 사마천이《사기(史記)》의 마지막 부분에서 부친이 쓴 '육가(六家)의 요지'를 인용한 것을 보면, 사마담이 어떻게
제자백가를 분류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마담은 크게
음양가(陰陽家)·유가(儒家)·묵가(墨家)·명가(名家)·법가(法家)·도덕가(道德家)의 여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그 첫째로,
음양가(陰陽家)는 우주론자의 일파로서, 음(陰)과 양(陽)이라는 우주의 양대 원리가 화합과 상호작용에 의하며 만물이 생성된다고 믿는 유파이다.
사마담은 음양가를 비판하기를, '너무나 길흉의 조짐을 중시하고, 꺼리는 바가 많으며 사람들이 구속을 받아 움직이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 음양가들이 배정한 4계절의 순서는 가히 칭찬받을 만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둘째로 공자(孔子)가 창시한 유가(儒家)는,
사마담이 보기에 '너무 넓게 탐구하여 요점을 잘 파악하지 못하며, 힘은 많이 들이지만 그만큼의 공은 얻지 못하는' 학파이다.
그러나
군신부자(君臣父子)의 예절을 정하고 부부장유(夫婦長幼)의 차별을 구별해놓은 점은 높이 샀다. 셋째, 묵가(墨家)의 경우, '사람들이 따르기 힘들
정도로 너무도 검약한 생활을 강조하므로 그대로 다 따라갈 수 없는' 흠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생산을 중시하고 절용(節用)을 실천한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넷째, 도덕·인륜보다는 보다 확고한 법전(法典)에 기반하여 국가의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법가(法家)는
'인간에게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여 온정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장점은 군신상하(君臣上下)의 명분을 바로잡아 둔 데에 있다 할
수 있다. 다섯번째로 명(名)과 실(實)의 구분과 그 관계에 관심을 가졌던 명가(名家)는 그 때문에 '사람들이 명칭[名]의 속박을 받게끔 만들고
진실성을 잃게 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명칭과 사실의 관계를 확정짓고 논리성을 따졌다는 것까지 바꿔 버릴 수는 없다고 하였다.
마지막의 도덕가(道德家)는 도가(道家)를 지칭하는 것으로, 무(無)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형이상학과 사회철학에 관심을 기울인 쪽이다. 그들이
말하는 무(無)란 곧 도(道)를 지칭하며, 이 도(道)가 각 개체에 내재된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정신을 한군데로 전념케 하고 자연(自然)에 적응할 것을 주장한다. 그들의 방법은 음양가에 의한 천시운행(天時運行)의
규율을 장악하고, 유가와 묵가의 장점을 취하며, 명가와 법가의 요점을 흡수하고, 시간과 더불어 움직이고 사물에 따라 변화한다. 상규(常規)를
정립하고, 사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마땅하지 않는 데가 없다. 주지(主旨)는 간단하여 시행키 쉬우며, 힘은 덜 들이면서 얻는 공은 오히려
크다. 유가는 그렇지 않아서, 군주를 천하의 의표(儀表)로 생각하고, 군주가 위에서 창도하면 신하는 아래에서 부화(附和)할 뿐이며 군주가 앞서
가면 신하는 뒤따를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군주는 피로하지만 신하는 편안하다. 그러므로 도가는 대도(大道)의 요지를 주장함에 있어
먼저 과도한 선망을 제거하고 비뚤게 사용되는 총명을 배척한다. 만일 이러한 원칙을 버리고 단지 자신의 재능만을 믿는다면, 많은 정신과 기력을
허비하게 된다. 신체와 정신이 모두 혼란스러운데 천지와 같이 장구(長久)하기를 바라는 것은 좀처럼 들어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논평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사마담은 다른 학파들에 대해서는 장점과 함께 단점도 일일이 지적했지만 이 도덕가만은 예외로 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사마담 자신이
도가에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2. 유흠(劉歆)의 제자백가론
제자백가에 대한 분류를 시도한 두번째의 역사가는 전한(前漢) 말기의 유흠(劉歆 : B.C 46∼A.D
23)이었다. 그는 부친 유향(劉向)의 뒤를 이어 여러 전적(典籍)의 편목(篇目)을 분류하고 그 뜻을 기록하였으며, 전적들을 총망라하여 목록을
작성하였다. 그 목록은 바로《칠략(七略)》이라는 것으로, 후한(後漢)의 반고(班固)가《전한서(前漢書)》〈예문지(藝文志)〉의 기초사료로
사용하였다. 그에 따르면 유흠은 사마담이 분류해 놓은 것에 종횡가(縱橫家)·잡가(雜家)·농가(農家)·소설가(小說家)를 추가함으로써
제자백가를 모두 열가지 부류로 분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9가(家)만 주목해 볼 만하다 했으므로 여기서 소설가(小說家)는
그리 중시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유흠의 분류법이 지니는 특징은, '제자백가가 주왕실의 관직에서 비롯된 것
[諸子出於王官論]'이라는 시각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주대의 봉건제도가 붕괴되기 전까지 '관리와 교사의 구분은 없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국가의 어느 분야의 관리가 곧 그 분야에 관련된 학문의 전수자였다는 뜻이다. 당시의 관직은 세습제였으므로 관학(官學)만이 계승될
수 있었고 사학(私學)은 성립조차 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아무도 사학(私學)으로 어떠한 학문분야에서 강의할 수 없었으며, 국가의 관직을 지닌
이만이 강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설에 의하면 주왕실이 권위를 잃으매, 각 분야의 관리들이 실직하여 전국에 흩어져 개인적으로
특정분야의 지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요컨대 제자백가 각 학파의 유래는 바로 '교사와 관리의 분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흠의 이런 논리는 제자백가가 기존의 봉건제도라는 틀 속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사회전환기의 변화 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견해와는 상반된다.
봉건제도를 은주대의 주요한 사회적 특징으로 인식한다면, 유흠의 논리는 은주대를 미화·강조하는 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유향(劉向)·유흠(劉歆) 부자가 전한 말기 왕망(王莽)의 개혁정치에 어느 정도 연관있는 인물이라는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왕망은 고대 주(周)의
이상정치를 희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편 유흠의 제자백가에 대한 분석은 다음과 같은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주대의 관직과 학파를 연결짓고
있다. 첫째, 유가는 대체적으로 주관(周官)의 사도(司徒)출신이라고 한다. 여기서 사도(司徒)란 백성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이들은
군주를 도와 음양에 순응하고 백성을 교화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직책으로 삼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둘째, 도가는 대체로 사관(史官)출신이라고 한다.
성패·존망·화복 등 옛날과 오늘날의 도를 빠짐없이 기록한 다음 그 요점을 파악하여 근본을 삼았기 때문이다. 청허과욕(淸虛寡慾)으로 자기를
보양(保養)하고, 비하유약(卑下幼弱)으로 자신을 보호하니 이것이야말로 군주의 통치술이며, 이 학파의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셋째, 음양가의
장점은 상천(上天)에 순종하고 일월성숙(日月星宿)의 운행을 추산하여 천문을 보고 백성들에게 농사철을 일러주었다는 데 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희화(羲和)출신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희화(羲和)란 희씨(羲氏)와 화씨(和氏), 즉 상고시대에 천지사시(天地四時)를 관장하던 관리를 말한다.
넷째, 법가는 상벌을 엄격하게 밝힘으로써 법률을 정돈했다는 데 그 이점이 있는데, 대체로 옥송(獄訟)을 심리하는 법관벼슬인
이관(理官)출신이었다고 한다. 다섯째, 명가는 명칭을 바로 함으로써 직위와 그에 따른 예의를 순조로이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예의(禮儀)를
담당한 예관(禮官)출신이었다. 여섯째, 묵가는 종묘의 수위 출신이라고 한다. 그들은 거친 서까래로 지은 초가집에 살았으며, 검약을 귀히 여기고,
부형(父兄)을 봉양하였으며 겸애(兼愛)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현인을 존경하고 묘제를 지내며 부친을 존경하였으므로 귀신을 숭상하고, 사시(四時)에
따라 일을 진행함에 숙명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상동(上同)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 학파의 장점이다. 일곱째, 종횡가는 대체로 외교관
출신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실제에 비추어 일을 처리하는 데 매우 능했다. 여덟째, 잡가는 대체로 의관(議官)출신이어서, 유가·묵가·명가·법가의
학설을 한데 통합시켰다. 이들의 장점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이 모든 유파가 모두 다 구비되어 있어야 함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홉째,
농가는 농업을 관장하는 관리출신이었을 것이다. 그들 덕분에 백성들이 씨뿌리고 밭갈며, 누에치고 의식을 풍족히 할 수 있었다. 마지막 열번째의
소설가는 거리의 풍속을 기술하는 패관(稗官)출신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거리에서 들은 것, 길에서 말한 것 등을 채집하에 이야기를 엮으니, 그
속에서 백성들의 의견을 가려 들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분석을 살펴볼 때, 어떤 한 유파를 어떤 한 관직과 결부시키는 것이 경우에 따라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오류는 범하고 있으되, 제자백가의 기원을 정치적·사회적 상황에까지 연관시켜 찾아보고자
하는 의도 자체는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size=3>유가(儒家)
1. 공자(孔子)의 사상
| 공자의 중심사상은 인(仁), 즉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인내하고, 타인(他人)에 대해서는 차마 참지 |
| 그림 설명 |
| 그림 설명 |
color=#0099ff>2. 맹자(孟子)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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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순자(荀子)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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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ze=3>노자(老子)의 사상
1. 노자(老子)의 사상
| 노자는 천신(天神)을 부정하고, 천(天)이 도덕의 근원을 부여한다고 하는 전통적인 사고를 받아들이지 |
color=#0099ff>2. 장자(莊子)의 사상
노자의 학설을 가장 잘 계승하고 발전시킨 인물은
장자(莊子)이다. 보통 노자의 사상과 장자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노장사상'이라 하여 동일한 사상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자세히 살펴 보면 다른 점이
있다. 예를 들어, 노자는 정치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항상 천하를 다스리는 술(術)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장자는 그렇지 않아서 단지 개인의
'마음을 편히 하고 삶을 보존[安心立命)]'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다는 것, 또 노자는 정치의 술(術), 처세의 술(術)을 역설하기 위해
무(無)를 말했지만 장자는 지식이나 언론의 성격을 분석함으로써 그것들이 믿을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오히려 실천적으로
무아(無我)의 경지를 자기 자신에게 실현시켜 천지와 일체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장자는 노자의 도(道)를 보다 구체적이고 서술적으로
드러내었으며, 제도나 가치의 인위·한계성을 통찰하여 만물의 상대성·보편성·평등성을 파악하고, 그리하여 자연귀일(自然歸一), 즉
만물제일(萬物齊一)의 제물론(齊物論)을 주장한 사상가로 정리될 수 있겠다. 그리고 그의 안심입명(安心立命) 논리는 후대의 청담사상·은둔사상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size=3>법가(法家)의 사상
1. 한비자(韓非子) 이전의
법가(法家)사상
중국 역사상 '법(法)'은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예(禮)를 보완하는 것으로서 기능하여, 양자
사이에 커다란 대립은 없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으면서 법은 예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법가들은
대체로 실제적인 정치가로서 내외 정세를 법에 의한 정치로 대처하고자 하는 시도를 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기본토대는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이었다. 제(齊) 환공(桓公)을 도와 패업을 이룬 관중(管仲)이나, '형서(刑書)'를 만듦으로써 실정법을 공포한 정(鄭)의
자산(子産) 등에서부터, '법치(法治)'를 내세워 위(魏)에서 변법을 시행한 것으로 유명한 이회(李 ), 신료들을 통제·제어하는 '술(術)'을
강조한 한(韓)의 신불해(申不害), 그리고 신하가 군주에 복종하는 것은 군주의 세력이지 결코 그의 덕행이나 재능때문이 아니라고 하여
'세(勢)'를 강조한 신도(愼到), 그리고 진(秦) 효공(孝公)을 도와 2차 걸친 강력한 개혁을 단행하여 이후 진(秦)의 통일기반을 제공한
상앙(商 ) 역시 법가(法家)로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2.한비자(韓非子)의 사상
위의 여러 법가사상을 총망라하고 집대성한 이로서, 우리는 한비자(韓非子)를 들 수 있다. 전국시대 말기는 한창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시기였고, 그 현실적인 방안으로서 부국강병, 그리고 전쟁에 의한 합병이 중시되던 시기였다. 이런 때,
한비자는 기존의 여러 법가사상들, 즉 술(術)·세(勢)와 법(法)을 통합하여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배를 추구하였다. 법(法)과
술(術)·세(勢)를 통합했다는 것은 법치(法治)의 운영방법으로서 술치(術治)와 세치(勢治)를 병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민(民)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법(法)이 필요하고, 관리를 부리기 위해서는 술(術)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법(法)과 술(術), 그리고 세(勢)는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이라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법치(法治)의 기본은 철저하고 엄격한 상벌(賞罰)을 통해 '사적인 것을 배척하고 공적인 것을
이롭게[排私利公]'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한비자가 집대성한 법가사상은 이후 진시황(秦始皇)과 이사(李斯)에 의해 실현되어, 진(秦)이
춘추전국시대의 분열상황을 극복하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진왕조가 단명한 후 한대 이래 법가는 유가에 밀리게
된다. 그 이유는 '교화'나 '위민(爲民)'의 이상이 없다는 데 있다. 법치를 강조하고 있지만 법에 의한 통치의 정당성 또는 합리적 근거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난세를 극복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적합하나 안정 국면에 적용하기에는 부족하였던 것이다.)
size=3>묵가(墨家)
묵자(墨子)의
사상
묵가(墨家)를 제창한 묵자(墨子)는 일찍이 유가의 학설을 배웠으나, 유가의 형식주의와 불평등성에 반대하여
묵가를 세웠다. 예컨대 공자는 어리석은 군주라도 신하가 잘 보필하면 정치가 잘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 반면, 묵자는 왕위세습을 반대하고 훌륭한
인물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묵가에서는 또한 유가에서 중시하는 예의와 음악을 허례허식의 낭비로 배척하고, 부모의 삼년상 역시 같은
이유로 비난하였다. 그리고 유가의 가족제도 및 인간상호간의 특수한 관계를 중시한 차등적인 사랑[仁]에 반대하여, 인간이 자신을 사랑하듯 다른
사람을 평등애[兼愛]로 사랑할 때 사회의 평화가 온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유가가 내세관을 부정한 데 반해, 묵자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귀신을
모시는 제사가 현세에 축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다.
묵자는 또한 생산활동과 함께 절약[節用]을 강조하면서 정치의 임무를 역설하였는데,
국가부강·인구증가·정치의 공정함을 강조하고, '백성의 굶주림, 추위에 입을 것이 없는 것, 일하는 자가 쉴 곳이 없는 것'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묵가의 사상에는 권위주의적 경향이 강하여, 추종자에게 절대 복종을 요구하고 엄격한 훈련을 통해 교단을 강화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절대적인 겸애설과 공리주의, 지나친 금욕주의 등으로 점차 신망을 잃게 되어 차츰 그 힘을 잃어갔다. 결국 현실주의적이며 중용주의적인
중국인들의 성격이 비현실적인 묵가의 사상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유가의 차등애(差等愛)쪽을 선택한 것이다.
size=3>명가(名家)
혜시(惠施)와 공손룡(公孫龍)의 사상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제자백가의 사상 중에는 우주만물과 인간문제에 대한 광범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학파가
많다. 그런데 그와는 대조적으로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다룬 학파도 있으니, 논리를 구사하는 명가(名家)와 군사문제를 다룬 병가(兵家), 그리고
외교술을 내세운 종횡가(縱橫家)를 꼽을 수 있겠다.
그 중에서도 명가(名家)는 논리를 주제로 언어와 사물의 개념[名]과 사실[實]을
중시하였다. 본래 중국의 언어가 한 단어씩 끊어지는 고립어인지라, 어형(語形)의 변화도 없고 고정된 품사도 없다. 따라서 언어를 구사할 때
융통성과 직감에 의한 요소가 많으며, 그에 따라 논리적인 엄밀성이 크게 떨어지는 편이다. 즉 주로 비유·대우·연쇄·연상 등의 수법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적확한 추리로서 올바른 판단을 구하고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태도가 부족하였다. 이 때문에 통상적으로, 중국에서는 논리적
표현이 서툴렀으며, 철학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논리학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해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국시대, 사회적 격변과 특히 국가간의
외교, 사상논쟁 등의 격화로 논리학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명가 중에서 유명한 이로는 혜시(惠施)와 공손룡(公孫龍)을 손꼽을 수
있다. 혜시의 논제는《장자(莊子)》에서 소개되고 있는 소위 '역물십사(歷物十事)'이다. 즉 모든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 진리를 부정하고 오직
인간의 주관성에 의해 진리가 결정된다는 것으로, 예를 들면 하늘과 땅은 같은 높이에 있고 산과 연못도 같은 높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
공손룡은 '백마는 말이 아니다[白馬非馬]'라는 주장으로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백마는 말'이라 하지만, 제대로 따져 보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백마라는 개념의 범위는 좁고, 말이라는 범위는 넓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궤변론자들이다. 그러나 단순히 궤변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 혜시는 사물[實]의 상대성·가변성을, 그리고 공손룡은 명(名)의 절대적·불변적인 측면을 찾아냈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논리학의
발전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양가(陰陽家)
color=#0099ff>추연(鄒衍)의 사상
중국최초의 자연철학은《주역(周易)》에 나타나 있는
음양사상에서 비롯되고 있다. 선악(善惡)이 서로 대립·경쟁하는 외국의 사상과는 달리, 중국인의 자연관은 음양(陰陽)의 두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이 음양(陰陽)의 개념은 남자와 여자, 낮과 밤, 해와 달 등 자연과 인간의 현상을 분석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이러한 이원적인 개념
외에도, 음양가에서는 자연현상이 오행(五行 : 木·金·火·水·土)의 다양한 배합과 연속적인 순환에 의해 변화,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이 오행설을
주장한 이가 추연(鄒衍)이다. 그는 오행설로써 제왕의 운명을 가늠하고 그에 의하여 왕조교체의 원리와 인간의 길흉화복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음양설과 오행설은 각각 별도로 시작되었으나, 한대에 합쳐져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로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이 음양오행설은 초반에는 초자연적인
사고에서 탈피한다는 의미에서 합리성을 띠고 있었으나, 점차 정형화되면서 미신화할 우려가 높아졌다. 결국 인간의 의식을 속박하는 기제가 되었다는
뜻이다.
size=3>종횡가(縱橫家)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의 사상
종횡가는 정치적 책략으로써 전국시대 당시의 국제외교상에서 활약한 유세객(遊說客)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특히
소진(蘇秦)이나 장의(張儀)로 대표되는 합종연횡(合縱連衡)의 책략이 그 중심을 이루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
소진 등이 주장한 합종책이란
당시 동쪽에 있던 연(燕)·초(楚)·한(韓)·위(魏)·조(趙)·제(齊)의 6국이 연합하여 서방의 진(秦)나라에 대항하려고 한 정책이며, 장의가
내세운 연횡책(連衡策)이란 그 반대로 진나라와 6국이 각각 손을 잡게 함으로써 진나라의 발전을 꾀한 책략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언동은《전국책(戰國策)》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잡가(雜家)
color=#0099ff>1.《여씨춘추(呂氏春秋)》
전국시대 말기, 점차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중국의 사상계는 크게 두가지의 양상을 보이게 된다. 하나는 일체의 불순한 요소들을 배제함으로써 통일의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와
거꾸로 불순한 요소를 배제하지 않고 다양한 요소를 한데 합하여 목적을 이루려 하는 것이다. 제자백가를 과감하게 절충하고자 하는 이러한 경향은 각
학파 모두에서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며 잡가(雜家)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여씨춘추(呂氏春秋)》이다.
진(秦)의
여불위(呂不韋)에 의해 감수·편집된《여씨춘추》에서는 도가·음양오행가·소설가·묵가·법가·유가·명가·종횡가·농가 등의 사상을 각기 별개로
주장하면서도, 잡가 특유의 절충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각 유파의 사상을 절충함으로써 여불위가 얻고자 했던 것은, 천하를 통일할 군주의
독본(讀本)이었던 것 같다. 여러 사상들에서 필요한 부분을 뽑아 서로 융합시킴으로써 전국통일 및 정치에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의도는, 진시황(秦始皇)에 의해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color=#0099ff>2.《회남자(淮南子》
《여씨춘추》와 같은 잡가 계열의 저서인《회남자(淮南子)》는
소위 '우주와 인생의 백과전서'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전한 시대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여러 빈객들을 모아 편찬한 것으로,《여씨춘추》와
마찬가지로 제자백가의 주장을 다양한 비율로 교차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들을 통합하여 핵심을 이루는 것은 도가사상으로서, 황노(黃老)보다는
노장(老莊)에 가깝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노장사상이 상세히 설명되고 심화된 한편, 새로운 해석을 더하여 종래에 볼 수 없는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도가는 무위(無爲)라는 부정의 논리로써 기성문화를 거부하였지만,《회남자》는 무위(無爲)를 정치술로써 보았기 때문이다.
size=3>농가(農家)
농가는 농업을 중시하고 농경에 힘써서 의식(衣食)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농업경제와 농업기술에 대해서도 연구한 학파이다. 본래 농업은 인류사회에 있어 기본적인 산업이었기 때문에 오랜 옛날부터 그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예컨대 고대 중국의 문헌을 처음으로 정리하여 기록한《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의 제자략(諸子略)에는 농가에
대해서《신농(神農)》,《야로(野老)》등 농가 아홉 사람의 서(書) 114편을 기록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음양가(陰陽家)·복서가(卜筮家)의
서(書)인〈수술(數術)〉중에도《신농교전상토경종(神農敎田相土耕種)》,《소명자조종생어별(昭明子釣種生魚鼈)》,《종수장과상잠(種樹臧果相蠶)》등과 같이
농업기술을 기록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따라서 '농가(農家)'란 단순한 농업기술을 해설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상적인 바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인물로는《맹자(孟子)》에서 "신농(神農)의 말을 이룬 자"라고 소개한 허행이 있다. 그러나 이
사상 역시 진(秦)·한(漢)의 제국통일 이후로는 쇠퇴하였다.
동양사상에서의 제자백가의 중요성
제자백가는 중국사상사에서는 물론이고 동양사상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즉, 동양사상의 뿌리는
중국의 제자백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인데, 중국사상사의 시대구분에서 진(秦)을 분기점으로 하여 선진(先秦)시대인 춘추전국시대를 특히 중시하는
이유가 바로 제자백가에 의한 사상의 황금시대가 바로 이 때 이룩되었기 때문이다. 한대(漢代) 이후 중국의 사상은 불교사상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유가(儒家)사상의 재해석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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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前漢)시대에 유학이 관학(官學)으로 정착된 후 발달한
훈고학(訓 學)이나 당대(唐代)의《오경정의(五經正義》에 의한 유학사상의 획일적인 해석, 그리고 송대(宋代) 이후의 성리학(性理學)과
명대(明代)의 양명학(陽明學), 그리고 청대(淸代)의 고증학 등도 춘추전국시대의 유가(儒家)에 모두 그 학문적 근거를 두고 있고, 여기서
발전하여 동아시아 각국의 문화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노장사상에서 발전한 도교(道敎)와,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
의한 이원론적(二元論的) 자연관과 음양오행적 인식론도 모두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에 근거하여 발전한 것임을 감안할 때, 제자백가의 사상적 의미가
동아시아 문화상에서 매우 중요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점 외에도, 제자백가의 사상은 최초의 체계적인
학문의 성립을 가져왔으며, 그것도 국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적(私的)인 학문집단을 통해 발전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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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제자백가의 사상은 각기 관점을 달리 하고 자파의 학설을
명백하게 내세우고는 있으나, 대체로 인간의 내세문제에 대한 관심은 희박한 편이다. 이 부분은 이후의 중국사상사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제자백가는 한결같이 현세의 인간문제와 물질세계를 사색의 근본으로 삼아 이를 위해 인간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을 뿐, 결코 내세(來世)에
대해 강한 관심을 보이거나 혹은 혼란한 현실세계를 초탈하여 사후(死後)세계에서 위안을 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공자의 '삶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未知生 焉能死]'라는 그 한마디는 내세 즉 미래를 탐구하고 추구하는 목표지향적인 서구사상과는 다른, '지금 현재',
그리고 과정을 중시하는 동양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현재주의·과정중심주의란 흔히들 말하는 제자백가의
기본적인 성격, 즉 인간중심주의와 합리주의 와도 연관된다. 개인의 가치가 전체적인 목표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속에 함몰되어
버리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자백가가 중국사상 전체뿐만 아니라 동양사상의 원류라 할 수 있는 것은 유교·도교 등 각
유파의 학문적 기원이라는 점과 집단적인 사학(私學)의 시초라는 점 외에도, 그 이후 동양사상이 '인간'이 자아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겠다.
| 내용출처 : [인터넷] http://aped.snu.ac.kr/cyberedu/cyberedu2/kor/kor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