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도읍, 한양의 풍수적 입지(1)
한양의 풍수적 입지를 정하면서 주장하였던 내용들은 풍수를 공부함에 무척 유익할 것 같아 여기에 메모를 남긴다. 본 자료는 고제희 대동풍수지리학회장의 풍수지리교과서 제2권 한국의 산천편을 읽으면서 발쵀하였다.
1. 한양의 도읍지 천도
1) 지기쇠왕설
역성혁명을 한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긴다라고 주장하며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하고, 인심을 얻고자 천도를 계획함. 도선비기에 繼王者李而都放漢陽, 다음의 왕은 이씨이며, 한양에 도읍을 정한다라는 한양도읍설과 개성의 지기는 이미 쇠하였다. 개성은 신하가 임금을 폐하는 망국의 터이다라는 지기쇠왕설이 퍼짐
2) 신도안의 건설
- 1392년 권중화를 파견하여 국도의 후보지로 계룡산 아래 신도안을 물색함
- 1393년 2월 양주 회엄사에 들려 무학대사를 동반하고 계룡산에 도착, 형세와 규모를 관찰
- 1393년 3월 신도안의 공사를 착수. 권중화의 종묘, 사직, 궁전의 설계, 이양달의 지면의 형세 파악,
김사형의 땅 측량
- 1393년 12월 경기도 관찰사 하륜의 상소로 심효생을 보내어 신도안공사를 중단 시킴
* 하륜의 상소 이유
도읍은 마땅이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 있어 동면, 서면, 북면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고 계룡산의 산은 건방에서 오고 물은 손방으로 흘러간다 하니 이곳은 송의 호순신이 이른바 물이 장생을 파하여 쇠패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으로는 적당치 못하다고 상소함
3) 한양 천도론
- 1394년 음양산정도감을 설치하여 권중화, 정도전, 석성린, 남은, 하륜 등 여러 신하와 더불어 서운관원(왕실의 풍수가) 과 함께 풍수지리서를 섭렵케 하고 새 도읍지를 선정토록 함
- 지리신법에 따라 신도안의 공사를 중지시킨 하륜은 새 도읍지 후보로 모악의 남쪽(현재 신촌 연희동 일대)를 추천하였으나 정도전, 석성린, 정총은 명당의 형국이 좁다고 반대함
. 정도전 ; 모악의 남쪽 땅은 한 나라의 중앙이고, 교통은 편리 하지만 땅이 계곡 사이에 있다. 안으로 조시종묘를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
. 성석린 ; 산수가 만나고 배가 다닐 수 있는 길지라도 명당이 기울고 협소하며, 뒷산이 낮고, 그 규모가 도읍으로 부적당하다.
. 정총 ; 명당이 매우 협소하며 주산이 낮고 빠져 있어서 수구가 관쇄되지 못했다. 또 이 땅이 길지였다면 어째서 옛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았던가? 새도읍지를 구하려면 아주 먼 곳에서 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하륜 ; 모악의 명당은 비록 좁은 것은 사실이나 송도의 강안전(만월대 부근), 평양의 장락궁터에 비하면 오히려 넓다. 이곳은 고려의 秘錄이나 중국의 풍수법에 맞고 나라를 복 되게 하고 계림(신라의 수도)과 평양(고구려의 수도)의 궁궐지에 비하면 넓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중앙에 있고, 배로 물건을 나를 수 있고 山河表裡의 지세이며, 또 동양의 성현이 전한 密設과도 일치하고, 풍수서의 山水朝聚의 형세와도 흡사하다. 이 땅을 두고 다른 땅을 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함
이에 태조는 권중화, 정도전, 심덕부 등을 한양에 파견해 궁궐, 종묘, 조시, 도로의 터를 정하도록 했고 공사가 시작되기전에 객사를 임시 별궁으로 하여 1394년 재위 3년만에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2. 경복궁 입지론
1) 궁궐터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모악과 남경을 실제 답사후 남경의 이궁이 있던 터가 국도로서 적합한지를 물었는데 윤신달은 개성이 제일이고 남경은 그 다음이라고 하였다.
. 윤신달 ; 건방이 낮고 명당수(청계천)가 말라 흉하다.
. 태조 이성계 ; 송도도 부족한 점이 많다. 이곳을 살펴보니 형세가 왕도로서 손색이 없으며, 배로 물건을 날을 수 있고, 마을 길도 균등해
사람의 일이 편리 할 것이다.
. 무학대사 ; 이곳은 아름답고 높은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중앙이 평탄해 도읍지로 적합한 땅이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태조의 굳은 결심을 알고 이구동성으로 천도할 바에는 이곳이 가장 적당한 곳이라 하여 경복궁을 궁궐터로 잡게 됨
2) 왕십리 전설
무학대사와 함께 한양을 찾아 온 조선의 태조는 궁궐터를 찾다가 지금의 왕십리에 당도하였다. 청계천이 합류하는 곳에 멈춘 뒤 도읍이 될 만한 땅을 찾았다. 북악산과 남산 사이에 상당히 넓은 명당을 발견하고, 그곳이 왕도로 좋은 터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디에 궁터를 정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 때 한 할멈이 나타나 이곳에서 십리를 더 간 곳이 좋다라고 일러 준 뒤 사라졌다. 두 사람은 신의 계시라고 믿고 북악산 기슭에 궁궐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3) 경복궁의 주산과 좌향
- 무학대사 ;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인왕산에서 남산까지 이어진 산줄기를 백호, 북악산으로 이어진 산세를 청룡으로 삼는 유좌묘향으로 경복궁을 놓아야 한다고 주장
- 정도전 ; 군주는 남면해 정사를 보았고, 아직 동면해 조정에 임한 자를 듣지 못했다. 따라서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고, 인왕산을 백호, 낙산을 청룡, 남산을 안산으로 삼는 임좌병향이어야 한다
- 무학대사 ; 나의 말에 귀를 귀울이지 않으면 2백년 후에 내 말이 헛되지 않음을 깨달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의 의상대사는 산수비기에서 도읍의 터를 택할 사람이 스님의 말을 들으면 국운의 연장을 바랄 수 있으나, 만약 정씨가 나와 시비를 걸면 5대가 되지 못해 찬탈을 당하고 2백년 내외에 외란의 재앙을 입는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 태종 때 형제간의 골육상잔이 벌어졌고, 세조가 왕위를 찬탈했으며,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4) 도읍의 축성
한양은 궁궐보다 도성을 먼저 쌓았다. 무학대사가 궁궐을 짖기 위하여 기둥을 세우는데 곧 넘어져 버렸다. 기둥 하나를 세우는데도 무척 힘이 들었다. 그런데 늙은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는데 소가 말을 듣지 않자 농부가 소에게 " 이 종 잡을 수 없는 놈아! 너의 심술궂기는 무학과 같다" 고 하였다. 무학은 농부에게 기둥을 세우는 것에 대해 가르침을 구했다. 그러자 농부는 " 한양의 산천지세는 학이 날개를 편 형상이고, 이곳은 학의 등에 해당한다. 따라서 여기에 건물을 세우려면 학의 날개를 누른 다음에 세워야 한다. 학의 날개를 그대로 둔 채 등에 기둥을 세우려 하니 그것이 넘어 지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따라 도성을 쌓고 그 다음에 궁궐을 세웠더니 공사가 잘 진행되었다. 이것은 남산에서 본 경복궁의 뒷산이 마치 학의 날개를 편 형상과 같아 보여 유래된 전설이다.
한양의 도성은 20만명의 인부를 투입해 그 길이가 9, 975이고, 높이는 28척이며, 8개의 대문을 가진 웅장한 규모로 건설되었다.
한양의 성문 ; 4대문 -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
4소문 - 창의문, 광화문, 혜화문, 소의문
서울의 유래 ; 한양은 궁궐을 쌓는 것 보다 도성을 먼저 쌓았는데 어느날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아침이 되니 눈이 산마루를 따라 하나의 선을 그었다. 선 밖에는 눈이 쌓였는데 그 안쪽에는 눈이 없었다. 이태조는 이것은 하늘의 계시라고 믿고서 눈이 쌓인 선을 따라서 도성를 쌓았다. 그 결과 한양은 설(雪)
이 울타린 친 도성이란 뜻에서 "설울"이라고 불렸고, 이것이 오늘날 서울이란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3. 한양의 산세와 수세
1) 조종산의 내력
경복궁은 북한산에서 분기해 솟은 북악산의 남쪽 산 기슭에 자리를 잡았으니, 한양의 지세를 이룬 조종산은 백두산이 태조산이고, 분수령이 중조산이며, 북한산이 소조산이고, 북악산이 주산이자 진산이다.
2) 한양의 산천
북쪽의 북악산을 현무(주산)로 삼고, 서쪽의 인왕산을 우백호, 동쪽의 낙산을 좌청룡을 삼은 뒤 남쪽의 남산과 그 뒤의 관악산을 주작으로 삼았다. 그 결과 한양은 전후좌우에서 사신사를 고루 갖춘 풍수적 길지가 되고, 남산은 도성으로 불어 오는 한강의 세찬 바람을 막아주는 안산의 역활을 담당한다.
- 주산은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에서 뻗은 지맥, 개화되기 전의 모란꽃 봉우리 또는 학이 날개를 핀 형상
- 한양은 북악산과 그 산에서 좌우로 가지 친 산줄기가 둥글게 껴안은 안쪽에 자리를 잡음
- 북안산에서 출맥해 자하문 터널을 지나 용맥은 몸을 재차 남서진하여 인왕산으로 솟고, 숭례문에서 몸을 낮추었다가 다시 남산으로 솟구쳤다. 남산은 한양의 안산으로 서울 중앙부가 산들에 의해 둥글게 둘러 싸였다.
- 좌우 양측의 청룡과 백호를 살피면 우측 산줄기인 백호가 웅장하면서도 길고, 좌측 산줄기인 청룡은 왜소하고 짧다. 청룡은 장남을 뜻하기 때문에 조선왕조는 산천지세가 장남이 번성하지 못할 땅으로 여겼다.
- 한양은 백호가 팔을 길게 뻗어 껴안은 듯한 우선국으로 도성안쪽의 내당수인 청계천이 서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외수인 한강은 멀리 북동방에서 흘러와 남산의 남쪽을 감고 돌아 서쪽으로 흘러가는데 내당수와 역행으로 흘러 도성안에 생기가 응집할 조건을 만들어 준다.
- 또한 청계천은 북악산과 인왕산의 사이의 계곡에서 발원해 도성의 중심을 북방에서 남동방으로 가로 지르며 흐르는데, 남산의 여러 계곡물을 받아 들인 뒤 중랑천을 거쳐 한강에 유입된다. 청계천은 궁궐의 앞쪽을 흐르는 명당수가 되고, 한강은 암공수가 되어 도성내에 기가 응집되도록 도와준다.
3) 옥녀직금형의 명당
- 한양의 안산인 남산은 그 모양이 누에머리를 닮은 잠두형이다. 이런 잠두를 안산으로 삼은 경우 누에는 고치를 만들고 옥녀는 고치에서 실을 뽑은 뒤 베틀에 올려 비단을 짤 것이다. 그러므로 누에머리를 안산으로 삼은 경복궁은 풍수상 옥녀가 베틀에 앉아 비단을 짜는 옥녀직금형의 명당에 해당한다.
- 옥녀직금형의 터에는 실에 물을 뿜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오른쪽에 침사수가 있어야 한다. 만약 물이 없다면 우물을 파야 지덕이 발동한다고 한다. 남산아래에 남지란 못을 판 것은 산천의 지덕을 발동시키기 위함이었다.
4. 한양산천의 풍수적 약점
1) 진곤저허의 지세
경복궁에서 보면 청룡인 동쪽(진)의 낙타산이 낮고 인왕산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남서방(곤) 쪽의 백호가 낮아 소위 진곤저허의 형세를 이룬다. 여기서 낙산이 낮은 이유는 도성 안에서 생긴 바람과 물이 모두 그 방위로 빠져 나가니 청계천으로 인해 산이 깍여 나간 결과이다. 남서방이 낮은 이유는 인왕산에서 남진한 용맥이 남산으로 솟기 위하여 스스로 몸을 낮추고 움츠린 고개마루이기 때문이다. 즉 용맥을 타고 흐르던 지기가 기를 가다듬고 힘차게 뿜어내는 과협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수지리적으로 낮은 곳을 허라고 하고, 허한 곳을 외적이 침범할 염려가 있어 꺼리는데 인진왜란은 선조 25년 왜군에게 동쪽을 통하여 함락을 당했고, 병자호란은 인조14년(1636) 청의 조공을 거절하자 남서방을 통해 침략했는데 싸워보지도 못하고 함락되고 말았다,
2) 관악산의 화기
관악산은 남산 너머에서 경복궁을 조응하는 조산인데, 일찍이 무학대사는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아 남향으로 경복궁을 지으면 정면의 관악산이 궁궐을 위협하니 그로 인해 외우내환이 잦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관악산의 형상은 화기를 품은 화산이고 그 기운이 한강을 건너 궁궐에 전달될 염려가 컸기 때문이다. 풍수지리는 보이지 않는 살기는 관계치 않으나 보이는 살기는 해가 된다. 는 원리에 따라 관악산이 비록 한강 너머의 먼 곳에 있지만, 경복궁에서 그 산이 바라보이기 때문에 실하지 못하다고 판단한다. 역사적으로 경복궁은 화재가 자주 일어났다.
3) 북악산의 동산
진산은 국도 즉 수도에 지기를 공급하고 수호하는 산으로서 지기는 산줄기를 따라 흐르기 때문에 국도의 뒷쪽에는 진산이 꼭 있어야 한다. 만약 진산이 없으면 늙은 거목을 당산목으로 삼아 하늘의 가호를 받고자 했다. 북악산은 경복궁의 진산인데, 암반이 밖으로 드러난 童山이라 마치 머리에 부스럼이 났거나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생기롭지 못하다. 이러한 동산은 흙이 두텁지 못하여 기가 쇠약한 산이고, 그곳에서 뻗어 내린 내룡 역시 지기가 왕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4) 청계천의 건수
내룡을 타고 흐르는 지기는 물을 만나야 생기를 응집하는데, 북악산에서 경복궁으로 흘러내린 정기는 청계천을 만나 기를 응집한다. 그렇지만 산과 물은 서로 음양의 조화를 추구하니 물의 양이 크면 음인 산의 지기도 크고, 물이 적으면 산도 적은 것이다. 청계천은 경복궁에서 보아 물의 근원이 매우 가깝고 또 안반으로 이루어져 물의 저장능력이 부족한 북악산과 안왕산에서 발원한 계류라서 수량이 풍족하지 못하다. 따라서 청계천을 맞이한 도성안쪽도 지기가 왕성하고 크다고 보기 어렵다.
5. 한양산천의 풍수적 비보
1) 흥인지문
도성의 동쪽이 낮고 허술해 한양이 임진왜란 때 함락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이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동쪽으로 산과 성을 높게 쌓는 대시 문 이름에 갈지(之) 를 넣어 흥인문을 흥인지문이라고 하여 갈 之자를 대문의 이름에 보태어 지세의 허약함을 비보하였다.
2) 창의문
창의문은 경복궁에서 보아 북서방에 위치한 낮은 고개위에 설치한 문으로 북문 또는 자하문이라 부른다.그런데 1416년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이 문의 통행이 궁궐과 왕조에게 불리하다고 하여 대문을 걸어 잠근채 일반백성들의 통행을 금지하였다.이것은 성문밖의 산세가 흡사 지네를 닮았는데, 이 지네의 독기가 성문을 넘어 궁궐로 살기를 뿜어 대어 이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06냔 이문의 통행을 재개하였는데 지네의 천적인 닭 상을 조각해 지네의 독기가 창의문을 넘어가는 것을 닭이 쪼아 먹게 비보하였다.
3) 숭례문
한양의 도성에 성치된 8개의 문에는 역법의 팔괘를 본 떠 정도전이 문액을 써 붙였다. 남쪽의 대문은 숭례문인데 숭례의 예를 오행에 해당시키면 화이고 화의 방위는 남방이기 때문에 남쪽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성문의 문액만이 세로로 써 달았는데 이것은 숭례의 두 글자가 화의 염상을 상징하는 바, 궁궐에 직면하는 관악산의 화기에 대항키 위한 풍수적 염승읜 셈이었다.
4) 해태상
서울의 광화문 양쪽에 서 있는 괴이한 석수는 본래 해치인데 세간에서는 흔히 해태라고 부른다. 어느 것이나 빛나는 눈으로 남쪽에 솟아 있는 관악산을 노려보고 있다. 그것은 관악산이 화산모양을 하고 있어 이 산과 직면한 경복궁이 자주 화재를 당한다는 말에 따라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정문 앞에 물의 신인 해태를 설치해 화기를 퇴치하고 자였다.
5) 남지
남지는 조선초부터 숭례문 밖에 있던 못이다. 한명회는 한양에 정도 할 때에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고자 남지를 팠으나 불이 끊이질 않은 것은 그 못이 메워진 탓이다라며 못을 복구할 것을 상소했다. 그러나 이 못을 복구하면 남인이 번성하다는 속설로 당쟁의 와중에 다시 못이 메어 졌다.
6. 한국의 수도, 서울의 풍수적 입지
1) 서울의 지맥
서울의 강북은 분수령을 태조산으로 하여 백두대간에서 분기한 정맥이 대성산-> 용임산을 거쳐 북한산으로 솟고, 이 산에서 남서진한 용맥이 남쪽의 한강을 만나 지기를 응집한 땅이다. 하지만 강남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분기한 한남정맥이 칠현산->광교산을 거쳐 관악산으로 솟고, 이 산에서 북동진한 용맥이 북쪽의 한강을 만나 지기를 응집한 땅이다.
강북 땅은 크게 창릉천과 중랑천에 의해 남북으로 경기도와 경계를 지으며 청계천에 의해 도성내의 지맥이 동서로 나뉜다.
- 강북의 중구, 종로, 서대문, 마포, 용산구의 지맥은 모두 북악산을 소조산으로 삼으며
- 성북, 도봉, 강북, 은평구는 북한산을 소조산으로 삼는데 중랑천의 동쪽인 노원, 중랑, 광진구는 수락산이 소조산이다.
그리고 강남 땅은 크게 안양천과 탄천에 의해 지맥이 남북으로 갈리고 경기도와 경계를 삼는다.
- 강남의 서초, 강남, 관악, 동작, 영등포, 금천구는 모두 관악산을 소조산으로 삼으며
- 송파, 강동구는 청량산(남한산성)을 소조산으로 삼는데
- 안양천 서쪽의 구로, 양천, 강서구는 군포의 수리산이 소조산이다.
2) 서울의 산천
(1) 산야 ; 북쪽의 북한산을 현무로 삼고, 동쪽의 응봉을 좌청룡 서쪽의 인왕산을 우백호로 삼은 뒤 남쪽의 관악산을 주작으로 삼았고 중심에는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 형세이다. 북쪽은 북한산에서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험준한 형세로 병풍을 둘러쳤고, 동쪽에는 수락산에서 불암산을 거쳐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이 웅장한 형세라 튼튼히 보인다. 또한 남쪽은 관악산에서 우면사능로 이어지는 산 능선과 청계산에서 인릉산-> 대모산으로 이어지는 높은 준령이 요세적 형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서울의 서쪽은 한강이 흘러 나가는 방위라 낮은 그릉과 평지를 이루어 지세가 낮고 허하다. 따라서 서울의 산야는 북, 동, 남쪽이 산으로 에워싸인 가운데 남서쪽 곤방과 서쪽 태방이 낮으며 넓게 트인 곤태저허의 형세이다.
(2) 하천 ; 멀리 동쪽에서 흘러 온 한강은 서울의 동쪽에서 중랑천과 탄천이 북쪽과 남쪽에서 유입되고, 서쪽에선 창릉천과 안양천이 북쪽과 남쪽에서 유입되는 안쪽에 서울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서울의 중심을 통과하는 한강은 금성수와 반궁수의 형태를 취하는데, 강북의 경우 광진구 자양동, 용산구 동부이촌동, 강남은 강동구 암사동, 강남구 압구정동이 한강을 금성수로 맞이해 길하다.
이와 반대로 강북의 성동구 금호 옥수동, 강남의 송파구 잠실동, 서초구 반포동은 한강물을 반궁수로 맞이해 바람과 홍수의 피해가 심했던 곳이고 또 중랑천과 탄천은 한강이 반궁수로 휘돌아 흐르는 금호동과 잠실동에서 한강에 유입되니 홍수가 심할 때면 하천이 역류하기 때문에 두 지역은 침수의 패해가 많았던 곳이다.
3) 여의도
여의도는 한강의 모래가 쌓여 형성된 섬인 독산이라 지기가 쇠약한 터이다. 따라서 행정상으로는 서울에 속하지만 지맥상으로는 한반도 지맥이 아닌 이국의 땅에 해당한다. 그래서 여의도는 쓸모가 없어 너나 가지라는 뜻을 가졌는데 지금은 한국의 맨하탄이라고 불릴만큼 금융, 정치 그리고 방송의 중추적 역활을 담당하는 기관이 많이 들어 서고 있다. 이곳은 새롭게 연구하여야 과제의 대상이다.
4) 행주형의 명당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한 한강은 서울의 중심을 완만한 유속으로 관통하면서 탄천, 중랑천 등을 합쳐 복서쪽의 서해로 흘러간다. 이처럼 물이 모여 시가지 중심을 통과하면 풍수지리는 항구에 정박한 배가 이제 막 출항아려는 행주형 이라 부르고, 재화와 사람이 풍성히 모여 번창할 땅이라고 한다. 행주형의 터는 도읍의 입지로서 제일로 꼽는다. (전통적 행주형 ; 서울, 평양, 청주, 남원)
그 결과 서울의 풍수적 형국은 도성내의 국세만을 판단한 한양의 옥녀직금형에서 한강을 중앙에 두고 강북과 강남을 포괄하는 행주형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을 서울의 지기가 왕족과 고관대작을 배출하는 터에서 벗어나 수 많은 인재와 재물이 함께 모여들 터로 변했음을 의미한다.
* 자료원 ; 대동풍수지리학회 고제희 학회장의 전통적 주거입지론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