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동(良才洞) 지명 유래
필자가 살고 있는 서울 서초구 양재동은 조선조 때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이 있었던 곳으로 종6품 찰방이 있어 그 밑에 12개의 작은 역을 두고 관원에게 말과 숙소를 제공했던 곳이다. 양재역을 말죽거리라고도 하였는데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도성을 침범하자 인조는 황황히 한양을 빠져 나와 충청도 공주로 피난케 되었다. 도성을 벗어난 임금 일행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허기와 갈증에 지쳐 있었다. 그러자 이곳에 사는 유생들이 급히 팥죽을 쑤어 바치니 임금은 말에서 내릴 틈도 없이 말 위에서 죽을 먹고 부랴부랴 떠났다 해서 말죽거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 이야기는 한양 도성에서 이곳까지는 한나절 거리로 지방에서 한양에 도달하려면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말의 먹이인 말죽을 먹이는 곳이라 해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양재동(良才洞)이라는 지명은 어질고 재주 있는 선비들이 많이 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재동은 조선 명종 때 벽서사건으로 유명한 곳이다. 인종이 갑자기 죽고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그 모친인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하여 정권을 잡아 나라를 다스렸다. 그래서 이로 인한 폐단도 많았는데 이곳 양재역 벽에 붉은 글씨로 "여자가 임금 위에 있고 간신이 그 아래서 국권을 농락하니 어찌 한심치 아니하랴!"라는 글이 붙어 있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문정왕후는 대로하여 여러 선비를 잡아죽이고 당대의 명현 수십 명을 귀양 보내는 등 이른바 정미사화를 일으켰다. 이것을 역사는 `양재역 벽서사옥`이라고 하였다.
이하는 지명과 관련된 참조사항입니다.
강남구 신사동
한강변에 있던 이 지역 부락 새말(新村)과 사평리(沙坪理)의 이름에서 각각 따와 신사리(新沙理)라 한데서 연유
강남구 개포동
이 지역에 갯벌이 있다하여 "갯펄"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개패"또는 한자명으로 개포
강남구 대치동
원래 자연부락 7~8개 마을 중 큰 고개 밑에 있는 한티(또는 한터) 마을을 한자 명으로 대치
강남구 일원동
옛날 이 마을에 일원이라는 서원(書院)이 있었으므로 일원 또는 일언이라 한데서 연유하고, 이 근처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므로 본동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이 마을의 사방이 대모산에 가리워져 [숨어져 있는 마을]또는 [편안한 마을]이라 해서 일원동 이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강남구 도곡동
이 마을 뒤의 매봉산과 물 아래쪽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어 독부리라 하던 것이 독구리, 독골이 되었다가 도곡으로 변하였다 한다. 어떤 이는 동네 주변 밭에 그릇 깨진 것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이 마을에 큰 도요(그릇 굽는 가마)가 있어서 흔히들 독골(독, 옹기,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는 마을)로 불려 왔을 것으로 짐작하여 마을의 유래를 살려서 이름을 붙인다면 道谷洞이 아닌 陶谷洞으로 해야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강남구 수서동
서쪽에 한강물이 흐른다 하여 수서
강남구 포이동 (浦二洞)
이 마을에 큰 물이 지면 한강물이 들어와 갯펄이 되므로 그 뜻을 따서 포이리라 했던 데서 연유
강남구 청담동
청담동 105번지 일대에 옛날에 맑은 못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
강남구 역삼동
조선시대 역촌이었던 말죽거리, 웃방아다리, 아랫방아다리 세마을을 합쳐 역삼리라 한데서 비롯
강남구 세곡동
세곡동 동명은 1914년 행정 구역을 조정하면서 옛날의 자연 부락 명칭인 세천리와 은곡동의「세」자와 「곡」자를 각각 따서 제정한 것
강남구 삼성동
삼성동은 봉은사 무동도 닥점의 세 마을을 병합하여 삼성리라 명명한데서 연유한다.
조선시대 삼성동의 자연부락은 닥점, 무동도, 학당동, 배곶이 마을 등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닥점은 무동도쪽에 있던 마을로 이 마을에는 닥을 파는 상점이 있었기 때문에 얻어진 이름이다. 무동도는 일명 저자도, 또는 압도라고도 하였는데 이 마을 동쪽 한강 가운데 있던 섬으로 옛날 이곳에 닥나무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저자도라고 하였으며, 무동도는 이 섬 남쪽에 어린아이처럼 생긴 바위가 마치 춤추는 모습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배곶이 마을은 무동도 건너편에 있던 마을로 지금의 잠실인 부리도에서 무동도로 건너오는 나룻배가 이 곳을 거쳐 다녔으므로 배곶이 또는 배꿎이 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학당동은 현재 선릉이 있는 131번지의 골짜기에 있던 마을로 조선시대에 서당이 있어 불리워진 이름이라고 한다.
강남구 압구정동
한명회(1415~1487)가 지은 압구정이라는 정자
강남구 한여울
한여울이란 지명은 한강이 이곳에 이르러 큰 여울을 이룬다는데에서 비롯 (여울은 탄, 천의 의미)
강남구 말죽거리
말죽거리라고 칭하게 된 내력은 옛날 제주도에서 올려보낸 말을 한양으로 보내기 전에 이 곳에서 최종적으로 손질하고 말죽을 쑤어 먹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남구 학여울
학여울이란 탄천과 양재천이 만나는 한강 갈대밭 부근의 옛 지명으로, 조선시대 대동여지도에는 학탄(鶴灘)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남구 학동
학동은 마을모양이 학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학실, 학곡, 학곡동으로 지칭되었다
강남구 용오동
학동근린공원의 지형은 용이 꿈틀거리며 등천하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용요봉으로 부르던 곳이다.
서초구 서초동
옛날 이곳에 서리풀이 무성하여 붙여진 동명으로 일명 상초리, 서리풀이라고도 칭하였다
서초구 잠원동
잠원동이란 동명도 양잠과 관련있다. 원래 잠실리라 불리던 것이 서울로 편입될 때 송파구의 잠실과 구분하기 위하여 잠실리의 「잠」자와 인근 신동면 신원리의 「원」자를 따서 잠원동이라 부르게 된것이다. 인근지역은 뽕나무밭이어서 뽕 나무 묘목을 재배하고 양잠을 치는 농가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한강변에 이 지역이 위치하고 있어 뱃사람 또한 많았다
서초구 원단동
원단동 이란 마을 위치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풍수 설에 따라 남산의 누에를 먹이기 위한 뽕나무를 마을에 많이 심었고, 세조가 이곳에 원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서초구 반포동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하여 '서릿개'. 즉 반포라 부르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이곳이 홍수피해를 입는 상습침수 지역으로 반포라고 불렀다 한다.
서초구 방배동
방배동 '우면산을 등지고 있는 고을'이라는 설과 이 동자체가 '한강을 등진 모서리'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세조의 큰 형인 양녕대군이 세자자리를 세종에게 넘겨주고 전국을 돌아다닐 때 자신의 왕위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한강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갔다 하여 방배동이라는 설도 있다.
서초구 남태령
우리나라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여시골(엽시골), 즉 여우고개라 불리는 고개가 흔하게 널려 있다. 이는 예전에는 그만큼 인적이 드물고 산세가 험해 여우의 출몰이 심했던 까닭이었다.
한양에서도 인근 경기도로 나가는 관문에는 곳곳에 여우고개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여우고개는 다름아닌 오늘날의 남태령이었다. 남태령은 서울과 과천의 경계로 관악산과 우면산 사이의 고개이다.
18세기 말 효성이 극진했던 정조는 수원에 있는 선친사도세자의 능을 자주 참배하러 다녔었는데, 어느날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다 "이 고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남태령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에 그를 시기하던 이가 "이 고개 이름은 본디 여우고개로 불리는데, 왜 거짓말을 아뢰느냐'고 힐책하자 이방 변씨가 "이 고개 이름은 본래 여우고개이나 신하로서 임금께 여우고개와 같은 상스러운 말을 여쭐 수가 없어 서울에서 남쪽으로 맨 처음 큰 고개이기에 남태령이라 했습니다."하고 아뢰니 정조가 이를 칭찬했다고 한다. 그 후 이 고개를 여우고개에서 남태령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초구 내곡동
옛 언주면의 일부로 본촌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안골, 안말로 불리던 것을 한자명으로 내곡이라 부르게 된 것이 동명의 유래인데, 일명 양지말이라고도 칭한다.
서초구 염곡동
이곳 지형이 염통과 같이 생겼으므로 염통골 또는 한자명으로 염통곡, 염곡동이라 하였다
서초구 신원동
조선시대 공용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개 위해 역과 함께 각 요로에 설치되었던 원의 터 아래쪽에 새로 조성된 마을로 "새원" 이라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신원동이라 한 것이다.
서초구 우면동
산모양이 소가 졸고 있는 형태의 산이라하여 불려온 우면산 기슭에 있으므로 붙여진 동명이다
서초구 양재동
양재동은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이 산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7호선 역명을 중심으로
마들역
예전 상계동에 역참기지가 있어 말들을 들에 놓아 키웠기 때문에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과
상계동 일대가 삼밭이어서 순우리말인 마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노원역
조선시대 육상교통의 수단인 역점으로서 노원역이 있었다. 예전에는 이곳에 갈대만 무성하고 인가가 없어서 행인이 몹시 곤란을 당하여 나라에서 원을 세워 노원이라 하였다.
상계, 중계, 하계역
자연부락들이 도봉구의 중앙을 흐르는 한내(漢川)의 위, 중간, 아래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공릉동
1963.1.1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서 서울시로 편입될 당시 서쪽에 공덕리, 동쪽에 태릉,
강릉이 있었는데 주민들의 합의에 의하여 공덕리의 孔자와 태릉의 陵자를 따서 공릉동이라는 지명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먹골역 (묵동)
먹골은 조선시대 먹을 제조하여 붙여진 묵동이라는 이름을 순수한 우리말로 표기한 것이라고도 하며
중화동
중화동은 예로부터 봉화산 아래 자연부락의 하나인 가운데 마을(中里)과 아랫마을(下里)의 글자를 따서 중하리로 칭한데서 비롯되었다
상봉(上鳳)동
상봉동은 조선시대부터 유래하는 上里와 鳳凰洞의 자연부락을 통합하여 上里의 上자와鳳凰洞의 鳳자를 따서 上鳳里라고 붙인데서 유래한다.
면목(面牧)동
면목은 조선시대 이곳에 말목장이 위치한다하여 지명
사가정
아차산 벌판에 거주했던 조선시대의 학자인 서거정(세종 2년∼성종19년)의 호를 따서 사가정길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중곡동
동네가 능말(능동)과 면목동의 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므로 "가운데말", "간데말" 또는 한자음으로 "중곡"이라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군자동
옛날 어느 왕의 일행이 거동하다가 마침 이곳 남일 농장터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날밤 동행하던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으므로 이곳을 군자동이라 하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이곳을 명리궁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논현동
논고개라는 고개의 지명을 본떠서 만들어진 이름으로 고개 위아래로 논밭이 연결되어 있어서 논고개라 함
반포동
반포라는 지명은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하여 서릿개 즉 반포(蟠浦)라 하다가 변음되어 반포(盤浦)로 칭함. 일설에는 이곳이 상습 침수지역이므로 반포라고도 함.
내방동
방배동은 관악구와 서초구의 경계에 솟은 우면산을 등지고 있는 동리라는 뜻의 방배(方背)라 한데서 연유하며, 일설에는 동네 북쪽에 흐르는 한강을 등진(背) 모서리(方)란 뜻으로 방배동으로 불리워지는데, 방배동의 안쪽이라 하여 내방동이라 함
이수
이수(梨水)란 옛날 배나무를 많이 재배하던 마을 동쪽에 한강물이 흐른다고 하여 유래 되었음
남성동
효성이 지극한 정조대왕이 수원에 있는 사도세자 능행시 행차길인 현재의 사당동 일대가 예전에 여시고개, 살피재 등으로 불리었으나 임금의 행차길이 이물스러운 지명이라 하여 여시고개를 남쪽의 큰 재라하여 남태령으로 고쳐부를 때 태령의 재 성(城)자를 따서 남성동이라 일컬었음.
숭실대 입구 (살피재 고개)
살피재 고개는 상도동과 봉천동 고개로서, 옛날 이곳은 수목이 울창하여 도둑이 많이 출몰하였던지라 이 재를 넘기 전에 사람들이 살펴서 가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짐
상도동
상여꾼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여 상투골이라 한데에서 유래
장승배기
장승이 서있는 곳을 장승배기라 하는데 유래는 조선중기 정조가 뒤주 속에 갇혀 비통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한시도 잊지 못하고 수원의 묘소를 참배다니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 당시 나무숲이 우거진 이 곳에서 쉬기란 적적하기 그지없어 장승을 만들어 세웠다고 함
신풍 (신길동)
신길동의 유래는 조선시대에 영등포 나룻터가 있던 곳으로 새로운 좋은 일이 생기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로 보고 있다
신풍은 수원가도 이서(以西)의 지역을 관할하는 옛 동명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림동
신대방동의 "대"자와 신도림동의 "림"자를 따서 대림동으로 명함
신대방동
신대방이라는 이름은 대방동과 접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대방동
일제시대에 이 동네에 영등포 등지를 번대방정회(番大方町會)를 두고 관할하였다
대림동
대림동의 대와 신림동의 림을 따왔다
구로
아홉 노인이 살았다 해서
가리봉동
마을 주위 작은 산봉우리가 이루어져 마을이 되었다고 한데서 붙여졌다는 유래와 고을과 같은 의미를 갖는 "갈" 또는 갈라졌다는 뜻인 "가리"에서 유래가 있다.
철산동
뒷산이 쇠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우두리(牛頭里)라고 불리다가 쇠와 철은 소리는 다르게 나지만 같은 뜻이기 때문에 철산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영등포
'浦'는 물가, 즉 바닷가나 강가를 의미하므로 강변마을을 뜻합니다. 물론 예전에 영등포 지역이 강 포구였게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永登'이라는 명칭이 어떤 의미에서 붙여졌는지 의문이라고 합니다. 다만 우리 민속에 음력 정월 또는 2월 중 ‘연등놀이’ 또는 ‘영등굿’이라는 것이 있는데, 갯마을이던 영등포의 지명이 우리 고유의 민속인 ‘연등’ ‘영등’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지 막연하게 추측할 뿐이라고 합니다.
도림동
산 모양새가 마을 뒤로 성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 마을이 국도(도)에서 돌아앉아 있다고 해서 도림으로 되었다는 설과 도림리 일대의 들판이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며, 특히 길옆에 삿자리 일종의 풀이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고 있다
문래동
문익점의 목화전래를 따온 이름
양평동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강을 도강하기 위해 설치된 양화진의 양자와 넓은 들판의 평자가 결합된 이름
당산동
마을 언덕(산)위에 당(당)이 있기에 붙여진 이름
지하철 2호선을 중심으로
태평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태평관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 길을 따라 입궁함
을지로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성을 따서 붙인 것이다.
신당동
신당이란 무당들이 받들어 모시는 신령을 모신 집을 말한다. 신당을 중심으로 많은 무당들이 광희문 밖에 살았다고 한다.
왕십리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찾아 남으로 내려와 왕십리에서 지형을 살피던 중 때마침 도선대사의 변신인 노인이 "십리"를 더 가서 도읍지를 찾으라는 가르침을 받아 그 노인 의 말대로 현재의 왕십리에서 10리를 더가 경복궁자리에 궁궐터를 잡았다는데에서 유래
행당동
동쪽 산 일대에 살구나무,은행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행당이라는 동명이 생겼다고 한다.
성수동
전래에 의하면 성수라는 이름은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비롯된 이름
화양동
화양정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구의동
아홉 개의 우물이 있다고 해서 구정동이라 불리던 구정동과 산의 동이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되면서'구'자와 '의'자를 따서 구의동이 된 것이다.
성내동
근처 성내천의 이름을 따서
잠실동
조선 초에 이곳에 잠실을 두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잠실은 잠실도회의 준말로 조선초의 국립 양잠소였다
사당동
사당동은 옛날 이곳에 큰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전해온다.
봉천동
봉천동(奉天洞)은이 지역이 관악산 근처의 마을로서 산이 험하고 높다하여 생긴것이다
신림동
동의 이름은 관악산 기슭 숲이 무성한 곳에 있다는 데에 유래한다.
지금의 신림사거리는 서원말이라 불리웠는데 서원말의 유래는 고려시대에 서원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붙여졌다. 강감찬 장군이 송도에 왕래할 때 자주 머물렀던 곳으로 정자는 없어졌으나 지금까지도 지명은 남아 있다. 마을 뒷산인 장군봉은 강감찬 장군이 무예를 연마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북쪽 산정에는 군웅당이라는 제당이 있었으나 주택 신축공사로 헐렸다.
난곡
조선시대 강홍립(姜弘立) 장군이 유배되어 은거할 때 난초를 많이 길렀다는 데서 유래하며, 낙골, 난골 등으로도 불린다
합정동
합정이라는 명칭은 옛날 양화나루근처의 마을로 그 일대를 보통 양화도로 호칭한다. 조개우물로 불리워지는 우물이 있으므로 합정동의 이름이 생겼는데 후에 합정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동교동
동교동이란 동명은 세교라는 이름이 '잔다리'라고 하는데서 생겼으며 지형이 좀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었기 때문에 '윗잔다리'라고 불렸던 것인데
대흥동
대흥동은 독은 구워파는 것을 업으로 삼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독막 또는 독마을로 불리워
지던 지방이었다
아현동
고개가 작기때문에 '애고개' 즉 아현으로 부르던 것이 아(兒)가 아(阿)로 변하여 아현(阿峴)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신정동
자연 마을이었던 신기(新機:신트리)의 '신'(新)자와 은행정의 '정'(亭)자를 따서 신정리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지하철 1호선을 중심으로
병점(餠店)
이 근처에 떡 장수가 많았다고 해서 유래
수원(水原)
물의 원천 이라는 뜻.
세류(細柳)
"버드내"를 한문 식으로 함
화서(華西)
수원에 위치한 화서문의 마을이라는 뜻.
부곡(富谷)
조선 중엽 남양부사가 이 마을에 들렀는데 "빈골"이라는 그 당시의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 "부의 마을"이라는 뜻의 부곡이라고 칭함
군포(軍浦)
임진왜란 당시 관군이 왜군에게 패해 이 지역으로 내려와서 굶주린 관군을 배불리 먹인 지역이라 유래.
금정(衿井)
옛날 이 지역은 벌판에 자리잡아 물이 풍부해 우물만 파면 물이 나와 아낙네들의 옷을 적셨다는 데에서 유래.
鳴鶴
주변에 두루미가 많이 서식, 유래
安養
"안양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여 유래
冠岳
주위에 관악산이 있어 유래.
石水
이 마을에 석공 들이 많아 유래
始興
고려 6대 성종때, 별호(임금이 마을이나 지역에 칭하는 명칭)를 시흥이라 칭한데서 유래
禿山
마을에 숲이 없어 "벌거숭이 산" 이라고 불린 데서 유래
加里峰
"고을+산 봉우리" 의 합성어, 유래
九老
이 마을에 현명한 9명의 노인이 살았다고 하여 유래
大方
마을명에서 유래.(번대방리에서 바뀜)
鷺梁津
수양버들과 노량나루터가 있어 유래
龍山
백제시대에 두 용이 나왔다는 데에서 유래
南營
조선시대에 남쪽 병영이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
新設洞
조선 초기에 새로 설치(계획)된 마을이라 하여 유래
祭基洞
조선 성종이 풍농을 위해 이 곳에 친경대를 만들고 친히 제사를 지냈다는 데에서 유래
안암동
대광아파트 단지 위에 사람 20여명이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바위가 있다는 데에서 유래
종암동
고려대학교 뒷산에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는데에서 유래
장위동
뒷산 이름이 장위산이라는데에서 유래
4호선을 중심으로
창동
조선시대에 임금님께 곡식을 진상하던 곡물창고가 있었던데서 붙여진 이름
쌍문
쌍갈래길에 이문이란 일종의 방범초소가 있어 '쌍갈무늬'라고 불리던 것이 변음
수유
수유리라는 지명은 인근의 우이천이 장마철이되면 흔히 물이 넘쳐 물결치는 모습이 아름답다 하여 수유라고 불려짐
미아
'미아'라는 지명은 고려말기부터 부근 야산의 언덕에 있던 마을의 모습을 넓을 미(彌)와 언덕을 뜻하는 아(阿)를 합하여 부르던 것으로 원래는 삼각산 끝의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삼양동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길음(吉音)
정릉천이 흐르는 계곡마다 그 물소리가 맑고 고와서 좋은 노래소리가 들리는 동네
돈암
돈암동이란 지명은 되너머고개 즉 돈암현(敦岩峴)이 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현재는 미아리 고개라고 불리고 있지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되놈'이 이 고개를 넘어 침입해 왔기 때문에 되너미고개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삼선
삼선교(三仙橋)라는 지명은 이 지역 남쪽의 옥녀봉 봉우리에 하늘에서 내려온 세 선녀와 옥녀가 함께 어울려 놀았다는 전설이 오늘에까지 전래되고 있는데서 유래
혜화
혜화라는 지명은 근세 조선의 도성8대문중의 하나로서 혜화문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명동
명동은 갑오개혁(1894년)때 처음 붙여진 이름으로 이는 조선초부터 이곳을 명례방이라고 한데서 유래
회현
조선왕조때 정광필, 김상헌 형제등의 어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회현동(會賢洞)
갈월
갈월동은 갑오개혁때 붙여진 명칭으로 칡이 무성하여 유래된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곳은 산줄기가 불룩하게 나와 있어 '부룩배기'라고도 불린다.
이촌동
옛날부터 중지도와 상변에 살던 사람들이 큰 비만 오면 대피했기 때문에 이촌(移村)동이라 하였는데, 음이 변하여 이촌(二村)동이 됨
동작
조선 왕조때 서울과 수원이남 지방을 잇던 동재기 나루 즉, 동작진에서 유래됨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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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모모 작성시간 10.10.22 아주 좋은 자료입니다. 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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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매곡-이승노 작성시간 10.10.22 좋은 자료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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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헌 작성시간 10.10.27 올미선생님께 정중히 말씀드림니다.
[부락]이라는 단어는 여러 제현님들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일본에 있는 천민들의 거주지를 일컫습니다.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서 우리민족을 억압하고 업신여기기위해서 붙인것입니다. 앞으로는 [부락]이라는 표현은 절대로 쓰지마시고 우리의 정서에 맞는[마을] 또는 [동네]로 표현해 주실것을 요청드립니다. 세계속에 빛나는 찬란한 문화를 가진 대한국민으로써 우리스스로를 일본의 천민으로 깍아내려선 안되겠지요. 문화인으로써 자부심과 긍지를 가집시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올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0.10.28 관심에 감사합니다. 일제시대를 거쳐갔으니 요소요소에 그 흔적들이 남아있으리라 봅니다. 더욱 잘 사는 국가로 만듬이 시대의 요청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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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금강 작성시간 12.09.03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