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스미스(1723~1790)
애덤스미스의 국부론
애덤 스미스는 그의 생애 동안에 3개의 혁명을 경험했다. 하나는 미국의 혁명이고 "국부론은 1776년의 독립선언의 해에 출판되었다. 이것은 영국의 중상주의적 식민지 체제의 붕괴를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프랑스 대혁명이고 그것은 봉건제의 지양이 세계사적 필연임을 입증했다. 또 하나는 영국의 산업혁명인데, 바로 국부론이 그 개막을 예고했을 뿐 아니라 영국은 그 높은 생산성을 배경으로 하여 자유무역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이 3개의 혁명은 "국부론"의 내용을 깊이 규정하고 있다. 즉 그것은 세계사적 필연으로서의 근대 시민사회의 생산력 구조를 해명함으로서 봉건제와 중상주의적 통제정책을 비판하고 자유주의의 합리성을 논증하려는 것이다. 다음에 국부론의 방대한 논술의 전개에 따라 특징적인 몇가지 논점을 설명하기로 한다.
"국부론"의 본문은 분업론으로부터 시작하고 있고, 핀 매뉴팩처에서의 분업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것이다. 보통의 사람이 스스로 핀을 만들어 보려고 하는 것과 비교하면, 작업장 내에서 분업조직이 성립하는 경우, 1인당의 생산고가 240배 내지 4800배나 된다고 한다. 스미스는 이 흔히 있는 경험적 사실을 예리하게 주목하여 근대사회의 눈부신 생산력의 발달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발견했다. 분업은 작업장 속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규모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직업의 분화가 그것이다. 혼자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어서 자급자족하는 것이 아니고, 각자는 각기 한 상품의 생산에 전념하고 그것을 시장에서 판매하여 얻은 화폐로서 시장으로부터 각종의 생활용품을 사서 생활한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 시민사회는 가장 발달한 분업사회이고 교환사회이다. 각자가 한 업종에 종사하기 때문에 기술이 향상되고 사회의 생산력은 현저히 높아진다. 분업이라는 것은 노동의 분할이기 때문에 분업사회는 사회 전체의 노동이 각 직종으로 나누어지고 그 노동의 생산물이 교환되는 사회이다. 가령 어떤 생산물 교환이 각 생산물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이 똑같이 되는 형태에서 행해진다면, 일상 행해지는 생산물 교환에 의해서 사실 두 사람의 같은 노동량이 교환된 것으로 될 것이다. 여기에 스미스의 노동가치설의 세계가 나타나지만 이 때 사람들은 자기가 사회(=시장)를 위해 투하한 노동량에 따라 사회(=시장)로부터, 타인의 그것과 같은 노동량의 생산물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즉 한 사람은 사회를 위해서, 사회는 한 사람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이고 사람들은 노동에 따라서 분배되는 것으로 될 것이다. 마치 사회주의의 이상과도 비유될 수 있는 이러한 교역관계는 곧 스미스의 분업사회의 원상(原像)이었고, 스미스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사상가인 것은, 이 체계의 기저에 이러한 노동론적 이상사회가 숨어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작업장에서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여 생산력적인 분업을 조직하는 것은 자본이다. 자본이 없으면 기업을 하는 것도 매뉴팩처를 운영하는 것도 분업을 조직하는 일도 할 수 없다. 따라서 근대사회의 거대한 생산력을 실현시킨 조건도 또한 자본이 되는 것이다.
스미스는 분업에 주목함으로써 그 조건으로서의 자본의 이 생산력적 의의를 비로소 전면적으로 확정했다. 중상주의에서는 화폐가 근대사회의 순조로운 경제순환에 있어 중요 불가결한 것이라는 시각이 있었으나, 분업의 생산력과 자본을 결부하여 그것을 근대 생산력의 기축으로 하는 생각은 없었다. 즉 관점이 유통주의적이었고 스미스와 같은 생산분석을 기초로 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중농주의에서는 농업에서의 자본투하의 생산력 효과의 분석은 있으나, 공업에서의 동일한 효과의 분석은 제대로 행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본을 아낌없이 생산에 투자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자본액에 비례한 수입이 보장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일부러 큰 자본을 투자하여 그 관리 운영의 위험이나 노고를 겪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본에 따르는 생산양식에 있어서는 자본에 비례하는 평균이윤율이 불가피한 것이다. 이것은 자본이라는 재산에 따르는 소득이고 임금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리하여 봉건제 이후 일종의 독자적인 재산소득으로 알려진 지대 이외에 이윤과 임금을 사상 처음으로 밝히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상주의에서도 중농주의에서도 대체로 이윤도 임금도 모두 시민층의 벌이로 생각되었지 뚜렷이 구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윤과 임금과 지대가 뚜렷이 구별되었을 때에 자본가와 노동자와 지주라는 근대사회의 3대 계급의 구별도 확실해졌다. 스미스는 처음으로 이 구별을 확립한 것이다. 중농주의에서도 중상주의에서도 사회는 지주와 농민과 상공업자로 나누어져 있었고, 아무래도 봉건주의의 유제를 남기고 있었다. 이와 같이 스미스에게 있어서 근대 시민사회는 분업사회이고 계급사회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거기서 행해지는 생산물 교환의 구조를 가치-가격론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설명하는 방식은 두가지가 있었다. 단순히 분업사회를 염두에 두고 계급사회를 도외시하면 상품은 그 생산에 투하된 노동량에 의해서 교환된다. 후년에 이것은 투하노동 가치설이라고 불리웠다.
이 입장에 서서 계급사회를 고려에 넣는다면 이윤이나 지대는 노동이 생산한 가치의 분해부분 내지 공제부분이라고 결론지어질 것이다. 이런 식의 잉여가치의 파악은 후년에 분해가치설이라고 불리우고, 리카도를 거쳐서 마르크스에 연결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본에의 이윤귀속이 당연하고 불가피하다는 견해가 있기 때문에 토지소유와 자본 아래서 생산된 여러 상품의 가격은 평균이윤과 지대와 임금을 합계한 것으로 정해진다는 설명도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후대에 구성가치설이라고 하여, 맬서스를 거쳐서 영국 정통파의 생산비가격론으로 이어진다.
이 견해는 노동이 상품의 전 가치를 생산한다는 최초의 가치 규정과 모순된다. 따라서 가치의 크기도 투하노동량이 아니고 그 상품이 시장에서 구매하고 지배할 수 있는 타인의 노동량에 의해 측정된다. 이 가치척도론은 지배노동가치설이라고 불리우고 구성가치설과 결부되어있다. 이러한 혼란은 스미스의 계급사회관의 혼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분해가치설에 있어서는 상품의 전 가치가 노동=생산에 의해서 결정되고, 이윤이나 임금, 따라서 불로(不勞)계급은 무산자인 노동자와 대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성가치설에서는 가치의 크기가 유통과정에서 측정될 뿐이어서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무산자로서가 아니고 노동능력이라는 귀중한 재산을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시민으로서 나타나고, 다같이 사유재산의 소유자인 지주와 자본가와 같은 시민관계에 서는 것이어서 3자가 더불어 3개의 소유재산에 대한 세가지 소득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분업사회에서 제 상품이 같은 노동량 교환의 형태로 행해지기 위해서도, 계급사회에서 평균이윤율을 가져오기 위해서도, 어떠한 조건이 필요하다. 즉 봉건적 여러 제약도 중상주의적 보호나 간섭의 정책도 특권회사나 독점기업도 없이, 오로지 사유재산권을 기초로 하는 근대적 시민권이 자유 평등하게 행사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조건하에서 각 생산자가 자유롭게 경쟁함으로서 자연스럽게 등가교환이나 평균이윤율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 성립한 가격을 스미스는 자연가격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어떠한 상품도 부족하면 시장가격이 높아지고 평균이상의 이윤율이 얻어짐으로서 다른 부문에서 이 부문으로 자본이 유입되고 이 상품의 생산과 공급이 늘어서 시장가격이 하락하여 다시 평균이윤율이 얻어질 것이다. 역이 성립하면 역이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항상 시장가격은 자연가격으로 수렴한다.
이 상태는 각 분업 부문간에 균형이 취해지고 있는 상태, 사회적 자원이 이용되지 않고 방치되거나 헛되이 이용되지 않는 상태, 사회적 욕망이 이것 저것 할 것 없이 충족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후대에 와서 이것은, 가치법칙의 한 측면, 혹은 완전경쟁의 상태라고 하고, 근년에 와서는 가격의 자동 조절기구라고도 불리우고 있으나, 그 원형을 스미스가 상세히 전개한 것이다. 스미스는 개개의 시민들이 제멋대로 이기심의 추구에 매달리고 있으나 사회적 총 결과가 이렇게 조화적일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의 유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이 표현은 그 방대한 "국부론" 전권에 있어서 제4편 제2장에서 한번 사용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것이 스미스의 시민사회 분석의 표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스미스가 이 생각을 전개한 것은 당시의 중상주의적 보호, 간섭 정책의 체제의 원리적 비판을 노렸던 것이다. 그러면 이 조건 하에서의 자본주의는 어떻게 발달하는 것인가. 스미스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발달은 자본축적과 같은 뜻이고 그 기본적 기구를 처음으로 해명한 것도 또한 스미스의 공적에 속한다. 그에 의하면 물건을 만들어서 가치를 생산하고 그 위에 이윤이나 지대를 부가하는 노동은 생산적 노동이다. 농업이든 공업이든 이것이 사회적 존립의 물질적 기초를 생산한다. 그런데 그것을 고용하고 각 작업소에서 분업을 조직하여 생산력을 높이는 경제적 조건이 자본인 것이다.
자본가는 그 생산품을 판매하지만 생산을 되풀이해서 계속하기 위해서는 그 판매가격으로부터 우선 임금부분이 보유되고 보전되어야 한다. 나머지 부분이 지대나 이윤이 되는 것이나 이것을 모두 자본가나 지주가 소비해버리면 생산을 지속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확대할 수는 없다(단순재생산). 그러나 지주나, 주로 자본가가 절약을 하여 그것을 신규로 투자하면 생산규모는 확대된다(확대재생산). 이와 같이 잉여가치를 절약하여 투자하는 것이 자본축적이고 이것이 자본주의 발달의 원 기구라고 간주되었다. 그런데 자본축적이 급속한 나라에서는 생산력이 급증한다.
투자할 곳을 구하는 자본이 해마다 급증하기 때문에 자본간의 경쟁이 치열하고 평균이윤율은 낮아진다. 노동수요도 해마다 급증하기 때문에 임금은 높아진다. 미국이나 영국은 그러한 예였다. 스미스는 이 상태를 공평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이윤은 불로소득이다. 따라서 이윤율이 낮아지고 노임이 높아지는 것은 공평하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높은 사회적 생산력과 사회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부의 전반화가 실현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스미스는 자본축적을 겁내지 않고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꾸로 자본이 축적되지 않는 저(低)생산국에서는 이윤율이 높고 임금이 낮은 불공평이 나타난다. 그는 이러한 상태를 비판한다. 당시의 중국이나 벵갈이 그러한 경우였다.
이상 제1, 제2편의 기초이론의 내용을 요약해 보았으나 현실적으로 자본축적이 급속하고 공평한 분배를 실현하고 있는 나라나 시대가 있었느냐 하면 그 역의 경우도 있었다. 이런 불균등 발전을 가져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을 역사분석에 의해서 확인하는 것이 제3편의 과제이다. 제1, 2편에서는 근대 시민권의 완전한 행사가 단순히 가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각 나라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영국에서도 봉건시대에는 이 조건이 존재하지 않았고 생산력도 여간해서 진전되지 않았다. 그것이 급진전을 시작한 것은 시민혁명 이후부터였다. 그 이외에 당시의 중국이나 벵갈은 말할 것도 없고 왕년에 번성했던 이탈리아나 독일이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도 봉건적 폭정이 횡행했기 때문에, 국부는 정체하고 있었고 앙시앵레짐 하의 프랑스에서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
각국의 역사를 비교 검토하여 스미스는 시민권의 충분한 보장이 근대사회의 생산력 해방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스미스에게 있어서 자연법이고, 그는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각 나라 각 시대의 봉건제를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그는 근대 시민법 확립의 역사적 필연성을 지적한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서의 이기심을 위해서(여기서도 자연법적 인간관이 개입되지만) 상품경제는 봉건제의 구속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나마 발전한다. 그러나 그것이 영주의 권력을 붕괴하고 시민권의 확립을 불가피하게 하는 것이다. 영국의 시민혁명이 그러했고 프랑스도 그렇게 될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도 시민법은 자연적인 것이고 그것은 규범만이 아니라 역사적 필연성마저 의미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국부론"의 기초이론은 가정(假定)에 의한 가설이 아니라 역사적 경험에 의해 기초지어진 현실적 이론이 된다. 이 점에서 "국부론"의 논술 구성은, 독점의 시대에 완전경쟁을 단순히 전제하여 그대로 가격의 자동조절기구를 논하는 비현실적 이론과는 다르다. 제4편에서 스미스는 중상주의 정책의 체계를 비판하고 자유무역정책으로의 이행의 역사적 필연성을 논증하려고 한다. 스미스가 보기에는 이 정책체계는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을 장려하며 식민지 무역을 독점하는 정책이고, 그 주안점은 무역균형을 확보하고 국외로부터 금속화폐를 획득하는 데 있었다.
스미스는 제1, 2편에서 해명된 것처럼 가장 생산력적인 분업 및 자본축적의 이론을 기준으로하여 이 정책체계를 비판하고 있다. 그 보호와 억제의 체계는 일국의 자본을 자연히 유입될 수 없는 용도로 유도하여 가장 생산력적인 분업구조를 왜곡시키고 자본의 축적을 저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뿐만 아니라 자유무역주의로의 이행은 이제는 역사의 필연이다. 원래 중상주의정책은 국가권력의 도움으로 산업자본의 육성을 노리는 것이었다. 수입제한도 식민지 지배도 그러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 나라가 국권을 이용하여 그렇게 하면 다른 열강들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국제적 현장에서는 여러 열강의 힘의 대립이 야기되고 계속 식민지 쟁탈전이 이어졌다. 더구나 북미의 식민지는 본국의 억압정책에 견디지 못하여 필사적인 독립전을 위해 궐기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본국 정부에서는 중세(重稅)에다가 거액의 공채를 발행하여 견디기 힘든 군사비를 부담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부담은 결국 국민경제에 전가되기 때문에, 본국의 자본축적은 크게 방해받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자본축적 촉진을 위한 정책이 역사의 변증법에 의해서 그 반대 쪽으로 전화되어 버린 것이다. 이리하여 본국의 자본축적의 관점에서 식민지의 독립=포기와 자유무역으로의 이행이 필요해졌지만 영국은 이미 달성된 높은 생산성 때문에 그 이행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즉 그 정책 전환은 이미 역사적 필연이었던 것이다. 스미스는 그간의 사정을 상세하게 그리고 흥미있게 분석하고 있다.
이리하여 성립하게 되어있는, 역사적으로 기초지어진 규범적인 시민사회를 "자연적 자유의 체제"라고 불렀다. 이 체제 하에서의 국가의 역할은 국방과 사법과 약간의 공공사업에 지나지 않는다. "국부론"의 마지막 편인 제5편은 이러한 정부의 역할이나 조세징수의 방법을 논하고 있다. 사법은 국내에서 시민권을 보장함으로써 분업과 자본축적의 급성장을 위한 정치적 사회적 조건을 보장한다. 국방은 국제상황에서 그와 같은 일에 종사한다. 약간의 공공사업은, 교육이나 도로나 항만 설비처럼 사회의 총자본에 의해 이용되고, 그것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어떠한 개별자본의 상업베이스에도 맞지 않는 사업을 국가가 대신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국가는 일국의 자본축적을 위해서 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스미스의 국부론의 첫째 특징이다.
그 경우 공무원은 사회적 분업의 일부문을 담당한다. 공무원은 상품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비생산적 노동자이지만 그런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국부의 생산에 기여한다. 공무원이 사법의 임무를 방치하면 순조로운 생산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국부론"의 사회적 분업론은 공무원의 분업기능의 분석에 의해서 비로소 완결된다. 정부나 공무원은 정부의 위에 있는 지도자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내부에 있어서 사회적 분업의 일부문을 담당하는 보통의 시민과 다름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시민정부라고 불리운다. 이것도 스미스의 국부론의 하나의 특징이다. 스미스 국부론을 후대의 학자들은 값싼 정부론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조세납부가 자본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비용이기 때문에 그 금액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는 일반론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사실은 시민정부가 값싸다는 것은 자본축적에 대한 역할과의 비교에 의한 것이다. 가령 혁명 전의 프랑스 정부는 호화로운 궁정생활과 대외전쟁에 여념이 없었으나 자본축적의 조건을 적정하게 장비하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자본의 입장에서는 값비싼 정부인 것이다. 이처럼 봉건국가나 중상주의 국가와 비교하면 시민정부는 자본에게 있어서는 훨씬 값싼 정부가 되는 것이다.
즉 스미스의 값싼 정부론은 봉건국가, 중상주의 국가의 비판을 의도한 것이다. 이렇게 "국부론"은 분업과 교환, 자본축적과 경제성장, 근대시민권과 근대생산력, 국가와 경제 등 근대사회의 제 측면의 관련을 논하고 있다. 더구나 근대사회를 특징짓는 가치법칙의 전개를 통하여 이들 제 특징이 통일되고 있다. 이렇듯 근대 시민사회의 총기구가 통일적, 체계적으로 해명된 점이 "국부론"의 커다란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부론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세계의 사상, 2002. 5. 20., 사회문화연구소)
애덤 스미스
애덤 스미스의 [국가의 부(富)의 본질과 원천에 대한 탐구], 일명 [국가의 부] 또는 [국부론]은 사실상 최초의 근대적인 경제학 저술이다. 그는 경제학의 방법과 용어를 만들었고, 경제 활동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 자체가 도덕의 한 형태라고 확신했다. 그는 독점 기업가에 반대하고 소비자의 이익을 옹호했으며 소비자의 욕구, 생산, 시장 경쟁, 그리고 노동 분업이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동력이라고 보았다.
글래스고 대학의 애덤 스미스, ‘가장 유익했고 행복했으며 명예로운 시기’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파이프 주의 커콜디에서 아버지 애덤 스미스(이름이 같음)와 어머니 마거릿 더글러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법률가이자 관리였고 상처한 뒤 1720년에 새로 얻은 아내가 애덤 스미스의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스미스가 태어나기 6개월 전 세상을 떠났다. 스미스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게 많지 않지만, 네 살 무렵 집시들에게 납치당했다가 구출되었다는 일화가 있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것, 어머니와의 관계가 매우 친밀했다는 것 정도다.
스미스는 1729~37년까지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좋은 초급학교들 가운데 하나인 커콜디의 버그 스쿨을 다녔다. 버그 스쿨을 마치고 14살 때 글래스고 대학에 입학해 주로 도덕철학을 공부했고, 1740년 장학금을 받아 옥스퍼드 벨리올 칼리지로 갔지만 옥스퍼드의 교육에 실망했다. 교수들의 열의와 수준, 학문적 개방성에서 글래스고 대학에 못 미친다고 보았던 것. 예컨대 그가 데이비드 흄의 [인성론]을 읽는 것을 대학 당국은 공공연히 금지시켰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영국 대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의 교수들이 그 능력과 상관없이 수입을 보장받고 있다고 꼬집었다. 1746년 그는 학위를 마치지 않고 옥스퍼드를 떠났다. 1748년부터 스미스는 에든버러에서 공개강연을 하면서 제법 큰 인기를 모았다. 1750년 그는 10살 이상 나이가 많은 데이비드 흄과 처음 만나 두터운 교분을 쌓았다. 역사, 정치, 철학, 경제, 종교 등 다방면에서 그들은 밀접하게 지적으로 교유했다. 1751년 스미스는 글래스고 대학 논리학 담당 교수가 되었고, 이듬해 도덕철학 담당 교수가 되었다. 이후 10여 년 간 계속된 교수 생활을 스미스는 ‘가장 유익했고 행복했으며 명예로운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도덕 철학자에서 정치경제학자로의 전환
1790년 애덤 스미스의 초상화
스미스는 글래스고에서 행한 강의를 일부 반영한 [도덕감정론]을 1759년에 출간했다. 그는 이 책을 평생에 걸쳐 개정했고 1790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최종판(6판)이 나왔다. [국부론]이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 받지만 스미스 자신은 [도덕감정론]이 [국부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을 사실상 처음 거론한 것도, 사람들이 각자의 이익에 따라 행동할 때 사회를 분명히 이롭게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도덕감정론]에서였다. 자기 이익을 위하는 자연적 성향을 지닌 인간이 어떻게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행위 할 수 있는가?
스미스는 자연적인 이기심에도 불구하고 제3의 입장에서 타인을 평가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을 강조한다.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을 관찰할 때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일깨우고, 자기 행동의 도덕성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자신에게 공감해주는 외부 관찰자를 원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사회관계가 도덕적 판단과 행동의 근원이라고 보는 셈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철학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도덕감정론]은 큰 인기를 모으며 스미스의 명성을 높여주었다. 스미스에게 배우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글래스고로 유학 오는 학생들이 많아질 정도였다.
1762년 글래스고 대학은 스미스에게 법학박사 칭호를 수여했다. 1763년 말 스미스는 흄이 소개해 준 찰스 타운젠드로부터 양아들 헨리 스코트를 가르치는 개인교사 제의를 받았다. 스미스는 교수직을 사임하고 헨리 스코트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며 그를 가르쳤다. 그가 받은 연간 600파운드의 보수는 교수 시절 보수의 2배였다.
스미스는 헨리 스코트 일행과 함께 프랑스의 툴루즈에서 1년 간 머물고 남프랑스를 여행한 뒤 제네바로 갔다. 그곳에서 스미스는 철학자 볼테르와 만났다. 이후 파리로 간 스미스는 벤자민 프랭클린, 튀르고, 엘베티우스, 프랑수아 케네 등 당대의 지적 리더들과 만났다. 특히 중농주의의 거두 케네의 업적을 스미스는 존경했다. 중농주의자들은 중상주의자들과 달리, 국가의 부(富)가 귀금속의 보유량이 아니라 생산, 특히 농업 생산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 모든 불완전한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중농주의는 정치경제학의 주제에 관해 지금까지 발표된 것들 가운데 진리에 가장 근접해있다.” 공업이 발달한 영국의 상황을 연구했던 스미스는 중농주의자들과 달리 공업 생산이 부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보이지 않는 손’, 자기 이익의 추구가 사회 전체의 이익을 낳는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국가의 부(富)의 본질과 원천에 대한 탐구) 1776년 초판본
1766년 헨리 스코트의 동생이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 직후 스미스의 개인 교사로서의 여행도 끝났다. 스미스는 고향 커콜디로 돌아와 10년 간 대작 [국부론]의 완성에 힘썼다. 1776년 출간된 [국부론]은 초판이 다 팔리는 데 6개월이 걸렸고, 이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국부론]은 오늘날 거시경제학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다음과 같은 명제로 시작된다. “한 나라 국민의 연간 노동은 그들이 연간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 전부를 공급하는 원천이며, 이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은 언제나 이 연간 노동의 직접 생산물로 구성되고 있거나, 이 생산물과의 교환으로 다른 나라로부터 구입해 온 생산물로 구성되고 있다.”
스미스에 따르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열정과 행위는 사회 전체의 이익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그런 방향을 이끄는 것이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이다(‘보이지 않는 손’은 스미스의 모든 저작에서 세 차례, 그것도 [국부론]에서는 한 차례만 나온다).
‘보이지 않는 손’은 가장 적절한 재화의 양과 종류를 생산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을 시장 과정의 측면에서 풀이하면, 다수의 수요자와 다수의 생산자가 자기 이익을 극대화시키려 노력한 결과로 가격이 형성되고, 그렇게 형성된 가격이 시장 참여자들을 고루 만족시키는 것은 물론 사회 전체의 이익도 극대화시킨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시장 경제야말로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모두에게 만족스런 결과를 낳으며, 사회의 자원을 적절하게 배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술도가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심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노동 분업의 양면성과 독점 및 집중의 폐단에 대한 통찰
공업 생산량을 늘리는 게 국부의 원천이라면, 어떻게 하면 생산량을 늘릴 수 있을까? 스미스는 같은 노동력을 투입하고서도 더 많이 생산하는 것, 즉 생산성에 주목했다. 그는 옷핀 만드는 예를 들었다. 한 사람의 노동자가 제조 공정 전체를 맡으면 하루에 핀 스무 개 정도를 겨우 만들 수 있지만, 10명의 노동자들이 제조 공정을 18단계로 나누어 작업하면 하루 4만8천 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미스는 분업이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 결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업이 진전되면서 노동으로 생활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즉 민중 대다수의 고용은 한두 가지의 단순 작업으로 한정된다. 작업의 결과라고 해봐야 거의 꼭 같은 것이나 다름없는 한두 가지 단순 작업을 하는 데 생애를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력을 마음껏 발휘하지도, 독창성을 시험해볼 수도 없다. 결국 이해력과 독창성을 상실하고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우둔하고 무지한 상태에 이르고 만다.”
스미스는 모든 형태의 사적인 이익 추구를 바람직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는 독점적인 이익과 경제적 집중에 반대했다. 경제적 집중은 자유 시장의 본질적인 능력을 왜곡시킨다. 그 능력이란 토지, 노동, 자본 등에 공정하고 합당한 대가를 제공하는 가격을 형성시키는 능력이다. 승자독식의 독점적인 이익도 마찬가지 결과로 이어지면서 시장을 왜곡시키고 사회와 국가 전체의 이익을 해친다.
지적으로는 모험을 즐기고 사회적으로는 조심스럽게 처신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집필한 저택 자리를 기념하는 동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자리에 그의 어머니의 집이 서 있었고, 그 안에서 애덤 스미스가 1767~1776년까지 거주하면서 [국부론]을 완성했다."
[도덕감정론]이 강조하는 공감과 [국부론]이 강조하는 이기심과 자기 이익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이기적 개인과 사회적 복리의 조화와 모순 문제를 학자들은 ‘애덤 스미스 문제’라 부른다.
이 문제는 어쩌면 앞으로도 해결하기 힘든 난문(難問)일지도 모른다. 다만 스미스의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은 서로 모순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상황에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 본성의 다른 두 측면을 각기 강조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1778년 스미스는 스코틀랜드의 관세청장으로 임명되었고 5년 뒤에는 에든버러 왕립협회 창립회원이 되었다. 1787~89년에는 글래스고 대학의 학자로서는 최고위직인 렉터 명예직에 재임했다. 그리고 1790년 7월 17일 에든버러의 자택 팬뮤어하우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병상에서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성취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스미스는 많은 노트와 미출간 원고를 남겼는데, 출간하기 적합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폐기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적으로는 모험을 즐기고 사회적으로는 조심스럽게 처신했다”는 평가가 그의 삶을 잘 요약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