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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열하일기 내용(네이버 검색자료)

작성자兀山(allmee)|작성시간16.07.18|조회수48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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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의 내용


1780년(정조 4) 저자가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연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하는 삼종형 박명원을 수행하여 청나라 고종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청조치하의 북중국과 남만주일대를 견문하고 그 곳 문인·명사들과의 교유 및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연행일기이다.

각 권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강록>은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으로 성제와 벽돌 사용 등의 이용후생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잡지>는 십리하에서 소흑산에 이르는 5일간에 겪은 일을 필담 중심으로 엮고 있다.

<일신수필>은 신광녕으로부터 산하이관에 이르는 병참지(兵站地)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관내정사>는 산하이관에서 연경에 이르는 기록이다. 특히 백이 · 숙제에 대한 이야기와 <호질>이 실려 있는 것이 특색이다.

<막북행정록>은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이다.

 <태학유관록>은 열하의 태학(太學)에서 머무르며 중국학자들과 지전설에 관하여 토론한 내용이 들어 있다.

<구외이문>은 고북구 밖에서 들은 60여 종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환연도중록>은 열하에서 연경으로 다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으로 교통제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금료소초>는 의술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옥갑야화>는 역관들의 신용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허생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뒷날에 이 이야기를 <허생전>이라 하여 독립적인 작품으로 거론하였다.

<황도기략>은 황성(皇城)의 문물·제도 약 38종을 기록한 것이다.

<알성퇴술>은 순천부학에서 조선관에 이르는 동안의 견문을 기록하고 있다.

<앙엽기>는 홍인사에서 이마두총에 이르는 주요명소 20군데를 기술한 것이다.

<경개록>은 열하의 태학에서 6일간 있으면서 중국학자와 대화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황교문답>은 당시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각 종족과 종교에 대하여 소견을 밝혀놓은 기록이다.

<행재잡록>은 당시 청나라 고종의 행재소에서 견문한 바를 적은 것이다. 그 중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취한 정책을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반선시말>은 청나라 고종이 반선에게 취한 정책을 논한 글이다.

<희본명목>은 다른 본에서는 <산장잡기> 끝부분에 있는 것으로 청나라 고종의 만수절에 행하는 연극놀이의 대본과 종류를 기록한 것이다.

<찰십륜포>는 열하에서 본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망양록>과 <심세편>은 각각 중국학자와의 음악에 대한 토론내용과 조선의 오망, 중국의 삼난에 대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곡정필담>은 주로 천문에 대한 기록이다.

<동란섭필>은 가악에 대한 잡록이며,

<산장잡기>는 열하산장에서의 견문을 적은 것이다.

<환희기>와 <피서록>은 각각 중국 요술과 열하산장에서 주로 시문비평을 가한 것이 주요내용이다.

≪열하일기≫는 박제가의 ≪북학의≫와 함께 “한 솜씨에서 나온 것 같다.”고 한 평을 들었다.

주로 북학을 주장하는 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고, 당시에 정조로부터 이 책의 문체가 순정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으나 많은 지식층에게 회자된 듯하다.


느낀 점
종래의 연행록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열하일기≫는 박지원의 기묘한 문장력으로 여러 방면에 걸쳐 당시의 사회문제를 신랄하게 풍자한 조선 후기 문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걸작이라 하겠다


연암 박지원

박지원(朴趾源, 1737년 음력 2월 5일 ~ 1805년 음력 10월 20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자 사상가, 외교관, 소설가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1] [2] [3] [4] 1765년 처음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했으며,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1786년 음서로 선공감 감역이 되어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1791년 한성부 판관, 1792년 안의 현감(安義縣監), 1797년 면천 군수(沔川郡守), 1800년 양양 부사를 역임했다. 안의현감 재직 중 북경여행을 다녀왔으며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면천군수 재직 중 《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 《안설 (按說)》 등의 저서를 남겼다. 사후에도 그의 문집과 저서는 간행되지 못하다가 1910년(융희 4년)에 가서야 간행되었다.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당색으로는 노론이었으나, 노론의 한 분파인 북학파(北學派)를 세워 그 영수가 되었다.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우수한 점을 배워야 한다며 상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주장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있다.


[편집]생애 초반
이 부분의 본문은 박지원 연보입니다.


[편집]어린 시절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 한양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 야동(冶洞))에서 지돈녕부사를 지낸 노론중진 박필균(朴弼均)의 손자이며, 열상외사(洌上外史) 박사유(朴師愈)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이창원(李昌遠)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6세에 조부가 사망했다.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하여 옛사람의 선침(扇枕)과 온피(溫被) 같은 일을 흉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의 가문은 서인과 노론의 명문가문이었으나 아버지 박사유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고, 포의(布衣)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박필균에게서 양육되었다. 할아버지 박필균은 정2품에 이르렀지만 당색에는 관심이 없어서 적을 만들지 않았다.
1752년(영조 28)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는 ≪사기(史記)≫를 배워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의 문우(文友) 관계를 이어갔다.[5]


[편집]수학 시절

 
그림작품 묵죽도

장인인 이보천에게서 《맹자》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이보천의 아우 이양천(李亮天)에게서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史記》를 비롯하여 주로 역사서적을 교육받고, 글과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고 많은 논설을 습작하였다. 수년간 이보천과 이양천의 학업에서 문장에 대한 이치를 터득하였다. 처남 이재성(李在誠)은 평생의 친구로 지냈고 동시에 그의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어주기도 했다.
22세 때부터 원각사 근처에 살 때 박제가·이서구·서상수·유득공 등과 이웃하여 깊은 교우를 맺었다. 홍대용과도 사귀면서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으며(30세 때[3]), 북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법을 토론하였다. 1760년 할아버지가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하였다. 그뒤 집안의 염원에 따라 29세 때 과거에 응시했지만 낙방한다. 과거에서 낙방한 이후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편집]학문 연구와 정치 활동
[편집]정치 활동과 낙향
박지원은 청년 시절에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하여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러한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이란 이름으로 편찬했다.[5]
 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그들과 교류하였고, 이후 그들과도 깊은 학문적 교유를 가졌다. 후일 박제가, 유득공 등은 그의 문인이 되었다. 또한 홍대용(洪大容), 이덕무(李德懋), 정철조(鄭喆祚) 등과도 만나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대하여 자주 토론하였으며, 이무렵 유득공, 이덕무 등과 서부지방을 여행하기도 했다.
1776년 정조 즉위 직후 정조의 측그느 근신인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으면서 같은 노론이지만 벽파(僻派)를 공격하면서 벽파에 속했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1777년(정조 1년) 권신(權臣) 홍국영에게 벽파(辟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이듬해 황해도 김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였다. 연암이란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5] 이때 그는 개성유수로 부임한 교우 유언호에게서 생활하는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린 것도 이에 연유한다. 박지원은 이곳에 생활하는 동안 직접 농사를 지어 생활하였으며,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게 되었다.


[편집]청나라 방문과 열하일기 저술

 
 열하일기 본문

 
 열하일기
 진하사, 열하일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780년(정조 4) 44세 때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삼종형 진하사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북경을 갔다. 1780년 6월 25일 출발하여 압록강을 거쳐 베이징, 열하를 여행하고 4개월간 돌아본 후 그해 10월 27일 귀국하였다. 이때 건륭제가 열하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박지원은 일행과 함께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熱河)까지 갔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발달된 사회를 보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된다.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는 이때의 견문을 기록한 것[5]으로 이용후생에 관한 그의 구체적 견해가 담겨 있다. 《열하일기》는 당시 보수파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신문물을 서술하여 실학 사상을 소개하였다. 그의 실학 사상은 ‘이용후생’을 한 다음에 정덕(正德)을 할 수 있다는 방법으로서, 도학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근본(도덕)보다 말단(실용)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쓴 책이 《열하일기》이며, 베이징, 열하, 만주 등에서 그가 본 풍경과 현지 주민의 생활, 그가 평소에 생각하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저술로 인하여 그의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하였으나, 어떠한 형식이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하여 이상한 글을 쓴다는 이유로 문단의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편집]북학파 활동
북학파, 벽파, 북학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는 노론임에도 열하와 베이징을 여행하고 돌아온 후 청나라와 서구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문물과 청나라의 기술 중 성곽 축조, 제련 기술 등을 적극 받아들여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상행위를 천시할 것이 아니라 상행위와 무역을 적극 장려하고 무역항을 개설해야 한다는 것과 화폐를 이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수많은 동지들을 규합하고 문하생을 길러내 노론당 내에서도 북학파라는 학파/정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문하생에도 양반, 중인, 서자를 차별하지 않고 학문을 배우려는 자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는 서얼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며 능력과 실력에 따른 균등한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서얼 차별에 대해 그는 '서자를 금고하는 것은 왕조를 세운 초기에 어떤 좀스런 신하가 기회를 타서 앙갚음한데 지나지 않는다.'며 서얼을 차별할 이유가 없다고 부르짖었다.


[편집]생애 후반
[편집]관직 활동

 
과농소초 (1798년)

1786년 50세 때 음보로 처음 출사하여 조정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그해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 감역(監役)에 제수되고, 1789년 사복시 주부主簿), 1790년 금부 도사, 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부 판관을 거쳤다. 이후 안의(安義) 현감 · 면천(沔川) 군수(1797년)를 거쳐 양양(襄陽) 부사(1800년) 등 지방 수령으로서 자신의 이용후생론을 실험하고 그 경험을 지식으로 구체화하였다. 《열하일기》에서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 풍요하게 하기 위한 이용후생론을 제시하며, 조선 사회의 편견과 타성의 폐단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그 개선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배청의식 속에서 수용되기는 어려웠다. 그의 안의현감 시절은 열하 여행의 경험에서 본 것으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면천군수 시절에는《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안설 按說》 등을 저술하였다.
정조 15년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정조 임금이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하고는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직접 응하지는 않았다.[5] 정조 21년(1797) 61세에 면천군수로 임명되었다.


[편집]은퇴와 죽음
문체반정, 한문소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당시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 배우고 신기술을 유치해야 하며 장사는 천한 것이 아니라는 이른바 북학파의 영수가 되어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하였다. 그는 작품에서 아무 실속 없이 양반이라는 자존심에 사로잡혀 허세부리는 자들을 조롱하고, 힘써 일하지 않는 게으른 풍조가 양반, 중인, 평민에게까지 확산되는 것을 지적했다. 또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자신의 작품에 실음으로서 논란거리가 되고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1798년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였다. 《과농소초》라는 농업 연구책을 지어 정조에게 바쳤으며,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정조가 죽자 노론 벽파가 집권했음에도 1801년 치사(致仕)하고 물러났다.
순조 5년(1805) 10월 20일 서울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선영이 있는 장단(長湍)의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5]


[편집]사후 영향
그의 묘는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에 있다. 그의 제자 중 한사람인 박제가는 윤가기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고, 순조 즉위 후 노론 벽파가 집권하면서 노론 북학파 사상 역시 이단시되어 정계에 발탁되지 못하거나 오히려 추방당했다. 후일 우의정을 지냈던 그의 손자 박규수는 그의 실학 사상을 계수하여 개화 사상을 열어준 인물로 비중이 크다. 그가 가지는 생각들이 당대의 사고와 많은 차이를 내포하고 있어 그의 문집은 그의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였고, 사후에도 간행되지 못했다. 그의 손자 박규수(朴珪壽)는 고종 때 우의정에 올랐지만 그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했다.
그의 문집 《연암집(燕巖集)》은 1900년에 비로소 초록 형태로 처음 서울에서 공간될 만큼 간행이 늦었다. 1910년에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의 시호를 받았다.[6] 1900년 김만식(金晩植) 등 23인에 의하여 경성부에서 처음 그의 문집을 초록한 형태로 간행되었고, 1910년 조선이 멸망한 뒤에 비로소 그의 저서와 학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편집]평가
홍대용·박제가(朴劑家)와 함께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10편의 한문소설을 써 독특한 해학(諧謔)으로 고루한 양반,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편집]문학 세계

 
저서의 하나인 연암집


噫, 瞻彼烏矣. 莫黑其羽, 忽暉乳金, 復耀石綠, 日映之而騰紫, 目閃閃而轉翠. 然則吾雖謂之蒼烏, 可也, 復謂之赤烏, 可也. 彼旣本無定色, 而我乃以目先定. 奚特定於其目? 不覩而先定於其心.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날개보다 더 검은색이 없긴 하나 얼핏 옅은 황금색이 돌고, 다시 연한 녹색으로 반짝인다. 햇볕이 비추면 자주색으로 솟구치다, 눈이 어른어른하면 비취색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은 것이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저 사물은 본디 정해진 색이 없는데도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리는 것이다. 어찌 그 눈에서만 판정할 따름이랴? 보지도 않으면서 마음속에서 미리 판정해 버린다.[5] [7]

박지원의 문학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라”는 의미다. 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되려는 것은 참이 아니며, ‘닮았다’고 하는 말 속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그만의 독특한 글투를 지향했다. 이러한 그의 글쓰기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연암체’라고 불렀다. 나아가 옛날 저곳이 아닌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중국이 아닌 조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일러 ‘조선풍(朝鮮風)’이라고 하는데 ‘조선의 노래’란 뜻이다.[5]
그는 자신의 실학 사상을 소설을 통해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다. 자신이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 양반들이 실속 없이 허울 좋은 이름만 내세우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10편의 한문 소설을 지어 독특한 해학으로써 이들을 풍자하였다. 〈양반전〉은 조선 왕조 봉건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군림하는 사(士) 계급의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있으며, 〈허생전〉은 북벌론의 허위의식을 배격하면서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또한 〈광문자전(廣文者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등은 양반 계층과 도학자의 도덕적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여 사회 개혁 의식을 제시하고 있다.
자유로운 성정(性情)을 표현하기 위해 신문체를 수립함으로써 이덕무, 박제가 등의 한학신파의 4가를 낳게 했으며 문학을 통해 양반계급의 해체를 통찰하고 이를 비판, 새로운 현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문학은 공리공론을 배격하고 사실주의 문학을 수립했다. 청나라 문학인들과 사귀며 정치·음악·천문·경의(經義) 등에도 관심을 갖고 연경에 갔다온 기행을 쓴 《열하일기》의 대문장 26권을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마장전>,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등의 단편소설을 창작하였는데, 비록 그 표기가 한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빛나는 걸작들이다.
그는 <양반전>을 통해 몰락해 가는 조선 사회를 풍자했으며, <호질>에서 유학자의 전형적인 위선을, <민옹전>에서 몰락해가는 무인들의 울분을 반영하여 당시 사회의 이면사(裏面史)가 되어준다. <허생전>에서는 전시대의 허균이 쓴 《홍길동전》과 함께 현실과 유토피아 세계를 교착시키며 날카로운 사회비판의 작가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의 소설은 근대적 비판의식의 소산으로, 여러 가지 인간 유형을 통해 리얼리즘의 전통을 이룩하였고, 독특한 풍자와 해학으로써 양반계급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등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8]
[편집]인물평

 
박지원

박지원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의 아들인 박종채가 《과정록(過庭錄)》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큰 키에 살이 쪄서 몸집이 매우 컸으며 얼굴은 긴 편이었고, 안색이 몹시 붉었으며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오고 눈에는 쌍꺼풀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현재 남아있는 박지원의 초상화와도 거의 일치한다. 또한 박지원은 목소리가 몹시 커서 그냥 말을 해도 담장 바깥의 한참 떨어진 곳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 박지원 자신의 중년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한 점 있었지만 연암은 그 초상화가 본래 자신의 모습의 7할도 못 미친다며 없애버리게 했고, 다시 그리자는 아들의 간청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박지원은 다른 사람과 쉽게 타협을 할 줄 몰랐던 성격이었다. 김기순은 박지원에 대해 "연암은 순수한 양기를 타고 나서 반 푼의 음기도 섞여있지 않으니, 지나치게 고상해서 매양 부드럽게 억누르는 공력이 모자라고, 지나치게 강해서 항상 원만한 면이 부족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박지원 자신도 "일생 동안 이런 저런 험한 꼴 다 겪은 것은 모두 내 성격 탓이다", "이는 내 타고난 기질의 병이라서 바로잡으려고 한 지 오래되었지만 끝내 고치지 못했다."라고 인정하고 있기까지 하다. 실제로 박지원은 음서로 관직에 진출해 안의현감이나 면천군수 등의 관직을 지내긴 했지만, 끝내 조정의 요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편집]가족 관계
• 할아버지 : 박필균(朴弼均, 돈령부지사 역임, 시호는 장간)
• 아버지 : 박사유(朴師愈)
• 어머니 : 함평이씨(咸平李氏), 이창원(李昌遠)의 딸
• 형 : 박희원(朴喜源, 1730년 - 1787년)[9]
• 누나 : 반남 박씨
• 부인 : 전주 이씨, 이보천의 딸
• 첫째 아들 : 박종의(朴宗儀, 1766년-1815년)[10] - 박지원의 형인 박희원의 양자로 입적.[9]
• 둘째 아들 : 박종채(朴宗采, 1780년-1835년)[11]
• 손자 : 박규수, 박종채의 장남
• 아들 : 박종간
• 장인 : 이보천
• 처남 : 이재성(李在誠) : 열하일기에 '중존'(仲存)이라는 자로 논평을 달았다.
• 처삼촌 : 이양천
• 외할아버지 : 이창원(李昌遠)
• 삼종형 : 박명원(朴明源)
• 친족 : 박준원
• 친족 : 수빈 박씨, 정조의 후궁, 순조의 생모.


[편집]주요 저서와 관련서
• 《열하일기》(1780-1793) : 호질, 허생전 수록
• 리상호 역, 열하일기. 보리. 1780-1793/1955/2004 ISBN 89-84-28187-5 : 완역
• 김혈조 역, 열하일기. 돌베개. 1780-1793/1955/2009 ISBN 8971993588 : 완역
• 고미숙, 길진숙, 김풍기 역,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상), (하). 그린비. 1780-1793/2008 ISBN 89-76-82102-5 : 발췌역
• 《연암선생 서간첩》(1796-1797)
• 박희병 역,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돌베게. 1796-1797/2005 ISBN 89-71-99211-5
• 《과농소초》(課農小抄, 1799)
• 최홍규 역, 국역 과농소초. 1799/1987. ISBN 2004246000419
• 《과정록》(過庭錄, 1826) : 차남 박종채가 쓴 박지원 평전
• 김윤조 역주, 역주 과정록. 태학사. 1826/1997 ISBN 8976262514
• 박희병 역,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게. 1826/1998 ISBN 89-71-99107-0
• 《연암집》(1900년 초간) : 양반전 수록
• 신호열/김명호 역, 연암집. 돌베게. /1900/2007 ISBN 89-71-99267-0 : 완역
• 홍기문 역,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 보리. /1900/2004 ISBN 89-84-28190-5 : 발췌역
•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편집]주요 문학작품
• 《마장전(馬駔傳)》
• 《민옹전(閔翁傳)》
• 《양반전(兩班傳)》
•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 《허생전(許生傳)》
• 《호질(虎叱)》
• 《우상전(虞裳傳)》
• 《광문자전(廣文者傳)》
•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 《김신선전(金神仙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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