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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과 고대수

작성자유노바교|작성시간13.12.29|조회수145 목록 댓글 0

1884124일 갑신정변과 고대수

 

국사 시간 중 기억나는 장면. 구한말에 즐비하게 늘어선 사건들, 갑오경장, 갑신정변, 임오군란 등등의 시대순 배열에 골머리를 앓던 중 선생님이 칠판에 뭔가를 적으셨다. 야 이것만 외워라. “갑사 을오 병육 임이그게 뭡니꺼? 선생님의 답은 이랬다. “갑자가 들어가는 해는 무조건 그 서기 끝자리가 4. 을이 들어가면 5고 임이 들어가면 2. 병자 들어가면 6이고. 갑신정변은 때려죽여도 1884년이고 갑오경장은 절대로 1894년이 되능기라.” 갑오경장과 갑신정변의 차이는 암기를 위해서 이리도 단순하게 갈렸지만 이 갑자 해에 일어난 두 사건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갑오경장의 역사적 위치야 다시 말할 것이 없을 것이고 갑신정변 또한 근대국민국가의 수립을 지향한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출발점”(조광 교수)라는 측면에서 주목할만 할 것이다.

 

1884124일은 우정총국, 요즘 말로 하면 근대적 우체 업무를 담당하는 관청 건물의 낙성연, 즉 준공 축하일쯤 되는 날이었다. 영국 미국 독일 등 각국의 영사 공사들까지 초청하고 고관대작들이 함께 한 거창한 축하일이었다. 우정총국의 책임자는 병조참판을 맡은 홍영식이 겸임하기로 했다. 그런데 연회의 호스트라 할 홍영식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개화파의 리더 김옥균과 함께 이 잔치를 빌미로 집결한 수구파 관료들을 척살하고 정권을 쥐려는 꿍심이었다. 광주유수 박영효가 양성한 신식군대 수십 명과 개화파들이 은근히 길러 온 장사들이 함께 했고 결정적으로 일본 공사 다케조에가 함께 하겠다.”면서 개화파를 독려했다.

 

우정국 낙성연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외부에서 불길이 솟았고 이를 살펴 보러 나간 수구파 (온건 개화파라고 할까)의 중심 민영익이 비틀거리며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심한 자상을 입은 그는 바닥에 쓰러졌고 잔치는 그것으로 파한다. 갑신정변의 시작이었다. 갑신정변의 엉성함은 이 민영익의 처리 부분에서부터 드러난다. 사람 좋은 홍영식이 민영익이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미국 의사 알렌에게로 피신시켜 준 것이다. 살생부의 윗단을 차지하는 인물을 스스로 살려 준 셈이다.

 

개화파는 창덕궁으로 달려가 임금과 왕비를 확보하려 했다. 난리가 났다는 이유로 넓은 창덕궁에서 수비가 편리한 경우궁으로 옮기자고 건의했는데 영민한 민비는 일본군이 일으킨 것인가 청나라군이 일으킨 것인가하며 자초지종을 대라며 김옥균을 추궁한다. 말 잘하는 김옥균도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차에 통명전 쪽에서 우렁찬 폭음이 들린다. 콰콰쾅. 폭탄이 터지는 소리였다. 이 소리 앞에서는 천하의 민비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전하 들으셨사옵니까? 어서 따르시오소서.”

 

이 폭탄을 터뜨린 것은 궁녀 고대수였다. 고대수는 그녀의 본명이 아니다. 고대수는 수호지에 나오는 여걸의 이름인데 그녀는 그렇게 불리웠고 본명 아닌 그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다. 이 고대수는 수호지에 나오는 여걸 이상의 걸물이었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해서 흉물이라 불릴 지경이었고 언감생심 (당시로서는) 정상적인 여성의 삶을 살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전하는 키가 180센티미터는 족히 넘을 듯 하니 당시로서는 웬만한 거한도 깔아보는 덩치였을 것이고 남자 대여섯 명 정도는 가뿐하게 상대했다고 한다. 그녀는 궁에 들어와 무수리로 지냈고 민비의 지근거리에서 지냈다. 아마 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가 피신할 때에도 곁에 있었고 그래서 신임의 도가 더 컸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부턴가 개화파의 논리에 경도돼 있었다. 김옥균에 따르면 1884년 당시 나이 마흔 둘, 개화파에 가담하여 궁중의 비밀을 전해 온 지도 10년에 가까웠다고 한다. 즉 그녀는 개화파의 주요한 혁명 동지였다.

 

그녀가 개화파에 가담했던 것은 천인으로 또 흉물로 온갖 구박을 겪었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일 수도 있고, 그녀 자신 만인이 평등하고 신분제에서 해방된 세상을 열망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갑신정변의 숨가쁜 전개 과정에서 그녀만큼 자기 몫을 확실히 한 사람도 드물었다. 김옥균은 다케조에의 일본군만 믿고 있었고 홍영식은 죽여야 할 정적을 살려 보내고 있었고 함경도 남병사로서 개화파에 가담하던 윤웅렬 (윤치호의 아버지)는 미적거렸고 서재필은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장사일 뿐이었다. 핵심은 임금을 확보하는 것이었는데 임금과 왕비는 김옥균의 어설픈 설득에 넘어가지 않았던 차에 고대수가 폭약을 터뜨려 임금 내외를 기겁하게 만든 것이다. 당시 폭약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 줬으나 제대로 터뜨린 건 고대수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수는 성급하고 서툴렀던 그의 혁명 동지들 덕에 참혹한 최후를 맞는다.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군대의 반이 돌아가는 등 힘이 없다고 생각했던 청나라 군대가 득달같이 달려들고 일본군이 꽁무니를 빼자 김옥균을 위시한 개화파 대부분은 그만 임금과 개혁을 버리고 도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민영익을 살려 준 홍영식은 차마 임금을 버리지 못하고 남았으나 임금이 청나라 군대에 넘어가자마자 바로 총살당하고 말았다. 개화파 남자들은 10년 동안 자신을 도와 궁중의 정보를 제공해 온 혁명 동지 고대수에 대해서도 별 배려가 없었다. 고대수는 체포돼 종로 바닥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며 참혹하게 죽는다.

 

개화파는 일본을 업었지만 대중의 반일감정은 상상 이상이었으며 일본과 개화가 등식이 된 순간 개화파들은 공공의 적이 돼 버렸다. 개화파 핵심들을 놓쳐 버린 군중의 분노는 궁녀 고대수에게로 향했다. “옷을 찢고 머리를 쥐어 뜯고 손톱을 세워 드러난 속살을 피가 나도록 할퀴기도 했지요. 보고 있는 사이에 옷은 피에 젖였고 피걸레처럼 찢여진 옷자락 사이로 보아서는 안될 것까지 드러나 보였습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일이 계속되었고 이 대역죄인이 지나간 눈 위에는 피가 벌겋게 얼룩져 있었지요." (당시를 목격한 상궁의 증언)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한양은 동대문 옆 광희문이었다. 시체가 나간다고 시구문이라고 부르기도 한 그 문 앞에서 그녀는 군중이 내던지는 돌에 맞아서 마지막 숨을 거둔다. 궁녀 고대수. 기실 흉물로 불리우던 그녀에게 궁궐이란 그나마 나은 환경일 수도 있었다. 거기다 왕비의 총애까지 입고 있었으니 그렇게 고단한 삶도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궁 밖의 개화파들에게 다가갔고 그들의 거사에 동의했고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결정적인 역할을 해 냈지만 말 잘한다고 소문난 김옥균조차 그녀의 생각이 어떠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에 대해 글 한 줄 남기지 않았다. 단순히 키가 크고 남자 몇 명을 간단히 제압하는 걸물이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종로바닥을 피투성이로 누비다가 돌무더기에 싸여 죽어간 고대수는 과연 누구였으며 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일까. 죽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때로 역사는 자기가 싫으면 말 한 마디 손짓 하나 건네지 않는 차가운 새침데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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