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의 참패 용인 싸움
1997년 1월 수원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색다른 유물이 발견됐어. 조선 중기의 화포였지. 화포 안에는 포탄이 장착돼 있었어. 즉 ‘실전 배치’돼서 전투 태세를 갖춘 화포라는 뜻이야. 그런데 이게 왜 버려져서 흙에 묻혔다가 수백 년 뒤에야 다시 햇볕을 받게 됐을까. 그 안의 포탄은 누구를 겨냥했던 것이었고 왜 쏘아지지도 못한 채 땅 속에서 녹슬어야 했을까. 그 포는 1592년 6월 5일(음력)을 생각나게 했어.
1592년 6월 5일 그곳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리 역사상 최대의 참패가 벌어졌다고 해 두자. 조선 세조때 양성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우리는 중국과 싸우면 열 번 싸워 일곱 번 이기고 여진족과 싸우면 다섯 번 이기고 다섯 번 진다. 일본과 싸우면 열 번 싸워 세 번밖에 못이긴다.”고 말이야. 즉 자고로 중국은 만만했고 여진도 해 볼만 했지만 이놈의 일본인들한테는 꽤 골탕을 먹었던 것 같아. 단병접전, 이른바 직접적으로 칼을 맞대기 시작하면 일본군, 아니 하다못해 왜구들을 제압할 군대는 동아시아에서 그렇게 흔치 않았지.
임진왜란이 터지고 일본군은 경부축선을 따라서 그야말로 바람같이 북상했어. 부산에 상륙한지 20일도 안돼서, 그것도 전투를 치르면서 서울을 함락시켰으니 그야말로 네가 좋아하는 산책이라도 하듯 흥얼거리며 국토를 가로지른 셈이야. 조선 사람들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을 거야. 마치 태풍이 지나가듯 일본군은 조선을 휩쓸었고 그 일파가 지나간 뒤에야 고개를 기웃거리며 뭘 어떻게 해야 하나 궁리라도 할 수 있었을 테니까.
일본군은 한양을 목표로 줄달음쳤기 때문에 충청도 반쪽과 전라도 전역은 일본군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어. 문제는 당시 조선은 북방을 제외하면 군대라고 이름할 집단이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했다는 거. 전라 감사 이광은 문신이었어. 그는 전쟁이 터지자 전라도 병력을 끌어모아 무조건 서울로 길을 잡았는데 공주에서 임금이 피난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는 “나 어떡해”를 부르며 전주로 돌아와 버려. 전라도 사람들 보기에 영 ‘앗싸리’하지 못한 행동이었지. 전설에 따르면 이때 전라도 태인 출신의 무장 백광언 같은 사람들은 칼을 뽑아들고 전라 감사 이광을 윽박질렀다고 해. “이런 느자구없는 감사또 같으니라고. 죽고 싶어 환장했는개벼잉. 상감이 피난을 갔으면 당신도 피난가겄다 이것이여? ”
이광은 또 동원령을 내린다. 이때는 해남 땅끝마을부터 전라도 첫고을 여산까지 수십 개 고을로부터 수만 명의 장정들이 몰려들게 돼. 워낙 물산 풍부한 땅이라 군수물자도 풍부해서 군대의 행진은 수십 리에 이르고 그 군수품을 실은 수레들도 그만했다고 하지. 그런데 이게 군대의 행군으로 보였느냐. 유성룡은 그 이동을 ‘양떼’에 비유했어. 즉 전쟁을 할 줄도, 생각도 별로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이었던 거야. 충청도 병력도 합류했고 도망쳐 온 경상감사도 함류해서 5만의 대군을 형성하게 돼. 좀 거짓말 보태서 10만 대군으로 부르기도 했지.
말이 5만 명이지 조선 건국 이래 그 정도의 군대(?)가 집결한 예는 없었어. 사람의 머리 수라는 건 없던 용기도 내게 만든다. 왕년에 가투할 때 폴짝 폴짝 뒷면서 자기 뒤의 시위대 수를 헤아리면서 “무지하게 많아!”를 외치던 여학생들 기억나지? 아마 그때 조선군들도 그랬을 거야. “와 징허게 많다. ” “인자 왜놈들만 밟아뿌면 되능거 아이가.” “끝이 안보이누먼유.”
백성들도 이 장관에 감격하여 함께 걷기도 하고 환호하기도 하고 마구 뒤섞였다가 널부러졌다가....... 하지만 한때 감사에게 칼을 들이댔다는 백광언은 불안해 하고 있었어. “이것들이 군대여 군상이여. 감사또 병력을 좀 나눕시다. 그러면 최소한 만판 깨지지는 않을 것잉게.” 그러나 문관 이광에게 이 말은 제대로 먹히지 않았어. “아니 우리는 머리 수가 희망인데 왜 군대를 나눠?” 전략도 없고 전술도 세우지 않은 ‘어떻게 되겠지’의 머릿수 군단은 그렇게 수원까지 이르렀어. 그 인근에서 조선군은 처음으로 일본군과 마주친다. 수십 명 규모의 정찰대 또는 경비병 수준의 일본군들이었지.
수십 명 일본군이 아무리 용감해도 5만 대군 앞에서 기가 질리지 않을 수 없었지. 이광은 모처럼 호기롭게 외친다. “저놈들을 모두 목을 쳐라.” 백광언은 쓸데없는 싸움 말자고 설득하지만 이광은 화를 낸다. 속으로 그랬겠지. ‘이놈아 내 앞에서 칼 들고 설칠 때는 언제고 싸울 때 되니까 꽁무니빼냐?’ 결국 백광언은 돌격해 들어가서 일본군 10여 명을 죽인다. 하지만 그게 승리의 다였어. 수백 명의 선봉대는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는데 이때 일본군의 구원군 일부가 백광언 등의 배후를 치면서 몰살당하고 말아. 백광언도 이때 스물 두 명의 일본군을 홀로 죽인 뒤 쓰러졌다고 하지.
그래도 조선군은 5만 명이었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광은 북상했고 오늘날 광교산 근처, 그러니까 아까 말한 화포가 발굴된 그 근처까지 이동했지. 온 들판이 다 조선군이었어. 거기서 야영을 하고 해가 뜨자 수만 명의 장정들은 나무를 해 오고 솥에 물을 붓기 시작해. 밥은 먹고 다녀야지. 그런데 이 모습을 일본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서 탤런트 김명수가 열연한 그 장수인데.... 거기서는 너무 말도 안되는 설정을 해 놔서) 였어. 그는 불과 1천 6백 명 정도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지. 그는 수만 명이 어울려서 밥 짓는 장관을 보더니 재미있는 명령을 내린다.
“조선군들은 우리 복장에 익숙지 못하다. 가면을 쓴 우리 기병 몇 명을 돌격시켜라.”
뿔도 길다랗게 달린 투구에 요상하게 다른 갑옷을 챙겨 입은 기병 몇 명이 백마를 달려 조선 진영을 향했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이 백마 탄 괴물에 밥 지어 먹던 조선 ‘군대’는 큰 혼란에 빠진다. 저게 사람이냐 귀신이냐. 5명은 마음대로 5만 명 사이를 휘저었고 이를 본 와키자카는 콧노래를 부르며 휘하 전 병력에게 돌격을 소리쳐. 우리가 열 번 싸워 세 번 겨우 이긴다는 일본군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내려갔는데 거짓말처럼 5만 대군은 ‘산이 무너지듯’ 결딴이 나고 말아. 마치 1987년 7월 이한열 장례식 때 시청앞을 메운 100만 군중이 지랄탄 몇 방으로 깨끗이 사라지던 모습을 생각하면 될 거야.
일본군도 그 기록에서 조선군을 ‘섬멸’한 게 아니라 조선군을 ‘궤주’시켰다, 즉 쫓아 버렸다고 표현한 것처럼 제대로 된 전투는 없었어. 정신을 조금만 차리면 5만 대군이 1천 6백명을 폭 싸서 녹여 버리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나마 병력을 유지시키며 후퇴한 몇 몇 장수들 (권율,황진 등) 외에는 장수들이 앞장서서 투구 팽개치고 무기 버리고 도망을 가 버려.
와키자카는 정말 장관을 보았을 거야. 눈 앞에 펼쳐져 있던 사람의 바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모세의 기적’이 연출된 거 아니겠어. 5만 대군이 먹던 쌀과 무기와 옷과 전쟁 도구들은 몽땅 일본군의 소유가 됐고 주체를 못한 일본군은 그 모두를 태워 버리고 낄낄대며 돌아선다. 이게 우리 역사상 최악의 패전 중 하나라 할 용인 전투가 된다. 그때 버려진 화포, 여차하면 불을 당길 준비를 완료하고 있던 화포는 포병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후 땅에 묻혀 수백 년 뒤의 포크레인 삽질이 그에 닿기까지 잠자게 된 거고.
언젠가 수원 촬영갔다가 그 아파트 공사장에서 나왔다는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공간을 들른 적이 있다. 그때 문제의 화포를 보면서 좀 복잡한 생각이 들었더랬다. 세계에서 가장 용감하게 싸울 줄도 알지만 가끔은 세계에서 가장 우습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는 건 이제나 그제나 마찬가지구나 싶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