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 주인공 최용신과 김학준
“여러분은 학교를 졸업하면 양복을 갈아붙이고 의자를 타고 앉아서 월급이나 타 먹으려는 공상브터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 남녀가 총동원을 해서 둥쳐 매고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서 우리의 농촌 어촌 산촌을 붙들지 않으면 그네들을 위해서 한몸을 희생해 붙들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거듭나지 못합니다.”라고 열변을 토하는 여학생 채영신과 그를 보고 호감을 품는 남자 박동혁. 뭐 이쯤 되면 영민한 너는 “상록수?” 하면서 잘난 체 팔짱을 끼겠지.
그래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한 대목이다. 1936년 8월 13일 동아일보 창사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이었지. 이 소설을 쓴 심훈은 목돈을 손에 쥐었지. 소 한 마리가 60원 할 때 500원이라는 현상금을 받았으니까.
이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과 박동혁에는 실제 모델이 있었지. 채영신은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당시만 해도 꽤나 오지였던 안산 샘골에 들어와 그야말로 “한몸을 희생해 붙들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어른들을 설득하고 학교를 세우고 일본 경찰의 견제에 악착같이 맞섰던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을 모델로 했고 박동혁은 몇 사람이 중첩되긴 했지만 가장 중심에 선 인물은 역시 함경남도 원산 출신의 김학준이라는 사람이었지.
최용신이 샘골에서 어떤 일을 했고 어떻게 죽어갔는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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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준과 최용신은 앞서 말했듯 함경도 원산 사람들이야. 조혼의 풍습이 채 가시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당시 10대 중반은 요즘의 10대 중반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던 것 같다. 10대 중반에 둘은 결혼을 약속했고 양가 집안도 인정했다고 하며 최용신은 김학준에게 10년 동안 조선을 위해 봉사한 후 결혼하고 이후는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고 하니까 말이야. 김학준은 그를 응낙했고. 요즘 같으면 중2병이 어쩌고 할 나인데. 최용신의 동료의 증언
“원산서 같이 자란 청년이 있는데 그 사람과 첫사랑을 했대요. 현재 그 사람은 일본 가서 공부하고 있는데, 자기는 얼굴이 이러니··· 그 사람은 앞으로 크게 일할 사람인데, 결혼을 해야 할지········· 자기가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고 생각한대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미안하다고요. 원산 있을 때 최용신씨는 부자 집 딸이고 그 남자는 어려웠대요. 그래서 아무리 외모가 그렇더라도 최용신 가정은 허락을 안 했대요.” (홍석창 목사 블로그에서 펌) 최용신은 천연두를 앓아 ‘곰보’였거든. 어쩌면 10년이란 기한은 김학준에게 자신을 떠날 수 있는 시간을 준 건지도 몰라.
최용신은 안산 샘골에서 여러 사람을 변화시키는 농촌 계몽 운동의 전범을 세운다. 그녀가 장 협착증 등으로 인해 세상을 떴을 때 샘골 주변의 농민들은 물론 상시 그녀를 감시하고 괴롭히던 일본 순사까지도 장례식에 참석해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하니까 말이야.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고 아꼈고 그 후 수십 년 동안 ‘최용신 선생님’을 잊지 못했던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며 세상을 떴다고 해. 그녀는 죽기 전에 여러 말을 남기는데 그 가운데에는 약혼자 김학준에 대한 애틋한 아쉬움도 있었지.
“김군과 약혼한 후 십 년되는 금년 사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하였는데 살아나지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나.”
여기서의 김군이란 바로 김학준이었지. 원산에서 온 최용신의 부모는 원산으로 시신을 옮겨 가려 했지만 노인부터 아이들까지 그 부모 앞에 무릎 꿇고 빌었단다. “제발 최선생님을 우리 곁에 두어 줍시오.” 부모는 딸의 샘골 안장에 동의했고 최용신은 영원히 안산에서 잠들게 되지. 교통이 불편하고 통신이 여의치 않던 시기, 일본 동경대 법대 재학 중이던 약혼자 김학준은 장례가 끝나고 매장이 시작될 즈음에야 숨이 턱에 닿아 안산 샘골에 도착했다고 해. 10년을 기다린 약혼자의 죽음 앞에서 김학준은 하늘이 무너졌어,.
도착하자마자 그는 잠시 소리쳐 기도하더니 와락 달려들어 덮어두었던 관 뚜껑을 열어 젖히고 시신을 끌어내려 했어. 영혼결혼식이라도 올리고 묻겠다는 거였지. 사람들은 기절초풍을 하면서도 눈물 흘리며 그를 만류했는데 김학준은 통곡하며 자신의 외투를 벗는다. 그 외투는 최용신이 봉급의 일부를 조금씩 떼어서 사 준 것이었다고 해. 사람들의 통곡 속에 흙이 뿌려지는 최용신의 관 위에 10년을 기다리고 평생을 약속했던 연인의 외투가 덮인다.
그 후 김학준은 함흥의 영생여고에 재직하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윤재 등 몇 명의 동료들이 감방에서 죽어가는 참혹한 감옥살이 속에서 김학준은 짐짓 안산쪽을 바라보며 용신의 이름을 불렀을 거다. “용신 보고 있소? 나 당신 뜻 따르다가 이렇게 감옥에 있소.” 김학준은 다른 여성과 결혼하게 되는데 어떤 자료에 따르면 그 아내 길금복은 최용신이 아끼던 제자였다고 해. 즉 최용신과 김학준이 어떤 사이였는지, 김학준이 최용신을 어떻게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
1961년 신상옥 감독이 주연하고 당대의 여배우 최은희가 주연한 <상록수>가 개봉된 뒤 김학준은 자신이 <상록수> 속 박동혁의 모델임을 밝혀 화제가 됐고 이후 최용신의 유지가 서린 샘골 마을로 찾아온다. 아내 길금복도 적극 지지했다고 하네. 그곳에서 김학준은 천곡(泉谷)학원, 즉 샘골학원 이사장을 맡아 최용신의 뜻을 잇고자 했고 마을 사람들은 최용신에 대한 존경심을 잊지 않고 김학준을 반가이 맞았다고 해. 김학준 역시 최용신의 약혼자다운 사람이어서 최용신 기념관을 세운다 하여 마을 사람들이 수백평 땅을 내놓자 원래 계획보다 축소해서 50평으로 줄여 지었고, 최용신 기념사업보다도 학교 일에 더 열심을 보여 사람들을 감동시켰다는군.
조선대학교에서 교편을 오래 잡았던 김학준은 1975년 지병인 심장병으로 죽었다. 옛 연인의 제자인 아내와 2남 3녀의 자녀를 뒀는데 그는 뜻밖의 유언을 남겨. 옛 약혼자 곁에 묻히게 해 달라는 거였지. 주변에서도 “처녀로 죽은 최용신 곁에 왜 다른 여자의 남편이 가느냐?”고 쑥덕거림도 있었다고 하지만 김학준의 부인의 결단으로 김학준은 죽어서나마 옛 여인의 곁에 묻히게 됐어. 아마 이렇게 되면 어느 여자나 “지금까지 나는 껍데기였단 말인가.” 하고 자괴할 게고 미친 듯이 화를 내는 게 정상일 거다. 입장 바꿔 남자라고 하면 옛 연인의 곁에 묻히겠다는 마누라라면 들어주기는커녕 그 유골을 동해바다에 뿌려 버리지 않을까.
하지만 길금복 역시 김학준의 아내였어. 그리고 일설에 따르면 최용신의 제자였지. 그녀의 지지와 마을 사람들의 환영 속에 단명한 처녀와 그녀를 평생 그리워한 유부남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누워 있을 수 있게 됐다. 김학준은 저승에서 만난 최용신에게 이렇게 얘기했을 수도 있겠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박동혁이 그랬잖소. ‘내가 죽는 날까지 당신이 못하고 간 일까지 두 몫을 하리라’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은 했는데 어찌 맘에 들 지는 모르겠소.” 그럼 곰보 얼굴에 환한 웃음을 드리우면서 최용신이 답했겠지. “내가 아이들에게 입이 닳도록 한 얘기가 뭐였나요. ‘누구든지 학교로 오너라. 배우고야 무슨 일이든지 한다.’ 평생 아이들, 학생들 가르치며 살았잖아요. 내몫까지 살아줘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