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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9월 21일 오마니! 남북이산가족 첫 상봉

작성자유노바교|작성시간14.09.21|조회수169 목록 댓글 0

1985921일 오마니! 남북이산가족 첫 상봉

 

1983KBS에서 몇 달에 걸쳐 방송된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그 정치적 의도나 전후 사정 모두를 뛰어넘은 방송 사상 일대 사건이었다. 애초에 일일 특집으로 기획된 프로그램이 그렇게 오랫 동안 한국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며 수많은 밤들을 하얗게 지새울 줄은 누구도 몰랐다. 전쟁이 끝난 지 30. 설운도의 출세작 가사대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잃어버린 30년 세월동안 먹고 살기 바빠, 아니 살아남기 위해 가슴 깊숙이 치워 두었던 이산의 아픔들이 마치 화산처럼 폭발하여 전 국토를 뒤덮었다. 전국 각지를 연결하여 분할된 화면 속에 기억의 퍼즐을 맞춰 가다가 맞아 맞아!”를 연발하다가 마침내 미친 듯이 울음을 터뜨리던 사람들의 모습은 어느 드라마보다, 다큐멘터리보다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1만여명의 이산가족이 만났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고, 특히 남과 북으로 갈린 이산가족들에게는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안겨 준 방송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렇게라도 찾을 희망조차 없었기 때문에. 1985921일 그 커다란 고통의 극히 일부나마, 최소한이나마 위안하는 날이 왔다. 남북이산가족들이 최초로 상봉한 것이다.

 

전두환에게 나는 대통령 호칭을 붙이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붙여 준다. 아웅산에서 북한의 폭탄 테러에 죽을 뻔 하고도 다음 해 통 크게북한의 수해 물자 지원을 받아들여 대화의 물꼬를 트고 장세동을 보내고 허담을 맞이하면서 그 통로를 넓혀간 끝에 예술단 상호 방문 공연과 이산가족 상봉까지 끌어낸 것은 전두환 대통령의 치적이라고 할 만하기 때문이다. 그는 적어도 분단국가의 대통령으로서의 마지막 책무까지는 버리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분단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

 

상봉 실현 이전의 과정은 무척이나 험난했다. 적십자 회담을 위해 남한 대표단이 북한으로 갔고 보도진도 따라갔는데 이때 남한 사람들은 북한의 모습을 남한 tv 취재진의 카메라를 통해서 생생하게 보게 된다. “해수욕이라는 말을 모르는 북한 사람들에게 해수욕 갔다 왔어요?”를 물어 묘향산으로 갔다 왔어요.”라는 답을 끌어내 북한 사람들이 거짓말한다는 식의 방송을 한 것은 왜곡된 시각의 단면일 뿐이었다. 북한 측은 남한 대표 앞에서 착검까지 한 소총을 들고 벌이는 전투적 매스게임을 펼쳐 보여 남한측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우를 범했다. 남한 대표는 퇴장해 버렸고 남북은 서로 무례하다고 책상을 쳤다.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들었다 놨다 하는 시간이 지나고 1985921일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날은 왔다. 북한의 이산가족 50명이 서울로 왔고 우리측 50명도 휴전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뒷날 인기 탤런트가 되는 박상원이 무용수로서 참여했던 예술단도 북으로 갔고 북한 예술단도 남으로 왔지만 역시 관심의 초점은 이산가족 상봉이었다.

 

조용필이 부른 일편단심 민들레야노래의 가사는 한 할머니가 조용필에게 보낸 가사에 곡을 붙인 것이다. 경기여고를 졸업한 엘리트 여성이었지만 6.25 때 남편이 납북되면서 고생길에 접어든다, 포목상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3남매를 키워낸 할머니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신문 기자를 통해 조용필에게 전했고 감동한 조용필은 이 곡에 곡을 붙였다. 1984923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이 노래를 지은 이주현 할머니 (신문상에는 이단씨로 나오고 이 노래의 작사자로 소개된다)도 방문단에 끼어서 동생을 만난다. 남편은 납북돼 죽었지만 동생은 북한의 인민배우가 되어 있었다.

 

첫 이산가족 상봉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사진이 있다. 자신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노모를 한 아들이 눈물을 철철 흘리며 쳐다보는 사진. 그는 오마니를 부르짖으며 어머니의 잃어버린 기억을 끌어내려 애썼다. “오마니 아들 형석이가 왔어요. 형석이가 왔단 말입네다.”  그래도 어머니가 무덤덤하자 그는 자신의 눈을 들이댄다. “오마니 어렸을 때 돌장난 하다가 다쳤잖아요.” 한참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얼굴은 모르겠고 이름은 알겠어.” 이미 치매에 접어들어 있던 어머니의 눈가에도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형석아! 부르짖으며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헤어지던 날 아들은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리며 울먹인다. “다시 뵙지는 못하겠습니다.”  꼭 다시 만나십시다라는 빈말조차 못하는 슬픈 이별.

 

지학순 주교는 방북해서 여동생을 만난다. 박정희 정권 때 구속되기까지 했던 그는 관계당국에 찾아가 사정한다. 나를 좀 끼워 주시오. 그가 만나고 싶었던 것은 여동생 지용화였다. 어릴 적 신앙심 깊었던 여동생 지용화는 눈물의 상봉 와중에서 지학순 주교에게 이렇게 쏘아부친다. “우리는 살아서 천당 가는데 오빠는 죽어서 천당을 가겠다니 돌았다" 충격을 받은 지학순 주교는 돌아온 이후 너무나 많이, 그리고 자주 울어 눈물의 주교라는 별명까지 얻었고 머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하나님께.....” 라고 말을 꺼내는 남의 형제에게 너 예수쟁이 다 됐구나. 하나님은 무슨. 수령님 은덕이다.”라고 북의 형제가 면박을 주기도 했다.

 

그래도, 그래도 상봉의 그 순간 태연한 사람은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이념이고 사상이고 수령님이고 하나님이고 저만치 밀어두고 그들은 헤어졌던 혈육의 아픔과 만남의 기쁨에 몸을 내맡겼다. 무엇이 그것보다 더 소중하단 말인가. 그로부터도 또 정확히 30년이 흐른 오늘, 그나마 그때는 중년이던 이산가족들이 이제는 여든 아흔을 헤아리고 있는데 그나마 죽기 전에 한 번 혈육을 볼 양으로 희망에 부푼 사람들의 소망보다 더 무거운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8시 뉴스에 등장하는 북한 아나운서의 목덜미를 잡아 땅에 패대기치고 싶은 이유다. 남한이 중상모략을 하면 했고 이석기같은 시대착오자를 잡아 가뒀으면 가뒀지 당신들이 저들의 희망을 이런 식으로 인질삼을 권리가 어디 있으며 그렇게 해서 얻는 이익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부르짖고 싶기 때문이다.

 

 

1985921일 상봉했던 이산가족들 중 적어도 반 수는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남한 어머니에게 북한 아들이 엎디어 울먹인 다시 뵐 수 없겠지요.”는 그대로 수십년 간 참 명제가 되어 버렸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6.25 때 스무살 청년이었다면 이미 80대 중반이 된다. 이미 부모 자식간 상봉 케이스는 그야말로 얼마 남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안타까움을 이런 식으로 짓밟아 놓고 무슨 얼어죽을 통일이냐. 도대체 무슨 낯빛으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를 수 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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