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혈전 1
임진왜란 3대 대첩이 아닌 것은? 하는 문제 기억나냐? 교과서 속의 3대첩은 행주,진주, 한산대첩이지만 행주 대첩의 지휘관 권율도 자신의 공으로 행주보다는 이치 전투를 들었고 그 외에도 ‘대첩’들은 많은데 꼭 그걸 3대첩이라고 정한 근거가 뭔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물론 3대첩의 의미는 절대로 작지 않지. 한산대첩과 행주는 가전사에 나왔었으니 생략하고 오늘 얘기할 진주성 전투로 들어가 보자고.
일단 충무공부터. 여기서 말하는 충무공은 이순신이 아니야. 역시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장군을 말하는 거지. 진주목사 김시민이야. 그는 오늘날 독립기념관이 서 있는 충청도 천안시 목천면 출신이야. 요즘 병천 순대로 유명.... 음 이 얘기할 때는 아닌 거 같고 아버지 김충갑은 조광조의 문인으로서 퇴계에게서도 사사받았던 이름 높은 유학자였지. 그 형제들도 다 과거에 올랐다고 했으니 공자왈 맹자왈 소리와 먹 냄새가 집에 그득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집안에 좀 별종이 태어났으니 그게 김시민이야.
전설에 따르면 이 소년 김시민은 아홉 살 때 동네 가축들을 괴롭히던 큰 뱀 (이무기?)을 활로 쏘아 잡았다고 하고 수백년 뒤까지도 그 동네 사람들이 “김시민 장군이 활 쏘아 뱀 잡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고 하니 만만한 소년은 아니었던 것 같아. 이 소년은 문방사우보다는 활과 친했고 시를 쓰고 경전 읽기보다는 칼을 휘두르며 말 달리기를 더 좋아했어. 그래서 과거도 문과가 아닌 무과로 풀린다. 작가 김성한의 <임진왜란>에 보면 그 어머니가 노발대발하여 “문과 집안에 무과가 웬말이냐”고 하여 무려 10여년간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 불 같고 칼 같은 성격을 자식에게 물려 준 모양이야.
군관으로 있던 김시민은 병조판서와 트러블을 일으키게 돼. 병조판서는 일도 일이지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면서 감히 판서 앞에서 하나도 기가 죽지 않는 군관에게 부아가 치민다. 그래서 아마 이런 류의 말을 한 거 같아. “대가리에 쓴 전립(조선 시대 군모)벗어 버려라. 너같은 넘이 무슨 군관이라고. 힘만 세고 미련한 놈은 장수 자격 없다.” 직장 생활에서 흔히 있는 깨짐이고 사후 욕 한 사발과 술 한 잔으로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굴욕인데 김시민은 그야말로 하늘같은 판서 앞에서 깽판을 쳐 버린다.
그는 전립을 벗어 땅에 내동댕이치고는 밟아 버리면서 이렇게 부르짖었던 거야. “이 전립 따위가 아니라면 장부가 남에게 모욕 받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뭉개진 건 애꿎은 전립만이 아니었겠지. 병조판서의 위엄도 같이 짓밟힌 거지. 하늘같은 병조판서 앞에서 ‘배를 짼’ 김시민쯤 되면 판서에게 이렇게 얘기했을지도 모르지. “말조심하셔유 판서 나으리. 벼락이라는 게 하늘애서만 치는 게 아니우. ” 한동안 김시민은 백수가 된다.
그런데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고 전쟁 협박도 끊이지 않으면서 무관들의 남부 지역 배치가 이뤄지면서 김시민의 이름이 거론된다. 1583년 여진족 니탕개가 일으킨 난 때 참전했던 무장들은 거의 모두 기용된다. 이순신, 김시민, 원균, 이억기 등이 그 ‘니탕개 리스트’ 출신들이지. 그는 진주판관으로 임명돼서 진주로 내려간다. 그때 그의 부임 행차를 보고 모친은 김시민을 용서하고 만나 주었다고 해. “문관만 벼슬인 줄 알았더니 무관도 괜찮구나.” (김성한의 <임진왜란> 중)
즉 진주목사가 아닌 진주판관으로 진주에 온 김시민. 전쟁이 터지고 진주 목사 이경은 지리산으로 몸을 피했는데 판관도 그를 따라야 했지. 이경이 산에서 병사한 뒤 진주목사에 오른 그는 그때껏 쌓아온 무장으로서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해. 당시 왜군은 경상 좌도를 주로 장악하고 있었는데 점점 낙동강 넘어 서쪽으로 슬금슬금 발을 들이밀었지. 이들을 혼내 준게 경상 우도의 의병들, 즉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대였는데 김시민은 이들과 함께 연합작전을 펴리며 고성, 창원 일대까지 들어온 일본군을 격파해. 이런 일이 반복되자 경상도 주둔 일본군은 진주를 주목하게 된다.
“진주에노 조선군의 배후 기지이자 주력부대가 있다데스. 거기다 진주만 차지하면 젠라도로 진출하는 것도 대끼리 쉬워진다데스. ” 이렇게 돼서 진주성 공격을 위한 3만 원정군이 편성되게 돼. 지금까지 일본군이 소규모 선발대나 별동대의 낙동강의 잔물결이었다면 이제 대군의 쓰나미가 본격적으로 경상 우도를 덮치게 됐지. 이 부대를 이끈 왜장 호소가와 다다오키의 후손이 일본의 수상이었던 호소가와 모리히로라는 건 하나의 팁.
조선군의 주력부대가 있다는 건 일본군의 오버였어. 김시민의 휘하에는 3천 8백명 정도의 군대가 있을 뿐이었거든. 김시민이 꾸준히 훈련시키고 실전에도 여러 번 단련된 정예병이긴 했지만 일본군의 1/5에서 1/7 정도의 수였지. 일본군은 거침없이 진주로 쇄도한다. 그 와중에 창원에서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이끄는 조선군이 막아 봤지만 괴멸당해. 유숭인도 괜찮은 지휘관으로 이순신이 경상도 해역에 출동했을 때 유숭인이 1천여 기병대를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난중일기에 남기기도 했지. 하지만 유숭인도 대군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어. 남은 군대를 이끌고 진주성 동문 앞에 이른 유숭인 부대는 당연하게 외친다.
“성문을 열어라. 경상 우병사 영감이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 성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어. 군졸들이 경상 우병사 현신을 여러번 외쳐도 진주성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어. 마침내 경상 우병사 유숭인이 직접 나선다. “진주 목사 나오라. 나는 유숭인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그제야 진주 목사 김시민이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왜 성문을 열지 않는 거요?” 유숭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어. 이미 일본군은 뒷덜미를 움켜잡을 듯 다가서고 있었고 자신의 패잔병 부대는 더 이상 도망갈 힘도 없을 만큼 지쳐 있었으니까. 하지만 김시민은 성문을 열지 않아. “성은 제가 지킬 테니 밖에서 응원해 주십시오.” 병사는 종2품, 목사는 정3품. 벼슬도 병사가 위였고 특히 전시에는 병마절도사는 경상우도의 모든 병력의 총사령관이었어. 그러나 목사가 병사를 내쳐 버리는 순간.
만약 유숭인이 차후에 문제삼는다면 김시민은 전시 명령 불복종으로 참형에 처해져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어. 하지만 김시민은 고개를 젓는다. 유숭인이 거느린 1천 군대가 절실하기도 했지만 눈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려. 이유는 다양할 수 있겠지.
가장 큰 것은 자신이 조련하고 함께 싸운 군대의 지휘권에 혼란이 일어난다면 치명적이라는 계산이었을 거야. 창원성을 맥없이 잃은 유숭인의 역량도 미심쩍었을 게고, 유숭인 부대를 성에 들일 때 일어날 혼란 때 일본군이 들이닥친다면 싸우지도 못하고 성이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도 감안됐을 것이고. 하나 더한다면 김시민은 일종의 시위를 한 것이지 않을까. 일본군이 온다는 소식에 공황 상태에 빠졌던 성 사람들에게 “나도 목숨을 걸었다. 행여 성 사수에 방해될까 병사 영감을 내쫓았다.”는 메시지를 주려던 것이 아닐까. 유숭인 부대는 일본군에 포위돼서 전멸당한다. 일찍이 병조판서 앞에서도 배를 쨌던 김시민은 그 참혹한 최후마저 성 안의 사람들의 각오를 다지는 데에 이용했는지도 몰라. 이제는 싸울 수 밖에 없다.
임진왜란을 통틀어, 아니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현실주의자 곽재우, 후일 2차 진주성 혈전 때 지는 싸움은 안하겠다고 끝내 입성을 거부했던 그는 이즈음 진주성 지원에 나서고 있었는데 이렇게 한 마디 했다고 해. “온전히 성을 지킬 수 있을만한 계책이다. 진주 사람들의 복이로다.” 김시민은 용맹하고 불 같은 성격의 무장이었지만 곽재우의 현실 감각도 갖추고 있었어.
그는 화약 수백 근을 미리 만들어 놨고 심지어 일본군의 조총을 본뜬 개인화기도 만들어 놨으며 하다못해 끓는 물을 적에게 들이붓기 위해 물을 끓일 솥까지 걸어 두고 있었어. 행주산성은 사실 원치 않는 싸움터에서 어쩔 수 없는 싸움에 내몰려 악으로 깡으로 이긴 전투였다면 진주성은 임진왜란 중 몇 안 되는 준비된 공성전이었고 그 전투는 전쟁의 모든 양상을 다 보여 주게 돼. 마침내 1592년 음력 10월 5일 일본군이 진주성을 향해 치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