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혈전 3
김시양이라는 사람 (김시민의 서제(庶弟)라고도 하는데)이 쓴 자해필담이라는 책에서 김시민은 이렇게 개탄했다고 하네. “평화가 200년 계속되는 동안 백성은 군사를 알지 못하고 바람에 날리듯 무너짐에 감히 무기를 잡을 자 없도다.” 뭐 50년 동안 냉전 상태에서 대치하고도 잠항 능력 없는 잠수함을 사들이고 사격을 하는데 불발이 나는 대포로 전방을 지키고 있는 나라도 있지만 말이야. 어쨌든 200년 전쟁 없던 평화의 나라의 무장 김시민은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어.
그 가운데 으뜸은 역시 조선이 일본에 비해 비교우위에 있던 화약 무기였어. 개인화기야 일본에 미치지 못했지만 일본군이 갖지 못했던 화포, 200년 전 최무선이 화약무기를 최초로 해전에 사용하여 왜구 함대를 불태운 이래 천자지자 현자 황자 등 다양하게 개량돼 왔던 그 화포. 김시민은 그 화포에 사활을 걸었고 무려 500근 (150근이라는 기록도)을 비축해 두고 있었지. 김시민은 화살이 떨어져 간다는 걸 알면서도 당황하지 않았어.
화살이 가장 많이 퍼부어진 건 왜군이 끌고 온 공성용 누각이었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적이야 끓는 물 붓고 돌로 찍으면 되지만 누각 위에서 조총을 쏴 대는 적병들을 상대하려면 화살을 쏠 수 밖에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왜군은 누각에 물을 끼얹어 불화살도 먹히지 않게 만들어 놨지. 김시민이 필사적으로 긁어모으고 만들어 놓은 화약은 이때 빛을 발한다. “현자총통! 누각을 겨눠라. 누각을 부숴라. ” 일본군 조총병들도 아가리를 내민 화포를 움직이는 조선군을 향해 총알을 퍼부었지만 조선군의 손이 더 빨랐어. 화살 수백 발을 쏘아야 불이 붙던 누각들이 현자총통 한 방에 산산조각나서 무너져 갔다.
진주성은 남쪽은 남강으로 그리고 너머지는 개천과 해자 (성벽 주위에 판 못)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일본군은 공격을 쉽게 하기 위해 해자와 개천을 짚과 송판으로 메우려고 했어. 김시민은 웬만큼 짚과 송판이 쌓여 일본군이 걸어서 건널 지경이 되자 또 다시 화약을 사용한다. 장작더미에 화약을 넣고 불을 붙여 그 위에 떨어뜨린 거야. 그냥 장작불로만은 타지 않을 젖은 송판과 짚들도 화약의 폭발에 이은 화기에는 활활 불타 올랐고 일본군들은 그대로 불바다 속의 탄 생선으로 죽어간다. 일본군이 사다리를 조밀하게 엮고 그 위에 그물을 촘촘하게 둘러친 산대를 과시하며 성을 위압하자 조선군은 자루가 긴 낫과 도끼를 동원해서 벼 베듯 해 버렸고 격전의 와중에 화살을 잡아당기는 모양의 인형을 성벽에 세워 놓고 일본군의 총알을 집중시키는 변칙(?)을 쓰기도 했다.
임기응변이라는 것도 준비된 사람이 할 수 있는 법이지. 컨닝도 실력이 있어야 하고 말이야. 진주성 전투에서 발휘된 조선군의 역량은 의로움이나 용감함에서 나온 게 아니라 철저한 준비에서 나왔어. 전투 와중에 짚으로 인형 만들 시간이 있었겠어? 만들어져 있었던 거야. 김시민은 그런 식으로 상대방의 총탄 소비를 유도하고 이쪽의 장비를 아끼려고 했었던 거야. 앞서 1에서 얘기했던 짚단 인형들이 병력의 많음만 과시하려던 건 아니었다고. 이런 준비가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상관을 내치면서까지 자신의 지휘권을 지키려고 했던 거 아닐까. 김시민은 격전의 와중에 곳곳을 누비면서 병사들에게 물을 먹이고 눈물 젖은 호령을 하면서 사기를 돋웠어. “죽을 땅에 빠지고서야 살 길이 열린다고 했다. 싸워라. 싸워라.”
일본군은 일단 물러선 뒤 주변의 의병 소탕 작전에 나서. 숫자는 얼마 안되는 의병대 같지만 하도 귀찮게 하니 일단 이들부터 일소하고 보자는 마음이었지만 원래 대군으로 게릴라를 공격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그렇게 소규모 전투 외에는 소강 상태를 보이던 날 밤, 일본군 진영이 갑자기 부산해진다. 횃불을 켜고 짐을 꾸리고 천막을 거두고...... 그러나 진주성은 환호하지 않았어. “왜놈들이 물러간다!” 성벽 위의 조선군들은 펄쩍펄쩍 뛰고 성내가 조용하지 않아야 마땅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하지만 일본군은 철수하는 게 아니었지. 아득한 옛날 트로이 공방전에서 그리스군이 철수하는 척 하면서 트로이의 뒤통수를 친 방식으로 진주성을 기습하려는 거였어. 조선군은 그걸 알고 있었지.
그로부터 몇 시간 전 한 아이가 진주성 북문에 뛰어든다. 며칠 전에 항복하라고 울부짖던 소년 중의 하나였어. 하나 까먹은 게 있는데 일본군들은 조선 팔도에서 사로잡은 아이들을 다 데리고 있었어. 즉 조선 팔도가 다 넘어갔다는 걸 과시하려는 심리전의 도구였지. 그 중의 한 아이가 탈출해서는 온 진주성민을 살리는 정보를 준 거야.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내일 새벽에 총공격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식의 현란한 페인트 모션 뒤에는 반드시 강력한 한 방이 있게 마련이야.
한창 부산하던 일본군들의 횃불이 꺼졌다. 하지만 조선군들은 눈에 불을 켜고 어둠 속을 지켜 봤다. 무시무시한 침묵과 어둠의 밤. 수만 명이 뒤엉킨 전장이었지만 사방은 조용했어. 조선군들끼리 속삭이는 소리만이 들리던 새벽 3시경. 동문 쪽에서 어느 조선군의 외침이 어둠을 찢었어. “왜놈들이다.” 그리고 불화살이 날았고 어둠 속 곳곳에 불이 지펴지자 마침내 일본군들의 악에 받친 얼굴의 윤곽들이 드러났어. 일본군 3만의 전원 돌격이었어. 마지막 전투라는 예감이 조선과 일본군 양쪽 모두에게 들었을 거야. “도쯔께끼!!!!” (돌격) 요쯔니 시데 즈가와스조! (토막을 내 주겠다) “막아라.” “온다!!!!!”
주공은 동문. 어둠 속에서 일본군은 새까맣게 성벽에 달라붙었어. 원래 공포와 위기감에는 날개가 돋는 법이야. 급박함을 직감한 성 안에서 잠자던 거의 모든 백성들이 성 위로 올라왔어. 김시민은 동문 근처 장대에서 목이 찢어져라 독전을 거듭했고 조선군과 백성들도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싸웠어. 이제는 화살을 아낄 것도 없었고 화약도 있는 대로 불을 붙여 던졌다. 인해전술로 성벽에 달라붙는 일본군에게는 화포도 무용지물. 결국은 백병전으로 화할 수 밖에 없었어. 준비한 돌이 떨어지자 백성들이 관아와 민가의 기왓장을 벗겨 올라왔고 끓일 물을 대다 보니 성 안의 우물마저 말라 버리는 그야말로 결사항전.
그렇게 동문 쪽에서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북문 쪽에서도 변고가 생겼어. 성동격서. 동쪽에 집중하던 것 같은 일본군의 또 다른 본대가 북문으로 기어오른 거야. 대규모 병력의 기습이었고 동문에 집중하던 조선군의 허점을 찌른 탓에 조선군의 전열이 무너져. 마침내 진주성 성벽에 일본군이 오르는데 성공한다. 성벽에 적병이 오른다는 건 하나의 점이 성벽에 찍힌 거야. 그 점들이 많아지면 선이 되고 선이 모여서 면이 된다. 그리고 그 면이 점점 넓어지면서 성문이 뚫리는 거야. 절체절명의 상황. 북문의 조선군들이 흩어져 도망하기 시작해.
하지만 아직은 진주성이 일본의 것이 될 운명이 아니었지. 도망가는 병사들 사이에서 비명과 호령이 동시에 울려 퍼졌어. 북문 수비대장 최덕량이 칼을 휘둘러 도망병의 목을 쳐 버린 거야. 그리고는 호령을 했겠지. “어디로 도망갈 거냐. 진주 남강에 고기밥이 될 거냐. 촉석루에 목을 매달 거냐. 나는 차라리 왜놈 몇 명을 죽이고 죽겠다.” 그렇게만 했으면 대세를 바꾸기 어려웠을 거야. 최덕량은 군관 이눌 , 윤사복 등을 거느리고 성벽을 점거하기 시작한 일본군에게로 단신으로 뛰어든다. 이에 병사들의 발길도 돌아서. 맞다 씨바 이왕 죽을 거. 성벽 위에 올라 반자이 부를 기세이던 일본군들은 별안간 돌아서서 덤비는 조선군에게 삽시간에 썰려 나간다.
그 시간 김시민에게 운명의 시간이 닥치고 있었지. 북문과 다름없이 육박전이 벌어지던 동문 근처에서 분투하던 그를 노리고 쏜 저격병의 총탄에 이마가 뚫리고 만 거야. 당시 일본군에는 이런 임무의 특수부대가 있었다는 생각도 들어. 2차 진주성 전투 때 지휘관 황진도 똑같은 방식으로 전사하니까. 김시민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곤양 군수 이광악이 대신 독전하며 버텼지.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성 밖을 내닫으며 그악스럽게 도쯔께끼를 외치던 일본군 장수 하나가 이광악의 눈에 들어왔어. 이광악은 남은 화살을 그에게 집중했고 쌍견마 (쌍으로 끄는 말)을 타고 달리던 일본군 장수의 심장에 화살이 꽂혀 버린다. 후일 진주성에서 죽은 일본군 장수만 수백 명이라고 일본군 스스로 떠벌였지만 그 중에서도 꽤 중요한 장수였음은 분명해.
마침내 진주성에서 일본군은 물러선다. 하지만 조선군은 추격하지 못했지. 이쪽도 지칠대로 지친 데다가 김시민이 총탄을 맞고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야. 달포 후 김시민은 끝내 세상을 등진다. 진주 사람들은 어버이를 잃은 듯 통곡했다고 해. 먼 훗날 김시민의 조카가 진주 지역을 찾았을 때에도 진주 노인들은 김시민 장군을 그리워하며 눈물지었다고 하니 사람들의 소회가 어떨지를 알 수 있겠지. 그 마음이 수백 년에 걸쳐서도 격세유전이 된 걸까. 얼마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지. 어떤 경로로 흘러들어갔는지 모르되 김시민에게 내리는 공신 교서가 일본 동경의 경매물 목록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어. 진주 시민들을 중심으로 한 여러 사람들이 돈을 모아 이 공신 교서를 국내에 들여왔던 거야.
배알이 뒤틀이면 병조판서 앞에서도 “네가 판서면 판서지!” 하는 양 자신의 군모를 짓밟아 놓는 배짱이 있었고 그 불같은 성미와 더불어 물같은 침착함과 준비성이 있었던 또 하나의 충무공 김시민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일본으로 건너가 있던 자신의 공신 교서를 다시 받아들고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네. 오늘날 진주 시민의 날은 10월 10일이다. 1592년 음력 10월 10일 진주 전투가 끝났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