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명나라에 ‘훈민정음의 존재’를 비밀로 했다.
명나라는 훈민정음 존재를 알았을까?
세종 27년(1445) 1월에 신숙주와 성삼문은 통역하는 손수산 (孫壽山・?~?)과 함께 요동에 있던 명나라 황찬에게 운서를 질문하였다. 조선이란 나라에 훈민정음이 탄생한 지 1년 정도가 지난 때다. 그들이 운서를 질문한 목적은 42년이 지난 성종18년(1487)에 이창신(李昌臣・1449∼?)에 의해 분명해진다.
세종조(世宗朝)에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을 보내어 요동에 가서 황찬(黃瓚)에게 어음(語音)과 자훈(字訓)을 질정(質正)하게 하여《홍무정운(洪武正韻)》과 《사성통고(四聲通考)》등의 책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서 한훈(漢訓)을 대강 알게 되었습니다.
《성종실록》 성종18년(1487) 2월 2일
세종 때 신숙주・성삼문・손수산이 요동에 간 것은 훈민정음 때문에 간 게 아니었다. 그들은 《홍무정운》에 있는 한자의 중국식 발음과 뜻을 배우려 요동에 간 것이다. 《홍무정운》은 한자의 중국식 발음과 뜻을 기록한 운서다. 그러나 명나라 관리로 요동 땅에 귀양 온 황찬은 중국음운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신숙주 등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었다. ‘황찬(黃瓚)’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 2015. 4. 15. 검색.
중국의 《홍무정운》한자를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책이 《동국정운》이다. 세종 29년(1447) 9월 29일에《동국정운》을 완성하였다지만, 이때도 조선에서는《홍무정운》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신숙주・성삼문 등은 세종 31년(1449)에도 조선에 온 중국사신에게 교열한 운서를 질문하였다는 기록이다.
“지금 오는 사신은 다 유자(儒者)이다. 신숙주(申叔舟) 등이 교열한 운서(韻書)를 질정(質正)하게 하고자 하니, 사신이 입경(入京)한 뒤에는 신숙주・성삼문(成三問) 등으로 하여금 태평관(太平館)에 왕래하게 하고, 또 손수산(孫壽山)・임효선(林效善)으로 하여금 통사로 삼게 하라.”
《세종실록》 세종 31년(1449) 12월 28일
세종 32년(1450) 윤1월 1일에 중국사신 예겸과 사마순이 서울에 왔다. 2일 후 그들은 정인지・성삼문・신숙주와 만났다. 성삼문・신숙주 등이 예겸을 만나 《홍무정운》을 가지고 한참 동안 강론하였다는 것은 《홍무정운》을 번역하면서 미진한 부분이 세종 32년(1450)까지도 있었다는 말이다. 문종 때 《동국정운》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예조에서 문종에게 과거 응시생이《동국정운》을 사용하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동국정운(東國正韻)》은 이미 고금(古今)의 운서(韻書)를 참작하여 정한 것이므로 운(韻)을 사용하는 데는 장애(障礙)가 없으니, 빌건대 《예부운(禮部韻)》과 같이 대략 주해(注解)를 내어서 거자(擧子)로 하여금 압운(押韻)하는 데 쓰도록 하소서.
《문종실록》 문종 2년(1452) 4월 4일
이처럼 훈민정음 창제 후에도 조선에서는 한자의 중국식 발음과 뜻은 중요하였고 우리글 보급은 뒷전이었다.
《홍무정운》에 관한 질문 때문에 훈민정음이 중국에 알려지진 않았다. 세종과 문종은 훈민정음 창제 후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중국에 보낸 그들의 부음에 훈민정음에 관한 기록이 없다. 1450년 2월 19일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선에서는 지중추원사 이선(李渲・?~1459) 등을 북경에 보내어 부고를 전하고 시호를 청하였다. 부고를 전하는 글에 《삼강행실》 반포는 있지만, 훈민정음 반포는 없다.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선비들을 모아 고문(顧問)을 갖추었으며, 또, 널리 고금의 충신과 효자·열녀의 사적과 도형기전(圖形紀傳)을 모아 시(詩)와 찬(讚)을 써서 이름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이라 하여 안팎에 반포하니, 궁벽한 촌 동리의 아동부녀(兒童婦女)에 이르기까지 보고 살피지 않는 이가 없게 하였습니다.
《세종실록》 세종 32년(1450) 2월 22일
문종이 1452년 5월 14일에 강녕전에서 세상을 떠나자 조선은 김세민・유수 등을 명에 보내 부음을 전했다. 문종의 부음에도 훈민정음이란 말은 없다.
정통(正統) 10년 을축(乙丑)에 장헌왕이 오래 묵은 병으로써 정사를 능히 보살필 수가 없으므로, 이에 왕을 명하여 여러 가지 정무를 참여 결정하게 했더니, 모든 시위(施爲)가 모두 의리에 합당하였습니다.
《문종실록》 문종 2년(1452) 5월 21일
정통 10년은 세종 27년(1445)이고 훈민정음 반포일은 세종 28년(1446) 9월 29일이다. 따라서 훈민정음 반포는 세종의 명을 받은 문종이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종의 부음에 훈민정음 반포가 없다면 문종의 부음에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명에 보낸 세종과 문종의 업적을 기록한 부음에 훈민정음 또는 언문이란 말이 없다는 것은 조선이 훈민정음의 존재를 명나라에 비밀로 하였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탄생 100주년을 4년 앞둔 중종 34년(1539)이다. 중종 34년(1539)에 조선인 통사 주양우(朱良佑・?~?)가 북경에서 명나라 사람에게 언문을 가르친 일이 문제가 되었다. 대사성 정세호(鄭世虎・1486∼1563)가 중종에게 하는 말을 읽어보자.
“요동(遼東)에 이르러 혼자 방에 있는데 어떤 유생(儒生)이 들어와서 언자로 자기 이름은 주사(周士)이고 자(字)는 상지(尙志)라고 썼습니다. 신이, 이것이 무슨 글인가 하고 물으니, 달자(㺚子)의 글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다시, 누구한테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그대 나라의 주양우(朱良佑)가 가르쳐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전교하였다. “숨기는 일을 가벼이 누설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하는 것이다. 아뢴 대로 (중국에 가는 조선의) 사신에게 이르라.”
《중종실록》 중종 34년(1539) 11월 19일
《국어사전》에 달자는 서북변의 오랑캐라는 뜻으로, 중국 명나라에서 몽골족을 이르던 말이라고 풀이하였다. 언자를 아는 중국 유생이 언자가 어느 나라의 글인지 모르고 있다. 훈민정음 탄생 100년이 지난 뒤에도 조선은 중국에 우리글의 존재를 비밀로 하였다.
윤두수는 아뢰기를, “임기가 통사로 원접사(遠接使)를 따라갔을 적에 언문(諺文)으로 번역된 《소학(小學)》을 가지고 갔었는데 이는 중국 사신의 질문에 대답할 적에 단지 참고해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임기는 이 언문을 중국 사신에게 보여 죄 없는 사람을 죄에 얽어넣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해진 말을 사실이라고 기필할 수는 없다.” 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9년(1576) 8월 4일
세월이 흘러 중국은 명나라가 아닌 청나라가 되었다. 《현종개수실록》에는 현종 7년(1666) 7월 15일 ‘청나라 사신이 언서로 번역한 조사 문건을 우상 허적에게 전하고 주문의 초안을 작성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때에 와서는 청나라가 언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청나라 사신이 언서(諺書)로 번역한 조사 문건을 우상 허적에게 전하고 주문의 초안을 작성하라고 하였다. 허적이, 그 가운데 분명하지 않은 말이 있고 또 사실과 틀린 점이 있다고 하여, 대제학 김수항과 함께 이일선을 통해 청나라 사신을 만나 논란한 끝에 겨우 바르게 고쳤다.
《현종개수실록》 현종 7년(1666) 7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