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글쓰기 32-17 내가 정하는 '값'(2026.6.21)
엄마와 동생을 만나러 영종도에 있는 호텔에 다녀왔다. 동생이 사준 호텔 조식을 거하게 먹고 호텔 주변 산책을 하고 시간이 남아 뭘 할까 하다가 근처에 있는 또 다른 호텔 구경을 하기로 했다. 규모도 크고 소장한 미술품도 많아 유명한 호텔이었다. 호텔은 과연 으리비까 했다. 쿠사마 아요이의 노랑호박 한 덩이가 놓여있는 원형 광장에서는 하프 연주가 한창이어서 푹신한 벤치에 앉아 생음악을 곁들여 노랑호박을 즐기는 호사를 누렸다. 8월까지인가 쾰른 루드비히뮤지엄에서 열리는 쿠사마 아요이 전시가 근사해 보였는데 노랑호박을 보며 대리만족했다.
앉아 있는 동안 엄마와 얘기를 나누었는데 엄마가 나중에 전주가는 버스를 타게될 공항에서 좋은 와인이 있으면 한 병 사고 싶다고 하셨다. 7월 초에 생신인데 그때 엄마 친구들이 밥을 사주신단다. 그때 친구들과 함께 마시고 싶다고 한다. 흔히 구할 수 있는 싼 와인 말고 좋은 와인이면 좋겠다 하셨다. 공항까지 갈 것 없고 거기 가서도 별반 다를 것 없으니 이 호텔에서 사면 된다고 말씀드리고 와인샵으로 갔다.
와인샵 직원을 불러줄까 물어보길래 일단 둘러보겠다 말하고 이것저것 봤다. 매대에 놓인 몇만 원 짜리 와인부터 유리장 속에 있는 고가 와인까지... 시중 와인샵처럼 종류가 다양하지 않아 오히려 좋았다. 와인 맛도 값도 잘 모르는 나지만 눈에 쏙 들어오는 와인이 있었다. <오즈의 마법사> 라벨이 붙은 스페인산 와인과 초록색 네잎클로버가 근사한 이탈리아 와인이다.
동생은 이런 곳에서 와인을 사면 안 된다고 이런 데는 세 배는 비싸게 받는다며 얼굴이 새파래졌다. 와인값은 천차만별이니 이곳은 고급 호텔 와인샵이니 동생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와인이 마음에 쏙 들었고 엄마에게도 사드리고 싶었다. 판매할 직원도 없고 미리 사서 들고 다닐 일도 없으니 사더라도 나중에 살 거여서 일단 철수하고 호텔 구경을 했다.
일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한가해서 좋았다. 느긋하게 그림들을 보고 넓은 광장에 있는 까페에서 한 잔 마시며 수다도 떨고... 일부러 찾아오진 앉겠지만 어디 먼 곳에 여행온 것 같은 기분을 즐기며 알뜰하게 놀고 나오는 길에 와인샵으로 갔다. 직원을 불러 이 와인 어떠냐 했더니 당연히 좋은 와인이라 했다. 와인샵 소믈리에가 애정하는 와인이고 누구든 마시기에 무난한 맛이라고. 네잎클로버 붙은 건 레드와인치고는 달콤한 와인이라 했다. 그렇지, 뭐 이런 설명까지 들으니 더 좋아지는 거지.
두 병을 사서 한 병은 상자에 담아 엄마께 드렸다. '그 이름도 유명한 P호텔 와인샵에서 큰딸 내외가 엄마 생신 때 친구분드랑 드시라고 사드린 와인'이 내가 붙인 이 와인 이름이다. 덕분에 나도 한 병 챙겼는데 와인 라벨에 '오즈의 마법사'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귄터 그라스 와인처럼 뭔가 특별한 날 책방 친구들과 까서 마실 예정이다.
동생이 말한 것처럼 비싼 값을 주고 산 건지 어떤지 모르겠다. 나는 물건을 사고 인터넷으로 가격을 찾아보거나 하는 일은 안 한다. 귀찮기도 하고 내가 산 물건을 인터넷이나 다른 매장에서 몇 푼 싸게 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그동안 내가 느꼈던 기쁨은 싹 날아가고 뭔가 바보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바보같은 짓을 굳이 시간들여 왜 한단 말인가. 내가 사는 물건 값은 내가 매긴다. 값이 비싸다고 생각하면 안 사고 적당하다고 판단하면 기꺼이 산다.
오늘 산 와인은 그 값어치가 충분했다. 와인 맛은 아직 모르겠지만 엄마와 친구분들에게 드릴 스토리와 고급짐(어디에서 누가 사줬다는 것 만으로도)을 선물했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처음 보는 '오즈의 마법사' 라벨이 붙어 있었으며, 남편에게 어머님을 위해 뭔가를 해드릴 수 있는 기쁨을 주었다. 새벽에 일어나 곰돌이를 산책시키고 영종도까지 달려간 건 엄마와 동생들 얼굴도 보고 뭐라고 대접하고 싶어서였는데 딱 필요한 걸 좋은 값에 사드릴 수 있어 기뻤다.
짐에 와인까지 한 병 얹어서 무거워진 게 좀 미안하긴 하지만 흡족한 쇼핑이었고 나도 덕분에 얻어걸린 '오즈의 마법사' 와인 병을 보며 두고두고 기쁠 거다. 그러니 수지 맞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