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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시험(2) 통과하고 나서 돌아보면 광야만큼 아름다운 곳은 없다/ 손성무 목사

작성자장세|작성시간26.06.07|조회수43 목록 댓글 0

요단강 위로 하늘이 열렸다.

예수님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상으로 그분 위에 임하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 장면은 얼마나 영광스러웠을까. 이 땅의 사람들은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했을지라도, 하늘의 천사들은 숨을 죽이고 그 순간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하늘 가득 환호성이 울려 퍼졌을 것이다.

 

드디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셨다.

드디어 오랜 기다림이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가까이 왔다.

드디어 성령의 한량없는 기름 부으심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놀라운 일을 시작하시게 되었다.

이제 곧 병든 자들이 일어나고, 귀신에게 눌린 자들이 자유를 얻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며, 하늘의 권능이 땅 위에 나타나리라. 천사들은 그렇게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요단강에서 시작된 이 영광이 곧바로 능력의 사역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가셨다.

 

마태복음은 조용히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사”라고 기록하지만, 마가복음은 더 강한 표현을 쓴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그 말에는 지체함이 없다. 머뭇거림도 없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즉시, 강하게, 거의 강권하듯 광야로 몰아가신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린 바로 그 다음 장면이 광야였다.

 

우리가 기대하는 순서는 대개 이렇지 않다. 성령의 불을 받으면 곧바로 능력의 사역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설교하자 삼천 명이 회개했던 것처럼, 바울이 주님을 만난 뒤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 받은 것처럼, 교회사 속에서도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 찰스 피니, D. L. 무디, R. A. 토레이, 길선주, 이성봉, 조용기 목사님과 같은 사람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고 놀라운 사역으로 들어간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곧바로 사역의 현장으로 가지 않으셨을까.

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들 앞으로 보내기 전에, 아무도 없는 광야로 몰아가셨을까.

 

마지막 아담이 걸어가신 저주의 땅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른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고 말한다. 또 첫 사람은 땅에서 나서 흙에 속한 자이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시다. 첫 사람 아담이 죄로 열어놓은 저주의 역사를 끝내기 위해 오신 분이다. 동시에 예수님은 둘째 사람이시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새 공동체의 시작점이 되신 분이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은 아담이 넘어졌던 자리와 연결되는 자리로 들어가셔야 했다.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무너진 인간의 역사를 다시 붙들기 위해, 예수님은 그 실패의 깊은 결과 속으로 들어가셔야 했다.

 

아담이 시험을 받았던 곳은 에덴동산이었다.

그곳은 완전한 낙원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았고, 마실 것이 부족하지 않았고, 기온도 환경도 인간이 살기에 완전했다. 온갖 과일나무가 아름답게 자라고 있었고, 죄의 그림자는 아직 땅 위에 드리우지 않았다. 배고픔도 없었고, 목마름도 없었고, 죽음의 냄새도 없었다. 모든 것이 충만했고, 모든 것이 선했다.

 

그런데 아담은 그 완전한 자리에서 넘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 땅은 저주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

 

에덴의 풍요는 깨어졌고,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다. 인간은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흙에서 난 사람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광야는 바로 그 저주의 흔적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땅이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

물이 없는 곳.

열매가 없는 곳.

길이 없는 곳.

생명이 메마른 곳.

 

어쩌면 아담이 범죄하기 전의 세계에는 우리가 아는 의미의 광야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광야는 죄로 인해 황폐해진 세상의 상처 같은 곳이다. 생명이 물러간 자리, 저주가 남긴 빈자리,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는 자리다.

 

아담은 낙원에서 시험을 받았다. 모든 것이 만족한 자리에서, 배고픔도 목마름도 없는 완전한 조건 속에서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저주받은 땅, 황폐한 자리,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후 시험을 받으셨다.

 

첫 사람은 풍요 속에서 넘어졌고, 마지막 아담은 결핍 속에서 이기셨다.

첫 사람은 동산에서 무너졌고, 둘째 사람은 광야에서 서셨다.

첫 사람은 먹을 것이 많은 자리에서 금지된 열매를 붙들었고,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만 붙드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광야는 단순한 고독의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구속사의 전장이었다. 아담의 실패가 남긴 저주의 땅 한복판에서, 마지막 아담이 새 인류의 길을 여시는 자리였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

하나님의 백성에게 광야는 언제나 특별한 장소였다.

모세는 출애굽의 사명을 받기 전, 광야에서 사십 년을 보냈다. 애굽 왕궁에서 익힌 힘과 자신감이 깨어지는 시간이었고, 자신의 육신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워가는 시간이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 사십 년을 보냈다. 그곳에서 그들은 낮아졌고, 시험을 받았고, 자기 마음이 어떤지 드러났다. 만나를 먹으며 인간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워야 했다.

 

다윗도 왕으로 세워지기 전, 광야를 지나야 했다. 사울의 칼을 피해 도망 다니며, 동굴과 들판과 황량한 땅 사이를 전전했다.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곧바로 왕좌에 앉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만 피난처로 삼는 법을 배웠다.

 

엘리야도 이세벨의 위협을 피해 광야로 들어갔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할 만큼 지쳤지만, 하나님은 그 광야에서 그를 먹이시고 다시 일으키셨다. 그리고 세미한 음성으로 그를 만나 주셨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광야는 단순히 척박한 땅이 아니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낮추시고, 빚으시고, 다시 부르시는 장소였다.

 

히브리어로 광야를 ‘미드바르’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말씀하다’는 뜻을 가진 ‘다바르’와 소리가 맞닿아 있다. 그래서 광야는 단지 아무 말도 없는 빈 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리처럼 느껴진다.

 

사람의 소리가 사라지는 곳.

익숙한 의지처가 무너지는 곳.

자기 힘으로 길을 만들 수 없는 곳.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한다.

 

누가복음 3장은 세례 요한의 등장을 이렇게 기록한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하고,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으며, 헤롯과 빌립과 루사니아가 각 지역을 다스리고,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황제가 있었다.

총독이 있었다.

분봉 왕들이 있었다.

대제사장들이 있었다.

권력의 중심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정치와 종교의 높은 자리에는 이름 있는 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궁궐로 먼저 가지 않았다. 성전 권력의 중심으로 먼저 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빈 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했다.

 

광야는 그런 곳이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곳이지만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곳이다.

사람의 말이 줄어드는 곳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곳이다.

세상의 중심에서는 멀어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중심으로 가까이 들어가는 곳이다.

 

길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길이 되시는 주님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광야로 이끄신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려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깊이 다루시려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더 가까이 만나시려는 사람들을 때로는 광야로 데려가신다. 그것은 버림이 아니다. 폐기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더 깊이 빚으시는 시간이다.

 

바울도 그러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는 곧바로 대중적 사역의 무대로만 나아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라비아로 갔다. 광야의 시간 속에서 주님 앞에 머물렀다. 그 시간 동안 그는 훗날 신약성경 여러 권을 기록할 만큼 깊은 복음의 계시를 받았다.

 

광야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광야에는 길이 없다.

만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나를 어딘가로 이끄시는 것 같은데, 그곳에 가보니 새로운 길이 보이고, 새로운 문이 열리고, 사람들의 도움과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은 광야가 아닐 수 있다.

광야는 사방이 막힌 곳이다.

앞도 막혀 있고, 뒤도 막혀 있고, 오른쪽도 왼쪽도 막혀 있다. 땅을 보아도 길이 없고, 사람을 보아도 답이 없다. 그래서 결국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 하늘마저 막힌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고, 말씀을 읽어도 가슴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고, 사람을 만나도 위로가 되지 않는 시간이 있다.

 

그때 우리는 묻는다.

하나님, 왜 저를 여기로 몰아오셨습니까.

왜 길이 없는 곳으로 데려오셨습니까.

왜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로 저를 밀어 넣으셨습니까.

 

그러나 광야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광야로 이끄실 때는, 그 광야에서 이루시려는 일이 있다. 그 목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사람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발버둥을 치면 시간이 더 길어질 때도 있다. 광야에서 가장 빠른 길은 항복이다. 자기 힘을 내려놓고, 자기 방식을 내려놓고, 자기 계산과 욕심을 주님의 발 앞에 내려놓는 것이다.

 

그 시간은 결코 쉽지 않다.

광야 한복판에 있을 때는 그곳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모래는 뜨겁고, 바람은 차갑고, 마음은 메마르고, 내일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알게 된다.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다. 그것도 이전과는 다르게, 훨씬 깊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이 더 생생해지는 곳.

내 자아의 소리가 작아지는 곳.

내가 붙들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약한지 드러나는 곳.

그리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곳.

광야는 아픈 곳이지만, 지나고 나면 가장 복된 곳이 된다.

 

광야에서 깨어지는 것과 다시 들리는 음성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1988년 가을이었다. 그것은 어떤 윤리적인 죄 때문은 아니었다.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살던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깊은 곳을 만지셨다. 그것은 죄의 행위라기보다 자아의 문제였다.

 

석 달 동안 하나님은 나를 깊이 다루셨다.

그 시간은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은 제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축복된 시간이었다. 만일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참된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종교 언어를 말하고, 매너리즘에 빠져 설교하고, 목회를 하나의 직업처럼 감당하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겉으로는 목회자였지만, 속으로는 삯꾼 목자처럼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종종 목회자들을 만나면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님께서 광야로 몰아가시는 시간은 무의미하지 않다고. 그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가장 복된 시간이 될 수 있다고. 그곳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자기 안에 남아 있던 욕심과 자아를 보게 되며,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한다고.

 

신명기 8장은 이렇게 말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광야는 마음이 드러나는 곳이다.

풍요로울 때는 잘 보이지 않던 마음이 광야에서 드러난다. 사람이 많을 때는 숨길 수 있던 마음이 홀로 남겨졌을 때 드러난다. 길이 있을 때는 믿음처럼 보였던 것이 길이 사라질 때 진짜 믿음인지 드러난다.

 

광야는 우리를 낮춘다.

광야는 우리를 시험한다.

광야는 우리 마음이 어떤지를 드러낸다.

광야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광야의 목적은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우리를 부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시되 다시 세우신다. 비우시되 다시 채우신다. 꺾으시되 새롭게 빚으신다.

 

광야에서 우리는 마침내 알게 된다.

주님만이 길이시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은 광야에서 더 선명해진다. 길이 보이는 곳에서는 그 말씀이 아름다운 교리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길이 전혀 없는 곳에 서면, 그 말씀은 생명이 된다.

주님이 길이시다.

 

길이 없어서 절망하는 곳에서, 주님 자신이 길이 되신다. 문이 닫혀 낙심하는 곳에서, 주님 자신이 문이 되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곳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다시 보여주신다.

 

통과하고 나서 돌아보면

혹시 지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나를 광야로 이끌고 계신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이미 광야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방이 막혀 있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고, 기도해도 하늘이 닫힌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먼저 조용히 물어보아야 한다.

하나님, 왜 저를 이 광야로 이끄셨습니까.

이 시간 속에서 무엇을 낮추기 원하십니까.

제 마음의 무엇을 보게 하시려는 것입니까.

제가 붙들고 있던 어떤 욕심과 자아를 내려놓기 원하십니까.

이 광야에서 제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광야는 사방이 막혀 있기 때문에 주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래서 광야는 고통스럽지만 복되다. 사람이 만든 길이 사라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게 된다. 내 힘으로 만들었던 문들이 닫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시는 문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므로 광야에 있다고 해서 좌절하지 않아도 된다.

낙심하지 않아도 된다.

버림받았다고 단정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조용히 기대해도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새롭게 만나 주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내 안의 욕심과 자아를 다루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을 통해 나를 더 아름답게 빚어 가실 수 있다.

 

광야에서는 서두르지 않는 것이 좋다. 자꾸만 빠져나갈 길만 찾다 보면, 정작 그곳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놓칠 수 있다. 때로는 잠잠히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이 가장 깊은 순종이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제가 발버둥치기보다 항복하겠습니다.

제가 제 욕심과 자아를 주님의 발 앞에 내려놓겠습니다.

이 광야에서 제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광야는 처음에는 황량한 곳으로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 곳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곳은 가장 깊은 만남의 자리가 된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우리는 이상한 고백을 하게 된다.

 

그때가 참 아팠지만, 그때 하나님을 만났다.

그때는 길이 없었지만, 그때 주님이 길이심을 알았다.

그때는 모든 것이 막힌 줄 알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께로 더 가까이 부르고 계셨다.

 

통과하고 나서 돌아보면, 광야만큼 아름다운 곳은 없다.

그곳에서 우리는 낮아졌고, 깨어졌고, 울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의 자아가 무너졌고, 바로 그곳에서 주님만이 길이심을 배웠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빚으셨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음성을 들으신 후 광야로 들어가셨듯이,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광야에 들어간다. 사랑받기 때문에 광야가 없는 것이 아니다. 사랑받기 때문에 광야에서도 버려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광야를 지나 돌아보게 될 때, 우리는 조용히 고백하게 될 것이다.

 

주님, 그곳이 제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곳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곳이 주님을 가장 깊이 만난 자리였습니다.

그곳이 제 평생에 가장 축복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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