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당쟁의 역사 1
조선 건국 후 사회가 점차 안정되자, 건국 초기부터 권력을 잡은 훈구세력들은 많은 기득권을 가진 지배층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반면 지방에서 학문을 추구하다가 뒤늦게 정치에 뛰어든 사림들은 훈구세력을 비판하며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두 세력 간의 갈등은 100년 가까이 피비린내 나는 4대 사화를 통해 나타납니다.
4대사화의 핏빛 희생을 치르면서도 훈구파를 물리치고 16세기 중엽 이후 정권을 장악한 사림세력은 학파, 지역별, 인척 관계 등에 의해 점차 나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1575년(선조 8) 서로 자기 편의 인물을 '이조전랑'에 임명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림은 동인ㆍ서인으로 나누어집니다.
제가 배운 학창시절 국사 시간에는 이조전랑이 무엇인지도 전혀 모른 채
'선조 8년인 1575년, 관리의 인사권을 행사하는 정5품 이조 전랑의 자리를 둘러싸고 심의겸과 김효원이 대립하였다.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은 한양 서쪽에 사는 원로대신들로 서인이라 불렸고,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은 동인이라 불렸다. 이러한게 당쟁의 시작이 되었다.'라고만 배웠습니다.
이조전랑이 어떤 자리이고 왜 그 자리를 두고 조정 신료 전체가 두 파로 나누어졌는가에 대해서는 그 어떤 설명도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 국사 교육이 항상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 왔으니 국사는 어떤 사건의 어떤 의미도 모른채 그냥 외워야만 하는 암기과목이 되었고 배우는 학생들은 국사과목을 싫증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먼저 도대체 '이조전랑'이 무엇이기에 사림이 두 편으로 나누어서 분당을 시작했는지 알아볼까요?
'이조전랑은 조선 시대에 이조의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을 함께 이르던 말이다. 이조의 정랑과 좌랑은 관원을 천거·전형(銓衡)하는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직책으로 전랑(銓郞)이라고 불렀다. 조선 시대에는 관원을 선발하는 권한이 오로지 이조에 속하였다. 또한 이조의 권한이 무거워짐을 염려하여 3사 관원의 선발은 이조판서에게 돌리지 않고 낭관(정랑과 좌랑) 에게만 맡겼다. 이에 따라 이조의 낭관은 3사의 언론관리 인사를 주관하게 되어 큰 실권을 잡았다. 전랑에는 3사 가운데 특별히 명망 높은 사람이 선발되었고, 그 후임은 전량이 추천하게 되어 있었으며, 전량을 거치면 대개 재상까지 될 수 있었다.'
이조 전랑의 3대 권한을 더 자세히 살펴 보면
1. 자대권(自代權) : 후임 전랑 지명권, 즉 후임자 추천권
전랑천대법(銓郞薦代法)에 의해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로, 전랑이 주어진 본인의 임기를 다 마치고 보직이동을 할 때 자신의 후임자를 직접 지명할 수 있는 권리였다. 이조전랑직은 거의 세습적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고 많은 인사청탁이 오고갔다.
2. 통청권(通淸權) : 정부의 각 부서 당하관을 천거(추천)할 수 있는 권리 + 3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총칭하는 조선의 언론기관으로서 이조전랑과 더불어 청요직이라 불림. 오늘날 언론, 검찰등 사법부의 역할)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는 권리.
이는 곧 문신 선발권을 광범위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리로서 바로 이 통청권이 이조전랑 인사업무의 핵심이었다.
3사 언론기관의 공무원 임용권한이 이조전랑에게 있었기 때문에 삼사 관원 예비생들은 이조전랑의 눈치를 봐야 했다.
즉 이조전랑이 조선의 언론을 간접적으로 지배할수 있었다.
3. 낭천권(郞薦權, 부천권이라고도 함) : 일명 재야인사 추천하는 권리
쉽게 말해서, 명성이 높거나 실력은 있는데 과거시험에서 합격하지 못한 재야의 선비들을 과거시험 없이 임용될 수 있게 추천할 수 있는 권리이다.
또한 이외에도 이조전랑의 추천을 받으면 대부분 등용될 수 있었다. 그런이유로 이조전랑에게는 수많은 인사청탁 빌미를 제공했다.
위와 같은 막강한 권한을 토대로 사림들은 이조전랑 지위를 이용해 끊임 없이 사림출신을 중앙에 공급하여 훈구에 맞설 세력 기반을 다질수 있었던 것이다.
윗 글은 이조전랑에 관해 백과사전에 나온 내용입니다.
이조전랑이 오늘날 관직 계급으로 보면 국가직 3, 4급 정도의 행정자치부 인사과장 정도 위치였지만 조선 시대 당시는 인사에 있어서만큼은 이조판서나 정승들보다 더 큰 권한을 가졌다고 보입니다.
위 내용을 보니 이조전랑 임명을 두고 조정 신료들이 갈려서 크게 싸울 만하죠?^^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조전랑을 두고 붕당이 발생한 것은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심의겸은 명종 정비인 인순왕후 동생으로 외척이었습니다.
사림들은 명종 대에 윤원형 등 외척들이 권신이 되어 조정을 좌지우지한 것에 대해 피해의식이 아주 컸습니다.
그래서 외척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심의겸의 경우 명종 말 윤원형 등에 의해 사림 출신이 큰 피해를 보고 있을 때 그래도 사림 출신을 두둔하여 또 다른 사화를 막은 공로가 있다 하여
사림 출신들이 심의겸만큼은 배척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김효원은 신진 사림 출신으로서 관직에 들어선 이후 신진들을 많이 천거한 까닭에 후배 사림의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조전랑에 있었던 오건이 김효원을 이조전랑 으로 추천했습니다.
오건이 김효원을 추천하자 그 당시 이조참의였던 심의겸이 명종 시대 권신 윤원형 집에서 김효원이 잠깐 기숙했던 일을 꼬투리 잡아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김효원은 이조전랑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김효원이 이조전랑을 물러날 때 심의겸의 친아우 심층겸을 이조전랑으로 추천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지난 이조전랑 임명 때 적극적으로 반대한 심의겸에 대한 원한이 사무친 김효원은 이를 당연히 허락하지 않아 심의겸 아우 심층겸이 이조전랑 자리에 가지 못합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김효원과 심의겸 불화원인이 되어 조선 당쟁 시작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300년 당쟁의 도화선치고는 조금 찌질하죠?^^
그리하여 당시의 조정신료들은 물론 사림들도 완전히 두 갈래로 나뉘어서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을 서인(西人)이라 하고,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을 동인(東人)이라 했습니다.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게 된 이유는 진짜 별게 아닙니다.
김효원 집이 서울 동편인 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에 동인이라 했습니다. 동인에는 주로 젊은 신진들이 참여했습니다.
심의겸의 집은 서울 서편인 정릉동(오늘날의 정동)에 있었서 서인이라 했습니다. 주로 연로한 인사들이 지지했습니다.
현대사에서도 김대중 계열을 동교동, 김영삼은 상도동이라 부른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한 동인, 서인 분당은 학문적, 지역적으로 분화되면서 오랫동안 대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제자들이 속한 서인은 기호학파가 주를 이루었고, 동인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 모여 영남학파로 형성했습니다.
동서분당 이후 한동안은 동인이 득세합니다.
서인으로 분류되기는 했지만 양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했던 이이가 죽은 후로는 서인이 조정에 들어가는 일이 더욱 어려워집니다.
이러한 동인과 서인의 처지를 역전시키는 일이 1589년 정여립 난으로 촉발된 기축옥사입니다.
선조는 서인인 정철을 기축옥사 조사관인 위관(委官)에 임명하고 관련자를 색출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이에 정철은 모반을 철저하게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정여립 과 관련 된 선비들을 잡아들여 죽이는데 이에 화를 입은 선비 대부분은 동인이었고 호남출신이었습니다.
정여립은 원래 서인출신이었는데 갑자기 율곡 이이를 비난하며 동인으로 돌아선 바 있었습니다.
정여립이 호남 지역에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호남출신으로 봐도 되는 정철로서는 너무 심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호남선비 씨가 마른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때 피해 본 선비들이 1000여명 가까이 됩니다.
송강 정철은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지만 기축옥사로 수 많은 호남선비들을 사지로 몰아 넣었다는 역사적 오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당쟁의 출발부터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벌어졌습니다.
기축옥사 때 서인 행동대장 정철 활약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았지만 동인들도 완전 몰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붕당을 조금은 조장하면서 지켜보고 있었던 선조는 어느 한 쪽에도 힘을 실어주지는 않습니다.
아직 조정에는 동인의 중량급 인사인 이산해가 영의정, 유성룡이 우의정으로 남아있었습니다. 당시 서인 정철이 좌의정으로 있었고, 대사헌, 부제학 등 서인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기는 했지만 불안한 서인 집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동인의 영수였던 이산해가 정철의 곧은 성격을 이용한 계략을 세우는데 바로 '세자건저문제'입니다.
당시 세자로 거론될 수 있는 왕자는 일찍 죽은 공빈 소생인 임해군과 광해군이 있었고, 인빈의 소생인 신성군이 있었습니다.
당시 장자인 임해군은 여러 모난 행위때문에 신하들 마음을 얻지 못했고, 모범생 스타일인 광해군에게 대부분 신하들의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이럴즈음에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유성룡, 서인인 좌의정 정철, 대사헌 이해수 등 동서 각 당의 중진들은 회동을 갖고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하기로 합의합니다.
하지만 이 일은 동인 이산해가 선조의 마음이 신성군에게 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계략을 세운 것이었습니다.
이산해는 함께 세자건저를 주청하기 전에 인빈 김씨의 아우 김공량을 찾아가 ‘좌의정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운 후 신성군 모자와 외가를 모두 죽일 것’이라고 일러 바칩니다.
깜짝 놀란 김공량이 인빈에게 말하고, 인빈은 선조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세우고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선조는 인빈에게 ‘정철이 그럴리 있냐’며 달래기만 했습니다.
세자건저를 주청하기로 한 날 이산해는 조정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동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인 이산해가 자리에 없자 우의정 유성룡은 정철의 눈치를 살폈고, 성격이 급한 정철은 좌의정으로서 양당 합의대로 선조에게 광해군이 세자로 적당하다고 주청 드립니다.
선조는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하자 인빈의 참소가 생각났고 인빈의 말이 사실이라고 여기게됩니다.
이에 분노한 선조는 “내 나이 아직 마흔도 안 되었는데 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라며 정철에게 호통을 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질 급하고 강직한 정철은 계속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합니다. 대사헌 등으로 있었던 서인들도 정철의 말에 동조하면서 가세합니다.
후에 광해군이 쫒겨난 인조반정이 서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때만 해도 서인들이 광해군을 세자로 지지했으니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이처럼 세자건저문제가 서인과 임금 간의 갈등 양상으로 전개되자 동인은 이틈에 서인을 끌어내리는데 모든 힘을 쏟습니다.
결국 정철은 이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유배길에 오릅니다.
정철의 실각으로 정국은 다시 동인의 손으로 넘어왔습니다.
동인은 이때 서인 정철 처벌문제로 강경파 북인과 온건파 남인으로 분파됩니다.
이중 북인과 서인은 세자로 주청할 때와는 정반대로 광해 등극문제로 서로 다툽니다. 서인은 광해등극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북인의 의도대로 광해가 등극하면서 북인 세상이 됩니다.
집권에 성공한 북인은 또 다시 서인 처벌문제로 강경파 대북과 온건파 소북 으로 나누어지고 광해는 대북을 선택해서 광해정권은 대북정권이 됩니다.
우리가 익히 잘아는 바와 같이 광해 대북정권은 외교는 잘했으나 내정은 실패합니다.
광해시대 이야기는 그동안 너무 많이 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어쩠든 광해 대북정권은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이라는 쿠테타에 무너지고 서인정권이 다시 전면에 나섭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앞, 뒤 못가르는 쥐뿔도 없는 자존심만 내 세우다 정묘, 병자호란이라는 우리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겪게 만듭니다.
병자호란 때 주화파와 척사파 대립은 당쟁이 아닌 서인들 끼리 청에 항복문제로 대립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당이라도 이처럼 노선이 다르기도 했습니다.
오늘 날 정당도 한지붕 두가족, 세가족은 흔한 일이죠?^^
병자호란의 처참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인조와 서인정권은 유지됩니다.
남인도 비주류로 남았지만 계속 유지됩니다.
동인계열 북인은 인조반정으로 남인에 흡수되거나 아예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효종때는 말뿐인 북벌론으로 조정이 시끄럽습니다.
효종의 북벌은 어느 정도 진정성이 있었으나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명에 대한 사대주의 입장에서 겉으로만 북벌을 찬성하는 것처럼 합니다.
서인의 거두가되는 송시열이 이때 부터 역사 전면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송시열로 인해 당쟁은 더욱 이념화되고 교조적으로 변해갑니다.
그리고 현종 때 이르러 그 유명한 '예송논쟁'이 벌어집니다
예송논쟁은 현종 즉위 시기 자의대비의 상례 절차인 왕이 상복를 몇 년을 입냐를 두고 서인과 남인간의 두 차례 벌어진 정치적 분쟁입니다.
저는 예송논쟁을 정말 쓰잘데기 없는 문제로 참으로 오랫동안 끈질기게 싸웠고 이 점이 조선당쟁의 가장 큰 문젯점으로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송논쟁도 깊이 들어가 살펴보면 당시로서는 정말 간단치 않는 문제였습니다.
단지 상복을 몇 년 입느냐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는 전대 왕인 효종과 그의 죽은 형 소현세자의 정통성을 두고 벌어진 초대형 정쟁으로 반란이나 내전의 명분이 될 수도 있었던 서인과 남인들이 각자 명운을 걸고 치열한 논리로 조선의 정신적, 철학적 사고의 정점을 보여준 조선 후기 정치와 사회 경향의 분수령이 된 대사건이었습니다.
그래도 현종시기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때보다 더 힘든 대기근이 일어난 시기임에도 백성들 안위보다는 위와 같은 문제로 오랫동안 싸웠다는 것은 정말 좋게 봐 줄 수 없습니다.
이제 숙종때부터 조선의 당쟁은 점입가경으로 들어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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