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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의 오류에 대하여

작성자신동|작성시간10.11.12|조회수455 목록 댓글 0

"태극기 휘날리며”의 오류에 대하여

 

  영화든 드라마이든 거기에는 연출자가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과 해석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일반 관객은 과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묘사된 ‘과거’를 사실(fact)이나 진실(truth)로 받아들이기 쉽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사극에 대해서도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논란이 벌어지는 일이 드물지 않다.

 

  그런데 이 논란의 결론 아닌 결론은 한결같다. ‘드라마(영화)는 어차피 픽션이므로 작품 그대로 평가해 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이 반복되는 데는 사실-허구 논란을 통해 작품의 인지도를 높이려는 의도도 반영되어 있다. 그렇지만 홍보수단으로서의 논란도 사극의 사실성 여부에 반응을 보이는 관객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늘 뻔한 결론으로 귀결되므로 무관심해도 될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테사 모리스-스즈키가 “우리 안의 과거”에서 지적한 대로, 영화는 ‘역사적 경험에 대한 강렬한 일체감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특정한 기억공동체의 틀에 맞추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역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는 당대, 혹은 후대에 이르기까지 일반대중의 역사지식 내지 역사의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는 영화에서 묘사된 장면과 줄거리상의 역사적 진위나 사실관계를 밝혀 영화 제작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모리스-스즈키가 말한 대로, ‘영화는 더욱 깊이 통찰한 과거의 지식을 창출하는데 공헌할 것이며, 관객은 영화를 과거에 대해 이해를 넓히는 방법의 하나’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반공영화 진흥책에 힘입어 1970년대에 매우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들어서 민주화 열기와 탈냉전, 전후세대의 증가, 제작비의 제한 등의 원인으로 국내 전쟁영화 제작은 크게 감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극기’의 흥행 성공(공식집계 1174만 명)은 전후세대들이 한국전쟁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이라는 현재진행형 프로젝트와 전쟁에 휘말린 형제의 비극을 조합해 ‘이념에 희생된 민족의 운명’을 표상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가족’, 나아가 ‘한민족’이라는 ‘코드’로 인해 이전의 반공적 한국전쟁영화와는 달리 다양한 관객층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고,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제작비(150억 원)를 투입한 만큼 외형적으로는 한국영화도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필자 역시 큰 기대를 갖고 극장을 찾았으나, 상당히 아쉬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곳곳에서 역사적 사건 이해의 오류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가 찾아낸 오류는 스무 가지가 넘었다. 이를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지면도 부족하고, 영화의 맥락과는 무관한 부분도 있다. 따라서 ‘집단적 기억을 형성’하는데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 부분 위주로 서술하겠다.

 

1) 역사적 사건의 해석에 관한 오류

  전쟁 발발 직전의 진태네 국수집, 진태(장동건 분)의 약혼녀 영신(이은주 분)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니 보리쌀 한 되를 주더라. 식구들 이름 다 적어낼 것을 그랬다’고 아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용 자체만 놓고 보면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서울과 지방간의 국민보도연맹 조직 과정이 다르다는 점을 간과했던 탓에 오류가 되어 버렸다. 서울에서는 1950년 1월경에 지역적 조직이 대부분 완료되고, 이후 전쟁 전까지는 주로 직능별 분회조직에 주력하였다. 반면 지방의 경우는 시·군 지부의 결성도 완료되지 못하였다.

  ‘보리쌀’은 바로 지방조직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가입 회유책이다. 가입실무를 맡은 경찰에서는 서별로 인원을 할당하였는데, 그 기준은 관할 내에 출몰했던 ‘공비(共匪)’ 및 좌익사건 가담자 통계였다.

  그런데 문제는 지방경찰이 책임추궁을 피하기 위해 이 인원수를 부풀려 보고하는 경우가 허다했다는 점이다. 당연히 할당인원이 실제 좌익혐의자보다 과다하였고, 그 격차를 메우기 위해 등장한 수단의 하나가 ‘보리쌀’이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농민단체·청년단체의 후원을 미끼로 회원 전체를 보도연맹에 가입시키는 일도 있었다.

  “태극기”의 이 장면은 이념대립과 전쟁의 와중에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되는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보도연맹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보리쌀’로 상징되는 할당식 가입, 그중에서도 일부만의 사실을 과도하게 일반화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해석의 일부를 전체화하는 것으로, 집단적 기억을 정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2) 고증에 소홀함으로써 발생한 오류

  이 항목에 해당되는 오류는 너무나 많아서 나열하기조차 힘들다. 그러므로 한국전쟁에 관련된 ‘집단적 기억’ 형성에 영향을 끼칠 만한 사항만을 예로 들어보자. 우선 진석(원빈 분)을 통해 전쟁 발발을 알게 된 가족들이 부랴부랴 피난을 떠나는 장면이다.

진태 형제의 집은 서울이다. 그런데 1950년 6월의 서울시민 대부분은 피난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조작된 보도(국군의 반격과 승리)를 믿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은 서울이 함락되기 전날쯤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피난길에 나선 강북지역 서울시민은 전체의 30% 정도였다. 그나마 피난시민의 4/5는 광복 후 월남자였으며, 나머지 1/5은 고급공무원·자본가·정치인 및 군인·경찰가족이었다. 즉 1950년 6월에 피난을 떠난 서울시민은 ‘남아 있으면 죽을 것이 뻔한’ 경우에 국한된다 하겠다.

  진태 가족의 배경이 자세히 설정되지 않았기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영화에서 묘사된 것만으로는 전쟁 발발 직후 황급히 피난을 떠나는 근거가 약하다. 필자가 추측컨대, 이 장면은 1951년 1․4후퇴 당시의 상황과 1950년 6월의 상황을 혼동한데서 탄생한 오류가 아닌가 한다.

  “태극기 휘날리며 메이킹 북”을 보면, 화물기차의 지붕과 기관차에까지 달라붙은 피난민 장면을 1950년 6월 부분에 집어넣으려다가 자문단의 조언으로 수정했다는 부분이 있다. 감독이 떠올리는 ‘피난의 기억’은 1․4후퇴로 정형화된 것은 아닐까? ‘전쟁=피난’이라는 고정관념은 1950년 6월부터 3개월간의 공산치하를 겪은 후에 만들어졌음을 고려한다면, 진태 가족의 피난 장면은 1950년 6월보다는 1951년 1월에 잘 어울린다.

  오늘날의 잣대를 함부로 과거에 적용할 때에 이런 실수를 하게 되며, 이와 같은 실수가 축적될 때 역사적 사실과는 동떨어진 ‘집단적 기억’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를 방지하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이하 태극기)의 스토리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소재 중 하나는 바로 “무공훈장”이다. 납치되다시피 징병된 진태와 진석 형제. 진태는 가족의 희망인 동생 진석을 제대시키기 위해 대대장에게 상의하고, 무공훈장을 받아 제대한 이웃 부대의 사례를 듣게 된다. 이후 진태는 훈장을 타기 위해 위험한 임무를 마다하지 않고, 차츰 훈장에만 집착하는 전쟁광으로 변해간다. 그는 결국 50년 10월 평양전투에서 인민군 대좌(최민식 분)를 생포한 공로로 태극무공훈장을 받게 된다. 중국군에 밀려 후퇴하던 중 대대장에게 진석을 제대시켜 줄 것을 요구하지만, 바뀐 대대장은 진태를 실성한 사람 취급을 하며 무시해 버린다. 그 와중에 진석이 갇혀있던 건물이 소각되고, 동생이 죽었다고 믿은 진태는 포로로 끌려가던 대대장을 죽인 다음 인민군 소좌로 변신해 동생의 죽음을 복수하는 악귀같은 존재로 변한다. 결국 진태를 잔혹한 인간으로 변모시키는 계기 중 하나는 무공훈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무공훈장에 그러한 의미를 붙이는 것이 역사적 진실과 얼마나 부합하는가?

  대한민국에서 무공훈장을 수여할 수 있는 근거는 “무공훈장령”(1950.10.18제정)이다. 게다가 무공수훈자에 대한 혜택을 명시한 법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태가 무공훈장을 수여받을 당시 대한민국의 무공훈장 명칭은 1등~4등 무공훈장이었다. 태극·을지·충무·화랑무공훈장이라는 명칭은 1951년 8월 이후 무공훈장령이 개정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1963년 훈장에 관한 여러 법령이 ‘상훈법’으로 통합되면서 인헌무공훈장을 추가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평양전투 이전에는 무공훈장과 관련된 언급이 나와서는 곤란하며, 명칭 역시 수정되어야 한다. 영화에서 사용되는 훈장소품은 현행 ‘화랑무공훈장’으로, 당시에 수여되던 무공훈장과는 디자인이 다르다. 대대장이 훈장증을 낭독하면서 ‘1950년’이라는 서기연호를 사용하는데, 당시 대한민국은 단기연호를 사용했으므로 ‘4283년’으로 정정해야 한다.

이외에도, 후퇴의 와중에서 훈장수여식을 거행하며 훈장 정장(正章)이 정확히 도착한 것도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1950년 서울 환도 직후 맥아더 원수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할 당시에도 훈장증만을 전하고 이듬해에야 훈장을 전달할 만큼 정부의 사정은 어려웠다. 실제로 전선에서는 일선 사단장 주관하에 ‘가수여증’과 ‘약장(略章)’만을 수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현재까지도 육군에서는 「무공훈장 찾아주기 운동」을 10여 년 전부터 하고 있지만, 아직도 9만여 개의 훈장이 제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태극기”에서는 역사적 사실의 고증에 소홀함으로써, 한국전쟁에 관한 ‘집단적 기억’을 오도하는 사례가 매우 많다. 우리는 이러한 고증 실수에 대해 ‘극영화는 어차피 픽션’이라는 면죄부를 주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것이 축적될 경우 역사인식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집단적 기억의 정형화’라고 부를 수 있는데, 정형화된 기억은 역사연구에까지 검증 없이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

  유사한 사례는 비단 영화만이 아니라 드라마, 심지어 역사관련 다큐멘터리물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자료수집에 관련된 시간과 비용을 계획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여 시나리오가 부실해지는 경우도 많고, 제작비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한두 명의 주관적인 견해를 검증없이 주된 줄거리로 설정하는 사례도 많이 보았다. 아울러 제작과정 중에 수정해야 할 사안이 발생하였을 때도, 제작시간과 완성일에 쫓겨 무시하는 사례도 흔하다.

  이러한 행동양식의 근저에는 관객(대중)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모더니즘적 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관객과 제작자, 관객들 상호간의 소통이 전제되어야만 ‘영화는 더욱 깊이 있는 통찰을 거친 과거의 지식을 창출하는데 공헌할 것이며, 관객은 영화를 과거에 대해 이해를 넓히는 방법의 하나’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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