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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연구

야고보의 죽음- 젊은 사람의 죽음

작성자신동|작성시간10.07.11|조회수450 목록 댓글 0

◈62. 젊어서 죽는 것에 대한 이해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12:1~2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과 비슷한 나이에 젊어서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 주변에 ‘선량한 사람이 아깝게 일찍 죽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수 십 년간 건강했던 친구가 한창 나이에 뇌졸증으로 갑자기 타계하기도 하는데요,


하나님께는 죽음이 없습니다. 모두가 항상 살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삶의 연장’으로 보고, 필요이상으로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주제의 글입니다.



▲고 김선일 선교사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은 34세의 청년이며

신학을 공부하여 장래 소망을 이라크 선교에 둘 정도로 참 성도인 그는

살아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참담한 상황에서 문제 해결의 능력을 가지신 주님을 얼마나 의지했겠습니까!

고인의 절박한 심정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고, TV에서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고인의 기도와, 그리고 우리 모두의 기대와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의 자연인(未신자)도 젊어서 일찍 죽으면 안타까운데,

특히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성도이기에 더욱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고인의 가족들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약간 솟구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의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참 성도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일찍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라는 것입니다.


 

▲고 윤장호 병장

이번에 아프간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고 윤장호 병장을 볼 때 마찬가집니다.

미국에서 직장을 잡고서 영주권을 따면, 군대를 안 갈 수도 있었는데,

애국심으로 자원입대를 했고, 자원해서 아프간까지 갔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런 선량한 사람들을 빨리 데려가시는 것일까요?

그 보다 더 악한 사람들은 버젓이 잘도 살아있는데 말입니다.

 

[아래는 추모 홈페이지에서 발췌]

윤 병장은 군에서 매달 받는 150만 원 가량의 월급을 부모님께 용돈으로 보내고,

6년 전 어머니가 뇌출혈로 생사를 넘나들 때는 삭발을 하고 새벽기도를 드릴 만큼

효성이 깊은 아들이었다. 그는 미국 고등학교 유학 시절에도 학업 성적이 뛰어나고,

적극적인 교내활동으로 클린턴 대통령상을 받았다고 한다.  

 

군 동료 안 상병은 "크리스마스 이브 때 전우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종이로 접어 만든 양말을 전우들의 관물대에 일일이 붙이고

그 양말에 초코파이 1개씩을 넣어줬던 기억이 난다.

어렵고 힘들 때 먼저 다가와 등을 두드려주던 선임병이었다"고 추억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불루밍턴 한인교회에서 교사로 봉사한 성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야고보 사도의 죽음은 이해하기 어렵다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 생각과 너무 달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 행12:1~2도 그 중의 한 곳입니다.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야고보 사도 (세베대의 아들)

본문에 나오는 야고보는 누구입니까? 사도 요한의 형제라 했습니다. 막10:35

주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모든 제자들과 사람들을 다 사랑하셨으나,

특별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수제자 그룹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공생애에 변화산, 겟세마네 등 모든 곳에 동행한

최측근 3인방 중의 한 사람, 다시 말해서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였습니다. 


주님께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특별하게 양육하셨고

이쯤 되면, 주님이 특별한 임무를 주실 것으로 장래가 촉망 되던 제자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비교하면

야고보보다 더 오래 살았던 베드로와 요한의 삶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일을 하였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으면서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요한 또한 가장 늦게까지 지상에 남아 있으면서

진솔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우리에게 전해 주었고(요한복음, 요한서신서)

계시록을 통해 천국의 일면을 알려주는 큰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에게 걸맞는 그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3명에 속했던 야고보는 어떠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 그는 일찍 죽었습니다.(순교)

그것도 허무하게 말입니다.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이 말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만한 업적이 없습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썼습니다.)


하다못해 스데반 집사처럼 유창한 설교 한번 못했습니다.

빌립 집사처럼 복음도 전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이렇게 죽을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그토록 애지중지 양육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어쩌면 이처럼 허무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야고보는 왜 이 시점에서 이처럼 허무하게 죽어야 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은 왜 야고보의 죽음을 못 본 척 지나치셨을까요?

 

▲가장 일손이 부족할 때 순교한 야고보 사도

우선 야고보 사도의 죽는 시점이 영 이해되지 않습니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교회는 한창 부흥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3천~5천 명이 회심하는 상황이고,

스데반과 빌립 등 집사들마저 정신없이 천국확장 사업에 몸 받치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대의 지경을 넘어

안디옥의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되어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러운(?) 명칭을 얻는 시점입니다.


한 사람의 일꾼이라도 더 필요한 그런 시기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양육하신 제자 3인방의 활약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던 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죽었습니다. 아무 한 일도 없이, 더욱이 가장 일손이 필요할 때 말입니다.


▲도저히 납득 안 되는 야고보 사도의 순교

오늘 본문 뒤쪽을 좀더 읽어보면

‘야고보의 죽음은 아무래도 하나님의 잘못(?)이 아닐까?’라는

불경한 생각이 들 정도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보세요. 곧이어 체포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살려 내십니다.

그것도 기적을 행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고보가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토기장이 비유에서 '주권'이라 그럽니다.)


베드로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간섭하신다면

야고보를 죽음에서 살려내는 것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두셨습니다.

야고보의 죽음을 방치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허무한 죽음을 예비(예정)하셨다면

주님은 왜 야고보를 편애하신다는 오해마저 받으면서까지

그토록 사랑으로 양육하셨을까요?

베드로나 요한처럼 하나님 나라(교회)를 위해 크게 쓰셔야 하지 않으셨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야고보의 죽음은 너무 허무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너무 많은 손해를 보신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손익분기점이 크게 기울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죄 없이 일찍 죽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경에 보면, 살아서 하나님의 사역에 크게 쓰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일찍 죽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벨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정도로 경건했고,

그가 더 살았더라면 하나님께 더 유익이 되었을 아벨이었지만 말입니다.


*욥의 초기 10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엉뚱한 사단의 시험에 아무 죄 없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그들도 더 살았다면 하나님의 사역에 도움이 되었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 탄생 때 아무 까닭 없이 희생된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과 한 시대에 태어난 영광에 따라 그들 중 몇 명은

주님의 귀한 동역자가 되었을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여하튼 이런 분들은 모두 일찍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무런 합당한 이유 없이,

아니 오히려 너무 억울하게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동일합니다. 그가 죽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살아서 천국사업에 크게 쓰임 받아야 마땅한 자였습니다.

왜 주님은 그토록 사랑하셨던 야고보의 죽음을 못 본 척 외면하셨을까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일찍 죽으면 ‘뭔 죄를 지었나?’ 하는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죄라도 지었나보다...’ 까지 나가면 곤란합니다. 아니 추악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않으신다.


▲인간이 볼 때, 죽음은 결코 달갑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합니다.

죽음이 무엇일까요?


*생물학적으로는 호흡이 정지되어 육체의 생명현상이 중단되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는 죄의 삯으로서 일종의 벌칙이지요.

다만 두려운 것은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가 될 수도 있기에

믿는 자들에게도 무척 겁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여하튼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무서움만큼은 잘 알고 있는 것이 죽음입니다.

결국 인간 측면에서 볼 때, 죽음이란 무척 부정적인 느낌을 가지게 되는

어떤 현상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죽음을 어떻게 보실까요?

참 다행인 것은, 하나님은 죽음을 조금도 부정적으로 보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눅20:38

하나님 안에서는 죽은 자란 결코 없습니다. 모두가 살아있습니다.


성경이 밝히는 하나님의 죽음관은 ‘안식’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에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영은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결코 종국이나 방해물로 보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도 한시바삐 주님 품에 안기기를 소원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죽음은 오히려 은혜입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빌1:23


우리는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116:15)

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계시를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죽음에 연연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죽음도 삶이요, 삶도 또한 삶입니다. 사나 죽으나 모두가 삶인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 일찍 데려가신 것 - 손해 아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의 죽음을 보는 우리의 시각도 변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일찍 죽임을 당한 야고보는 하나님께 손해였을까요?


성경을 상고하건데, 결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야고보가 미워서 일찍 죽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사랑하셨기에 일찍 불러 가신 것입니다.

아마 천상에서 다른 중요한 사역이 있었나 봅니다.

아니면 다른 제자들보다 더 아끼셔서, 빨리 곁에 두고 싶으셨는지요...

어쨌든 신앙에는, 우리가 모두 알 수 없는 미지의 부분이 반드시 남겨져 있습니다.


인간에게 야고보 사도는 죽었지만,

하나님께 야고보 사도는 항상 살아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손해가 될 리 없습니다.

고 김선일 씨도, 고 윤장호 씨도, 또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안에 사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의 죽음이 빠르거나 늦거나 하는 시점의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은 죽음의 빠르고 늦음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 안에 거하느냐, 아니냐인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인 것입니다.


성경은, 죽었거나 살았거나에 관계없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를 ‘복 있는 자’라고 선포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가기

고 김선일 씨나 사도 야고보의 죽음이 우리 생각에는 조금 빠른 것 같으나,

하나님께는 늦지도 빠르지도 않습니다.

이들에게 가장 은혜스럽고 적절한 시기에 데려 가신 것입니다.

은혜의 시간이요, 구원의 때에 불러 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살아있다 하는 우리는,

이들의 죽음을 보며 안타까워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기라도 한다면

이는 큰 잘못이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시 이들을 만나지 못하므로

무척 서운한 마음이야 들겠지만,

천국에서의 재회를 믿는다면 오히려 감사의 고백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이미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롬14:8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의 죽음을 비탄으로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 사도는 일찍 죽었고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가 오래 살아서 귀한 사명을 감당했는데,

어떻게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가 스스로 잘났다고 자고自高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뭘 좀 하고 있다고 자고하면 안 됩니다.

그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따름입니다! 

 

(물론 죄지으면 자기 명대로 못 살고 빨리 죽는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삼상2:33, 욥36:14 등.

그러나 그런 판단은 선한 사람이 아니라, 명백한 악인들에게나 해당되는 경우임)

 

*출처: www.nosuchjesus.com > 맑은 바람소리 > #15 성도의 죽음...

정순태 님의 글. 07.01.27. 편집


*관련글 : 죽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니라 살아서 갑니다. 

http://blog.daum.net/rfcdrfcd/10799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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