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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이야기 1권 2권

작성자신동|작성시간06.09.15|조회수259 목록 댓글 0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저


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롤로그 


폴리비오스는 왜 자신의 모국 그리스는 스스로 무너져 가고, 왜 로마는 계속 융성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갖고 역사를 기술했다. 어린 시절에 축적된 경험과 지혜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자립했을 때 비로소 진가를 발휘할 때가 있다. 이처럼 로마가 번성한 요인은 대부분 일보 전진과 반보 후퇴를 거듭했고, 잘못하면 10보나 20보씩 후퇴하여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는데 수십년이 걸리곤 했던 처음 500년이나 되는 동안에 싹이 터서 자랐다. 로마의 탄생으로부터 기원전 202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의해 한니발이 패배한 자마 전투까지 500년 동안에 로마는 서서히 만들어 졌다. 로마는 역시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 1 장 로마의 탄생


로마의 건국 기념일은 기원전 753년 4월 21이었다고 한다. 그 해에 로물루스의 나이는 18세. 이 약관의 젊은이와 그를 따라온 3천 명의 라틴족에 의해 로마는 건국되었다. 로마의 초대 왕인 로물루스는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하는 왕은 아니었다. 국정을 3개의 기관에 나누어 준 것이다. 왕과 원로원 및 민회. 이 3개의 기둥이 로마를 떠받치게 되었다.


종교제의와 군사 및 정치의 최고 책임자인 왕은 민회에서 투표로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왕은 마치 종신대통령과 같았다. 또 로물루스는 100명의 장로를 모아서, 그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원로원을 창설했다. 원로원 의원은 정부의 관직이 아니다. 왕에게 조언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따라서 민회의 선거를 거칠 필요가 없다. 민회는 로마 시민 전원으로 구성되었다. 왕을 비롯한 정부관리를 선출하는 것이 민회의 역할이다. 다만, 민회는 정책을 입안할 권리는 갖지 못했고, 왕이 원로원에 조언을 받아 입안한 정책을 승인할 것인가 부인할 것인가를 결정했을 뿐이다. 전쟁을 할 때도 그들의 승인이 필요했고, 외국과 강화를 맺을 때도 그들이 승인해야만 비로소 효력이 발휘되었다.

  

건국의 왕 로물루스는 패자조차도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방식으로 로마를 강대한 나라로 만들어 갔다. 로마는 전쟁에서 이기면 진 부족에게 로마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었다. 로물루스가 사비니족 여인을 강탈하여 전투에서 이긴 후 로마는 사비니족 사람들을 동등한 입장에서 하나로 합쳤다. 사비니족의 왕 타티우스는 로물루스와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공동대표제도 로마에서는 있었다. 사비니족의 왕 타티우스는 곧 전사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갈등요인은 배제되었다. 물론 서로의 세력권을 존중하여 공존하는 형태의 화평은 아니다. 두 부족이 합치는 형태를 택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는 종종 공동대표제의 형태를 취한다. 어떻게 봐야 할까? 그러나 로물루스는 공동 왕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로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cf.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 로물루스는 인근에 사는 사비니족을 축제에 초대했다. 신에게 바쳐진 축제일에는 전투가 금지된다. 사비니족도 기꺼이 초대를 받아들여 온 가족이 로마까지 찾아왔다.축제 기분이 고조되었을 때 로물루스의 명령에 따라 로마의 젊은이들은 사비니족 아가씨에게 덤벼들었다. 서양에는 지금도 신랑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풍습이 있다. 이 사건은 푸생이나 루벤스 같은 후세 화가들한테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게 된다.


우리 모임의 경우에 적용시켜 본다면 모임의 이름은 CBA나 BWM 둘 중 하나로 통일해야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것이 명확해 진다면 공동대표도 가능한 것인지? 그러나 현재로서는 CBA와 청장년은 합치기 어려운 것 아닌가 싶다. 어쨋든 그릇이 크고 수용적이고 공정하고 관대한 것이 로마, 알렉산더, 칭기스칸 어디에나 발견된다.

로마나 칭기스칸이나 영토확장은 언제나 전쟁을 통해 이루어진다. 전쟁은 군인의 전투력 향상이 요청되고 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전략이 필요하다. 이 전략은 지도자가 제시해야할 고유한 영역이다. 이 전략에 따라 전투훈련이 필요하고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게 된다. 이것을 교회나 선교단체에 적용해 본다면 언제나 교회와 선교단체의 성장은 전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전도를 통하지 않고 CBA가 성장할 것을 기대한다면 완전히 헛다리라고 해야 하지 않나? 또 전투훈련이 바로 제자훈련이요 양육이 아닌가? 지도자가 정보를 소중히 하고 확실한 정보에 근거하여 합당한 작전을 세움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처럼 나도 CBA의 사역 전략을 적절히 제시할 중차대한 책임이 있다. 그리고 언제나 공격형 전략만이 위대한 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은 역사에서 증명된다. CBA도 공격적이며 전투적인 모임이어야 하지 않나? 한국교회가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병욱 목사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타당하다.


로물루스는 100명의 병사로 편성된 백인대(켄투리아) 제도를 고안해 내었다. 이것은 로마 군단의 최소 단위이자 핵으로써, 로마가 존재하는 한 백인대 제도도 계속 존속하게 된다. 이와같이 우리 CBA도 일대일 내지 소그룹으로 편성된 셀모임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CBA군대의 최소 단위이자 핵으로써, CBA가 존재하는 한 셀모임도 계속 존속하게 된다. 로마는 백인대장의 충성으로 강대한 나라가 되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셀모임이 살고 충성스러운 셀장을 만들어 냄으로써 강한 선교단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cf. July, August의 명칭 유래; July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난 달이기 때문에 그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August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한 명칭이다.


제2대 왕 누마는 건국 당시부터 로마가 다민족 국가였기 때문에 법을 제정하여 충돌없이 로마가 국가로서 기능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인간의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유대인은 종교에 맡겼고, 그리스인은 철학에 맡겼고, 로마인은 법률에 맡겼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로마인들은 언제나 법을 만들어 통치하고 싶어했다. 누마가 새로운 개혁안을 계속 제출하여 로마를 개혁해 갔던 것 처럼 로마는 계속 적극적으로 법을 만들어 감으로써 강한 나라가 되었다.


제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때 알바롱가는 로마와의 약속을 어겼다. 대표자끼리 결투를 벌여서 승부를 결정짓기로 약속하고 이를 어겼다. 툴루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배신행위를 저지른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그는 결국 두 필의 말에 알바롱가 왕의 다리를 하나씩 묶은 다음, 말에게 채찍질을 가하여 제각기 반대방향으로 달리게 했다. 이로써 로마인은 전쟁에 패한 민족을 로마에 동화시키는 로물루스 시대 이래의 노선을 계승하면서도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배신행위를 저지른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노선도 확립했다.


‘로마인’들은 싸움에 진 라틴족이나 사비니족만이 아니라 그밖의 민족도 피정복민으로 예속시키지 않고, 물론 노예로 삼지도 않고 ‘로마화’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패배자는 로마로 강제 이주당했다. 그들에게는 선주민과 동등한 시민권이 주어지고, 유력자한테는 원로원 의석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라틴족과 사비니족은 독립된 부족으로 존속했다.


급속히 발전한 민족은 쇠퇴할 때도 급속히 쇠퇴한다. 로마는 농경민족한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완만하면서도 착실하게 세력권을 확대해 나갔다. 이렇게 한 걸음씩 천천히 지반을 굳혀 가는 방식은 나름대로 칭찬해도 좋은 생활방식이지만, 조직에 이질적인 분자가 섞여 들어온 것이 비약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이따금 일어난다. 마치 화학반응 같은 현상인데, 건국한지 139년째 되던 해에 최초로 선거운동을 통해 왕이 된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를 통해 로마에도 바로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


타르퀴니우스는 코린트인의 피를 이어받은 에트루리아인이다. 혼혈아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곳으로 로마를 선택했다. 로마에서는 정착할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마(사비니족)나 안쿠스 왕(사비니족) 같은 경우도 건국 당사자인 라틴족이 아니었는데 왕이 될 수 있었다.


당시 기술력이 가장 뛰어난 족속은 에트루리아인이었다. 간척 기술, 지하수로 공사에 필요한 기술, 도로포장 기술, 신전 같은 대규모 석조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기술 등 모든 기술이 에트루리아에서 들어왔다. 기술 지도자로 에트루리아인도 들어왔다. 로마에는 머리를 길게 기른 에트루리아인이 갑자기 부쩍 늘어 났을 것이다. 로마인은 에트루리아 기술자들의 지도를 받고 일하면서, 그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이것이 나중에 세계적인 토목 기술자들을 키워내는 기초가 되었다. 타르퀴니우스가 도입한 에트루리아 기술로 변모한 로마 시가지를 보고, 원래 농경민족인 로마인은 기술력에 눈이 뜨게 되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출신이 확실하지 않은 한 에트루리아인 소년이 맘에 들어 친 아들과 함께 기르기로 했다. 소년이 젊은이가 되었을 무렵에는 그의 총명함과 용기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로마 귀족의 자제 가운데는 한 사람도 없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세르비우스를 사위로 삼았다. 타르퀴니우스 왕은 선왕 안쿠스의 두 아들에 의해 암살당하나, 타르퀴니우스의 아내가 세르비우스가 왕위를 차지하도록 도와주었다. 왕비한테는 친아들이 둘이나 있었지만, 왕이 암살당한 직후에 왕비가 부른 것은 사위였다.


세르비우스는 높은 평가를 받은 전임자의 뒤를 이은 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우선 선왕 타르퀴니우스가 착수한 사업을 마무리짓는 일부터 서둘렀다. 그것은 로마 전체를 지키는 성벽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내가 전임자의 뒤를 이을 경우 나는 어떤 일을 이어받아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것일까?


로마에서는 한 사람이 한 표를 갖지 않는다. 군단의 최소단위이기도 한 백인대가 각각 한 표를 갖는다. 백인대 내부에서 논의와 토론을 거쳐 뜻을 모으고, 그렇게하여 나온 통일된 뜻이 한 표로 연결된다. 말하자면 소선거구제다.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는 한 사람이 한 표를 갖지만, 로마에서는 100명이 한 표를 갖는 방식을 고수했다. 내가 생각할 때 토론과 논의를 잘 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나라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 CBA나 성락교회도 역시 마찬가지다. 토론과 논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민주적이라는 증거다. 영혼을 위한, 영혼애 의한, 영혼의 CBA! 영혼 만족 경영!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방식 아닌가?


추문은 힘이 강할 때는 공격해 오지 않는다. 하지만 약점이 드러나면 당장에 쳐들어온다. 그 추문이 당사자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 해도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공동체는 초기에는 중앙집권적인 편이 효율적이다. 조직이 아직 여린 시기에 활력을 낭비하는 것은 치명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는 한 사람의 강력한 지도자가 결정하고 앞장서서 실행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로마의 일곱 왕의 역사는 알맞은 시기에 알맞은 인재를 알맞은 자리에 등용한다는 원칙이 지나칠 만큼 완벽하게 적용된 역사였다. 로마는 이런 왕들 덕택에 튼튼한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릴 수 있었다.


제 2 장   로마공화정  BC 6세기 초


로마는 해마다 선거를 통하여 뽑히는 자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개인보다는 법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다. 사적인 추문을 이용하여 왕정을 타도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그후 500년 동안 이어지는 로마공화국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는 해마다 민회에서 왕을 대신할 국가의 최고 지도자인 집정관 2명을 선출하는 제도를 창설했다.


브루투스는 바보를 뜻하는 말이다. 그는 바보로 멸시당하면서도 제멋대로 전횡을 휘두른 타르퀴니우스시대를 참고 견디며 은인자중해 왔다고 한다. 별명이 결국 성이 된 셈. 그러나 아무리 바보 취급을 받아도 왕의 조카인 이상 그는 권력의 주변에 있게 마련. 모든 것을 냉정하게 관찰할 기회가 많았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정보도 풍부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한 개인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제도는 버려도 될 만큼 성장했다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개혁의 주도자는 흔히 신흥세력 보다 구세력 속에서 생겨나는 법이다.


그러나 왕과 원로원 및 민회는 원래 로마를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이었는데, 공화정 로마에서는 왕이 집정관으로 바뀌었을 뿐, 권력의 삼각 구조는 그대로 존속하게 되었다. 브루투스의 개혁으로 공화국 시대의 로마는 원로원에 많은 신참자가 들어왔다. 로물루스때 원로원 의원은 100명이었고 타르퀴니우스왕때 200명이었는데 이제는 300명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로마의 유력 가문에 속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 가지 불만이 고개를 쳐들었다. 어른들은 좋다. 원로원 의원이 아니었던 사람들까지 의원으로 임명되고, 집정관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으니까. 그러나 젊은이들은 달랐다. 왕정시대에는 왕의 기분에 따라 젊은이들이 발탁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명문 집안의 젊은이들은 공화정으로 바뀐 결과 자기들이 활약할 기회가 줄어들었다고 느꼈다. 그게 불만이었다.


이런 젊은이들이 왕정복고를 기도하다 발각되었는데 그중엔 당시 집정관이었던 브루투스의 두 아들도 있었다. 브루투스는 자신의 두 아들에게 참수형을 내렸다. 젊은이들의 왕정복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선왕 타르퀴니우스는 정면 충돌을 시도했다. 이때 브루투스는 사망하나 로마가 이겼다. 이때 발레리우스가 개선 장군의 영예를 누렸다. 발레리우스가 백마 4마리를 몰고 개선식을 하자 너무 화려하다고 비난 받았다. 왕족 취향처럼 느껴짐. 또 그의 저택은 너무 웅장. 이것 역시 왕의 궁전처럼 보였다. 또 그는 공석인 집정관 자리를 빨리 메우려고 하지 않았다. 왕위를 노리고 있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알아차린 발레리우스는 수많은 일꾼을 동원하여 하루밤 사이에 자기 저택을 부숴버렸다. 그는 땅값이 싼 로마 성벽 근처에 소박한 집을 짓게 하고, 출입문을 항상 열어두었다. 아무나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직접 볼 수 있게 하려고.


그후 그는 계속 민중에게 좋은 평판을 받을 성싶은 법률을 차례로 제정했다. 왕정 시대에 왕이 관리했던 국고를 앞으로는 재정관이 관리하도록 규정한 법률도 그런 법률 가운데 하나였다. 정치와 군사에서는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도 국가 재정에는 관여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이 법률은 시민들의 갈채를 받았다.


또 하나는 로마 시민의 항소권을 규정한 법률이다. 이 법률에 따라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는 사법관이 내린 판결에 대해서도 민회에 항소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인권을 중시한 이 법은 후세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중요한 법개념을 이루게 됨. 그래서 발레리우스의 인기는 점점 높아짐. 결국 사람들은 발레리우스를 ‘푸블리콜라’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공공(푸블리카)의 이익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사람들의 질시와 의심과 중상모략을 받게 마련이다.


공화정으로 이행한 로마는 국력이 약해졌다. 그 이유는 타르퀴니우스왕의 편을 든 에트루리아계 사람들이 로마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 동안 3대에 걸친 에트루리아계 왕들은 모두 로마에서 대규모 개발사업을 벌였고 그에 따라 상공업이 발전했다. 에트루리아인들의 지위와 영향력도 당연히 강해졌다. 이들중에 공화국으로 이행하면서 따라온 이들도 있지만 떨어진 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공화국 초기에 로마는 대규모 건설사업을 거의 추진하지 못했다. 국력의 저하는 인근 부족들에 대한 권위의 추락으로 이어졌다.


푸블리콜라는 국고수입을 올리기 위해 무역상들에게 부과되고 있던 간접세를 경감해서 이제까지 상인이 아니었던 사람들까지 무역업에 뛰어들게 만들었는데 이 결과 신흥중산계급이 형성되었다. 우대받은 이들 신흥중산계급이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게 된 것을 당연했다.


체제가 바뀔 때 기존 체제에서 배려가 되던 사람들은 새 체제를 지지하는 사람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새로운 체제를 원한다면 새로운 지지기반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체제가 바뀌면서 반드시 그 단체나 국가는 약화될 것이다. 푸블리콜라는 신흥중산계급의 도움을 받고, 한편으로는 적극적인 이민 수용책으로 에트루이아인의 유출로 입은 피해를 만회하려 하였다. 그러나 에트루이아인의 세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로마는 에트루리아인과의 전쟁에서 패했다. 다만 왼손잡이 무티우스의 용기 때문에 강화가 이루어졌다.


어제의 이민도 오늘부터는 로마의 지도층에 들어갈 수 있다.


기원전 503년, 로마가 공화정이 된지 6년이 지났을 때, 푸블리콜라가 세상을 떠났다. 그 많던 재산도 없어져 장례식 비용조차 낼 수 없게 된 발레리우스 가문을 위해 로마인들은 모두들 조금씩 추렴하여 푸블리콜라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브루투스가 씨를 뿌리고 발레리우스가 뿌리를 내린 로마 공화정은 이제 확고해 졌다.


그리스에 시찰단 파견


당시 로마에 비해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인 타란토와 시라쿠사는 세 배 내지 다섯 배의 세력권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테네는 로마의 열배, 카르카고는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로물루스가 건국한 지 300년이 지난 기원전 5세기 중엽에도 로마의 세력은 이 정도에 불과했다. 크게 확대한 지도가 아니면 영역조차 명확히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이 시절, 로마는 지중해 세계에서는 선진국이었던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처음으로 접촉을 갖게 된다. 본토인 그리스의 도시국가, 특히 아테네나 스파르타와 직접 접촉한 것이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생겨난 여러 가지 문제가 일단 해결된 뒤, 로마는 쉴 틈도 없이 주변 부족들을 상대로 방위전을 치러야 했다. 그 전쟁이 일단락된 기원전 5세기 중엽, 로마인은 처음으로 성문법이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다. 그때까지의 로마법은 불문율의 집성이었고,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지배계급뿐이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민중이 법의 성문화를 요구했다. 법을 글로 표기하면 누구나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민중의 권리 획득은 흔히 법의 성문화를 요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스 문명


그리스 문명은 기원전 2000년 전후에 그리스 본토가 아니라 크레타섬에서 시작되었다. 본토 그리스보다 크레타 섬이 선진 문명인 이집트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미노스 왕이 해적을 소탕한 후 크레타 사람들은 점점 부유해져 석조 저택까지 가질 수 있게 되었으나 기원전 1350년경을 전후하여 급속히 쇠퇴했다. 이때 크레타의 수도 크레노스가 파괴되었다.


그후 그리스 본토에서도 남쪽에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미케네 일대가 그리스 문명의 새로운 담당자가 되었다. 이들은 호머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통해 후세에 알려졌다.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 테살리아의 왕 아킬레우스,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 통틀어 아카이아인이라 불림. 기원전 1250년 전후에 일어나 10년 동안의 포위전을 거쳐 끝나는 트로이 원정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러나 트로이의 함락으로 개가를 올린 미케네 문명도 불과 반세기 뒤인 기원전 1200년경에는 벌써 멸망하고 말았다. 10년 동안이나 집을 비우고 먼 트로이에서 전쟁놀이에 열중했으니, 그동안 국내 질서는 흐트러지고 국력도 쇠퇴하여 외래 민족에게 쉽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산더미 같은 전리품을 가지고 귀국한 그리스군 총대장 아가멤논은 욕실에서 왕비와 왕비의 애인에게 살해당한다.알렉산더 대왕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10년 이상 고국을 떠났었는데 그때도 이와같은 위험한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까?


미케네 문명은 도리아인들에게 멸망당하고 기원전 1200년부터 기원전 800년까지 그리스 역사의 암흑기가 왔다. 그리스의 중세라고 부르기도 함. 당시 호머의 영웅들은 청동기밖에는 갖고 있지 않았지만, 야만적인 도리아인은 철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인은 기원전 800년경에 암흑기로부터 탈출하여 폴리스라고 부르는 도시국가 시대에 들어선다. 도리아인이 건설한 스파르타와 도리아인의 침략으로 도망친 아카이아인이 건설한 아테네가 대표적인 폴리스로 성장한다. 이 시기에 폴리스의 탄생과 함께 그리스의 재생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현상은 해외에 대한 식민활동이었다. 식민활동은 늘어난 인구를 자국 안에서 부양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스의 식민활동은 두 시기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제1차 식민활동은 기원전 9세기 말부터 기원전 8세기 초까지 이루어졌고, 이 시기의 식민지는 오로지 소아시아 서해안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이로써 이오니아 지방이 탄생하였다. 크레타에서 미케네로 이동해온 그리스 문명의 중심은 아테네보다 먼저 이오니아 지방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 역사학의 선구자 헤로도토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 그리고 호머도 역시 이 지방 출신이라고 한다.


제2차 식민활동은 제1차 식민활동에서 반세기가 지난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식민범위는 에게해 지역이 아니라 지중해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제1차 식민활동을 통해 에게해는 그리스인의 바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제2차 식민활동이 끝난 뒤에는 그리스인의 세계가 지중해 전역으로 넓어졌다. 해상에서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페니키아인의 이주로 건설된 카르타고뿐이었다. 호머의 오딧세이는 제2차 식민활동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인들이 해외로 진출한 것은 호기심과 모험심과 독립심이 낳은 열매였다. 이런 진취적인 성향은 그리스 민족의 특질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 식민지는 모국과의 관계가 별로 없었다. 식민지는 모국과 전혀 상관이 없이 발전했다. 그리스인들은 모국에서 언어와 종교, 진취적인 기질과 독립에 대한 집착만을 가져간 듯 싶다. 로마는 이렇지 않았다. 로마는 그리스와 정반대로 식민지와 모국 사이에 긴밀하고도 유기적인 관계를 성립시켰기 때문이다.


아테네


크레타섬의 폭군 미노스를 타도한 테세우스 이후 아테네는 왕정(모나르키아)이었다가 기원전 800년경에 귀족정치(아리스토크라티아)로 바뀐다. 귀족 출신인 9명의 통령이 1년 임기로 행정과 군사와 제사를 담당하고, 그밖의 귀족들로 구성된 장로회의가 이들을 보좌했다. 자유시민들로 이루어진 민회가 있었지만 발언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기원전 7세기에 접어들자 이 귀족정치는 아테네의 현실에 맞지 않게 되었다. 토지 소유에 경제적 기반을 둔 귀족 계급에 대해, 상공업으로 힘을 얻기 시작한 신흥 계급이 대두했기 때문이다.


이들 신흥 상공업자 계층이 국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솔론의 개혁이다. 솔론의 제도는 권력이 재산(보다 정확히 말하면 부동산, 또 이에 따른 농업 수익)의 많고 적음에 비례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권정치라고 번역할 수 있는 티모크라티아라고 불리게 되었다. 수입의 다소가 권력의 다소로 이어지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귀족으로 태어나지 못하면 참정권을 갖지 못했던 귀족정치에 비하면, 이는 상당히 발전한 정치체제였다. 혈통은 어쩔 수 없지만, 재산을 모으는 것은 재능과 운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솔론은 신흥 상공업자 계층에 속해 있지도 않았고, 빚에 시달리는 자작농 출신도 아니었다. 넓은 토지를 가지고 아테네를 좌우해온 명문 귀족 출신이다. 그 역시 역사에 이따금 등장하는 선견지명과 실행력을 가진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신흥 상공업자충은 솔론의 개혁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혁에 의해 더욱 힘을 얻는 이들은 솔론이 은퇴하지마자 귀족들에 대해 권력투쟁을 시작하였다. 결국 폭발하는 힘을 질서정연하게 통제할 수 없는 인물이 없는 권력의 공백상태, 곧 무정부 상태(아나르키아)가 도래하고 아나르키아의 끝의 티라니아, 즉 독재정치가 왔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명문귀족 출신이지만 귀족계급이 아니라 민주파라 불리는 신흥 계급에 권력 기반을 두었다. 그의 20년 간의 독재는 아테네에 평화와 질서를 주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유례없는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독재정치는 독재자의 재능이나 성격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아테네 시민들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의 독재에 따랐지만, 그가 죽은 뒤 후계자가 된 그의 아들들의 독재까지는 참지 않았다. 기원전 510년 아테네 귀족들은 스파르타의 후원을 얻어 독재정치를 타도했다.


독재정치를 타도한 클라이스테네스는 귀족정치를 부활시키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독재 밑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는 아테네 시민의 경제력은 더욱 높아져 있었다. 아테네 경제의 중심은 이제 분명히 토지에서 상공업으로 옮아져 있었다. 그래서 솔론의 법을 부활시키는 것도 부족했다. 솔론의 법을 발전시켜 부동산을 동산으로 바꿈으로써 결국 클라이스테네스는 보다 민주적인 방향으로 정치개혁을 했다. 그는 행정개혁을 하여 귀족의 소유지를 쪼개어 그들의 권력기반을 없애고 민회를 강화하여 20세 이상의 아테네 시민이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게 했다. 이 시기에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시민이 국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탄생한 것이다. 당시 아테네 성인 남자의 수는 3-4만 정도였는데 민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1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클라아스테네스는 또한 도편추방제라는 일종의 자체정화제도를 도입했는데 별로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 그리스인의 왕성한 독립정신이 토론을 좋아하는 성향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의사진행이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 1만명이 국정을 다룰 수 있을 만큼 수준 높은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을는지 의문이다.


그러나 아테네는 시민권에 대해 배타적이었고 다른 그리스의 폴리스도 실제로는 뜻밖에도 배타적이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아테네에 살아도, 아니 아테네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죽어도, 외국인은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다. 아테네에서는 부모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이 아테네 시민이어야만 아테네 시민권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도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르면 더욱 배타적으로 바뀌어, 부모가 모두 아테네 태생이 아니면 시민권을 가질 자격이 없게 되었다.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대철학자조차도 부모가 아테네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테네 시민이 될 수 없었다. 이 점에서 로마는 그리스와는 다른 길을 택했다. 로마는 개방적이고 토착 원주민이 아닌 모든 외국인들에게도 관대하게 로마시민권을 나누어 준 것이다. 이런 방식만큼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요인은 없다. 그러나 외국인에게 자국민과 똑같은 세금을 물리면서도 피선거권은 커녕 선거권조차 인정하지 않는 국가는 오늘날에도 드물지 않다.


그리스와 로마의 차이는 노예에 대한 처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의 노예는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노예인 채 평생을 마칠 운명이었다. 반대로 로마의 노예에게는 해방노예라는 제도가 있었다. 저축한 돈으로 자유를 사거나 오랫동안 노예로 일한 뒤 퇴직금처럼 자유를 얻는 제도다.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노예는 해방노예라고 불렸지만 그 자식대에 이르면 로마의 자유민과 똑같은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


스파르타는 두명이 동시에 왕 노릇을 하는 세습제 쌍두정치였다. 군사와 정치의 최고 지도자인 왕은 스파르타의 두 명문 출신이 맡도록 되어 있었다. 여기에 기원전 7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리쿠르고스의 개혁으로 이 정치체제는 더욱 확고해졌고, 스파르타적 성격은 더욱 강화되었다. 솔론의 개혁이 아테네의 성격을 결정지은 것과 마찬가지로, 방향은 전혀 다르지만 리쿠르고스의 개혁이 스파르타의 성격을 결정했다. 개혁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실패하면 그 민족에 치명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성공해도 그 민족의 성격을 결정하고 그에 따라 그 민족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까지 결정지어 버리기 때문이다. 리쿠르고스의 개혁으로, 스파르타인의 모든 생활은 전보다 더한층 군무를 지상 목적으로 삼는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다.


군사력 증강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었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군사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비록 수는 적지만 그 명성은 페르시아에까지 알려졌고, 그리스에서 정예부대라면 스파르타의 보병군단을 의미했다. 이 스파르타는 전사 외에는 아무것도 낳지 못했다. 철학도, 과학도, 문학도, 역사도, 건축도, 조각도 전혀 남기지 못했다. 스파르타식이라는 낱말을 남겼을 뿐이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스파르타는 자신의 지배하에 들어온 폴리스들을 모아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했다. 여기에 가담하는 폴리스는 전쟁시 병력을 제공하고, 민주정치가 아니라 귀족정치를 채택해야 한다. 결국 아테네는 경제력으로 스파르타는 군사력으로 단연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페르시아 전쟁



그리스인을 먼저 이해하지 않고는 로마인을 이해할 수 없다. 페르시아 전쟁도 그리스인을 이해하는데 좋은 소재가 된다. 어쨌든 페르시아 전쟁은, 격렬한 내분이 특징인 그리스 역사에서는 드물게 그리스 전체가 일치단결하여 적과 맞서 싸운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이기도 했다. 1차 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테네는 10명의 스트라테고(국가전략 담당관) 중 결단력이 있는 밀티아데스의 지휘하에 페르시아를 물리쳤다. 이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달린 아테네군 병사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근대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의 원천이 되었다.


2차 페르시아 전쟁은 30만 대군의 침입에 자극받은 스파르타의 참여한 가운데 테미스토클레스가 지휘하여 이겨내었다. 아테네는 바다에서, 스파르타는 육지에서 페르시아를 막아내었다. 그후 아테네가 주도하여 페르시아의 침입을 막기위해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였으나, 아테네가 주도권을 장악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스파르타가 동맹 참가를 거부했다. 스파르타는 자기네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강화하는 길을 택했다.


강경파의 생각은 언제나 온건파보다 명쾌한 법이다.


강경파인 데미스토클레스는 온건파인 아리스티데스는 페르시아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싸웠다. 데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의 적은 페르시아만이 아니라, 언젠가는 스파르타와의 대결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데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를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수단이 해군이므로 해군력을 증강해야 하고, 피레우스 항에 정박해 있는 해군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하기 위해 아테네와 피레우스를 연결시키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데미스토틀레스는 스파르타의 위험을 계속 경고했다. 그러나 그가 외친 반스파르타주의는 아테네만이 아니라 다른 폴리스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에서 추방되고 아테네는 온건 보수파가 지배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죽기 1년 전 보수파의 영수 키몬도 도편추방을 당한다. 그러나 다시 득세한 민중파는 세력을 회복한 뒤에도 테미스토클레스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역시 10년의 공백은 너무 컸다.


페리클레스 시대


민주정치를 움직이는 사람이 반드시 민주주의자일 필요는 없다. 페리클레스는 그 자신이 민주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민주정치를 교묘히 운영할 수 있었다. 보수파 키몬이 도편추방으로 실각된 것도 그가 배후에서 공작한 결과였을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정계에 등장한 해부터 무려 30년 동안 거의 해마다 국가전략 담당관에 선출되었고 그 대부분은 의장직을 맡았다. 그는 도편추방제를 폐지하지 않았다. 남의 성공에는 유독 질투심을 불태운 것이 아테네 시민이었다. 그런데도 3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한번도 이 제도에 발목이 잡힌 적이 없었다.


그는 모든 공무원에게 공무에 종사하는 기간 동안 일당을 지불하기로 했다. 당시까지 공직은 모두 무보수였다. 그가 추첨과 일당 지급으로 무산자 계급까지 국정에 참여시킴으로써 이 시기의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고비에까지 이르렀다.


또 그는 아테네 시민들의 주요한 오락장이었던 극장에 누구나 공짜로 들어갈 수 있게 하고, 입장료는 국고가 부담했다. 아크로폴리스를 전보다 더 아름답고 호화로운 신전과 극장으로 메우는 웅대한 재개발 사업에도 착수했다. 이런 일에 국민의 돈을 사용하는데 대한 비판이 높자, 어설픈 변명으로 발뺌하지 않고 공사비용을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충당했다. 대신 파르테논 신전 정면에 페리클레스라는 이름을 새겨두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반대파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파르테논 신전을 중심으로 하는 아크로폴리스는 외국에서 온 나그네가 찬탄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의 찬탄이 높아질수록 아테네 시민들의 긍지도 높아졌다.


또한 페리클레스는 민중파의 영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티데스와 키몬으로 이어지는 보수파 노선을 배척하기는 커녕 그대로 답습했다. 아테네의 시장을 확보하고 경제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페르시아나 스파르타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데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주장하다가 이루지 못한 정책도 계승했다. 페르시아를 숙적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스파르타를 가상 적국으로 간주하고 여기에 바탕을 둔 스파르타 대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페리클레스가 지도하는 아테네는 모든 분야에서 재능있는 인물을 우대했다. 시민권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인정하고 등용해서 썼다. 철학자도 역사가도 예술가도 모두 아테네를 지향했고, 아테네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 그들에게는 등용문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이오니아 지방에서 태어난 그리스 철학이 아테네로 중심을 옮겨온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아테네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비록 해군에 국한되어 있긴 하지만 군사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화적으로 그리스를 대표하는 폴리스가 되었다. 이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는 기원전 460년부터 기원전 430년까지 30년 동안이다. 후진국 로마의 원로원 의원 세 명이 선진국 그리스를 시찰하기 위해 방문한 것은 기원전 453년부터 기원전 452년까지 1년 동안이라고 한다.


그리스를 알고난 후


그러나 로마는 이 아테네를 모방하지 않았다. 강대한 아테네도 항상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스파르타도 모방하지 않았다. 쇠퇴기에 접어든 나라를 찾아가 거기에 나타난 결함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절정기에 있는 나라를 시찰하고도 그 나라를 흉내내지 않는 것은 보통 재주가 아니다. 물론 로마가 그리스를 흉내내지 않았다는 것이 곧 그리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자유와 질서의 양립은 인류에게 주어진 영원한 과제의 하나다. 자유가 없는 곳에는 발전이 없고, 질서가 없는 곳에서는 그 발전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어느 한쪽을 일으켜 세우면 다른 한쪽이 일어서지 못하는 이율배반의 관계에 있다. 로마인은 스파르타만큼 자유를 억압하지 않아도 질서를 유지할 수 있고, 스파르타만큼 양병에 기울이지 않아도 나라를 방위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그리고 세 명의 로마인은 페리클레스의 탁월한 재능을 접할수록, 그런 비범한 인간은 드물다는 사실도 통감했던 게 아닐까? 이것을 통감할수록, 페리클레스만한 인물이 있어야만 비로소 충분히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민주정치의 약점을 간파한 게 아닐까?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는 겉모습은 민주정치였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우리 교회가 민주적이지 않은 것도 어쩌면 김기동 목사님이 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앞으로도 성락교회가 민주적으로 운영되려면 김기동 목사님 보다 훨씬 더 훌륭한 목사가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닌가? 민주정치는 결국 한 사람이 대단히 효과적으로 지배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농경민족인 로마는 본디부터 보수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로마인은 변혁을 본능적으로 싫어했다. 개혁이 불가피해져도 천천히 추진했다. 그 대신 일단 개혁하면 함부로 바꾸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인에 비해 발전 속도는 느렸지만, 일단 발전하기 시작하면 장기간에 걸쳐 발전을 지속할 수도 있었고, 쇠퇴기에 접어들어도 천천히 쇠퇴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병사만큼 지휘관의 능력에 민감한 존재는 없다. 무능한 지휘관 밑에서는 무의미하게 목숨을 잃게 된다. 또한 성년이 된 뒤 예순 살에 예비역을 면제받을 때까지 오랜 전쟁 경험을 통하여, 지휘관이 없는 군대는 전력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이다. 공동체에는 유능한 지휘관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로마인은 평소부터 충분히 이해하고 인식했다. 또 하나 로마인은 전쟁 경험을 통해 다른 것을 희생하더라도 지휘계통을 통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켈트족의 침입


테베레 강 동쪽 연안에 모여 있는 일곱 언덕과 ‘포로 로마노’는 한번도 적에게 짓밟힌 적이 없었다. 기원전 390년 여름에 쳐들어온 켈트족이 사상 처음이었다. 로마가 두 번째 적에 짓밟히기까지는 로마 제정 말기인 서기 410년에 역시 야만족인 서고트족이 침입할 때까지 800년을 기다려야 했다. 이 일을 겪고 나서 로마가 다시 일어서기까지는 4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야만족 앞에 어이없이 굴복한 로마에 인근 부족들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라틴 동맹’도 공중분해되었다. 해체된 정도로 끝난 것이 아니라, 어제까지의 동맹국이 이 틈을 타서 로마를 멸망시키려 하는 적으로 돌변했다. 로마는 건국 이후 360년 만에, 공화정으로 바뀐 지 100여년 만에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 되었다.


그러나 로마 역사를 쓴 그리스의 폴리비오스는 기원전 390년의 켈트족 침입을 로마가 강대해지기 시작한 첫걸음으로 중시하고 있다. 밑바닥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기어올라올 수밖에 없었지만, 밑바닥에 떨어진 채 올라오지 못하고 끝나 버리는 민족도 적지 않다. 로마인은 기원전 390년에 밑바닥까지 떨어졌지만, 로마인답게 느리면서도 착실하게 다시 기어올라온 것이다.


그리스의 쇠퇴


페리클레스 이후 아테네는 ‘중우정치’ 시대로 돌입한다. 중우정치라 해도 인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니키아스,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 등, 그 무렵 아테네 정치를 주름잡은 인물만 손꼽아 보아도 모두 충중한 사람들이었다. 다만 그들은 페리클레스만한 정치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페리클레스는 무려 30년 동안 아테네 민중에게 국정은 자기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믿게 하는데 성공했고, 도편추방에 발목이 잡히지도 않은채 정국 안정을 실현하는 동시에 자기 뜻대로 아테네를 이끌어갈 수 있었으니, 그는 대단한 정치력의 소유자다.


그런 의미에서 중우정치는 인재 부족에서 생겨난 결과가 아니라, 제도가 내포하고 있는 구조적 결함이 표면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필자 나나미는 본다. 즉 민주정치가 구조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민중의 인식 능력에 환상을 품지 않았던 정치적 인간이었기 때문에, 민주정치의 구조적인 결함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위대한 인물을 사모하는 사람들 중에는 스승의 가르침 가운데 한 가면만 강하게 느끼고, 그것을 강조하는 삶으로 치닫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 사람은 모든 사물에는 겉과 안의 양면이 있고, 겉과 안의 균형을 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린다. 베뢰아 운동에도 이것은 동일하지 않나?


결국 그리스는 쇠퇴하고 그 와중에서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당한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패배한다. 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해군이 강한 아테네가 해전에서 패함으로써 결판이 났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패권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아테네만이 아니라 스파르타도, 아니 그리스 전체가 자유와 독립을 잃어버리는 시대의 시작이었다.


아테네를 대신한 스파르타의 패권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힘이라고는 군사력밖에 갖고 있지 못했던 스파르타는, 강국이 될 수는 있었지만 패권 국가의 자리에 계속 머물 수는 없었다. 스파르타에게는 패배자조차도 납득할 수 있는 생활철학이 전혀 없었다. 스파르타인의 생활양식은 밖으로 수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타국인은 ‘스파르타식’에 전혀 매력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371년에 스파르타는 패권을 잃고, 테베가 스파르타를 대신하여 패권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테베의 패권 시대도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동안 아테네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문화국가로도 일급이었지만, 정치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속 혼돈을 거듭했기 때문에 그리스를 이끌어갈 만한 세력은 되지 못했다. 이리하여 폴리스의 영광스러운 역사는 마침내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기원전 362년, 그리스의 주도권은 마케도니아의 손에 넘어갔다. 마케도니아는 왕정이기 때문에 도시국가는 아니다. 기원전 356년 그 마케도니아에 알렉산더 대왕이 태어난다.


일어서는 로마


우리가 아는 정치체제에는 다음 세 가지가 있다. 왕정과 귀족정과 민주정이다. 로마인에게 당신 나라의 정치체제는 이 세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냐고 물어도, 대답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집정관한테만 조명을 비추면 왕정처럼 보인다. 원로원의 기능에만 주목하는 사람은 귀족정이라고 말할 것이다. 민회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민주정이라고 단언할게 분명하다. ...... 그런데 로마의 정체제는 이 세가지를 짜맞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와같은 로마의 정치체제가 가장 이상에 가깝다고 생각하였다.


 자기 주장을 당당하게 전개하는 사람은 미움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원전 367년, 로마 역사상 획기적인 법률인 ‘리키니우스 법’이 성립되었다. 평민들은 두 집정관 중 한명을 평민 출신으로 하자고 주장하고, 귀족들은 계속 정부 요직을 그들이 독점하려고 하였는데 마침내 깊은 통찰력에 뒷받침된 현명한 결단이 있었다. 국가 요직을 전면 개방한 것이다.


만일 관직을 귀족과 평민에게 분배하면, 차별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조치가 거꾸로 차별을 정착시키는 결과가 된다. 게다가 이런 것은 일단 양분되면 양분된 상태로 고착되어 버린다. 두 파로 나뉜 이익대표가 항상 대립하면서 서로를 적대시하는 것이다. 이래서는 두 개의 정부가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국가 전체의 힘을 유효하게 활용해야 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투쟁의 불씨를 영원히 몸 속에 끌어안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로마는 전면 개방을 택했다. 국가 요직을 전면 개방하면, 완전한 자유경쟁이 된다. 선거 결과, 집정관은 둘다 귀족이 될 수도 있고 두 자리를 모두 평민이 차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자유로운 경쟁이니까 어느 쪽도 불평할 수가 없다. 또 중요 공직을 경험한 사람은 귀족이든 평민이든 원로원 의석을 취득할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하였다. 결과적으로 평민계급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임무인 호민관조차도 퇴임한 뒤에는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다. 노동조합장이 퇴임한 뒤에 그 회사의 중역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1년마다 선거로 교체되는 집행기관을 떠받치려면, 선거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으로 일관된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사람들이 꼭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이 로마 공화정에서는 원로원에 있었다. 이제 이 원로원은 귀족계급의 아성에서 벗어났다. 원로원 의원에게는 출신 가문도 성장기 교육도 문제삼지 않게 되었다. 경험과 능력만이 문제가 될 뿐이었다.


인류는 종종 선견지명이 뛰어난 인물을 배출했다. 그에게는 앞이 보이니까. 현재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한 것뿐이라면 선견지명을 가진 지식인으로 끝나 버린다. 보고 이해한 것을 실천에 옮기려면 권력이 필요하다. 마키아벨리도 “무기를 갖지 않은 예언자는 자멸한다”고 말했다. 트로이의 왕녀 카산드라는 트로이가 그리스군에게 멸망할 것을 예견하고, 그것을 막기 위한 대책을 트로이 사람들에게 말했지만,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지금도 설득만 하면 들어줄 거라고 믿는 사람을 ‘카산드라’라고 부른다.


따라서 권력 획득이 선결 문제가 되는데, 권력을 얻으려면 시대의 큰 흐름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큰 물결이 민중이라면 그는 민중파의 우두머리가 되어야 하고, 민주정치가 벽에 부딪친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과두정치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권력은 그들에게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하지만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


로마는 어쨋거나 개방적이고 유연했다. 원로원 의원은 로마로 이주해온 타부족의 유력자한테도 금방 제공되었다. 패전국의 지배계급도 원로원 의원이 되어달라는 적극적인 초빙을 받았다. 또 집정관을 지낸 사람도 재무관(오늘날 재무부장관 정도)에 선출되면 재무관으로 일했다. 정계나 관계만이 아니라 군대에서도 상위직에 있었던 사람이 하위직을 맡는 경우가 허다했고, 이것을 불명예스럽다거나 부적절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켈트족의 침략을 통해 배운 것


로마인은 패배하면 반드시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하여 기존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개량하여 다시 일어서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390년의 켈트족 침략에서 로마인은 몇가지를 배웠다.

그중 하나는 국론분열의 어리석음이다. 귀족파와 평민파가 양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야만족에 불과한 켈트족한테 실컷 당했던 것이다. 이것은 리키니우스 법으로 해소되었다. 로마의 귀족과 평민의 대립관계는 귀족이 평민을 끌어아는 관계로 바뀌었다. 이제 로마는 로마인이 가진 모든 역량을 투입할 수 있는 체제를 확립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 배운 것은 타국과의 관계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예전의 라틴동맹에서는 로마와 가맹국만이 아니라, 가맹국 상호간에도 협정이 맺어졌다. 그래서 로마와 어떤 가맹국과의 관계는 그 가맹국과 다른 가맹국의 관계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다 보니 주도국 로마를 포함하여 동맹 가맹국들은 여러 세대가 모여사는 집처럼 통일성이 없는 잡다한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로마가 강할 때는 로마와 손을 잡지만 로마가 약해지면 당장 배반해 버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 연합의 기둥인 로마다. 두 번째는 ‘라틴동맹’의 가맹국이었던 나라들로서, 기원전 390년에는 로마를 배신했지만, 재기한 로마에게 패배한 나라들이다. 원래 언어도 종교도 풍속도 같은 이런 나라의 주민들에게도 로마는 과감하게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이들 중 로마의 집정관이 된 사람도 있었다. 눨ϨϨ͒Ǵ끈ͩ










                    

인간 세계에서 처음부터 먼 장래까지 내다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백년대계를 세우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다. 적기 때문에 천재다. 천재가 아닌 보통 사람은 눈앞의 과제를 해결하는 것만 생각하여 방책을 세운다.


‘라틴동맹’에서는 동맹의 구성요소가 로마와 기타 가맹국이라는 두 부류밖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로마연합’에서는 구성요소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첫째, 연합의 기둥인 로마다. 두 번째는 ‘라틴동맹’의 가맹국이었던 나라들로서, 기원전 390년에는 로마를 배신했지만, 재기한 로마에게 패배한 나라들이다. 원래 언어도 종교도 풍속도 같은 이런 나라의 주민들에게도 로마는 과감하게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이들 중 로마의 집정관이 된 사람도 있었다.


세번째 부류에 속하는 것은 라틴어로 ‘무니키피아’라고 불린 나라들이다. 이 라틴어에서 파생한 이탈리아어인 무니치피오를 사전에서는 지방자치단체나 시, 읍, 면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런 나라에 로마는 투표권이 없는 시민권을 주었다. ‘투표권이 없는 시민권’이란 로마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을 뿐, 그밖의 모든 면에서는 로마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뜻이다. 또한 라틴어를 배우면 가까운 장래에 완전한 로마 시민권의 소유자가 되도록 예정된 사람들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로마 시민예비군이다. 실제로 이들은 3년만 지나면 로마 시민권을 얻는 것이 보통이었다.


네번째 부류는 우리가 식민지라고 번역하는 ‘콜로니아’다. 그러나 근대의 영국이나 프랑스나 네덜단드나 스페인의 식민지와는 다르다. 로마인은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식민지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처럼 본국에서 밀려난 자들이 멋대로 다른 곳에 가서 도시를 세우고, 본국과는 교역이나 문화 교류 외에는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 방식을 로마는 답습하지 않았다. 전략적 요충으로 여겨진 지역에 로마 시민들이 정착한다. 이들은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군에 복무할 의무를 가진다.


식민지 중에는 로마 시민을 정착시킨 ‘로마 식민지’가 있는 반면, ‘로마 연합’에 속해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이주시킨 ‘라틴 식민지’도 있었다. 이주한 사람만 다를 뿐, 식민지 건설의 목적은 같았다. 로마인에게 식민지는 곧 ‘요새’ 건설이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식민지를 맡길리 없었다.


다섯번째 부류는 ‘소키’라고 불린 동맹국들이다. 이런 동맹국들은 다른 동맹국 처럼 로마와 싸워서 진 패자지만, ‘라틴 동맹’의 가맹국들처럼 기원전 390년 직후의 패자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의 패자라는 점이 다르다. 이들은 기원전 350년 이후에 로마와 싸워서 패한 나라들이다. 이런 부류의 ‘소키’는 완전한 국내 자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또한 언어도 종교도 풍속도 종래의 것이 그대로 허용되었다. 특히 주민이 사용하는 언어가 그리스어인 경우에는 라틴어를 새로 배우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당시에는 그리스어가 라틴어보다 언어로서의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로마인은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뒤에도 태연히 두 언어를 계속 병용한 민족이다. 로마인은 이 ‘소키’(동맹국)에 대해 공물과 같은 형태의 납세를 요구하지 않고, 그 대신에 병력 제공을 요구했다. 물론 병사들이 자비로 무장하는 것이 상식이었던 당시에, 병력을 제공하는 것은 곧 병력 유지비를 제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로마 연합군’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이었고, 동맹국에서 참전한 사람은 지원군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이런 비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이른바 ‘만민법’이라는 법률까지 만들었다. 말하자면 ‘외국인법’이다. 이런 면을 생각하면 법제에서 로마는 우리나라보다도 훨씬 앞서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BC 3,4세기에 AD 20세기보다 앞선 것도 있을 수 있다니 놀랍다. 이 다섯번째 부류에 속하는 나라들 중에는 네아폴이스(나폴리)를 비롯하여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차례로 로마의 세력권에 편입된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가 많았다.


이렇게 로마는 패자를 예속시키기 보다는 패자를 자신의 ‘공동 경영자’로 삼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것은 타국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방식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후세에 유명해진 ‘분할하여 지배하라’는 사고방식의 탄생이기도 했다.


로마를 제외한 네 가지의 부류의 나라들은 로마를 중심으로하여 마치 나이테를 그리듯 차례대로 ‘무니키피아’, ‘콜로니아’, ‘소키’로 나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네 종류의 ‘동맹국’은 서로 뒤섞여 있었다. 로마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특히 전략적 요충에 군데군데 세워진 식민지는 동맹국끼리의 공동 행동을 분리시키는 역할도 맡았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이점도 많은 대신 결점도 적지 않았다. 가장 큰 결정은 로마에서의 지령이나 파병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무렵부터 계획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로마 가도는 바로 이 문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로마의 길


도로가 국토의 ‘동맥’인 것은 오늘날에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2천 300년 전에 이것을 안 것은 로마인뿐이다. ‘아피아 가도’(비아 아피아)가 개통된 기원전 312년을 계기로 그 이후의 로마 가도는 단순한 행정 도로가 아니라, 정략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 지게 된다. 정치와 군사 및 행정의 필요에 따라 길을 만든 것이다. 대개 로마 가도를 군용도로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훨씬 더 정치적인 성격이 짙기 때문에 차라리 정용(政用) 도로라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로마인은 이 사실을 완벽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후에 만들어지는 로마 가도는 더 이상 어디어디로 가는 길을 의미하는 명칭으로 부르지 않고, 그 길을 만든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어디어디로 통하는 길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붙이면 길을 더 길게 연장할 때 곤란해진다. 아피우스가 건설한 가도라고 이름지으면, 길을 늘이든 줄이든 자유자재가 된다.


아피아 가도를 건설한 사람은 로마의 명문 귀족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아피우스인데, 그는 로마적인 의미를 가진 가도를 처음으로 만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상하수도 공사를 시작한 사람이기도 했다. 어떤 이는 이런 모습을 보고, 그리스인은 신전 건축에 열심인 반면 로마인은 공공시설을 확충하는데 중점을 둔다는 글을 남겼다.


그러나 도로는 숙명적으로 양날의 칼이 될 수 밖에 없다. 아군의 연락이나 이동이 편리해졌다는 것은 적군의 정보 수집이나 이동도 편리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로부터 수십년 뒤에는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가, 100년 뒤에는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인이 건설한 가도를 따라 로마로 쳐들어와, 로마인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어를 최대 목표로 삼는 민족은 도로공사 기술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평탄하고 편리한 도로를 건설하는 일에는 열성을 쏟지 않는다. 고대의 에트루리아 민족과 중세 유럽이 그 좋은 예다. 반면에 지평선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가다 보면, 고대 로마인의 외향성의 표본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로마인은 종교와 정치체제, 대외관계에서 도로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개방적인 민족이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우리 CBA나 성락교회, 내지 베뢰아운동은 얼마나 개방적인지, 아니면 얼마나 폐쇄적인지? 현재 청장년은 대단히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려 하지만 그 결과 사람을 오히려 잃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모체인 성락교회의 폐쇄적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뢰아운동이나 성락교회가 폐쇄적이라 해도 여전히 과감하고 진취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취적이라는 것과 개방적이라는 것이 공존하지 않았던 역사적 실증은 그리스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베뢰아는 그리스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인들은 모험심이 강하고 진취적이긴 해도 여전히 폐쇄적이었다. 그래서 놀라운 발전은 했어도 그릇 자체는 작았기 때문에 서로 단결하지 못했고 다른 나라나 민족에 대해서도 단지 독선과 교만으로 대했던 것이다.


시민권


로마인은 자국의 시민권을 타국인에게 주는데 대단히 너그러운 민족이었다. 덕택에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병력은 만 명 단위에 머물렀지만, 로마는 10만 단위의 병력을 가질 수 있었다. 전성기의 아테네에서도 부모가 모두 아테네인이 아니면 아테네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이 점은 스파르타도 마찬가지였지만, 로마에서는 얼마 동안 로마에 거주하기만 하면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제도가 훨씬 이후까지 실시되었다.


반대로 아테네에서는 오랫동안 아테네에서 살고 학교까지 열어 아테네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평생 동안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 시민권에 대한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사고방식의 차이는 노예에 대한 처우에도 나타나 있다. 그리스에서는 노예가 노예인 채 평생을 마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로마의 노예한테는 다른 길이 열려 있었다. 노예라도 왕이나 집정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로마는 개방적이고 관대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로마의 6대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말이 놀랍도록 대비가 되고 있는 것을 살펴보라. 아리스토텔레스; “유용함에서는 노예와 가축이 별 차이가 없다. 노예든 가축이든 그들의 육체로 우리 인간에게 봉사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툴리우스; “노예와 자유민의 차이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태어난 뒤에 만난 운명의 차이에 불과하다.”


로마에서는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봉사한 노예에게 주인이 보답하는 의미로 자유를 주거나, 노예 자신이 저축한 돈으로 자유를 살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자유를 회복한 노예를 해방노예라고 부르고, 그들의 자식대에는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시민권만 수중에 넣으면, 그후 사회에서의 출세는 그 사람 자신의 재능과 팔자에 달려 있다. 반대로 아테네에서는 저 유명한 페리클레스 조차도 아테네인이 아닌 여자와 재혼했기 때문에 그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테네 시민권을 얻지 못하다가, 특례를 인정받아 겨우 아테네 시민의 자격을 얻었을 정도다.


시민권에 대한 로마인의 개방적인 사고방식은 이중 시민권, 다시 말하면 이중 국적까지 인정한 점에도 나타나 있다. 이 시기에는 ‘로마 연합’의 동맹국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로마 시민권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자기가 속한 지방의 시민권을 포기할 필요도 없었다. 이 이중시민권도 동시대의 타국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로마의 독특한 제도였다.


로마는 끊임없는 전투가 지도자 계급에 속하는 이들에게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희생을 강요했다. 그 결과 원로원 의석을 차지하는 귀족들이 엄청나게 많이 죽었다. 그러나 정부 요직과 원로원 의석을 평민에게 개방함으로써, 로마는 항상 새로운 피를 수혈받을 수 있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는 한니발에게 완벽한 패배를 맛보았다. 6천 명의 로마 기병 가운데 370명, 8만의 로마 보병 가운데 불과 3천 명밖에는 살아남지 못했다. 그런데도 로마는 재기할 수 있었다. 항상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것을 잊지 않은 로마인의 사고방식이 거둔 성과였다.


이것은 그리스에서도 이집트에서도 카르타고에서도 에트루리아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로마인의 독특한 ‘철학’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시기에 로마인 외에 오직 한 사람,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 했던 인물이 있었다. 다만, 이 인물의 시선은 로마가 있는 서쪽이 아니라 동방으로 향해 있었다. 그 이름은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그러나 만약에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으로 쳐들어가지 않고 서쪽으로 향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리비우스는 이 질문에 대해 알렉산더가 상대였다 해도,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 이유를 리비우스는 7가지로 든다. 첫째, 알렉산더의 군대에는 지휘관이 대왕 한 사람뿐이었던 반면, 같은 시기의 로마군은 적어도 11명의 뛰어난 지휘관이 있었다. 로마에는 지휘관의 자리가 비어도 대신할 사람이 항상 있었다는 뜻이다. 둘째, 로마군의 엄정한 규율은 알렉산더 군대의 규율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고, 400년의 유구한 전통을 가진 로마군의 병사들의 사기와 10여년 만에 양성된 마케도니아군 병사들의 사기는 전통적으로 보아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휘관이 사기를 북돋울 수 있지만, 병사 개개인의 가슴 속에 축적된 자신감이야말로 사기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 알렉산더 개인의 전략과 전술적 재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로마군은 다리우스 왕의 병사들이나 인도 병사들과는 다르다. 로마인은 페르시아인이나 인도인처럼 사치에 익숙지 않았다. 실질강건을 당연하게 여겼던 당시의 로마 남자들과 싸웠다면, 아무리 알렉산더 대왕이라 해도 유약한 민족과 싸울 때처럼 승전에 승전을 거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넷째, 로마와 알렉산더의 전쟁은 조직과 개인의 대결이고, 알렉산더에게 남아 있었던 10여년의 기간으로는 아무리 그의 재능이 뛰어났다 해도 효율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조직에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다섯째, 마케도니아의 중무장 보병군단은 한 덩어리가 된 공격에 강하고 방어에도 유리하지만, 중대의 연합체인 로마의 중무장 보병군단은 기동성이 뛰어나고 전술 전환에 즉각 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리비우스가 든 여섯째 이유는 적지에서 싸우는 알렉산더에 비애 자국 영토 안에서 싸울 수 있는 로마군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특히 로마는 ‘로마 연합’에 가입한 식민지와 동맹국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들은 로마와 긴밀한 관계로 맺어져 있어서, 아무리 알렉산더 대왕이라 해도 이 촘촘한 그물을 간단히 돌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 이유는 알렉산더에게 전투에 패하는 것이 곧 전쟁에 패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던 반면, 로마군의 전통은 전투의 패배가 전쟁의 패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나는 리비우스와 동의하지는 않는다. 이미 알렉산더 사후 100여년이 지난 후에도 한니발에게 엄청난 패배를 당한 로마가 쉽게 한니발의 사부님의 사부님에 해당되는 알렉산더에게 쉽게 이길 수 있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또 알렉산더에게 10년의 여생만이 남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것도 여전히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알렉산더가 동방이 아니라 서방으로 방향을 돌렸다면 갑자기 열병으로 사망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 로마와 알렉산더의 전쟁이 조직대 개인의 대결이라고 리비우스는 표현했지만 사실 알렉산더의 군대도 이미 그의 아버지 필립포스왕때 개인의 군대의 성격을 넘어섰다고 본다. 이미 필립포스왕의 마케도니아 군대는 당시 최고의 군사 강국이었던 스파르타와 테베의 전략과 전술에 의해 훈련되어 알렉산더가 지휘하지 않더라도 막강한 힘을 가진 군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아마 알렉산더가 로마를 쳐들어 왔다면 당연히 로마는 쑥밭이 되었을 것이고, 만일 그 결과로 로마가 망했다면 역사상 로마인의 이야기는 쓰여지지도 않고 묻혀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묘하게 알렉산더가 동방으로 진출했기 때문에 로마는 역사속에 좋은 사례를 남겼던 것이 아닐까? 또 어떻게 생각하면 주님이 오시기 전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준비 작업을 하기 위해 알렉산더의 마음이 동방으로 향하도록 하셨다고도 생각된다. 만일 알렉산더가 동방을 향하지 않았다면 복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당시 세계는 초대교회때만큼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복음전파에 유리한 위지에 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느 역사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확실히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알렉산더나 칭기스칸의 관대함과 공정함이 로마에서는 제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나 할까? 알렉산더나 칭기스칸처럼 개인 단위로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그릇이 크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그만큼 로마는 지속적이며 견고하고 큰 나라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산악 민족 삼니움족


삼니움 족은 이탈리아 중부에서 남부에 걸친 산악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이다. 로마인들은 이들 삼니움 족과의 전쟁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하게 된다. 삼니움족은 산악에서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여 대항하였는데 로마는 이런 전투에 익숙치 않았다. 로마의 전투대형은 평원에서의 대결에 적합했다. 아무리 로마가 평원으로 유인하려 해도 삼니움족은 로마를 타도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방어만 했다. 결국 로마는 삼니움족을 복종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불리한 입장에서 공격을 해야 했다.


그러나 1만여명의 로마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카우디움의 협곡에서 포로가 되었다. 기원전 321년의 일이다. 로마인은 70년 전에 켈트족에게 굴복을 당한 적이 있었다. 포로가 된 로마인들은 삼니움족에 의해 속옷바람으로 창을 빼들고 빈틈없이 늘어서 있는 삼니움족 병사들 사이를 지나가라는 강요를 받았다. 로마인들이 지나갈 때 삼니움족은 욕설을 하기도하고 창으로 찔러 죽이기도 했다.


삼니움족이 로마인과 공존할 생각이었다면, 그들의 이런 처사는 참으로 졸렬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로마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은 명예였다. 삼니움족은 그 명예심에 깊은 상처를 준 것이다. 로마인은 승전보다 패전을 더 오래 기억하는 민족이었다. 패배를 맛본 로마인의 태도는 시대를 초월하여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싸움에 패한 장수를 처벌하지 않는다.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사람은 심한 수치심에 괴로워한다. 구태여 해임하거나 죄를 물을 필요가 없다. 수치심으로 괴로워하는 것 자체로 벌을 충분히 받았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명예심을 제일의 덕목으로 생각한 로마인에게는 명예를 잃는 것이 가장 무서운 벌이었다.


둘째, 새로운 전술을 도입했다. 군단(레기온)을 구성하는 중대의 지휘관은 총사령관인 집정관의 명령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면 독자적인 행동도 임기응변으로 취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이러한 조치는 기동성을 높여주었다. 무기도 삼니움족이 사용하고 있는 투창의 효력에 주목하여 당장 그것을 도입했다.


셋째, 그때까지 추진하고 있던 기본 정략의 유효성을 깨닫고, 그것을 계속 추진했다. 로마의 기본 정략은 바로 ‘로마 연합’의 확립과 확장이다. 로마와 새로 동맹관계를 맺은 지방의 확대는 로마군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동싱 로마군의 보급선을 늘렸고, 그 결과 삼니움족의 근거지를 포위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이때까지 두 명의 집정관이 각각 군단 하나씩 맡아 이끌던 것을 두 군단씩 지휘하게 하는 변화가 있었다. 이제 로마의 전력은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 5년을 그냥 산지에 틀어박혀 지낸 삼니움족은 로마가 그들을 제압할 수 있기까지 그냥 방관만하고 있었다.


동맹관계에 있는 나라가 배반하는 경우, 그 나라가 독립하여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겼기 때문에 떠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는 다른 강대국 쪽에 붙는 편이 상책이라고 생각한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종주국은 항상 자기가 더 강하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어야 한다. ‘로마 연합’에 가입해 있던 카푸아가 삼니움족쪽으로 돌아선 것도 카우디움 협곡에서 패배한 로마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로마는 삼니움족과 다시 한 번 겨룰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우선 삼니움족의 지원을 격퇴하는데 성공한 로마군은 곧이어 카푸아로 쳐들어갔다. 카푸아는 자력으로 방위할 만한 힘이 없었다. 카푸아는 함락되었고, 유력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그후 제2차 포에니 전쟁때 한니발 쪽으로 돌아설 때까지 100년 동안, 카푸아는 로마에 충성을 바쳤다.


로마는 패자에게 너르럽기로 유명했지만, 모든 패자에게 다 너그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패자는 처음은 로마의 관용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두번째나 세번째 관용은 기대할 수 없었다. 명예와 함께 신의를 중시한 로마인은 협약을 배신한 자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부 이탈리아로 가는 요충지 카푸아를 되찾은 로마는 4년 뒤인 기원전 312년에 로마에서 카푸아까지 아피아 가도를 건설한다. 가도를 활용하여 유기적으로 전략망을 만들어 가는 로마의 독특한 방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로마는 카푸아를 되찾은 뒤, 단번에 삼니움족까지 결파하지는 않았다. 계속 이탈리아 중부에서 남주에 걸쳐 세력을 확대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4개군단을 상비군으로 갖춘 로마는 삼니움족의 지배를 받고 있던 지방도 조금씩 자기 세력권에 끌어들이게 된다. 여기서도 로마는 패자를 동맹국으로 삼고, 요충지에는 식민지를 건설하여 로마 연합권을 강화하기를 잊지 않았다. 로마인은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나아가는 방식을 고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쪽에서 에트루리아인이 켈트족과 공동전선으로 로마를 야금야금 침식해 들어왔다. 아펜니노 산맥의 아드리아해 쪽에 사는 움브리아인도 로마에 대한 투쟁에 가담하게 되었다. 로마에 밀려 계속 산지로 쫓겨들어가기만 하던 삼니움족도 여기에 가담하여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로마는 북쪽과 동쪽과 남쪽의 세 방향에서 동시에 포위 공격을 받게 되었다.


기원전 297년, 로마 원로원은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16세부터 40세까지의 시민만이 아니라 평소에는 병역을 면제받는 60세까지의 예비군도 소집되었다. 이런 사태라면 집정관이 독재관을 임명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이번에는 독재관이 임명되지 않았다. 독재관으로 임명할만한 사람은 명문 귀족인 파비우스밖에 없었는데, 그가 독재관이 되면 평민계급이 반대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론 일치가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되는 위기의 시기에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재연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파비우스가 집정관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평민계급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해의 집정관은 퀸투스 파비우스와 젊은 보르미니우스가 선출되었다. 이로써 파비우스는 집정관에 5번째 취임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독재관에 임명되지 않은 것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파비우스가 동료 집정관 선출에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노인의 기질로 보아 젊은이와 의견이 이치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동료 집정관으로서 세번이나 함께 집정관을 지냈고, 같은 전쟁터에서 싸운 경험도 공유하고 있어서, 속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데키우스를 추천했다.


참 파비우스가 지혜롭다는 생각이 든다. 대개의 경우 전혀 모르는 사람과 함께 중요한 일을 하게 될 때 그 사람이 나와 함께 일을 하기에 합당한지 잘 계산해 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 함께 일하기 부적합한 경우라는 것이 발견되었을 때 파비우스와 같이 일반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문제(노인과 젊은이의 세대차이 등)를 지적하면 감정이 상하지 않고 일을 진행할 수 있지만 대개 개인적인 문제를 지적하여 동역이 어려움을 깨면 완전히 원수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쩌면 파비우스의 노인과 젊은이의 기질 문제 지적은 사실 정직한 것이 아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무난한 문제를 지적하여 자신에게 맞는 동역자를 구한 파비우스는 참 지혜로왔다.


독재관과 집정관의 가장 큰 차이점은 6개월과 1년이라는 임기 차이가 아니다. 독재관은 혼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반면, 집정관은 동료 집정관과 협의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동료 집정관과 마음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집정관의 임무를 수해하는데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전쟁을 하기에 앞서 로마는 에트루리아가 분열되어 있는 낌새를 눈치챘다. 그래서 먼저 에트루리아 본국에 침공하여 파괴활동을 시작했다. 효과는 당장에 나타나서 에트루리아 군대는 싸우기도 전에 전선을 이탈했다. 이제 적군은 오른쪽은 켈트족(갈리아인), 왼쪽은 삼니움족으로 나뉘어 공격해 왔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가들이 모두 인정하는 로마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패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재능과 승리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재능이다. 기원전 297년의 승리도 이런 특징을 뚜렷이 보여준 사례 가운데 하다였다.


쉴 틈도 없이 진격하는 로마군에게 쫓겨 켈트족은 북쪽으로 밀려났고, 움부리아인과 에트루리아인도 ‘로마 연합’에 가맹할 것을 약속했다. 기원전 290년, 유일하게 저항을 계속하고 있던 삼니움족도 마침내 로마군에게 강화를 요청했다. 삼니움족은 ‘로마 연합’의 한 동맹국(소키)이 되었다. 그들이 사는 산악지대 한가운데에 로마 시민들이 이주할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로마에서 카푸아까지 건설된 아피아 가도는 기원전 285년에 베누시아(오늘의 베노사)라고 이름지은 이 식민지까지 연장되었다. 로마의 패권 확대를 구체적인 형태로 보여주는 로마 가도는 아피아 가도를 비롯하여 여섯 개로 늘어나 있었다. 그 모두가 수도 로마와 지방의 전략적 요충지에 건설된 식민지(콜로니아)를 잇는 도로였다.


로마는 기원전 290년의 전투를 끝으로 이탈리아 중남주의 제패를 완성한 셈이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남해안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던 그리스인의 도시와 처음으로 직접 접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와 로마의 대결


역사를 서술할 때의 어려움은 시대를 명쾌하게 구분지어 이 시대에는 무슨 일이 이루어졌고, 다음 시대에는 무슨 일이 있었다고 쓰기가 불가능하다는데 있다. 전쟁 기록조차도 그런 식으로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첫번째 이유는 대부분의 일들이 서로 겹쳐서 진행되기 때문이고, 두번째 이유는 나중에 큰 의미를 갖게 되는 일도 처음에는 작고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는 필연에 의해 발전한다는 생각이 진리인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는 우연의 중첩이라는 생각도 진리가 된다.

이렇게 되면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나쁜 우연과 좋은 우연을 구별하여 대처하는 능력, 나쁜 우연은 되도록 빨리 처리하여 거기에서 벗어나고 좋은 우연은 필연으로 가져가는 능력이 아닐까. 대기만성형의 로마인이 다른 민족에 비해 뛰어난 것은 바로 이런 면에서의 재능이 아닐까 여겨진다.


하나님의 예정이냐 인간의 자유의지냐의 문제도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역사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의해 발전한다는 생각이 진리인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는 인간들의 여러 자유의지가 우연히 어떻게 서로 작용하느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생각도 진리가 된다. 이렇게 되면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유의지가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는 경우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휘되는 경우를 구별하여 대처하는 능력, 나쁜 방향의 자유의지는 되도록 빨리 처리하여 거기에서 벗어나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으로 가져가는 능력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비해 뛰어난 것은 바로 이런 면에서의 재능이 아닐까?


기원전 283년,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뒤꿈치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타렌툼(타란토) 앞바다에 10척의 로마 선박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 동안 줄곧 육상 민족이었던 로마도 나폴리 일대를 ‘로마 연합’에 끌여들였을 무렵부터 소규모나마 함대를 갖게 되었다. 그 함대 가운데 10척이 태풍에 쫓겼는지, 타렌툼 항구로 피해 들어온 것이다.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 가운데 우두머리겪인 타렌툼과 로마 사이네는 로마가 삼니움족과의 전쟁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부터 이미 서로의 세력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협약이 맺어져 있었다. 타렌툼 사람들은 이 사고를 협약 위반으로 받아들이고, 항구에 들어온 이유조차 묻지 않고 당장 실력행사에 나섰다. 다섯척은 당장 침몰하고, 승무원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나머지 다섯척은 간신히 달아날 수 있었다.


로마는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타렌툼 시민들은 손해배상 교섭에 응하기는 커녕 손해배상을 요구하러 방문한 사절단의 그리스어 발음이 엉터리라고 비웃으며 쫓아냈을 뿐이다. 로마는 전쟁을 결의한다.


타렌툼은 스파르타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건설한 도시국가였다. 도시국가로서는 로마와 거의 같은 나이였다. 기원전 3세기 전반의 이 시대, 본토인 그리스에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및 테베 같은 유력한 폴리스들이 차례로 사라지고, 마케도니아 왕국의 지배에 복종했지만, 알렉산더 대왕이 요절하는 바람에 다시 이전의 혼란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을 통틀어 ‘대 그리스’(마그나 그라이키아)라고 부른 것도 본국의 쇠퇴와는 반대로 계속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당초에 그리스계 도시들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타렌툼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의 로마는 삼니움 전쟁을 겨우 끝내고, 넓어진 세력권에서 기반을 다지는 시기에 들어가 있었다. 실제로 타렌툼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의하긴 했지만, 군대를 당장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타렌툼에서는 로마의 결의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말았다. 스파르타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치고는 불가사의하게도 타렌툼 사람들은 싸움을 싫어하여, 자국의 방어를 외국 용병에게 맡기는 관습이 있었다. 타렌툼은 당시 최고의 용병인 북부 그리스의 왕국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를 택했다. 타렌툼은 피로스왕에게 이탈리아에 와서 로마를 공격해 준다면 35만 명의 보병과 2만 명의 기병을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도 특히 동쪽에서는 ‘알렉산더 증후군’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현상이 만연해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지 아직 4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대왕의 위업은 그의 원정에 참가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야심만만한 그리스 남자치고, 자기도 알렉산더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많은 그리스인들 가운데 알렉산더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주목받고 있었던 자가 바로 피로스였다.


병법의 천재 피로스


태풍으로 2천명의 병사와 2마리의 코끼리를 잃은 피로스를 맞은 타렌툼의 거리는 임전태세가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다. 야외극장이나 체육관은 시민들로 가득찼고, 약속한 37만 명의 병력은 그림자도 없었다. 그는 당장 극장과 체육관을 닫으라고 명령했는데 타렌툼 시민들은 피로스를 용명으로 고용했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조치에 불만을 가졌다.


로마가 남하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피로스는 그리스에서 데려온 휘하 별력만 이끌고 싸우기로 결심한다. 통틀어 2만 6천 500명의 병사와 코끼리 18마리가 전부였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볼 때 타렌툼의 모든 행동은 자만과 안일로 뭉친 모습으로 비쳐진다. 전쟁을 할 마음도 아니면서 전쟁강국인 로마를 무시하고 감정을 건드린 이유는 무엇이며 이미 전쟁선포가 있었는데고 자만에 빠져 안일하게 무방비상태로 있었던 것은 어떻게 변명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대단한 타렌툼이어도 결국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스인은 타민족을 모두 ‘바르바로이’, 즉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결국 그들의 자만이 자멸를 초래한 것이다.


피로스는 훗날 한니발이 병법의 스승으로 삼은 장수답게, 용맹하고 과감하게 공격하는 무장과 침착하고 냉정한 전술가의 양면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우면서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투의 전모를 머리에 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마가 피로스에게 패하자 이 소식은 당장 이탈리아 남부 일대에 퍼져, 로마 세력권에 편입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자들이 피로스쪽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로마로 진군하는 동안, ‘로마 연합’에 가담하고 있는 부족들이 로마에 등을 돌리리라는 것을 계산하고 수도 로마로 북상하던 피로스는 난처한 상황에 봉착했다. ‘로마 연합’의 가맹국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토록 끈질기게 로마와 싸우다가 마침내 굴복한 삼니움족까지도 피로스의 유혹을 거절했다. 바로 이것이 로마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쳐들어간 피로스의 기세를 꺾어 버렸다.


로마는 당시 병역이 면제되어 있었던 무산자들조차도 소집할 만큼 이번 사태의 중대성을 심각하게 인식했다. 그러나 당황하여 허둥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독재관도 임명하지 않았다. 이때도 역시 로마인의 평소 방식대로 피로스와의 서전에서 패한 집정관 레비누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고, 집정관 자리에서 해임하지도 않았다. 이 상황에서 로마에 다행스러웠던 것은 피로스가 다른 모든 것은 갖추고 있었지만, 인내심만은 갖지 않은 사나이였다는 사실이다. 피로스는 ‘로마 연합’이 해체되지 않는다는 것과 수도 로마에서 무산자 계급까지 소집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 회군해 버린 것이다.


타렌툼으로 돌아간 피로스는 타렌툼의 입장에서 로마에 강화를 제안했다. 조건은 첫째, 로마가 앞으로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를 존중하고 불가침을 선언할 것. 둘째, 그리스계 도시들과 로마 사이에 쌍방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중립지대를 두기위해 그 지역에 사는 삼니움족과 루카니아족을 ‘로마 연합’에서 해방하여 다시 독립시킬 것.


만약 로마가 두번째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이 지역에 전략적 이유로 건설한 루체리아(오늘날 루체라)와 베누시아라를 두 식민지는 철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베누시아까지 건설이 끝난 아피아 가도도 그 정략적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로마인들은 피로스가 제의한 강화를 진지하게 토의한 모양이다. 이번 전쟁은 원래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을 정복하려고 시작한 전쟁도 아니었다. 그리고 소문으로만 들었던 피로스의 교묘한 전술과 코끼리 부대의 파괴력을 직접 체험한 지금은 로마인도 주눅이 들어 있었다. 원로원 의원의 대다수는 강화를 맺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알고 격분한 인물은 노령 때문에 은퇴해 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다. 아피우스 가도를 건설한 아피우스는 다른 아피우스와 구별해서 ‘재무관 아피우스’나 ‘장님 아피우스’라고 부른다. 노령에 시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원로원에 나타나 호되게 원로원 의원들을 꾸짖었다. 그 결과 원로원의 분위기는 바뀌었다. 그러나 로마는 피로스의 제안을 거절할 결심까지는 서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선 포로의 몸값을 가진 특사를 타렌툼의 피로스에게 파견하였다.


피로스는 몸값을 받지는 않고 포로가 된 로마 병사들을 강화체결을 미리 축하하는 뜻으로 석방한다고 풀어주었다. 그러나 로마의 특사는 600명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가는 것은 받아들였지만 강화가 성립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 포로들을 다시 피로스에게 돌려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귀국한 특사를 맞아 로마 원로원은 다시 토의를 시작했다. 결국 피로스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600명의 로마병사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다시 헤어져 타렌툼으로 돌아갔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고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민족인지 너무 놀랍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인의 핏줄로 유전될 수 있는 기질이 아니었다. 왜나하면 로마가 이런 강대한 나라를 이루게 된 때에 보여준 이런 기사도와 신사적인 태도는 고대 로마가 망한 뒤 로마의 후손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기대 이상으로 신사적인 모습이 로마에서 나타난다.


거의 같은 무렵, 로마 원로원을 몰래 찾아온 외국인이 있었다. 피로스의 시의(侍醫)가 보낸 밀사였다. 그는 피로스를 독살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 대가로 무엇을 해줄 것이냐고 물으러 온 것이다. 원로원은 이 일의 자초지종을 피로스에게 알렸다. 피로스는 너무 고마운 나머지, 그 보답으로 로마군 포로 600명을 다시 돌려보냈다. 로마쪽도 그냥은 받을 수 없다면서 로마에 포로로 잡혀와 있던 그리스 병사들을 송환했다. 참 너무나 놀라운 모습이다. 로마는 이무렵 얼마나 높은 자존감(Self-image)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피로스도 상당히 높은 자존감을 가진 인물이었음이 틀립없다.


다시 로마와 피로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로마가 패배했다. 그러나 피로스도 지쳤다. 패주하는 적도 뒤쫓지 않고 타렌툼으로 돌아온 피로스에게 시칠리아섬의 시라쿠사에서 사절이 왔다. 카르타고의 공격으로부터 시칠리아의 그리스인을 지켜달라는 요청이었다. 로마인과의 싸움에 염증이 나있던 피로스는 자세히 물어보지도 않고 이 요청을 수락했다. 그러나 시칠리아를 수중에 넣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3년 동안 피로스를 괴롭힌 것은 카르타고인이 아니라 시칠리아의 그리스인이었다.


로마와 거의 같은 시기에 건국되었지만,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는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 건국 초기부터 이들의 힘은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번영은 사람들의 정신을 자만과 안일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리스인들 특유의 강한 독립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들은 동포인 그리스인끼리도 협조하는 정신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피로스는 이들의 내분이나 배신에 우롱당하고 말았다. 마지막에는 신변의 위험까지 겪어야 했다. 피로스가 3년후 시칠리아를 포기하고 타렌툼으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절반으로 줄어든 휘하 병력뿐이었다. 타렌툼 시민들도 시칠리아의 동포와 다를게 없었다. 돌아온 피로스를 전보다 더 백안시할 뿐, 그가 군대를 재건할 수 있도록 원조하는 것조차 아까워했다.


한편 로마는 이 3년을 허송세월하지 않고 ‘로마 연합’을 단단히 굳히는데 활용했다. 가맹국은 이제 모두 확고한 로마편이었다. 다시 한 번 피로스가 로마에 쳐들어왔을 때 로마는 승리했다. 피로스는 자신의 왕국인 에페이로스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3년 뒤에 피로스는 스파르타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이름높은 장수였던 피로스를 귀국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은 이 사건으로 로마는 일약 국제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라틴 민족의 일개 부족에 불과했던 로마는 이 전쟁을 계기로 지중해 동부 국가들까지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이집트에서 특사가 도착했다. 지중해 세계에서 카르타고와 어깨를 겨루는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있던 이집트가 로마에 사절을 보낸 것이다. 이 특사의 임무는 로마와 우호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273년 타렌툼에 대한 공격이 개시되었다. 남에게 의지할 가망도 사라진 타렌툼은 간단히 함락되었다. 함락된 타렌툼을 로마는 6동맹국으로 만들었다. ‘로마 연합’의 다른 동맹국과는 달리, 타렌툼에는 자치권을 주지 않았다.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제일 좋은 이 항구를 직할 해군기지로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군항인 이 타란토에서는 1991년의 걸프 전쟁 때도 중동으로 가는 함대가 출항했다. 아피아 가도는 곧 타렌툼까지 연장되었다. 몇 년 뒤에는 타렌툼에서 브린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까지 연장되어, 가도의 여왕이라 불리는 아피아 가도가 완성되었다.


우연히 일어난 사건은 이리하여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이라는 역사적 필연이 되었다. 기원전 270년 무렵인 이 시기에 이르러, 로마는 북쪽으로는 루비콘 강에서 남쪽으로는 메시나 해협에 이르는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완성했다. 기원전 753년에 건국된 뒤부터 헤아리면, 무려 500년에 이르는 긴 세월이 걸린 사업이었다.


맺음말


로마가 군사력만으로 1천년 동안이나 그토록 많은 민족을 제압할 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로마가 융성한 원인에 대해 할리카르나소스의 티오니시오스는 종교에 관한 로마인의 사고방식에 주목하여 설명하였다. 로마는 다른 종교에 관대했기 때문에 어느 민족과도 대립관계보다는 내포관계로 나아가기가 쉬웠을 것이다.


정치 지도자이기도 했던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특유한 정치체제의 확립이 로마가 융성한 요인이라고 했다. 각각 공동체 일부의 이익만을 대표하는 경향이 있는 왕과 귀족정과 민주정이라는 정치체제를 고집하지 않고, 집정관 제도를 통해 왕정의 장점을 살리고, 원로원 제도를 통해 귀족정의 장점을 살리고, 민회를 통해 민주정의 장점을 살린 로마 공화정의 독자적인 정치체제에 융성의 요인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플루타르크는 패자까지 포용하여 동화시키는 로마인의 생활방식이야말로 로마가 융성한 요인이라고 단언한다. 플루타르크의 모국인 그리스에서는 그리스인이 아닌 민족을 바르바로이(야만인)라고 불렀을 뿐만 아니라, 같은 그리스인 사이에서도 스파르타 출신이 아테네 시민권을 취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반면, 로마는 같은 라틴족에 대해서는 출신지를 따지지 않고 시민권을 부여했으며, 적국 출신인 경우는 일정 기간 동안 로마에 거주하기만 하면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다만, 로마인은 이기지 않고 관용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이기고 나서 관용을 베푸는 식이었다.


티오니시오스가 거론한 종교, 폴리비오스가 지적한 정치체제, 플루타르크가 말한 포용력은 모두 고대에는 이례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로마인의 개방적인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갈리아인)이나 게르만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졌던 로마인이 이들 민족보다 뛰어난 점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개방적인 성향이다. 로마인의 진정한 자기정체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이 개방성이라고 생각한다.


군사력이나 건설에서의 업적은 개방성을 확실히 하기 위한 구체적인 현상이다. 고대 로마인이 후세에 남긴 진정한 유산은 광대한 제국도 아니고, 2천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서 있는 유적도 아니며, 민족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상대를 포용하여 자신에게 동화시켜 버린 그들이 개방성이 아닐까?


우리 현대인은 그로부터 2천년이 지났는데도, 종교적으로는 관용을 페풀 줄 모르고, 통치에 있어서는 능력보다 이념에 얽매이고, 다른 민족이나 다른 인종을 배척하는 일에 여전히 매달리고 있다. “될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 속담을 “장미라면 언젠가는 꽃을 피운다”고 표현한다. 


이념에 너무 집착하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수가 있다. 이념 자체를 지나치게 중시하다보면 이념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체제라는 이유만으로 그 좋은 면에는 눈을 감아 버리게 되는 법이다. 민주정이 좋은지 제정이 좋은지 너무 이념에 집착하다 보면 사실은 어떤 이념을 채택하더라도 훌륭한 지도자가 나온다면 국가가 얼마나 훌륭하게 다스려질 수 있는지 간과하기 쉽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고상한 이념을 제쳐놓고 생각해 보면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가 페리클레스와 아우구스투스를 같은 위치에 놓고 칭찬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아테네 민주정치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한 것은 페리클레스가 훌륭하게 지도했기 때문이고, 로마 제정이 ‘팍스 로마나’(로마의 지배에 의한 평화)를 쌓아올린 것은 아우구스투스 덕택이다. 만민의 행복에 이바지했다는 점에서는 민주정도 제정도 사라지고, 오직 선정(善政)만이 남는다.


2권 한니발 전쟁


제 1 장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 기원전 241년)


기원전 265년 로마 원로원은 전례없는 난제 앞에서 고심하고 있었다. 메시나가 시칠리아 최강국인 시라쿠사의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메시나가 페니키아에게 구원요청을 할까 아니면 로마에게 구원요청을 할까 하다 로마쪽으로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다. 로마는 메시나가 동맹관계에 있는 우방이 아니었기에 망설였다. 게다가 메시나에 가려면 아무리 좁은 해협이라고는 하지만 바다를 건너야 한다. 로마 군단은 한번도 바다를 건넌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선박이 필요할 때는 ‘로마 연합’에 속해 있는 항구도시 나폴리나 타란토가 대행해 주었다. 지금까지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농경민족인 로마인은 이웃 도시에 갈 때도 배에 돛을 다는 그리스인과는 달랐다. 그런 로마인이기에 발을 물에 담그기를 망설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로마가 지원요청을 거절하면 메시나는 카르타고에 의지할 것이 뻔하다. 더구나 기원전 3세기 중엽인 이 무렵, 카르타고는 이미 시칠리아의 서쪽 절반을 자기 세력하에 두고 있었다. 이때까지의 시칠리아 역사는 그리스 식민도시들 사이의 항쟁사라 해도 좋았지만, 어부지리를 얻은 것은 카르타고였던 것이다. 그래도 시라쿠사와 메시나가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완충대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나가 카르타고의 수중에 떨어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완충대가 없어지는 것만이 아니다. 아테네가 쇠퇴한 이 무렵에 카르타고는 지중해 제일의 해운국이었다. 만약에 카르타고가 메시나까지 기지로 삼게 되면, 이탈리아 남부를 둘러싼 해역의 지배권은 카르타고의 것이라 생각해도 좋다. 그렇게 되면, 로마를 맹주로 하는 ‘로마 연합’ 도시들의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결국 로마는 메시나를 지원하기로 하고 동맹 협정을 맺었다. 이런 로마군에 위협을 느낀 시라쿠사는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페니키아 민족의 나라인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  시라쿠사군은 남쪽에서, 카르타고군은 서쪽에서, 로마군이 버티고 있는 메시나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시라쿠사와 시칠리아에 주둔해 있는 카르타고는 로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당시 시라쿠사의 참주인 히에론은 이 상황에서 로마에 강화를 요청한다. 그는 세습으로 왕위를 물려받은게 아니라 실력으로 왕위를 획득한 사람이다. 3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통찰력이 뛰어난 현실주의자였다. 히에론은 시라쿠사가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어 방어시설도 완벽하기 때문에 쉽사리 함락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시라쿠사가 로마와 싸우는 동안 카르타고가 어부지리를 얻는 것이었다. 그리스 민족과 페니키아 민족은 예로부터 사이가 나쁘다. 그러나 정작 히에론이 강화를 요청했을 때 로마는 지나칠 정도의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다. 싸우는 시늉조차 못하고 투항한 상대에게 제시한 조건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은 로마와 맺은 동맹을 죽을 때까지 지켰다. 로마가 곤경에 빠졌을 때도 배신하기는 커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로마와 동맹을 맺은 것은 현실주의자인 히에론에게는 궁여지책이 아니라, 냉정하고 정치적인 선택이었던 것이다. 시라쿠사는 그후 50년 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된다.


여기서 전쟁이 종결되어도 좋았겠지만 카르타고의 위기감이 높아졌기에 결국엔 포에니 전쟁(페니키아인과의 전쟁이라는 뜻)이 발발한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의 무대는 시칠리아였다. 당시까지 로마인은 이미 강대국이었던 카르타고의 허락이 없이는 바다에서 손도 씻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만큼 해상활동에 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농경민족인 로마에게는 육지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구태여 바다로 나갈 필요도 없었고, 배라고 부를만한 배도 거의 갖지 못한 실정이었다.


당시 해운국 카르타고와의 해전에서 로마는 카르타고와 같은 5단층 갤리선을 모방하여 제조하였는데 여기에 ‘까마귀’라는 신무기를 설치했다. ‘까마귀’는 항해중에는 뱃머리와 가장 가까운 돛대에 로프로 고정되어 있는 일종의 잔교다. 뱃머리부터 적선에 접근하면, 돛대에서 풀려난 ‘까마귀’는 적선 갑판으로 떨어진다. ‘까마귀’ 끝에 붙여놓은 날카로운 철제 갈고리가 낙하할 때의 힘으로 갑판에 꽂혀 고정된다.


로마 병사들은 이 다리를 통해 적선으로 물밀듯 쏟아져 들어간다. 항해술에 자신이 없는 로마인은 이 ‘까마귀’를 이용하여 해상 전투를 육상 전투로 바꾸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까마귀’는 180도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도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적선이 좌우 어느 쪽에 나타나도, 일단 접근에만 성공하면 ‘까마귀’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까마귀’ 같은 신무기를 생각해낸 것은 로마에 해운의 전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해운국의 뱃사람은 항해술에 자신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선박의 미관도 소중히 여긴다. 모든 돛을 활짝 펼친 범선의 아름다움은 바다에 목숨을 건 사나이들의 자부심을 북돋운다. ‘까마귀’ 같은 기묘한 물체를 돛대에 부착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배와 바다에 대한 모독이었다. 바다의 사나이가 아닌 로마인은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전통이 없는 것도 새로운 운동을 하기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전통을 무시해야 새로운 운동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260년의 첫번째 해전은 로마의 완승이었다. 기원전 257년의 해전에서도 그 다음해의 해전에서도 로마의 압승이었다. 로마가 아프리카에까지 상륙하여 승승장구하자 카르타고는 강화를 요청했다. 그러나 강화는 결렬되고 이듬해 봄에 재개될 전쟁에 대비하여 카르카고는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 크산티포스를 고용했다. 그는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전투를 치러본 경험이 풍부한 역전의 용사였다.


일반 병사와 중대 지휘관까지는 외국인 용병에 의지하지만, 총지휘는 카르타고 귀족이 맡는 것이 전통적인 규칙이었다. 그러나 카르타고군을 시찰한 크산티포스는, 이런 군대와 함께 싸웠다가는 용병료를 받기도 전에 자신과 부하들의 생명이 위태로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크산티포스는 고용주인 카르타고 정부에 건의했다. 요컨대 로마에 패한 것은 병사들 탓이 아니라 지휘관 책임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데다 잇딴 패배로 자신감마저 잃어버린 카르타고 귀족들은 그렇다면 네가 직접 한 번 해보라고 대답했다.


이튿날부터 크산티포스는 카르타고군을 훈련하기 시작했다. 코끼리 부대를 확보하고 누미디아 기병도 고용하여, 이들을 활용하는 전술도 세웠다. 준비가 되자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에게 싸움을 걸었다. 로마 집정관 레굴루스가 저지른 과오는 아군의 도착도 기다리지 않고 적의 도전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과두정치는 선거를 거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를 뿐, 의회 민주주의와 비슷하다. 지도층을 구성하는 이들에게는 국정 제일선에서 활약할 기회를 가능한 한 평등하게 부여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과두정치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 체제에는 장점도 많지만 단점도 적지 않다. 그 단점 가운데 하나는 총사령관을 겸임하는 집정관이 임기중에 전과를 올리려고 애쓰기가 쉽다는 점이다. 전과를 올리면 개선장군으로 귀국할 수가 있다. 수도에서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만큼 로마 시민으로서 명예로운 일은 없었다. 임기중에 사령관의 직무를 아무리 충실하게 수행했다 해도, 그 열매인 승리가 이듬해 집정관의 임기 개시일인 3월 15일 이후로 넘어가면, 그것은 신임 집정관의 업적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로마 집정관을 속전속결형으로 만들기 쉬워서, 포에니 전쟁과 같은 장기전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결함이 되었다. 레굴루스도 후임 집정관이 아프리카에 도착하기 전에 전과를 올리고 싶었던 것이다.


고대의 코끼리는 근대전의 전차와 같다고 생각해도 좋다. 레굴루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아무리 정예부대라 해도 보병 수에서 이미 열세인데다 기병의 수는 8분의 1밖에 안되고, 게다가 전차라 할 수 있는 코끼리는 한 마리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총사령관의 작전 능력이 각별히 뛰어났다면 전황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굴루스는 정정당당하게 대결하는 것을 더없는 자랑으로 여기는 고지식한 장수였다.


로마군은 제1차 포에니 전쟁 10년째에 처음으로 철저한 패배를 맛보게 된다. 시칠리아에서 출발한 로마군은 오는 길에 이 소식을 들었다. 네번째 해전에서도 로마가 카르타고를 이겼지만 로마는 남아있는 병사들을 배에 태우고 아프리카 전선에서 철수를 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시칠리아 남해안까지 왔을 때 엄청난 태풍을 만났다.


무경험자쪽이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

 


 육지도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태풍에 농락당하는 공포를 견딜 수 없게 된 로마인을은 해안에 접근하라고 선원들에게 명령했다. 게다가 배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한 무더기가 되어 접근하라는 명령이었다. 선원들은 당연히 항변했지만, 경험이 없는 자에게는 설득도 효과가 없다. 게다가 무경험자 쪽이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다. 230척으로 이루어진 로마 함대는 바람과 비와 거센 파도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해안으로 접근해 갔다.


결과는 지중해사상 최대라고 일컫는 해난사고였다. 안벽(岸壁)에 부딪치거나 배들끼리 충돌하여 시라쿠사 항까지 피난할 수 있었던 것은 230척 가운데 불과 80척뿐이었다. 그 일대의 해변은 표착한 시체로 메워졌다고 한다. 이 해난사고로 로마는 6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해전에서는 이겼지만 태풍에는 이기지 못한 로마인은 역시 해운의 전통을 갖지 못한 민족이었다.


카르타고는 기뻐날 뛰었고 강화사절을 로마로 보냈다. 강화사절은 포로가 된 레굴루스였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로마가 완전히 포기하라는 강화조건을 제시했다. 레굴루스는 설득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임무를 끝낸 뒤에는 카르타고로 돌아오겠노라고 약속해야 했다. 레룰루스는 카르타고의 감시인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도 로마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카르타고 쪽이 기대한 것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였다. 카르타고와 강화를 맺으라고 설득한게 아니라, 오히려 맺지 말라고 설득한 것이다.


원로원 의원들은 아프리카 작전이 실패로 끝난데다 전대미문의 해난사고로 의기소침해 있었지만, 레굴루스의 참뜻을 이해했다. 여기서 강화에 응하면 지금까지 치른 희생이 헛되이 되어 버린다. 또한 기세가 오른 카르타고와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위험도 잊을 수는 없다.


로마 원로원은 강화 제의를 거절했다. 약속대로 카르타고로 돌아간 레굴루스를 카르타고인은 동그란 바구니 속에 가두고, 코끼리들이 그것을 축구공처럼 걷어차게 하는 방식으로 죽였다. 카르타고쪽은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사기도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 크산티포스도 이제는 필요없다고 해고해 버렸다. (바보들... 카르타고인들은 바보다! 패장이지만 레굴루스는 기상이 대단하다.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가질 수 있는 모임은 산다. CBA도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 반드시!)


실수를 저지른 사람에게 다시 책임을 맡기는 것이 좋다. 로마가 적에게 포로로 붙잡혔던 사람이나 사고 책임자에게 다시 지휘를 맡기는 것은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려는 온정때문은  아니다. 한 번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그 실수에서 틀림없이 교훈을 얻었으리라는게 그 이유니까 재미있다.


또 한 번의 해난사고를 당해 바다에서는 태풍을 무서워하고, 육지에서는 코끼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벌벌떠는 로마군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그러나 집정관 메텔루스는 병사들이 꼬끼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해주는 일이 선결과제라 생각했다. 메텔루스는 코끼리를 제거하기 위해 해자를 더 깊고 넓게 파고 바닥은 좁게 만든 후, 경무장 보병을 앞세워 적병이 아니라 꼬끼리떼을 향해 창을 던졌다. 창을 다 던진 후 쏜살같이 성벽 안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코끼리는 화가 나서 돌진하다 대부분 해자 속에 곤두박질을 하였고, 경무장 보병들이 성벽위에 나타나 해자 속에 날뛰는 코끼리떼를 향해 창을 던졌다.


이 전투는 팔레르모 공방전이라 불렸고, 이 전투를 지휘한 카르타고 장군은 본국에 송환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카르타고인은 패전 책임을 묻지 않는 로마인과는 정반대 방식을 취하는 민족이었다. 전쟁 첫해에 로마군이 메시나 해협을 건네게 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한 지휘관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였다. 이쯤되면 누가 이길 것인지는 이미 판가름이 난 것 아닌가?


승장이 된 메텔루스는 코끼리를 새긴 기념 은화를 만들었다. 코끼리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 것은 팔레르모 방어에 성공한 것보다 더 기념하고 축하할 만한 일로 간주되었다. 코끼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로마인은 바다에 대한 두려움도 잊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정관 플크루스가 카르타고 함대를 공격하다가 로마군에게 최초의 패배를 안겨준다. 그는 로마인들이 중시하는 새점을 업신여긴 뒤에 벌어진 전투에 패배했기 때문에 2달란트의 벌금형을 받았다. 이것은 로마 해군에 첫 패배를 안긴데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은 아니다. 로마에서 손꼽히는 명문 귀족인 그도 막대한 벌금을 냈기 때문에, 대대로 살아온 저택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은 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2달란트면 우리 시세로 6억이다. 대단한 부자에게도 6억은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액수였던 것일까?


기원전 247년 카르타고는 젊고 유능한 장수를 시칠리아 전선에 파견했다. 바르카스(페니키아어로 번갯불이라는 뜻이다)라는 성을 가진 하밀카르가 바로 그였다. 30대 초반이었던 하밀카르는 나중에 로마인의 악몽이 된 한니발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인은 자국에 유리한 기회를 활용하는데 서툴렀다. 이때도 유능한 사령관을 파견해 높고는, 그를 계속 강력하게 지원해야 할 본국 정부가 둘로 분열되어 있었다. 국내파의 리더가 한논 가문이라면, 하밀카르나 한니발이 속해 있는 바르카스 가문은 해외파의 리더로 간주되었다. 국내파는 북아프리카 일대의 농경지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해외파는 해외무역에 기반을 둔 자들이다. 서로의 이권이 다르니까 그들은 국론화합이 되지 않았다.


전쟁중 로마는 새로 5단층 갤리선을 200척이나 새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국고는 거의 텅비어 있었다. 원로원은 세금을 늘리는 것이 최선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까지의 관례를 어기면서까지 동맹도시들에게 전비 부담을 요구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원로원은 전시국채를 발행하기로 결의했다.


전쟁이 끝난 뒤 상환능력이 회복되었을 때 갚는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이런 조건으로 전시국채 구입을 요구받은 것은 로마 시민 전체가 아니었다. 구입이 의무화된 사람은 유산계급과 원로원 의원 및 정부 요직에 있는 자들뿐이었다. 이렇게하여 재원을 마련한 로마는 200척의 5단층 갤리선을 새로 건조하고, 집정관 카툴루스에게 지휘를 맡겨 바다로 내보냈다. 참 지혜로운 위기타결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식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면 어떤 국민이 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질까? 짐은 일반 국민보다 재계, 정계 지도자가 더 져야 한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진행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카르타고는 이미 정보력이 너무 뒤떨어져 있었다. 정보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이하하지 못한 그들이 로마에게 패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로마의 신임 집정관의 임기가 3월 15일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보통은 그해의 로마군 교체병력이 시칠리아에 도착하는 것은 일러야 4월말이다. 카르타고는 이 시기를 노려 군량보급을 끝내둘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산이었다. 로마는 전황이 중대 국면이 접어든 것을 깨닫고 육군은 병력을 반으로 줄였지만 해군 전력은 집정관과 함께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카르타고의 오산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해난사고와 해전에서의 패배로 로마군이 쉽사리 싸움을 걸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카르타고는 예측했다. 그래서 기원전 241년 봄에 출동한 카르타고 함대는 함대라기 보다는 수송선단이라고 부르는 편이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얼마나 안일하고 정보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카르타고인인지...


당연한 결과지만 카르타고는 순식간에 패배하고 본국으로 달아난 카르타고 총사령관은 나무기둥에 묶어놓고 찔러 죽이는 형벌에 처해졌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 이래 패전 책임을 지고 사형에 처해진 카르타고 사령관은 이제 세명이 되었다. 카르타고는 급히 로마에 강화를 요청했다. 이렇게 하여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서 400년 동안 쌓아올린 기득권을 마침내 로마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것은 지중해 서쪽 바다를 잃는 것이기도 했다.



제2장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기원전 241년-기원전 219년) 


전쟁이 끝난 뒤에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장래는 결정된다. 승패는 이미 판가름났으니까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문제는 거기서 얻은 경험을 어떻게 살리느냐다.


모든 로마인과 대다수의 카르타고인에게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다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하는 23년 간의 세월이 휴전 기간이 아니었다. 로마인도, 극소수를 제외한 카르타고인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전쟁이 또다시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23년의 기간동안 카르타고와 로마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먼저 카르타고는 전쟁후 용병의 뒷처리 문제로 골치를 썩었다. 용병료 지불에 대해 관대할 수 없었던 카르타고 정부에 대해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속령이 리비아에서도 전쟁이 끝난 후 세금이 두배로 늘어났기 때문에 이에 동조했고, 카르타고 제2의 도시 우티카마저 불만파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용병을 중심으로한 반란군은 숫적으로는 우세했지만 지휘관이 없었다. 더구나 반란군 토벌은 전술이 뛰어난 하밀카르가 맡았기 때문에 반란군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래도 반란군 진압은 3년 4개월이나 걸렸다.


그러나 로마와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의 위기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속령들이 배바하는 바람에 식량이 부족한 카르타고 정부의 요청을 받아 수도 카르타고에 밀을 수출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승자 로마도, 전통적으로 카르타고와 사이가 나빴던 시라쿠사도, 이 기회를 틈타 카르타고를 궤멸시킬 마음은 없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로마가 이 사이에 이권을 챙긴 것도 있다. 카르타고 총독을 죽인 사르데냐 섬에 지원군을 보내 사르데냐를 로마의 수중에 넣은 것이다. 사르데냐가 수중에 들어오면, 바로 북쪽에 있는 코르시카 섬도 자동으로 로마의 것이 된다. 이리하여 로마는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및 코르시카에 대한 지배권을 얻어, 이탈리아 남쪽과 서쪽 바다의 제해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반란을 진압한 이후에도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국내 중시파와 해외 진출파의 분쟁이 계속되자 해외파 리더인 하밀카르는 국내파가 우세한 카르타고를 떠나, 에스파냐에 거점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에스파냐는 이미 카르타고 식민지가 있었지만, 카디스를 중심으로 하는 에스파냐 남해안만 한정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다 넓고 본격적인 식민지로 개발하려는 것이다. 하밀카르는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장년의 나이였다.


지배 지역은 급속히 확대되었고, 그 땅은 카르타고인 특유의 영농기술에 의해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는 농장으로 변모했다. 에스파냐에 많은 광맥도 풍부한 광산으로 다시 태어났다. 에스파냐의 카르타고 세력권은 하밀카르가 이주한지 9년 뒤에는 에스파냐 동남부를 제패할 만큼 확대되었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상실을 만회하고도 남는 식민지를 획득한 셈이다. 하지만 이곳 에스파냐 식민지는 본국과는 거의 독립해 있어서 바르카스 가문의 왕국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주한지 10년째가 되는 기원전 228년에는 에스파냐 동해안에 ‘신카르타고’라고 이름지은 도시가 건설되었다. 여기에는 왕궁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바르카스 가문의 성도 세워졌고, 에스파냐 각지에서 나는 산물은 모두 이곳에 모이게 되었다. 하밀카르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사위 하스두루발이었다. 직계 후계자인 한니발은 아직 18세에 불과했다.


카르타고가 에스파냐 식민지를 확장시키는 동안 로마는 그리스 문화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아테네가 건재했던 시절부터 그리스 문화의 일대 근거지였던 시라쿠사의 문화수준은 타란토를 비롯한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사라쿠사가 로마의 우방이 되자 로마의 양반집 자제들은 모두 그리스어 습득을 위해 남쪽을 향했다. 당시에는 그리스어가 라틴어보다 언어로서 완성도가 높은 탓도 있었다. 또한 그리스어의 사용권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 걸쳐 있었다.


그리스 희극을 모방한 것이 분명한 라틴 희극이 로마에서 처음으로 상연되기 시작했다. 작자는 리비우스 안드로니코스. 최초의 라틴 희극작가로 되어 있는 플라우투스가 활약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역시 그리스 희곡을 모방했지만, 안드로니코스보다는 로마화한 작품을 썼다. 민중을 상대로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플라우투스의 희극에는 곳곳에 그리스어가 사용되고 있다. 민중도 그 정도의 그리스어는 이해했던 모양이다. 그걸 생각하면, 두 언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 로마인의 층이 두꺼운데에는 그저 경탄할 수밖에 없다.


카르타고인은 한논의 <아프리카 항해지>나 마고네의 <농장 경영자> 같은 실용서적 외에는 쓰기를 좋아하지 않은 민족이었다. 외국어도 다 알고 있어도 자기 나라 말 외에는 모르는 척을 하는 자들이 카르타고인이었다. 반면,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로마인 사이에 퍼진 ‘그리스 열풍’은 원로원을 중추로 하는 지도층에게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원로원은 새로 얻은 시칠리아를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해결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복자가 피정복민의 언어 습득에 열심이고 문화를 좋아한다면, 피정복민의 심정에도 미묘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리스 열풍’은 원로원이 바라는 바였다. 그들은 솔선하여 피정복민을 가정교사로 초빙하거나 비서로 채용하고, 자제를 피정복지로 유학을 보냈다. 물론 그리스 문화가 뛰어났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로마인의 남다른 점은 뭐든지 자기들이 다 하려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어느 분야에서나 자기네가 제일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완전히 로마에 동화한 에트루리아인은 여전히 토목사업에서 솜씨를 발휘했고,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인은 통상을 맡고 있었다. 시칠리아가 세력하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그리스 문화가 도입된 이후로는 예술도 철학도 수학도 모두 그리스인에게 맡긴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런 로마인의 개방성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확대되어갔다.


로마인의 개방성은 기마민족의 특징과 유사하다. 진시황도 인재를 등용할 때 동일한 원리에 따랐다.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쓰면 된다는 식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가장 뛰어난 사람을 쓰면 된다. 자기가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될 필요는 없다. 참 의미심장하다.


그런 면에서 UBF나 Navi식 제자사역은 어쩌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교회사에 영향을 큰 영향을 미치는 운동은 훨씬 더 개방적인 성격을 띄어야 한다. 그런 모델은 오히려 CCC가 더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잘못하면 내실이 없을 수도 있다. 어떻게 로마는 이렇게 개방적이면서도 로마 안으로 들어온 민족이나 나라를 로마화하는데 성공한 것일까? 예를 들어, 만일 CAM이 CBA 안으로 들어온다면 CBA는 CAM을 CBA화 하는데 성공할 수 있나? 만일 UBF가 CBA 안으로 들어오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UBF를 CBA화 할 수 있나? 또 Navi라면 어떤가? 그들이 믿는 것을 그대로 인정해 주면서,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그대로 하게 하면서 통합할 수 있는 형태여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더 좋은 것을 CBA를 통해 얻을 수 있어야 CBA화가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장 CBA와 청장년과의 관계가 통합적인 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또 국론이 분열되면 안 된다는 철칙이 CBA에서는 잘 지켜졌다고 보아야 하나? 초창기에는 김기동 목사님과 김교수님, 이종대 간사님, 그리고 스탭들의 의견이 3분되었다. 김기동 목사님은 애매한 입장이었고, 김교수님과는 이종대 간사님이하 스탭들이 대립되는 입장이었다. 결국 이종데 간사님이 빠졌고, 김교수님과의 대립관계는 최현범 간사님이하 스탭들과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최현범 간사님과 거의 모든 스탭이 빠져나갔고, 갑자기 CBA의 실무진이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 위기상황에 배태호 선교사님이 나왔지만 결국엔 김교수님과 역시 대립하였고, 김교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이준열 선교사님도 김교수님과 부딛쳐 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가? 배태호 선교사님은 나나 정관식 선교사님이나 박진희 선교사님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이 상황에서 김교수님이 밀고 들어오자 장년 교구 사역을 하면서 CBA에서 거의 빠져버렸다. 그러나 김교수님도 휴거소동이 있을 때, CBA를 사임했고 배선교사님은 미국으로 떠났다. 그 와중에 CBA와 청장년은 제 각각 방향을 찾아간 셈이 되었다. 나는 CBA를, 정관식 선교사님은 청장년을 맡는 형태로.


지금 CBA는 국론이 크게 나뉘어져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도 표면적인지도 모른다. 사역자에 따라서는 아직도 나와 동의하지 않으면서 나름대로 자기의 입장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지금의 상황은 CBA와 청장년의 통합을 생각할 때인가? 나는 통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관식 선교사님의 위치에 대해 여전히 편치 않은 마음이 있다. 역량만 있다면 정선교사님이 CBA를 맡아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내가 그만한 정도로 역량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고, 정관식 선교사님 입장에서 반대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이민족을 통치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로마인은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한 뒤, 시칠리아 통치에 적합한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냈다. 그동안 ‘로마 연합’의 맹주인 로마와 가맹국 사이의 관계는 라틴 동맹의 가맹국이었던 나라들, ‘무니키피아’, ‘콜로니아’(이중 로마식민지가 있고, 라틴식민지가 있다), ‘소키’가 있다. 기원전 4세기 중엽에 창설된 ‘로마 연합’은 로마와 다른 도시국가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었다. 그 관계는 문자 그대로 제각각이었다. 그런데 1세기가 지나서 라틴동맹의 가맹국이었던 나라들은 완전히 로마화해서 구분이 필요없었다. 그들은 완전히 로마시민이었다.


그리고 무니키피아도 콜로니아도 소키도 승자인 로마에 해마다 조공이나 조세를 바칠 의무는 없었다. 로마는 이들 도시에 병력 제공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서구 사상의 뿌리가 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자금 제공보다 병력 제공이 더 명예로운 협력방식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로마는 이처럼 동맹자와는 사례별로 다른 관계를 수립했지만, ‘사례별’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별’이었지 ‘차별’은 아니었다. 간선도로인 아피아 가도에서 그 증거를 볼 수 있었다. 간선도로는 로마 연합이면 어디라도 차별없이 이어진다.


로마가도에는 통행료가 없었고, 누구나 지나다닐 수 있었다. 행군하는 군대를 만나면 물론 옆으로 비켜서야 하겠지만, 포도주통을 가득 실은 마차도, 장작더미를 짊어진 당나귀도 마음대로 지나다녔다. 산적이나 강도를 만날 위험도 줄어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군부대의 왕래가 잦은 길에 산적이 출몰할 리가 없다.


로마인은 요즘 말로 ‘사회간접자본’의 중요성에 주목한 최초의 민족이 아닌가 싶다. 사회간접자본이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생산성 향상이 생활수준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누구나 알고 있다.


로마인은 시칠리아를 ‘프로빈키아’(속주)로 삼기로 했다. 속주는 지금까지 로마의 지배 개념에는 없었던 새로운 개념이다. 하지만 로마인은 시칠리아 전체를 속주화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도 로마인은 사례별로 대처했다.


시라쿠사의 통치영역은 시칠리아 섬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고, 메시나와 팔레르모 같은 자유도시의 영토를 합하면 4분의 1이 되기 때문이다. 로마가 속주로 삼은 지역은 시칠리아의 절반에 불과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도 이것은 ‘로마 연합’ 방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지배방식이 시작된 것을 의미했다. 또한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는 섬 전체가 속주로서 로마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여기서도 로마인의 ‘사회간접자본’은 동맹국과 속주를 차별하지 않았다.


로마는 속주는 십일조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었다. 누진세제도도 없이 일률적으로 십일조만 내면 되었다. 대신 병역의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물론 토지는 모두 몰수되어 로마의 공유지가 되었다. 로마 연합의 동맹국과 다른 점은 동맹국의 경우는 일부의 영토만 몰수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도 땅은 국가의 소유였고 시민이라 할지라도 필요하면 나라에서 임대를 해야 했다. 토지 임차에는 상한이 있어서, 원로원 의원조차 500유겔리(약 125헥타르) 이상은 빌릴 수 없었다. 


로마는 국세청도 없이 민영으로 했기에 푸블리카누스, 즉 공공업무를 대행하는 자가 세금징수를 도급맡았다. 이들의 몫은 십일조의 십일조였다. 로마는 이 징세 청부업을 개인보다는 속주가 되기전에 존재했던 각 도시가 담당하도록 장려했다. 그 결과 시칠리아에서는 외부인이 푸블리카누스가 된 적이 없다. 직접세의 1퍼센트라도 현지로 환원되도록 조처한 것이다.


그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나 로마는 전례없는 위기에 직면했는데, 이 시기에 임시로 10분의 1세를 5분의 1세로 증액한 해가 있었다. 그때도 세금으로 납부되는 것은 10분의 일뿐이었고, 나머지 10분의 1에 해당하는 수확물은 로마 정부가 사들였다.


속주민은 종교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받았다. 속주민들은 통치방법이 불공정하다고 여겨지면 로마 원로원에 직접 호소할 수 있는 권리도 인정받고 있었다. 언어도 지배자인 로마인이 그리스어를 습득하는데 열심인 상태라서, 속주민이 된 그리스계 시치리아인에게는 조금도 불편함이 없었다.


사회간접자본 정비에 열심인 로마인 덕에 생산성도 계속 향상되었고, 팍스 로마나(로마 주도의 평화)를 맨먼저 누리게 된 것은 시칠리아의 그리스인이 아니었다 싶다. 또 속주가 된 이후 시칠리아는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던 각 도시간의 분쟁도 자취를 감추었다. 또 일리리아 일대에는 해적의 소굴이 많아서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로마는 일리리아 해적을 소탕했다. 그리하여 그리스와 통상하는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은 평안을 찾았다.


나는 확신한다. 로마 때문에 많은 나라가 덕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 로마가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러나 로마 때문에 피해를 당하고 있는 나라가 많으면 로마도 망할 수밖에 없다.


로마인은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은 바꾸지만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은 바꾸지 않기 때문에, 대개혁을 강행하지는 않았다. 6세기 중엽의 왕정시대에 제6대 임금 세르비우스가 완성한 세제와 선거제 및 군제를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기원전 241년에, 즉 무려 300년 만에 개혁했는데 이것도 실정에 맞게 손질했을 뿐이다. 제도가 개혁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지난 300년 동안 중산계급이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중산계급의 확대는 지난 300년 동안 로마인 사회가 건전하게 성장해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도 건전하게 성장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떨까? CBA도 자꾸 제도를 개혁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또 우리 양육교재도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말자.


로마군단


무엇이든 체계화하기를 좋아하는 로마인의 성향은 로마 군단 편성에 잘 나타나 있다. 위기에 신속하게 대응하려면 체계화해 두는 것이 최선책이지만, 군주의 한마디로 병력을 모으거나 필요해진 뒤에 비로소 용병을 모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시대에 로마인의 방식은 특이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대개 체계화를 좋아하는 경우에는 융통성이 없다. 그러나 로마인은 체계화를 좋아하면서도 융통성이 있었다.


현역은 17세부터 45세까지이고, ‘유니오레스’라고 불렀다. 주니어(junior)의 어원이다. 46세부터 60세까지는 예비역이고, ‘세니오레스’라고 불렀다. 시니어(senior)의 어원이다. 하지만 장교급이 되면 연령 제한이 없었다. 그래도 60세가 넘으면,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기 어렵다고 여겨진 인물이 아닌 경우에는 퇴역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기 어려운 사람은 60세이후에도 계속 일하게 한다.


군단은 집정관 1명이 2개 군단을 이끈다. 각 군단에는 6명의 장교가 배치된다. 따라서 집정관 2명에 4개 군단이므로 도합 장교 24명이 필요하다. 집정관과 장교는 마르스 광장에서 민회가 열릴 때 선출된다. 장교 중 10명은 10년 이상 군복무자이고, 나머지 14명은 최소한 5년의 군복무 경험이 있어야 한다. 


로마 병사들은 보통 시민이다. 따라서 로마는 쓸데없는 징집을 극도로 싫어했다. 또 자산 소득을 기대할 수 없는 무산자는 징집하지 않는다. 자산 소득이 없는 무산자를 징집하면 생활 수단을 빼앗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 시민은 동맹국 주민에 비해 세배나 많은 병역을 치러야 했다. 기원전 225년 로마의 현역병 수가 20만 명이었던 반면, 동맹국의 현역병은 60만 명이었다. 그런데도 해마다 동원되는 병력은 거의 같다. 이렇게 로마인들이 더 큰 희생을 감수했기 때문에 자동으로 로마 군단의 총지휘권은 언제나 로마인이 가졌다. 이런 댓가를 지불하면서 로마는 성장했다.


로마 군단의 주축은 상급 지휘관인 장교가 아니라, 하급 지휘관인 백인대장이었다. 그들이야말로 로마 군단의 최소 전투 단위인 ‘소대’의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이끌고 싸우는 책임자였다. 무장으로서 최고사령관의 능력은 백인대장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부릴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를 정점으로 하는 로마 명장들은 모두 백인대장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그들을 수족처럼 다룰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우리 CBA도 셀장이 CBA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게 해야 한다.


로마인에게는 무엇이든지 체계화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지휘관부터 병사까지, 군대 전체가 해마다 바뀌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해도 같은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자세한 부분까지 미리 결정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로마인은 참으로 철저했다. 고작 하룻밤 사용할 숙영지도 우직하게 교본대로 건설했다. 교본도 잘 만들어져 있어서, 제정시대가 된 뒤에도 바꿀 필요가 없었다. 바꾸기는커녕, 로마인은 이 숙영지 건설법을 신도시 건설에도 적용했다.


로마인들은 천막 설치가 끝나면 모두 청소를 한다. 천막 사이에 뻗어 있는 길을 비로 쓸고 물을 뿌린다. 식사는 이런 일을 모두 끝낸 뒤에 시작한다. 설거지와 불의 처리법도 엄밀하게 규정되어 있다. 다른 민족보다 먼저 훌륭한 하수도를 만든 로마인이다. 숙영지에도 변소를 설치하여, 아무데나 대소변을 보지 못하도록 했다.


갈리아인이나 게르만족은 고기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로마인과 달랐다. 로마인은 고기를 먹어서 체위 향상을 꾀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식은 어디까지나 곡물이었다. 현대 서구인들이 고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들의 선조가 갈리아인이나 게르만족이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군율과 상벌도 상세히 정해져 있었다. 이것도 역시 지휘관이 해마다 바뀌는 상태에서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로마인의 군율은 언제나 공정하면서도 엄격하게 집행되었다. 아들을 처형한 집정관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후세에 전해졌다. 또 무엇보다 명예로운 일은 백인대장에 선출되는 것이었다. 사람을 소개할 때는 백인대장을 몇 번 지냈다는 식으로 말한다. 제1군단의 ‘프린키페스’에서도 제1소대 백인대장을 지냈다면, 그것은 훈장과도 바꿀 수 없는 명예로 여겨졌다.



제3장 제2차 포에니 전쟁 전기(기원전 219년-기원전 216년)


기원전 219년 28세가 된 한니발은 오랫동안 품고 있던 생각을 드디어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고, 당시에는 로마뿐 아니라 카르타고 본국도 이 젊은이의 참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해에 한니발은 사군토를 공격했다. 한니발의 공격을 받은 사군토 주민들은 급히 동맹국 로마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로마인은 동맹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민족이었지만, 그해의 상황은 너무 나빴다. 한니발이 바랐던 것 처럼 결국 법을 존중하는 로마는 선전포고를 했고, 이로써 한니발 전쟁이라고 부르게 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막이 올랐다. 이 전쟁의 목적과 전쟁터가 어디가 될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서른도 채 되지 않는 한니발 한 사람뿐이었다.


한니발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한니발이 대군을 이끌고 코끼리 부대까지 데리고 알프스를 넘은 것이야말로 그후 2천 200년 동안 역사에 흥미가 없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은 적이 있는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한니발이 동시대인에 비해 단연 뛰어난 점은 정보의 중요성에 착안한 점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쪽에 사는 갈리아인과 프랑스 쪽에 사는 갈리아인들이 가축 따위를 데리고 알프스를 넘어 왕래하고 있다는 사실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몇 년 전에 로마군과 싸운 갈리아 병력에는 론 강 일대에서 온 갈리아인도 섞여 있었다. 한니발은 갈리아 원주민이 하고 있는 일을 코끼리 부대까지 거느린 대규모적인 형태로 실행하려 한 것이다. 한니발의 이 ‘알프스 넘기’는 모험이긴 했지만, 냉철한 계산을 토대로 하여 실행된 모험이었다.


한니발의 그후 행동을 상당히 자세하게 추적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기록자를 동행했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알렉산더 대왕을 본받은 것인지로 모른다. 한니발의 그리스어 교사이기도 한 그 기록자는 실레노스라는 이름의 그리스인이었다. 한편 로마 쪽에도 기록자가 있다. 한니발과는 동시대인으로, 원로원 의원을 지내고 있던 파비우스 픽토르가 그 사람이다. 


75만 명의 동원력을 가지고 있던 이탈리아에 2만 6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온 한니발은 숫자로만 보면 무모한 모험을 감행한 미치광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내막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실제로 로마와 동맹국은 시민들이 가능한 평등하게 돌아가면서 병역을 치르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탈리아로 쳐들어온 한니발이 75만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북쪽에서 쳐들어온 한니발이 당면한 적으로 간주한 병력은 5만 정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숫적으로는 한니발 보다 두배나 우세하지만 한니발의 병사들은 정예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명실상부한 전사 집단이었던 것이다.


한니발이 치른 전투를 추적해 보면, 그가 알렉산더 대왕의 전술을 철저히 공부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보병과 기병의 비율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것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알렉산더에 비해 한니발은 더 적은 병력밖에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로 쳐들어간 직후에 전력을 증강할 방법이 없었다. 반면에 한니발은 갈리아인을 우군으로 끌어들인다는 수단이 있었다. 모든 면에서 검토해 보아도, 한니발은 결코 무모한 모험을 감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국내파 지도자였던 한논이 지적한 것 같이 한니발이 성품이 격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전투 결과를 좌우하는 전술은 콜럼버스의 달걀인 동시에 콜럼버스의 달걀이 아니다. 아무도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는 콤럼버스의 달걀이지만, 그 방식을 답습해도 누구나 반드시 같은 결과를 낳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콜럼버스의 달걀이 아니다. 그 방식을 살리느냐의 여부는 그 방식을 실제로 구사하는 인간의 재능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알렉산더니까 성공했지, 누가 해도 성공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니발은 알렉산더의 선례를 참고하면서 나름대로의 독자성으로 그 방식을 살렸다.


뛰어난 장군은 주력 부대를 얼마나 유효하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투 결과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주력 부대를 유효하게 사용하려면, 비주력 부대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2만 6천은 한니발의 주력 부대였다. 그런 그가 이탈리아에 사는 갈리아인을 회유하려고 애쓴 것은 비주력 부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알프스를 넘는데 성공한지 한달도 지나기 전에, 한니발 밑에 모여든 갈리아인 병력은 1만명을 넘어섰다. 2만 6천이 3만 6천으로 늘어난 셈이다. 게다가 당시의 갈리아는 아프리카의 누미디아와 더불어 기병의 산지이기도 했다.


티치노- 제1회전


한니발의 월등히 우세한 누미디아 기병에 밀려 로마측의 갈리아 기병이 패배하자 로마 기병은 포위될 위기에 처해져 도망하려 했다. 그 사이에 집정관이 포위되어 중상을 입었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17세밖에 안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집정관을 구했다.

트레비아- 제2회전


정보수집에 열심인 한니발은 셈프로니우스의 심리까지 파악했던 모양이다. 코르넬리우스가 없는 상태에서 셈프로니우스라면 도발에 응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니발은 막내동생 마고네를 데리고 주변 지형을 조사하고 로마군을 포위공격할 수 있는 지점을 신중히 골랐다. 그리하여 중앙을 돌파하여 도망칠 수 있었던 로마군 1만명을 제외한 2만명의 로마군은 포위망에 걸려들어 거의 살육당하다시피했다. 트레비아 전투의 결과는 병사들 개개인의 전투력이 아니라 전술의 승리였다. 개인의 전투력 보다 전술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라.


트레비아 전투의 결과는 순식간에 포 강 주변의 갈리아인들에게 알려져, 그때까지 로마쪽에 붙어있던 부족도, 어느 쪽에 붙을까 망설이고 있던 부족도 일제히 승리자 곁으로 달려갔다. 한니발 군대는 당장 5만명으로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로마는 몇 달전에 재패를 끝낸 이탈리아 북부를 완전히 포기하고 남쪽으로 철수했다. 그 결과 피아첸차와 크레모나는 갈리아인들 틈에 남겨졌는데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날 때까지 16년 동안 거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것은 좋은 기회를 살릴줄 모르는 갈리아인의 성향 덕분이기도 했다.


한니발의 목표는 로마연합을 무너뜨리는데 있었다. 이것만 성공하면 더 이상 75만 대 2만 6천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승리에 도취하지 않고 여전히 침착하게 로마포로와 동맹국 포로를 이간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트라시메노-- 제3회전


알프스를 넘는다는 전대미문의 위업을 이룩하고, 게다가 쉴 새 없이 두 번이나 로마군에게 참패를 안겨준 한니발의 의도를 당시 로마인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주도권은 완전히 30세의 젊은이가 쥐고 있었다. 한니발은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아르노 강 유역으로 내려왔다.


한니발은 피렌체에 도착한 뒤 병마를 쉬게 했다. 그동안 척후를 내보내 정보를 모았다. 피렌체에서 남동쪽으로 10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아레초에 플라미니우스의 2개 군단이 있는 것도 알았다. 게다가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성품까지 알아낸 모양이다.


로마군은 한니발의 군대를 협공하려 했다. 한니발이 평범한 장군이었다면 이 작전도 성공했으레 분명하다. 하지만 30세의 젊은이는 정보수집과 선택, 그리고 그 활용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뛰어났을뿐만 아니라, 신속한 행동도 발군이었다. 그에게는 로마의 4개 군단이 합류하도록 내버려둘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한니발은 로마군이 합류하기전에 기습해서 2개 군단을 거의 전멸시켰다. 이제 로마는 이번 전투의 패배로 토스카나 지방까지 내주게 되었다.


이제 로마는 한니발이 플라미니아 가도를 지나 로마를 공격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누구나 예측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로 직행하는 플라미니아 가도를 버리고, 아드리아 해로 가는 길을 택했다. 휘하 장군들은 대부분 총사령관의 이 선택에 불만을 품었다. 풍부한 약탈품을 기대할 수 있는 수도 로마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할 뿐 아니라, 이제 주인이 된 토스카나 지방을 떠나 아드리아 해로 빠져서, 해안을 따라 이탈리아 남부로 가려는 것이다. 하지만 장군들한테도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것이 한니발의 습관이었다. 장군들도 병사들도, 적과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젊은 사령관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트라시메노에서 대승을 거두고도 일을 서두르지 않는 것을 보고, 전쟁 2년째에야 대부분의 로마인도 한니발의 전략을 알게 되었다. 우선 로마 연합의 가맹국 영토를 중점적으로 불태우고 약탈한다. 이어서 그것을 좌시할 수 없는 로마군이 출동하면 싸움을 걸어서 승리한다. 전투에서 승리가 거듭될 때마다 로마에 등을 돌리는 동맹도시가 늘어난다. 마지막으로 바깥해자가 다 메워진 상태의 로마를 공격하여 궤멸시킨다. 이 전략은 완전히 이치에 맞는다.


이 상황에서 독재관이 된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로마에서 한니발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아예 한니발과 싸우지 않으려 했다. 효과는 있는 전략이었지만 그 때문에 치러야 할 희생도 컸고, 불만도 많이 사서 결국 면직되었다. 로마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은 동안 동맹도시가 엄청난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니발이 로마를 계속 쳐부수고, 또 로마동맹국의 포로들은 온정을 베풀어 고국으로 돌려보내 이반을 꾀하려 하였는데도 로마 연합 가맹국 중 로마를 버리고 한니발에게 달려온 도시는 하나도 없었다. 한니발은 결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칸나에-- 제4회전


31세의 젊은이는 당구나 포커의 고수가 봉으로 점찍은 하수한테 흔히 써먹는 수법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일부러 져주고, 막판에 몽땅 터는 수법이다. 한니발은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땅에서 자기가 원할 때 전투를 했다. 트레비아도 그렇고, 트라시메노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원하는 땅으로 적을 유인했다는 점에서는 칸나에도 다를게 없다. 하지만 한니발은 카나에에서는 2킬로미터 거리를 사이에 두고 로마군과 대치한 이후로는 적극적인 행동을 전혀 취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나오기는커녕, 작은 전투 결과에 낙심하여 움직일 수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로마쪽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했다.


결국 강력한 기병을 이용한 포위작전에 넘어가서 로마군 7만명은 거의 궤멸하였다. 로마 시민에게 금반지는 결혼반지가 아니라 도장이었는데 죽은 로마병사들에게서 빼낸 금반지가 이때 산더미처럼 쌓였다 한다. 로마는 완패 소식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패배한 로마군 집정관 테렌티우스 바로를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게다가 로마는 갈리아 땅에서 2개군단잉 궤멸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한니발의 부하들은 당장 로마를 치자고 부추긴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탈리아 침공을 결심했을 때부터의 기본전략을 변경하지 않았다. 따라서 칸나에에서 얻는 승리도 로마 연합의 해체라는 이 기본전략을 실현하는데 활용했다. 결국 이것이 주효하여 카푸아가 로마를 버렸다. 동맹국 포로만 계속 석방한 한니발의 계책이 큰 열매를 맺은 것이다. 그는 카푸아에서 기원전 216년부터 215년에 걸친 겨울을 보내면서 로마 연합이 해체되기를 기다렸다.


알렉산더대왕과 한니발


알렉산더는 두명의 기록 담당자를 동행했다. 이 두 사람이 쓴 기록을 토대로, 대왕이 죽은 직후에 두 명의 역사가가 전기를 썼다. 오늘날에는 알렉산더와 동행한 두 사람의 기록도, 대왕이 죽은 직후에 두 역사가의 저술도 사라져버렸다. 플루타르크와 쿠르티우스 루초의 저술 외에도 알렉산더가 죽은지 100년밖에 안 지난 한니발 시대에는 훨씬 자료가 많았을 것이다.


알렉산더가 이룩한 대원정은 그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고대인들을 계속 매료시켰다. 자신이 목적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선례는 없을까 하고, 선인들의 업적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어느 사회에나 있는 법이다. 한니발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훗날 그는 스키피오의 질문을 받고, 가장 뛰어난 장군으로 알렉산더 대왕을 꼽았다. 아마도 한니발은 실레노스라는 그리스인을 대동하면서 알렉산더 대왕의 전략과 전술을 읽어주게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알렉산더는 18세 때 아버지인 마케도니아 왕 필립포스 2세가 이끄는 군대에 참가하여, 테베와 아테네 연합군을 상대로 카이로네이아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 그는 기병대 지휘를 맡았다. 마케도니아군과 테베와 아테네 연합군은 병력에서는 대등했지만, 이 전투는 마케도니아의 승리로 끝났다. 승리를 결정한 것은 마케도니아 기병의 활약이었다. 이 때 마케도니아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10대 1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드디어 동방 원정을 떠날 때, 그의 전력은 보병 3만 1천에 기병이 5천이었다. 보병과 기병의 비율이 6대 1로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그는 기병의 전투력과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중무장 기병까지 고안해냈다. 기병을 직접 지휘하고 그것으로 승부를 결정지음으로써 젊은 알렉산더는 기병의 중요성에 눈을 뜬 것이 아닐까?


알렉산더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3만 6천 명의 병력만 이끌고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으로 쳐들어갔다. 이 정도의 병력으로 그는 10만 내지 20만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한 페르시아 다리우스왕과 싸워 두 번이나 승리했다. 페르시아의 전사자는 10만을 헤아린 반면, 알렉산더의 손실은 200명 내지 300명에 불과했다. 0을 하나나 두 개쯤 빼먹은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옛 사람들은 과장되게 쓰는 버릇이 있었다지만, 완승이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알렉산더가 출현하기 전의 전투는 ‘덧셈식’ 전투였기 때문에, 페르시아 쪽에는 대군을 투입할 이유가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젊은이는 종래의 이같은 전투방식을 바꾸어 버렸다. 그는 기병이 갖는 기동력을 구사하여 보병과 기병으로 이루어진 군사력을 유기적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군 전체를 유기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적의 주력부대를 무력화시키려 한 것이다. 그에게는 보병도 기병도 전쟁터라는 장기판 위에서 전술에 따라 움직이는 말이었다. 그는 적의 보병에 기병을 투입하거나 보병대를 기병과 싸우게 했다. 귀족 출신이 많은 기병의 자부심을 존중하는 것 따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자기 군대가 가진 힘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었다. 이것이 전쟁터에서 그가 이긴 요인이었다.


천재는 그 개인에게만 보이는 ‘새로운’ 사실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누구나 뻔히 보면서도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기존의’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야말로 천재다.


전쟁터에서 알렉산더는 항상 주도권을 장악하고, 적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보려고 기다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전투는 격동의 상태다. 따라서 전쟁터에서의 모든 행위는 격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도 알렉산더는 전쟁터 밖에서는 신중하게 처신할 줄도 알았다. 그는 이수스에서 완패한 다리우스를 너무 멀리까지 추격하지 않았다. 또 가우가멜라에서 다시 다리우스한테 이긴 뒤에도 그를 추격하기 보다는 바빌로니아나 수사 및 페르세폴리스 공략을 우선했다. 다리우스를 추격할 준비에 들어간 것은 이런 페르시아의 주요 도시들을 수중에 넣은 다음이었다.


전투에서 대승한 뒤에도 패주하는 적을 너무 깊이 추격하지 않고, 주변을 계속 공략하여 전투에서의 승리를 확고한 것으로 만드는 알렉산더의 방식은 3만 6천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동방에 쳐들어간 그의 군대를 대폭 증강시켰다. 동쪽으로 나아갈수록 그의 군대는 점점 그리스 색채가 옅어졌다. 행군 도중에 현지 주민들이 병사로 가담하여 병력이 계속 늘어났기 때문이다.


한니발과는 달리, 알렉산더는 적의 허를 찌르거나 책략을 꾸민적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그리스인과 카르타고인이라는 민족성의 차이가 아니라, 알렉산더와 한니발이라는 개인의 성격 차이로 돌릴 수밖에 없다. 호머의 영웅 가운데 알렉산더가 가장 사랑한 것은 고귀하고 용감하지만 책략과는 인연이 없는 아킬레우스였다. 한니발이 좋아한 영웅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교묘한 책략으로 트로이를 함락시킨 오디세우스가 좋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기질에 가장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법이다. 기원전 4세기의 ‘아킬레우스’는 야습조차도 하려들지 않았지만, 한니발은 기원전 3세기의 ‘오디세우스’였다.


로마의 입장에서 중무장 보병을 소홀히 하는 것은 곧 공화정 로마의 정신을 소홀히 하는 것이 된다. 기병이 중요해졋다고 중무장 보병을 기병으로 바꾸면 로마인은 더 이상 로마인이 아니다. 또한 500년 전부터 줄곧 중무장 보병을 군대의 주력으로 삼아서 지금까지 잘 해왔다. 기금까지 줄곧 유효했던 것을 변혁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는 제도화가 너무 잘 되어 있어서 한니발에게 당했다고도 할 수 있다. 또 사실 기병은 당시 말의 등자가 없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태어날 때부터 말을 타고 뛰어다닐 수 있는 말산지 출신자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유한 집의 자제밖에는 될 수 없었다. 따라서 기병력 증강이 급선무라는 것을 알아도 당장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제4장 제2차 포에니 전쟁 중기(기원전 215년-기원전 211년)


한니발은 로마군 포로 8천명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제의했다. 그러나 로마는 강화 제의를 거절했다. 네 차례의 패전으로 로마의 사기가 저하된 것은 사실이지만 강화 조건은 시칠리아아 사르데냐 및 카푸아 이남의 이탈리아 남부를 포기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전쟁 수행의 의지를 천명한 로마에서는 원로원 의원 전원이 부동산을 제외한 전재산을 헌납하기로 결의하고, 그대로 실행했다.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전시 국채가 발행되어, 무산자 계급을 제외한 모든 시민에게 각자의 경제력에 따라 국채가 할당되었다.


이런 로마에 동맹국들이 자금을 원조해 왔다. 나폴리는 25개의 금화 항아리를 보내왔지만, 원로원은 그 가운데 하나만 감사의 표시로 받고 나머지는 돌려보냈다. 시라쿠사에서도 많은 밀과 1개 부대의 병력을 보내왔다. 로마는 병력 지원은 수용했지만, 밀값은 내고 싶다고 전했다. 로마는 동맹국에 대해 병력 제공은 요구했지만, 자금 지원은 요구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위기가 닥치면 국론이 분열되지만, 로마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한니발에게 참패를 당한 뒤에도, 이것은 로마의 진정한 강점으로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 남부는 대부분 한니발의 세력하에 들어가버렸지만, 카푸아가 로마연합에서 이탈한 뒤에도 로마가 걱정한 캄파냐 지방의 도미노식 이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로마의 다른 동맹국과 식민지도 로마연합에 계속 남아 있었다. 이것도 역시 로마가 가지고 있던 강점이다.


속주도 로마를 떠나지 않았다. 카르타고 본국이 기회를 놓칠세라 공격한 사르데냐에서는 원주민들이 로마에서 파병한 지원군과 협력하여 카르타고군을 격퇴했다. 시칠리아에서도 시라쿠사의 이탈에 뒤이어 로마를 배반한 도시는 하나도 없었다. 또 시라투사도 오랫동안 로마의 믿음직한 친구였던 히에론이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내분이 일어났을 때, 한니발이 공작원을 파견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했기 때문에 배반한 것이다.


당시 로마의 속주 통치는 선정 그 자체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에도 로마는 속주민에게 부과하는 십일조를 늘리지 않았다. 이탈리아 남부를 한니발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밀이 모자라서 속주에 공출을 요청하긴 했지만, 십일조를 초과하는 밀은 돈을 주고 사들였다. 로마가 이런 방식을 택한 데에는 자긍심과 더불어 동맹국이나 속주의 이반을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어쨌든 이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다.


대부분의 일은 그 자체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관점만 바꾸면 가능한 일이 될 수 있다.

 


시라쿠사가 로마에 반기를 들었을 때, 마케도니아 왕 필립포스 5세가 한니발에게 동맹을 제의했다. 기원전 215년부터 로마는 동서남북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이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동쪽은 마케도니아, 남쪽은 시라쿠사, 서쪽은 에스파냐, 북쪽은 갈리아인, 그리고 이탈리아 안에는 가장 막강한 한니발이 자리잡고 있었다.


로마 원로원은 마케도니아의 참전을 알자마자, 당장 이집트에 특사를 보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동맹을 맺었다. 또한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한테서도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원로원은 레비누스를 시켜 마케도니아 왕국과 접경하고 있는 아이톨리아인을 부추겨 마케도니아에 대해 봉기를 일으키도록 공작했다. 게다가 마케도니아의 세력확장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마케도니아의 동쪽의 페르가몬 왕국이 로마편에 들어오게 하는 데도 성공했다. 결국 로마는 1개 군단만을 보냈는데도 마케도니아 왕을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 있는 카르타고군에는 한니발 외에는 우수한 지휘관이 없었다. 한니발이 자리를 비우면, 당장 그라쿠스의 노예군단에게 먹이가 되는 것이 상례였다. 얼핏 보기에 무적처럼 보이는 한니발이지만, 실제로는 캄파냐 지방에 눌러앉아 카푸아를 지원하기도 어렵고, 나폴리같은 항구도시를 공략하기도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었다. 카푸아와 타란토와 시라쿠사, 즉 이탈리아 남부의 3대 도시가 모두 한니발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지만, 로마도 패배하고 있는 것만도 아니었다.


로마는 마르켈루스와 4개 군단을 시라쿠사에 보냈다. 카푸아 탈환전에는 6개 군단을 보냈다. 한니발이 그라쿠스가 이끈 노예군단의 방해를 피하면서 캄파냐 지방으로 들어왔을 때, 카푸아는 이미 로마의 6개 군단에 포위되어 있었다.


로마인은 하룻방 숙영지도 우직할 만큼 견고하게 지을 정도니까, 성을 공격하기 위한 포위망은 그야말로 철저하다. 깊은 참호를 파고, 목재를 빽빽이 늘어세운 울타리를 만들고, 그 위에 다시 흙자루를 쌓아올려 보강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틈이 없는 완벽한 포위망이다. 그 대단한 한니발 조차도 이 포위망은 돌파하지 못했다. 누미디아 출신 기병들을 결사대로 파견하여, 카푸아에서 농성중인 군대에 그의 도착을 알릴 수 있었을 뿐이다. 


시라쿠사에서는 아르키메데스의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 나는 한 사람 아르키메데스의 두뇌가 로마의 4개 군단보다 더 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사람의 가능성을 아는가? 나는 한 사람의 가능성을 진심으로 믿는다. 한 사람이 일년에 만명을 전도할 수도 있으며, 한 사람이 미국 역사에 위대한 부흥을 일으킬 수 있고, 한 사람이 한국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한 사람 때문에 베뢰아 운동도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고, 한 사람 때문에 제자사역이 전세계에 이토록 유행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중요성을 나는 그러므로 철저히 믿는다(1996.11.24. 주일 새벽).


기원전 213년 봄에 로마군은 시라쿠사를 노리고 남하했다. 그러나 시라쿠사를 공격하기 시작한 뒤로는 완전히 기력을 잃어버렸다. 시라쿠사가 온 힘을 다해 필사 항전을 나섰기 때문은 아니다. 시라쿠사에는 아르키메데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이 때 한 사람의 두뇌가 4개 군단과 맞먹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육지에서 공격하는 로마 병사들은 성벽 위로 목을 내밀고 동맹이를 쏘아대는 신병기에 골치를 앓았다. 이런 병기는 사정거리도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하는데다 이동도 자유자재인 듯, 로마 병사들이 위치를 바꾸어도 정확히 겨냥하여 돌맹이를 쏘아댔다. 그런데 사람은 성벽 위로 눈만 내놓고 로마군의 움직임을 알리기만 할 뿐 이어서, 화살을 쏘아 성벽 아래로 떨어뜨릴 수도 없었다. 로마군은 사라쿠사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에 달라붙기는커녕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바다쪽에서의 공격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로마 선단이 벼랑에 접근하자마자 성벽 위로 얼굴을 드러낸 것은 사람이 아니라 기묘하게 생긴 기계뿐이었다. 그 기계는 성벽을 넘어 벼랑 위에까지 뻗어와, 이제 막 거기에 내려진 공격용 사다리를 쳐서 바다로 내던졌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인 이 기계는 바다 쪽 성벽 여기저기에서 얼굴을 내밀고는, 공격용 사다리와 그것을 타고 벼랑 위로 내려서려던 로마 병사들을 모조리 바닷속으로 쳐내는 것이었다.


바다쪽에서도 사정거리와 이동이 자유자재인 투석기가 활용되었다. 커다란 돌맹이에 맞아 균형을 잃고 벼랑에 충돌하여 부서지는 배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신무기의 공세를 피해 성벽에 달라붙은 병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병사들도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없는 거울에 반사된 햇빛을 받고 눈이 부셔서, 성벽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떨어질 뿐이었다.


공격을 계속할수록 인적 피해와 물적 희생이 커지는 것은 육지와 바다가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적의 활약으로 로마 병사들은 완전히 기가 꺽이고 말았다. 선상에서 아군의 고전을 바라보고 있언 마르켈루스는 호쾌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주위 장교들에게 농담을 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이미 로마군 사이에서도 유명해져 있었다. ‘이탈리아의 칼’이라는 별명을 가진 마르켈루스는 “늙은이 하나한테 휘둘리다니, 이게 무슨 꼴인가!”하고 한탄한 적도 있었다. 2천 200년 뒤의 고등학생들까지도 수학이라는 골치아픈 학문으로 괴롭히게 되는 아르키메데스는 그해에 75세 안팎이었을 것이다.


시라쿠사가 함락된 것은 결국 포로중에 시라쿠사 출신을 심문하여 새로운 정보를 알아낸 다음에 가능하였다. 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를 기리는 축제일에는 술에 취해 곤드라지는 것이 시라쿠사인의 습관이라는 것이다. 이날밤 기급에 성공하여 결국 시라쿠사는 함락된다.


마르켈루스는 평민 출신인데도 그리스어에 능통하고, 그리스 문화에 대한 경애심이 강했다. 그는 시라쿠사에 있는 미술품과 공예품을 로마의 소유물로 모아서, 이런 경우에 흔히 파괴되기 쉬운 예술품을 지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라쿠사에서 가져온 이 전리품은 그때까지 로마인이 알고 있던 이탈리아 남부의 미술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시라쿠사의 500년 역사는 다른 도시국가들의 500년 역사와 달랐다. 전성기의 아테네와 스파르타도, 그리고 카르타고도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될 500년이었다. 시칠리아의 동쪽 절반과 이탈리아 남부 일대는 ‘마그나 그라이키아’, 즉 ‘대(大 ) 그리스’라고 불렸는데, 그 대 그리스의 중심은 항상 시라쿠사였다. 플라톤이 방문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 해가 넘도록 로마군을 괴롭힌 아르키메데스는 시라쿠사 함락의 혼란 속에서도 수학 문제를 푸는데 열중해 있다가, 그를 알아보지 못한 로마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마르켈루스는 몹시 애석해했다고 한다.   


카푸아는 결국 한니발의 구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로마와의 장렬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함락되었는데, 함락된 카푸아는 국내 자치권을 잃어버렸다. 동맹국에서 속주가 된 것이다. 시민들은 노예가 되지는 않았지만 , 카푸아가 로마를 배신한 것은 피로스왕에게 로마가 고전하고 있을 때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가 된다. 로마인은 100년 동안 두 번이나 배신한 카푸아를 용서할 수 없었다. 로마는 카푸아에 대해서는 시라쿠사보다 한층 더 엄격한 조치를 취했다. 카푸아의 지도층 인사 70명을 사형에 쳐한 것이다.


스키피오의 등장


청년 스키피오는 유난히 빛나는 공적을 쌓은 것도 아닌데, 전부터 시민의 절대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그는 자격 연령이 30세 이상으로 되어 있는 안찰관에 22세에 입후보로 나서서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선거위원장이기도 한 호민관이 자격 연령에 미달이라는 이유로 스키피오의 당선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22세의 젊은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든 시민이 내가 안찰관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충분히 안찰관을 맡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공화정주의자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시민들의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이리하여 자격 연령에 7세나 모자란 안찰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화정 로마의 최하위 관직인 안찰관이라면 눈을 감아줄 수도 있다. 2개 군단의 2만 5천명 내지 3만 명의 병력을 지휘하는 대임은 집정관이나 법무관한테만 허용되어 있었다. 두 관직 모두 자격 연령이 40세였다. 관직에 취임하는 이듬해에는 스키피오도 25세가 되겠지만, 이번에는 7세가 아니라 15세나 모자랐다.


로마는 이듬해인 기원전 210년에는 모든 전선에 21개 군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을 지휘하려면 11명의 사령관이 필요했다. 10명까지는 결정되었지만(그들은 모두 40세 이상이었다), 에스파냐 전선의 사령관만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직책을 맡기기에 적합한 40세 이상의 장군은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원로원은 결국 에스파냐에서 전사한 선친의 뒤를 이어 자기를 그 전선의 총사령관으로 삼아 에스파냐로 파견해 달라는 요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아버지와 숙부의 원수를 갚고 싶다는 소원을 뿌리치기도 어려웠다. 젊은이의 선친과 숙부는 원로원 의원들의 동료이기도 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법무관 경험도 없는 사실을 감안하여 스키피오가 잘못을 저지를 때, 당장에 대신할 사람으로 실전 경험이 많은 실레누스를 감찰관으로 딸려 보냈다. 원로원의 결정은 시민들의 큰 호평을 받았다. 



제5장 제2차 포에니 전쟁 후기(기원전 210년-기원전 206년)


로마는 사령관과 장교들한테는 쉴틈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시민병들은 여유가 생기는대로 귀가 시켰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시민군을 이끌고 장기전을 치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백성을 생각하고 지도자들이 부담을 갖는 경향은 로마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담백하고 소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지도자로 성공하는 남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야말로 젊었을 때부터 이런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연단에 올라선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흉중에는 그를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난다. 그리고 대머리가 되기 전의 스키피오는 미남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코르넬리우스 가문이라는 로마 제일의 명문 귀족출신이다.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난 유능하고 잘생긴 이 젊은이는 자기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타고난 붙임성 때문에 불쾌감이나 반감을 느끼지 않고 그의 이런 확고한 자신감을 받아들였다.


그의 매력은 많은 사람을 상대할 때에만 발휘된 것은 아니다. 상대가 한 사람일 때도 발휘되었다. 오스티아에서 배를 타고 에스파냐 동해안에 있는 엠포리아이까지 가는 동안, 그는 원로원이 감찰관으로 딸려 보낸 실레누스를 회유해 버렸다.


유니우스 실레누스는 시키피오와 동등한 권위와 권력을 부여받고 에스파냐로 보내졌다. 원로원이 젊은 스키피오를 신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이래서는 시키피오가 운신하기 어렵다. 뛰어난 두 장군은 평범한 장군 한 명보다 못하다고 나폴레옹은 말했지만, 동등한 권위를 가진 두 장군이 협력하여 전선을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은 스키피오의 아버지와 숙부 같은 경우뿐이다.


25세의 스키피오는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실레누스에게 에브로강 이북의 타라고나에 남아서 본진을 지키는 역할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요컨대 에브로강 이남에 있는 카르타고군과의 싸움은 자기한테 일임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실레누스는 기꺼이 승낙했다. 이 약속을 끝까지 지킨 것이 실레누스의 현명한 점이었다. 물론 젊은 스키피오의 행동도 감찰관이 구태여 나설 필요가 없을만큼 훌륭했다.


스키피오는 로마병사들의 패배감을 일소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스키피오는 그들을 모아놓고, 어제까지의 일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고 모든 것은 오늘부터 새로이 시작된다고 선언했다. 비록 나이는 젊지만 자기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후원을 받고 있다고도 말했다. 자기의 친 아버지는 에스파냐에서 전사한 코르넬리우스가 아니라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라고 암시하기까지 했다. 신앙심이 강한 로마 병사들은 그렇다면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스키피오는 우방도시인 마르세유를 포함한 모든 지방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하고, 그것을 토대로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기밀을 지키기위해 전략 목표를 스키피오 자신과 부관 라일리우스, 그리고 실레누그만이 알게 했다. 적을 속이려면 우선 아군부터 속이지 않으면 안된다.


에스파냐에 도착한 이후 수집한 정보를 통해, 스키피오는 에스파냐의 카르타고인과 원주민의 관계가 힘으로 누르거나 금품으로 협력을 얻는 관계라는 것을 알았다. 한니발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가 카르타고인인 동시에 카르타고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니발의 두 동생을 포함한 다른 카르타고인들은 단지 카르타고인일 뿐이었다. 결국 스키피오는 단 하루의 기습작전으로 적의 거점이자 카르타고 본국과의 중요한 연락지점인 카르타헤나를 함락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인인 동시에 카르타고인이 아니었다. 나도 베뢰아 사람인 동시에 베뢰아 사람이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스키피오는 에스파냐의 카르타고인이 취한 방식과는 반대로, 온정주의 노선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이 방식은 그의 성격에도 맞았다. 고대의 관례에 따르면, 함락된 카르타헤나는 사람도 재산도 모두 승자의 소유가 될 터였다. 스키피오는 항복한 수비대와 주민들을 모두 모아놓고, 그들을 남자와 기능공과 아녀자로 나누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즉시 집으로 돌려보냈다. 몸값을 요구하지 않고 노예로 삼지도 않은 이 조치에 사람들은 모두 감격했다.


남자들 가운데 나이가 젊고 체격이 건장한 사람들만 골라, 로마군의 노잡이로 배정했다. 다만, 에스파냐에서 카르타고 세력이 일소되면 그들에게도 귀가를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노약자한테는 즉시 귀가가 허락되었다. 기능공은 2천명쯤 되었다고 한다. 스키피오는 그들에게 로마군의 공병으로 일할 것을 명령했다. 에스파냐에서 전쟁이 끝나면 그들도 당연히 해방될 터였다. 로마에 포로로 압송된 것은 이 도시에 살고 있던 카르타고의 유력자들뿐이었다.


카르타고인들이 인질로 잡아둔 원주민 자녀 300명이 있었는데 스키피오는 이 아이들의 머리를 일일이 쓰다듬으로면서, 반드시 부모 곁으로 돌려보내줄테니까 로마와 동맹을 맺으라는 편지를 부모에게 보내라고 말했다. 인질들 중에는 부족장의 어머니도 적지 않았다. 스키피오는 전리품 중에서 금은 장식품을 골라 그녀들에게 선물했다.


이 도시의 여자들 가운데 유난히 아름다운 아가씨가 하나 있었다. 스키피오의 관대한 조치에 고마움을 느낀 장로들이 이미 약혼자가 있는 그 처녀를 스키피오에게 바치고 싶다고 제의했다. 26세의 승리자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기쁜 선물이 없지만, 전쟁을 하고 있는 사령관으로서는 이렇게 곤란한 선물도 없소이다.” 이렇게 말한 뒤, 그는 아가씨를 약혼자에게 돌려보냈다. 모두들 또다시 감격했다. 60세 노인이 그렇게 말했다면 별문제지만, 팔팔한 20대 젊은이의 말이었기 때문에 효과도 더욱 컸다. 카르타헤나에서는 로마병사들이 비무장으로 혼자 돌아다녀도 안전했다.


한편 이탈리아의 칼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을 계속 집요하게 추격하였다. 61세가 된 마르켈루스는 38세인 한니발과 싸워 3대 2정도의 비율로 약간 밀리는 전투결과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너무나 집요하게 괴롭혔기 때문에 한니발도 지칠 정도였다. 그 사이에 파비우스의 2개 군단이 타란토 공략에 성공했다. 시라쿠사와 타란토의 회복, 그리고 카르타헤나의 점령으로 로마연합의 도미도식 해체는 막을 수 있었다. 결국 로마연합의 해체를 노린 한니발의 전략은 이제 실패로 드러난 것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는 것과 정비례하여 신중해지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파비우스의 신중함은 그의 타고난 본래의 성격이었다. 반대로 마르켈루스의 기질은 신중하다기 보다는 과감했다. 민회에서는 마르켈루스에 대해 시민들이 항의했다. 2년동안이나 한니발을 추격하고 있으면서 결말을 내지 못한데 따른 책임과 비난을 뒤집어 쓴 것이다. 원로원은 그를 지지했지만, 62세가 된 고집스러운 무인에게 시민들의 비난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마르켈루스은 초조해졌다.


초조해진 마르켈루스는 오버 페이스를 하게 된다. 정찰대를 보낼 때 두명의 집정관과 동맹국 지휘관 2명이 모두 대규모 회전을 예상하여 함께 참여한 것이 불찰이었다. 수뇌부가 총동원된 정찰대는 불과 220명의 기병만 데리고 갔다. 이들은 잠복해 있던 누미디아 기병 300명에게 포위되었다. 로마 기병 220명 가운데 절반은 에트루리아 기병이었는데, 그들이 맨 먼저 무너졌다. 전투는 오래 계속 되지 않았다. 마르켈루스는 적병이 내지른 창에 가슴을 찔려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집정관을 경호하고 있던 12명의 호위병도 모두 전사했다. 동맹국 지휘관 두명도 전사했다. 남은 집정관 크리스피누스는 중상을 입고 역시 부상한 마르켈루스의 아들과 함께 간신히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그들을 따라온 로마 병사는 20명뿐이었다.


마르켈루스는 사람들의 비난 때문에 중심을 지키지 못했다. 아무리 사람들이 충동질을 해도 나는 나의 길을 가야 한다. 오버 페이스를 하면 죽는다. 절대 오버 페이스를 해서는 안 된다. 이광성 목사님도 중국산 돗자리가 잘 나간다고 오버 페이스를 하다 부도를 냈다. 목회가 잘 된다고 오버 페이스를 하다 2주 금식을 끝낸 후 음식을 잘못 먹어 하반신 마비가 된 목사님의 얘기도 들었다. 일이 잘되어도, 아니 혹 잘못되어도 나는 내 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바이쿨라--제5회전


스키피오는 군선의 노잡이로 징용한 카르타헤나 주민들을 약속한 시기보다 일찍 귀가시켰다. 군사 목적으로 징용한 기능공들한테도 귀가를 허락했다. 카르타헤나 수비에 많은 병력을 할애할 수 없던 스피키오는 로마에 더 강한 친근감을 갖게된 카르타헤나 주민들에게 이 도시의 방어를 맡겼다. 신뢰는 찔끔찔끔 주지 않고 한꺼번에 주는 편이 더 큰 효과를 낳기 쉽다.


신뢰는 찔끔찔끔 주지 않고 한꺼번에 주는 편이 더 큰 효과를 낳기 쉽다.


바이쿨라 전투에서 카르타고 쪽 전사자는 8천명에 이르렀고, 포로는 1만 2천 명이었다. 스키피오 쪽의 희생자는 너무 미미해서 헤아릴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스키피오에게는 불리한 지형이요, 전력도 불리했었기 때문에 그는 알렉산더와 한니발의 전술을 답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눈만 마주쳐도 마음이 통하는 라일리우스와 같은 동료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전술은 성공할 수 있었다. 적의 주력을 무력화시키

는 것은 전술의 가장 중요한 요체다. 스키피오는 이 전술을 멋지게 전개했다.


카르타고 사령관은 하스드루발이었다. 그는 마고네의 군대가 지원할 것이라 믿고 그후에 전투를 시작하려고 행동을 늦추었다. 그러나 마고네의 군대를 묶어두는데는 라일리우스의 부하로도 충분했다. 하스드루발은 미끼에 덤벼들어 결국 완패했다. 바이쿨라 전투의 패배는 에스파냐의 카르타고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도망간 하스드루발은 마고네와 시스코네와 상의한 후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가기로 했다. 남은 마고네와 시스코네는 병력을 합쳐 앞으로 공동 투쟁 체제로 스키피오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런데 스키피오가 포로로 잡은 1만 2천 명 가운데는 누미디아의 미시시나의 조카가 있었다. 누미디아 왕자 마시시나는 카르타고군에 고용되어 있는 누미디아 기병대 대장이기도 하다. 그는 3년 전에 매복작전으로 스키피오의 아버지를 전사시킨 장본인이었다. 스키피오는 소년에게 삼촌 곁으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소년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시키피오는 그 소년에게 로마식 ‘투니카’와 금장식이 달린 허리띠와 말 한 필을 내주라고 부하에게 명령했다. 그리고는 기병들에게 그 소년이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 주라고 말했다. 27세의 젊은이는 로마 장군들이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을 시도하기 위한 포석을 두었던 것이다. 마시시나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참 놀라울 정도로 관대한 스키피로라고 생각된다. 자기 원수의 조카에게 어쩌면 이렇게 관대할 수 있을까? 또 참 지혜롭기도 하다.


하스드루발이 이탈리아로 가자,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한니발을 고립시킨다는 지구전론자인 파비우스는 ‘하스드루발이 이탈리아로 간다’는 소식을 받고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이 파비우스는 죽을 때까지 스키피오를 신뢰하지 않았다. 참 답답한 일이다.


메타우로--제6회전


역사에는 우연으로 말미암아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해의 이탈리아 전선에서 일어난 우연은 하스드루발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갈리아를 횡단하고 알프스를 넘은 것이었다. 현재 프랑스 일대에 사는 갈리아인들은 이탈리아로 가는 것이 한니발 형제의 목적임을 이제 충분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방해도 없었고, 오히려 한니발의 명성 때문에 갈리아 용병들이 많이 참가했다.


칼라브리아를 떠난 한니발은 느린 속도로 북상했다. 그뒤를 네로가 이끄는 로마군이 마치 마르켈루스가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바싹 추격해왔다. 형제라 해도 반드시 동등한 재능을 타고난다고는 할 수 없다. 쉽게 5만으로 증강된 병력을 갖게된 하스드루발은 적의 허를 찌를줄 몰랐다.  하스드루발은 형과는 달리 정보 수집을 중시하지 않았던 것 같다.


형제라 해도 반드시 동등한 재능을 타고난다고는 할 수 없다.


하스드루발은 형 한니발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기에는 그가 택할 길목과 합류 예정지점을 써놨다. 이 편지는 한니발이 있을 곳을 찾고 있던 네로의 병사들의 손에 들어갔다. 페니키아어로 된 이 편지를 급히 번역시켜 읽은 후 네로는 공화정 로마의 사령관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원로원의 승낙도 없이 자기 구역을 넘어 제멋대로 군대를 이동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런 짓을 하면 전선 이탈과 똑같이 취급된다. 집정관 네로의 담당 구역은 한니발에 대한 전선이다. 그에게는 하스드루발에게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 또 그의 가문은 성미가 강하고 속전속결형의 경향이 있었다.


네로는 잠자는 시간도 아껴서 강행군을 했다. 800킬로미터나 되는 거를 돌파해야 했다. 하루 사이에 1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행군한 셈이다. 보통 로마군의 행군거리는 하루에 20킬리미터다. 이때 네로의 행군 속도는 150년 뒤의 카이사르에 의해서 비로소 깨진다. 이 노력에 힘입어 하스드루발의 군대는 전멸하고 자신도 장렬히 전사했다. 5만 5천명이나 되는 군대가 무참히 깨진 것이다.


메타우로의 전투의 승리에 열광한 로마에서는 시민들의 환호 속에 개선식이 거행되었다. 개선장군으로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몬 것은 집정관 리비우스였다. 전투가 그의 담당 구역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집정관 네로는 멋대로 전선을 이탈한 죄를 문책당하지는 않았지만, 개선장군의 영예는 허용받지 못했다. 그는 우익 지휘관으로서 말을 타고, 네 마리 말이 끄는 리비우스의 전차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로마 시민들은 누가 진정한 개선장군인가를 알고 있었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개선식과 같은 형태를 CBA에 도입할 수는 없을까?


일리파--제7회전


기원전 206년 에스파냐의 카르타고군은 총력을 기울여 반격을 나서기로 결의했다. 7만 2천 대 4만 8천이다. 29세가 된 스키피오는 용감하게 싸우는 것 이외에 다른 방책도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스키피오는 한동안 시간만 끌다가 처음으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침 동트기 전에 아침 식사를 충분히 하고, 무장을 갖추고, 언제라도 출전할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내두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튿날 새벽, 아침 안개처럼 전쟁터를 메우고 있는 로마군을 보고 카르타고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휘관들의 재촉을 받은 병사들은 아침도 먹지 못하고 진영에서 뛰쳐나갔다. 황급히 포진을 끝낸 카르타고군의 진용은 코끼리 부대를 전면에 배치할 시간 여유가 없어서 좌익과 우익에 배치한 것 외에는 전날과 동일했다. 즉 정면에 아프리카 병사, 좌우익에 에스파냐 병사들을 배치한 것이다. 반면 로마군의 진용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정면에는 에스파냐 보병이, 좌우로 나뉘어 중무장 보병이 비스듬한 진영을 만들면서 공격했다. 스키피오는 아군의 최강 전력이 적군의 가장 취약한 전력을 공격하게 한 것이다. 비스듬히 옆에서 공격하는 전법은 적의 입장에서는 수비에도 불리하고 공격에도 불리한 전법이었다. 또 카르타고의 코끼리 부대는 로마의 경무장 보병의 쏘아대는 화살을 뒤집어 쓰고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해서 아군인 카르타고 기병쪽으로 뛰어들었다. 혼란에 빠진 누미디아 기병대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쨌든 7만 4천 명의 병력 가운데 남은 것은 6천명 뿐이었다.


승리한 스키피오는 승전보를 형 루키우스통해 로마에 전하고 전쟁터를 카르타고의 본거지로 옮기는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스키피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기병 전력의 증강이었다. 아군의 전력을 증강하는 것이 곧 적의 전력을 감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터였다. 스키피오는 아무래도 기병이 필요했다. 그것도 지중해 세계 최강인 누미디아 기병이 꼭 필요했다. 그래서 스키피오는 마시니사와도 또 그와 대립관계에 있는 누미디아왕 시팍스에게도 동맹을 제의했다. 둘 다 지금까지 카르타고와 맺고 있던 돈독한 관계 때문에 당장 스키피오에게 확답을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드는 던져졌다.



제6장 제2차 포에니 전쟁 말기(기원전 205년-기원전 201년)


토론이 잘 이루어지고 토크쇼가 활발한 나라는 선진국이다.


 로마는 소수가 지도하는 과두정 체제를 채택한 공화국이다. 정책을 세워도, 그것이 당장에 실천에 옮겨지는 군주제 국가가 아니다. 또한 사전 교섭만 잘하면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관료제가 완비된 국가도 아니었다. 공화정 로마는 지도층이 결집된 느낌을 주는 원로원이 있었다. 원로원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오직 변론뿐이었다.


스키피오는 원로원에 가서 자신의 임지를 북아프리카로 결정해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다름아닌 파비우스가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칸나에에서 참패한 로마를 지구전 전술로 이끌어온 파비우스는 그해에 70세가 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의 방패’라는 별명까지 얻은 파비우스는 원로원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누리며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로마 원로원에는 다른 의원보다 우선하여 발언권을 갖는 ‘제1인자’(프린키페스)라는 제도가 있는데, 파비우스는 그동안 줄곧 제1인자였다.


파비우스는 스키피오의 임무는 아프리카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에 계속 눌러앉아 있는 한니발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아프리카를 공격하면 한니발도 이탈리아를 떠날 거라지만, 반드시 떠난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굽히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성공한 방침도 필요하면 바꿔야 하며 지금이야 말로 그때라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카르타고가 로마에 싸움을 걸어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로마가 카르타고에 싸움을 거는 것이다.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한 짓과 똑같은 일을 로마인이 아프리카에서 하는 것이다. 적의 본거지를 공격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한니발이 실증해주었다.


30세의 젊은이는 이어 70세된 노인에게 말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께서 충고해 주셨듯이, 저는 언젠가는 한니발과 대결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니발이 전쟁터로 나오기를 기다리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한니발을 전쟁터로 끌어내어 싸우겠습니다. 제가 한니발을 로마와 대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겠습니다. 그 싸움에서 얻는 전리품은 칼라브리아 지방의 무너진 성채 따위가 아니라, 카르타고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원로원의 의견대립은 출신 계급이 아니라, 나이에 따른 것이었다. 고령자들은 파비우스를 지지했고, 젊은 의원들은 스키피오의 생각에 동의했다.


고령자라서 완고한 것은 아니다. 보통사람이라면 육체의 쇠약이 정신의 동맥경화 현상으로 이어질지 모르지만, 훌륭한 업적을 쌓은 고령자에게 나타나는 완고함은 그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훌륭한 업적을 거둠으로써 성공자가 되었기 때문에 완고해진 것이다. 나이가 사람을 완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공이 사람을 완고하게 만든다. 성공자이기 때문에 완고한 사람은 변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되어도, 성공으로 얻은 자신감 때문에 다른 길을 선택하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근본적인 개혁은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과거의 성공에는 가담하지 않았던 사람만이 달성할 수 있다. 흔히 젊은 세대가 근본적인 개혁을 성취하는 것은 그들이 과거의 성공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멘. 1996.11.24.


변론의 결과는 원로원 연장자들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고, 그렇다고 젊은층의 변혁 의욕도 꺽지않는 절충적인 타협이 성립된 것이다. 스키피오의 임지는 시칠리아로 정해졌다. 시칠리아로 가는 시키피오는 그 이듬해에는 국가를 위해 필요한 경우 아프리카로 갈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수도에서 2개 군단을 편성할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고, 시칠리아 땅에서 지원병을 모집할 권리만이 주어졌다. 요컨대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로 원정한다해도 그것은 공인된 군사행동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원정이 실패로 끝나도, 책임은 원로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키피오 개인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보통이라면 이런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원로원은 7천명의 지원병에 소요되는 경비는 인정했다. 사람을 모으는데에는 스키피오가 에스파냐에서 거둔 전적이 도움이 되었다. 또한 원로원의 냉대도 도움이 되었다. 로마 시민들과 동맹도시들의 시민들은 모두 젊은 장군의 능력을 인정하고 동정했다. 당장 그의 능력에 희망을 건 자들이 지원해와서 6천 200명의 보병과 300명의 기병을 얻게 되었다. 30척의 군선도 도착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본토에서 온 지원병과 칸나에 군단의 병사들을 합해도 병력이 모자랐다.


그래서 스키피오는 자신이 속주 시칠리아의 최고 통치자도 겸하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시칠리아 속주민들에게 몰수된 토지를 돌려주었다. 고마움을 느낀 그들은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는 병역에 지원했다. 그래서 결국 2만 5천명의 병사와 1만 2천명의 선원이 시키피오 휘하에 모였다. 최대의 성과는 시칠리아 전체를 보급기지로 만든 것이었다. 동맹국도 없는 아프리카 원정을 성공시키려면, 가까운 거리에 보급기지를 확보하고 그 기지와 전선 사이에 보급로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스키피오는 각지에서 모여든 병사들을 훈련했다. 고참병이든 지원병이든 신병이든, 병사들은 모두 총사령관 스키피오가 원하는 타입의 전사로, 즉 스키피오의 두뇌가 생각하는 전술을 수족처럼 실천에 옮겨줄 전사로 탈바꿈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날마다 병사들 틈에 섞여 지내면서도, 30세의 집정관은 북아프리카에 관한 정보 수집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카르카고와 가까운 시치리아에는 아프리카를 잘 아는 주민이 적지 않았다. 스키피오는 밤에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또한 직접적인 정보 수집은 친구인 동시에 부사령관이기도 한 라일리우스에게 일임했다. 함대를 이끌고 카르타고 이외의 북아프리카 연안을 돌아 다니는 라일리우스에게는 정보를 수집하는 것말고도, 누미디아 기병의 귀추를 결정할 힘을 가진 시팍스나 마시니사와 연락하는 임무도 부여되어 있었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 원정 준비에 몰두해 있었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는 그의 기질은 그동안에도 줄곧 발휘되었다. 칼라브리아 지방의 항구도시 로크리가 내통에 의해 로마 쪽으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정보를 얻은 스키피오는 당장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로크리로 갔다. 한니발이 이런 사실을 알고 달려왔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이로써 카르타고 본국이 한니발에게 보내는 지원선단이 로마 제해권의 그물을 빠져나가 로크리에 도착하곤 했던 것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었다. 한니발에 대한 포위망은 더 좁아졌다.


그러나 스키피오가 로크리 전격작전에 성공한 것은 원로원의 연장자 의원들을 자극했다. 그들은 원로원에 허락도 청하지 않고 멋대로 담당 구역 밖으로 군대를 움직인 스키피오를 비난했다. 원로원은 스키피오를 심문하기 위한 조사단까지 파견했지만, 스키피오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원로원의 비난도 박력이 없었다. 한니발 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집정관 리키니우스가 4개 군단이나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전혀 전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막다른 곳으로 쫓겨들어갔다고는 하지만, 한니발은 로마의 평범한 장군한테는 역시 버거운 존재였다.


이듬해 기원전 204년 봄, 스키피오는 마침내 2만 6천 명의 병력과 그들이 먹을 45일분의 식량과 물을 가지고 시칠리아 서쪽 끝의 마르살라에서 아프리카 북부 튀니스로 출발했다. 병력을 무사히 상륙시킨 후, 스키피오는 나쁜 소식에 접했다. 누미디아왕 시팍스가 스키피오의 동맹 제의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결정적으로 카르타고 쪽에 붙었다는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카르타고는 시스코네--에스파냐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한 카르타고의 장군--의 딸을 왕비로 주어 시팍스 왕을 회유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딸은 절세미인으로 원래 마시니사와 약혼한 사이였는데, 마시니사와 파혼시키고 시팍스에게 시집을 보낸 것이다.


또한 스키피오가 희망을 걸고 있던 또 한 사람의 누미디아인인 마시니사는 아버지가 죽은 직후에 시팍스에게 왕국을 침략당하여, 약혼녀를 빼앗겼을 뿐 아니라 왕국조차 없는 이름뿐인 왕으로 몰락해 있었다. 기병의 산지인 누미디아는 두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의 왕국밖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하나의 왕국은 카르타고쪽에 붙어버렸다.


200명의 기병만 거느리고 스키피오 앞에 나타난 마시니사는 사막의 외로운 늑대를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풍모를 허물어뜨리지도 않고 스키피오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그대는 2년 전에 나와 동맹을 맺고 싶어했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대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나 자신밖에 없소이다.” 스키피오는 속으로는 낙담했겠지만, 그런 내색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고 여느 때처럼 붙임성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오.” 이 순간, 34세의 누미디아인과 31세의 로마인 사이에 사나이의 우정이 싹텄다.


스키피오는 마시니사를 200명의 기병밖에 갖지 않은 외국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후 스키피오의 전략 전술은 스키피오와 마시니사에다 지금까지 모든 전선을 스키피오와 함께 담당해온 라일리우스를 더한 30대 남자 세 사람의 공동 작전으로 실현되었다. 바로 이것이 평생 동안 친구라는 것을 모르고 지낸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차이점이었다.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침공 첫해는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이룩한 것과 같은 큰 전과가 없었다. 그것은 카르타고 쪽이 로마군을 맞아 싸울 움직임을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 사실에 주목하지 못했다. 카르타고 쪽에서 한니발에게 보낸 지원군이 이탈리아 북부에 상륙했기 때문이다. 한니발의 막내 동생 마고네가 이끄는 1만 4천명의 병력은 로마군에게 패배했다. 한니발도 칼라브리아 지방에서 틀어박혀 적극적인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교착상태를 깨뜨린 것은 역시 아프리카 전선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 장군은 정정당당한 싸움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정정당당하게 이기는 것이 그들의 자랑이기도 했다. 그런 로마인들에게 한니발은 책략으로 이기는 것도 역시 승리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정정당당한 싸움을 고집해도 싸움에 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것을 가장 거리낌없이 흡수한 것이 스키피오 세대의 로마인이었다.


스키피오의 로마군과 카르타고-누미디아 연합군이 10km를 사이에 두고 진지를 구축했을 때 스키피오는 누미디아왕 시팍스에게 다시 연락을 취했다. 카르타고와 명예로운 강화를 맺고 싶은데, 그 중계 역할을 당신이 맡아줄 수 없느냐고 넌지시 암시한 것이다. 여기에 시팍스가 넘어갔다. 시팍스는 아내 때문에 카르타고 쪽에 붙긴 했지만, 마시니사를 쫓아내고 누미디아 전체의 왕이 된 이제는 카르타고 편으로 참전해도 더 이상 얻을게 없었다. 또한 둘 다 강대국인 카르타고와 로마의 중개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 왕국과 절세미녀를 가진 그의 허영심을 자극했다.


시팍스가 제시한 강화 내용은 스키피오가 아프리카에서 철수하고,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고, 앞으로 로마와 카르타고는 서로의 주권을 존중하는 관계를 다시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온당하기 그지없지만, 먼저 쳐들어온 카르타고는 동의한다 해도 로마 쪽은 도저히 승복할 것 같지 않은 내용이다. 로마는 15년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의 절반이 유린당하고, 10만 명이 넘는 병사를 잃고, 열 명이나 되는 집정관급 사령관을 잃었다. 도저히 승복할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스키피오는 즉석에서 거부하는 대신, 강화 교섭을 위한 사절을 파견하고 싶다는 회답을 시팍스에게 보냈다.


스피키오가 강화 체결에 관심이 많다고 믿은 시팍스는 사절을 정중하게 대했다. 스키피오는 이름난 귀족 출신 장교를 사절로 보냈지만, 그 사절을 수행하는 하인이나 마부는 진짜 하인이나 마부가 아니었다. 노예 차림을 걸치고는 있었지만, 모두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장교나 백인대장들이었다.


교섭은 오래 끌었다. 아니, 스키피오가 일부러 지연시켰다. 강화를 교섭하는 동안은 자연 휴전기가 아니더라도 휴전이 되기 때문에, 그 사이에 적이 공격해올 염려는 없었다. 또한 교섭이 지연되어 사절의 왕복 횟수가 늘어날수록, 하인이나 마부로 분장한 역전의 용사들은 적진 상황을 더욱 정확하게 시찰할 수 있었다. 사절이라면 왕의 막사로 직행해야 하지만, 하인이나 마부는 기다리는 동안에도 진영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올 무렵, 적의 모든 것을 알아낸 스키피오는 시팍스 왕에게 마지막 사절을 보냈다. 사절이 가져간 편지에는, 자기는 강화 조건에 동의하고 싶지만 작전회의에 참석한 장교들 대다수가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강화 교섭을 끝낼 수밖에 없다고 적혀 있었다. 그래놓고 몰래 야습을 하여 카르타고군과 누미디아군 3만명을 죽였다. 로마군은 사망자가 한 명도 없었다.


카르타고군이 다시 병력을 보강했을 때 스키피오는 전체 병력을 이끌고 카르타고-누미디아 연합군 합류지점으로 갔다. 로마군의 병력은 연합군의 절반도 안되었지만, 스키피오는 정면 대결로 승부를 낼 작정이었다. 라일리우스와 마시니사가 이끄는 로마 기병은 시팍스를 따라 누미디아 영토안으로 침입했다. 시팍스는 결국 따라잡혀 로마군의 포로가 되었다.


왕을 붙잡은 뒤에도 두 사람은 스키피오의 명령대로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이 기회에 누미디아 왕국을 되찾고 싶다는 마시니사의 소망을 참작한 행동이다. 누미디아 왕국의 수도 주민들도 쇠사슬에 묶인 왕을 보고 성문을 열었다. 왕궁에 들어간 마시니사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소포니스바 왕비였다. 미시니사에게는 과거의 약혼녀다. 마시니사는 망설이지 않고 소포니스바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왕국이 없는 왕이 아니었다.


마시니사가 진영으로 돌아오자, 그를 맞은 스키피오는 왕국 탈환에 대해서는 축하했지만 적의 아내와 결혼한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32세의 로마 장군은 세 살 위인 누미디아 친구에게 말했다. 시팍스는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카르타고 쪽에 붙었으니, 로마로 압송하지 않으면 아니되오. 왕이 로마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그 왕의 소유물도 모두 로마의 것이 되었다는 뜻이오. 스포니스바만 예외로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소. 따라서 소포니스바도 로마로 호송하지 않으면 아니되오. 하지만 나는 도저히 내 마음의 벗인 그대의 아내를 그런 식으로 대우할 수는 없소.“


말없이 스키피오 앞에서 물러난 마시니사는 누미디아에 두고 온 아내에게 편지 한통과 그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독약을 인편에 보냈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내를 지키는 것이 남편의 첫 번째 의무이지만, 나는 그것조차도 할 수 없게 되었소. 그리고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한 이제, 나는 두 번째 의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구려. 그것은 아내가 불행한 처지에 빠지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편지와 함께 보낸 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소.”


소포니스바는 편지를 다 읽은 다음 독배를 마셨다. 그녀가 남긴 말은 남편의 결혼 선물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겠다는 한 마디뿐이었다. 실의에 빠진 친구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스키피오는 병사들을 모두 집합시켜놓고 마시니사가 누미디아왕이 된 것과 누미디아왕국이 앞으로도 로마의 동맹국이 된 것을 공표했다. 그는 지금까지는 자기만 사용하고 있던 집정관 전용 붉은 천막을 그에게 주었다. 이런 전말을 보고 받은 로마 원로원과 민회는 스키피오의 조치를 승인하고, 아프리카 땅에 최초의 로마 동맹국이 탄생한 것을 축하했다. 로마로 압송된 시팍스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에서 감시를 받으며 은둔생활을 하다가 늙어 죽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의문이 남는다. 시팍스가 스키피오와의 약속을 어겨서 적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아내가 설사 지금은 마시니사의 아내가 되었어도 그의 아내는 용납할 수 없다는 논리인가? 또 아무리 약혼을 했었어도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 버렸는데 개의치 않고 결혼한 마시니사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마시니사의 아내를 그대로 둔 채로 누미디아와 로마가 동맹을 맺는다면 그의 아내가 마시니사의 마음을 돌려놓아 로마에게 등을 돌릴 수 있다고 본 것인가? 어떤 이유로 꼭 마시니사와 그의 아내를 헤어지게 하고, 아니 소포니스바를 죽게까지 해야 했을까? 스키피오의 의도는 무엇이었고, 아내를 죽게한 마시니사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자국 영토 안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를 맛본 카르타고는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어서 완전한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 정부 안에서도 의견이 갈라져, 통일된 방침도 세우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일부에서는 함대를 출동시켜 로마 군선을 공격하는 적극전법을 써야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일부에서는 수도를 둘러싼 성벽을 수리하여 농성전에 대비하자고 주장했다. 스키피오에게 강화를 제의하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한니발을 도로 불러들여 로마군과 싸우게 하자는 목소리도 제법 컸다.


카르타고는 결국 4가지 방책을 동시에 추진하게 되었다. 한니발과 마고네에게 본국 귀환을 명령했다. 동시에 스키피오에게는 사절이 파견되었다. 스키피오가 제시한 조건은 1. 로마는 카르타고의 자주 독립과 자치권을 인정한다. 2. 이탈리아의 알프스 이남의 갈리아 지방에 있는 카르타고군은 모두 철수할 것(이것이 한니발 형제의 철수를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3. 에스파냐에 있는 카르타고의 기득권을 완전히 포기할 것. 4. 마시니사의 왕국을 승인하고 그 주권을 존중할 것. 5. 20척을 제외한 모든 군선을 로마 쪽에 양도할 것. 6. 강화를 교섭하는 동안, 카르타고는 아프리카에 있는 로마군의 군량을 조달할 것. 여기서 문제가 될만한 것은 5번 조항이다. 이것은 사실상 카르타고 해군을 해체하라는 요구였다.


이런 조항으로 추측건대, 이 시점에서 스키피오는 진심으로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을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프리카 원정의 첫째 목적은 한니발을 이탈리아에서 끌어내는 것이었다. 전투, 특히 평원에서 맞서는 회전 방식의 정면 대결은 사전에 아무리 철저한 준비를 갖추고 치밀하게 전술을 짜도 필경은 도박이다. 한니발을 상대로 도박을 할 사람은 없다.


그후의 언행이 실증하듯이, 스키피오는 무력 투쟁만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균형잡힌 성격의 소유자였고, 따라서 광신적인 성향은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원수를 갚는다는 감정만큼 그와 인연이 없는 감정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초래한 장본인인 마시니사도 이제는 그의 동지가 되어 있었다.


본국으로 귀환을 했을 때 한니발은 44세가 되어 있었다. 이탈리아로 쳐들어온지 16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니발은 에피소드를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후세의 우리에게는 한니발만큼 표정을 포착하기 어려운 인물도 없다. 특히 16년 동안이나 그가 사령관으로 모시며 따랐던 부하 병사들에게 그가 어떤 인물로 비쳤는가를 알아내는데 도움이 되는 문헌자료는 전무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런데 그런 기록이 딱 한 군데 있다. 그것은 한니발을 수행했던 실레노스의 기록을 참고했다는 리비우스의 저술에 포함되어 있다. 한니발이라는 인물을 바로 눈 앞에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한 그 대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추위도 더위도 그는 묵묵히 견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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