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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생명 사랑

매일 도토리 100개를 3년간 심으면 3년간 10만개의 도토리를 심게 된다. 그럼 그중 2만개가 싹이 나고 그중 반인 1만개만 살아남는

작성자신동|작성시간09.05.29|조회수194 목록 댓글 0


▒ 시리즈소개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내 나무 아래에서
나무 숲 속
나무를 심은 사람
나무는 좋다
숲 이야기


▒ 저자 및 역자

저자 : 장 지오노(Jean Giono)

1895∼1970. 프랑스 남부 오뜨 프로방스의 마노스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이었던 그는 집안 사정으로 인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16세에 은행에 취직하여 20여 년간을 은행원으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그리스와 라틴의 고전들을 섭렵하며 문학 수업을 쌓았다.

1928년 발표한 <언덕>이 성공을 거두면서 뛰어난 서정성과 강렬한 문체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지오노는 평생을 고향인 마노스끄에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며, 30여 편의 소설과 수많은 희곡, 시나리오를 발표한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지오노의 소설 작품은 크게 2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의 것으로 구분되는데, 전쟁 전의 주요 작품으로는 <언덕>, <보뮈뉴에서 온 사람>, <소생>으로 구성된 「목신의 3부작」과 <세상의 노래>, <영원한 기쁨>, <산중의 전투> 등이 있고, 전쟁 후의 작품으로는 「기병 연작」인 <앙젤로>, <지붕위의 기병> 등과 「소설 연대기」인 <권태로운 왕>, <강한 영혼> 등이 있다.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역자 : 채혜원

그린이 : 이정혜


▒ 추천의 글

■미디어 리뷰

어린 시절 「위인전」을 읽으며, 이 세상이 선의와 숭고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던 사람은 성장기의 어느 시기에 몹시 당황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현실에는 「위인」이란 그리 흔치 않으며, 어쩌면 진정한 「위인」은 이야기 속에나 존재할 뿐이라는 상실감까지 느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세상의 공동선에 대한 희망, 공동선을 가장 앞서 실천하는 사람을 만나고픈 기대를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스스로 「위인」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깨달을 때까지.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근래에 만난 아주 숭고한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어려운 말로 이념을 이야기하거나 높은 목소리로 공동선을 주창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가장 낮은 목소리로, 가장 간략한 서술방식으로, 한 평범한 이야기를 전할 뿐이다. 바로 자신의 영역에서,자신의 방식대로 공동선을 실천한 한 숭고한 인간의 이야기를. 이 책의 화자는 프로방스 지방을 등산하다가 길을 잃어 황폐한산으로 들어선다. 그곳에서 혼자 양을 치며 살아가는 엘제아르부피에라는 목자를 만난다. 나이가 55세인 늙은 목자는 쇠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산을 오르내리며, 그 지팡이로 땅에 구멍을 파고 도토리를 심는다.

10만개를 심으면 2만그루쯤의 싹이 나오고, 산짐승에 먹히거나 자연재해로 인해 다시 그 중 절반이 죽어버린다. 10만개의 도토리를 심어 1만 그루를 키워낸다는 생각으로,5년째 매일 도토리 열매를 심는다고 늙은 목자는 설명한다.

산을 내려온 화자는 그 늙은 목자를 잊어버린다.곧이어 발발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야 했기 때문이다.5년동안 전쟁을 치른 후 지친 몸을 쉬기 위해 다시 프로방스 지방을 찾을 때에도 화자는 그 늙은 목자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전쟁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늙은 목자는 살아 있었다. 자신보다 키가 큰 10살짜리 떡갈나무들과 함께. 그가 심은 떡갈나무들은 끝없이 펼쳐지는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또 습기가 많은 땅을 골라 자작나무숲도 가꾸어 놓았다. 메말랐던 시내에는 물이 흐르고, 물 근처에는 버드나무와 풀꽃들이 되살아나 있었다. 늙은 목자는 어린나무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양들을 처분하고 대신 100여개의 벌통으로 생업을 대신한다고 설명한다.

그 후 화자는 1년에 한 번 꼴로 늙은 목자를 방문한다.그는87세로 사망할 때까지 단풍나무도 심고 너도밤나무도 심으며 꾸준히 숲을 가꾼다. 숲이 울창해지자 산밑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이 생긴다. 정부에서는 자연림이 형성되는 것을 기뻐하며 그곳을 특별 보호구역으로 선포하지만 그것이 한 인간의 숨은 노력 때문임은 알지 못한다.

이 책은 1953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처음 발표된 이후40여년 동안 13개국어로 번역·출판되었다고 한다. 많은 나라에서 환경보전과 지구 재녹화 운동의 교재로 사용된다고 한다.그러나 <나무를 심은 사람>이 단순히 환경보전의 성공 사례로만 읽히는 것은 아니다. 산업화와 인간중심주의의 대척지에 서서 자연사상을 전해주는 문명비판의 책으로 읽힐 수도 있다. 절대고독 속에서, 다른 인간의 영혼에 섬세하게 접근하는 고독한 영혼들의 교감도 아름답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절대선을 추구하는 한 숭고한 인간의 위인전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경향신문 | 1996-07-10 |

피서철이다. 산으로 바다로 강으로 서둘러 길 떠나는 사람들, 도시를 탈출하는 이들의 흥성스러운 풍경은 유쾌하고 동시에 서글프다. 자연의 율동으로부터 격리되어 도심이라는 `게토'에 분리 수용된 난민들.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와 더불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가 층층이 누적된 이 희망 없는 땅에서 당신의 별은 안녕한가. 나의 별은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았는가.
인간은 꿈꾼 만큼 살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싶다. 꿈꾸어도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 시시로 무력감을 느낄 때,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나를 위로하며 묵상의 소롯길로 안내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나무를 심는 것'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말하는 장 지오노의 메시지는 명징하다. 그러나 이 명료한 메시지는 단순하거나 건조하지 않다.

스스로 절대적 고독을 선택하였고 고독 속에서 나무를 심는 행위를 통해 자연과 신과 평화를 얻은 이 글의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는 단호하지만 섬세한 영혼의 율동이 만드는 기적 같은 희망을 보여준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사랑을 원하며 사랑의 `실천'이 존재의 이유가 되는 기적!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강요된 바 없이 황무지에 희망의 숲을 가꾼 부피에를 통해 나는 깨닫곤 한다. 내 영혼이 얼마나 헐거운지, 혹은 얼마나 딱딱한지를. 인간이 만든 모든 경계에 대해 아나키스트였으며 농민이었고 아카데믹한 문단의 조류로부터 일체의 거리를 두었던 장 지오노는 다만 자신이라는 나무가 뿌리내린 터전으로서 이 별을 사랑했다. “이 작품은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작품 중의 하나다. 이 책은 나에게 단 1페니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이 점이야말로 내가 이 작품을 쓴 목적의 하나를 이루어 준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그는 한 푼의 인세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책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읽고 그가 소망한 `공동의 선'을 위한 메시지가 순결하게 전해질 수 있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참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다. 속도를 숭배하지 않고 느림 속에 살며 그 완만하고 선한 힘으로 스스로 빛나는 사람들. 휴가를 준비하는 당신에게 이 작고 아름다운 책 한 권을 권한다. 계곡에 발을 담그고 혹은 풍성한 나무 그늘 아래서 당신의 아이에게나 연인에게, 당신 자신에게 읽어줄 수 있기를. 그리하여 부디 사람들이 발을 디딘 대지가 그 뿌리내림을 거부하지 않게 되기를. 무절제한 욕망과 이기심과 무지로 이 별을 병들게 한 물질문명의 죄로 말미암아 저승길을 헤매야 할 가여운 바리데기들이 더 이상 탄생하지 않게 되기를.
┃시인 김선우 | 한겨레신문 | 2000-07-31 |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하고 개성이 강하면서도 이 세상에 대해서 반항적이고 그리고 남자든 여자이든 매력이 있다. 어쩌면 누구나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긴 소설을 읽는다거나 하는 일은 싫은 일이다. 직장에서건 나이트클럽에서건 튀고 싶다. 마치 달리는 오토바이처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오늘은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들 때 가 있다. 내가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을 만난 것도 그런 때였다. 나는 그것을 1년 간격으로 두번 읽게 되었다.

두번째 읽었을 때는 비디오를 구해서 보았다. 주인공은 1차대전이 있기 전의 프랑스의 황무지를 여행하다가 말없이 양을 키우면서 황무지에 나무를 심고 살고 있는 노인을 알게 된다. 황무지는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처럼 황폐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쓸쓸한 곳이었다. 이 소설은 아주 짧고 그리고 그다지 복잡한 스토리가 아니기 때문에 내용을 다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글의 처음에서 말한것처럼 고요한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에 이 글을 읽었다.이전에 이런 글을 좋아한다고 누가 말하면 나는 촌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는것이 80년대나 그 이전을 그리워하는 노인네처럼 생각된다는 선입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피곤해서 집에 바로 돌아와 구두를 벗고 쉬고 싶은 날이 있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단순하고 고요한 스토리 안에 현란한 개성을 뛰어넘는 촉촉함이 있었다.내가 그것을 즐기게 된 것은 비디오테이프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비디오테이프는 어린아이들이나 청소년을 의식해 만들어 놓은 것 같았지만, 내 생각에는 어린아이들이나 청소년이 초록빛과 황무지, 그리고 바람부는 그림으로 가득한 그것을 별로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생각할 때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지친 어른들이 보기에더 적당하다고 느껴진다. 어른들은 개성있고 매력적이 되기 위해서 아주 노력하고 있고 그리고 그만큼 지쳐 있기 때문이다. 아주 샤프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면서도 홀로 집으로 돌아가서는 남몰래 자신의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사람>이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절대로 도시를 떠나지 못하면서도 황무지에 홀로 살아가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삶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장 지오노의이 소설을 에코토피아 스타일의 녹색운동권 소설로 생각하거나 쓰레기 분리수거를 해야지, 하면서 읽는 것보다는 `나는 엄마가 필요해` 하는 마음으로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그리고 나무를 심는 사람이 꼭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한국일보 | 1996-0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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