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텦의 서쪽 끝에 위치하였던 돌궐계의 제국들은 자체내의 극심한 세력경쟁에 분주하여 중앙스텦지대의 쇠약해진 유목국가들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몽고가 등장하게 되는 과정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여 고찰되어야 한다. 중앙스텦으로부터 예기되는 위협이란 가능성이 거의 전무하였기 때문에, 정착국가들은 중앙스텦에 큰 관심이 없었고 따라서 몽고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거의 완전한 이변이었던 것이다. 아보기가 요제국을 성립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스텦의 사신들이 그의 조정에 왔다. 그 사신들 중에는 저복, 달탄에서 온 자들이 있었다. 달탄은 곧 타타르로 여진족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부족이었다. 저복이 어떤 계통의 민족이었는지 아직까지 확실한 결론이 없으나, 그들의 사신이 요조정에 내왕할 당시에 그 부족은 케르렌강 유역을 따라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며, 후에 오르곤강까지 판도를 넓혔다. 그들이 거주하였던 지역이 후에 몽고족의 근거지로 추측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느 정도 몽고족의 조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요제국 200년 기간 동안 약 60회의 저복의 사신이 요조에 내왕하였으나, 그들의 글란과의 관계는 대체로 적대적이었다. 계속해서 글란의 변방지방을 약턀하였고, 감주와 사주도 공격하였다. 그러나, 기록에 등장하는 그들의 무력행동에 관한 내용은 애매한 점이 없지 않으니, 그러한 도발행위가 안위에 심각한 위협이 된 경우가 전무하였기 때문이다. 저복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을 종합하여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들은 글란조 시대에 통일된 집단을 형성하지 못했고, 씨족들은 패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서로간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글란과 후에 몽고족의 중핵할거지가 되는 지역과의 관계는 저복과의 접촉이 그 주종을 이루었으나, 기록에는 그 지역에 거주하던 다른 부족들도 언급되어있다. 1096년과 1097년에 글란은 한자로 梅里急라고 이름이 기술된 부족과 전쟁을 하였다. 의심의 여지가 없이, 이 이름은 <메르키드>족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들은 12세기 중에 셀랭가 하류지역에서 유목생활을 영위하였다. <금사>에는 메르키드족의 북쪽에서 유목을 하던 <퀘레이트>라는 부족명이 언급되어 있다. 몽고사에 관계되는 페르시아 자료의 기록에 따라서, <퀘레이트>를 <요사>에 언급된 북<저복>로 우선 인정할 수 있겠다. <나아만>도 하나의 확고한 부족단위명으로 금의 연대기에 최초로 등장한다. 끝으로, 글란의 정사인 <요사>에 1084년 萌古國이란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조공사가 왔다는 기록이 있다. <萌古>가 몽고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간단하고-또 보통 그러하듯이-의문스러운 기사 이외에 이를 증명할 다른 증거를 요사에서 발견할 수 없다. 여진족이 출현하는 시기부터는 스텦의 정치정세에 관한 기록이 그 이전보다 다수 현존한다. 그러나 여진조의 연대기에 포함한 스텦관계기사를 이해하려면 몽고역사서를 참고하여야 한다. 여기저기에서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모든 자료들을 종합하여 일관성있게 정리할 때, 당시 스텦에서 일어나고 있던 거창한 정치적 격동의 양상이 나타난다. 글란시대에 처음으로 시작된 동요가 여진시대에는 확연해진다. 수많은 부족들이 -그중 몇몇만 언급해도, 케레이트, 나이만,메르키드, 타타르등-각각, 자체의 지도력하에 스텦을 재통일하고 스텦제국을 자신등의 전통에 입각하여 수립하려고 노력분투하고 있었다. 12세기중에 그러한 기도를 추진하는 주된세력, 그리고 만약 여진이 간여하지 않았더라면 성공할 수 있었던 세력은 케롤랜강의 남쪽 지역과 흥안산 중간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타타르족이었다. 당시 여진과 탕굴은 스텦에서 진전되고 있는 사태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고 인정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위협을 가능성으로만 인식하였기 때문에 시기가 늦을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