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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람세스, 크리스티앙 자크

작성자신동|작성시간14.06.07|조회수256 목록 댓글 0

10여년전 잠시 손에 쥐었다 이내 내팽개쳤던 책,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를 최근에야 끝까지 읽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전개가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한 데다

극중 에피소드들이나 등장인물들의 대사 따위가 유치하고 미개하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 때문에 흥미를 붙일 수 없었던 듯.

 

하지만 우연히 다시 손에 들게 된 람세스는 10여년의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많이 변해있었다.

물론 활자 속 람세스가 변할 리야 만무하지만,

별로 발전이 없었다고 생각했던 10여년의 시간 동안 내 지적수준이나 마음의 여유가 꽤나 변화한 건 지도.

 



 

고대 이집트의 황금시대를 열었다는 '대왕' 람세스2세.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상상력이 절묘하게 결합된 이 다섯권짜리 기나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든 힘은, 

사실과 허구의 그 불명확한 경계 때문인지도 모른다.

드문드문 남아있는 역사적 실재들과 그 휑한 간격을 차곡차곡 채워가는 작가의 상상력은,

비록 몇몇 에피소드의 자연스럽지 않은 전개와 생뚱맞은 끝맺음이 좀 까끌하게 느껴지긴 해도 충분히 박수를 보내줄 만 하다.

 

기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피-람세스의 희미한 흔적들과 아부심벨의 신전,

여기저기 남겨진 파피루스와 신성문자 정도의 빈약한 소재를 손에 들고

위대한 대왕 람세스와 아름다운 왕비 네페르타리의 대서사시를 구성해낸다는 것은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도 무척이나 버겁게 느껴지는 일이다.

 

소설 람세스가 나에게 특히 큰 울림을 전해준 것은 소설 내내 지겹다싶을 만큼 반복됐던 고대 이집트인들의 세계관이다.

람세스가 통치 내내 온힘을 다해 수호하려고 했던 신(神)들의 가치는 종교와 이념을 떠나 21세기 현대인들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제한된 통찰력으로나마 그들은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려 했고,

그것을 매우 높은 수준으로 받아들여 체화했으며,

곧 우주의 질서이기도 한 신들의 가치를 지키는 데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고대인의 신화란 그저 자연의 두려운 힘에 굴종하고 종족의 안위를 기원하기 위한 미신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생활을 규율하고 보다 나은 공동체를 이루는 기준이 되어주는 절대선이자

일종의 사회적 규준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극중 람세스의 죽마고우로 등장하는 저 유명한 모세(Moses)의 스토리도 흥미진진하기 이를 데 없다.

 

성경 속 모세가 이집트인을 쳐죽이는 사건을 일으키는 곳은

히브리인에 대한 핍박이 이뤄지던 이집트의 국고성 '라암셋'이다.

 

하지만 소설 속 모세는 람세스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라암셋(피-람세스)의 건축 총책임자요,

그의 살인은 학대받는 히브리인의 봉기를 이끌기 위한 예정된 행위가 아니라

그저 '개인적으로' 갈취당하고 있던 한 질낮은 히브리인을 구하기 위한 우발적 범행이었다.

 

그가 신의 이름으로 '출애굽'을 이끌기 위해 보여줬던 수많은 이적들은 소설 속에선 그저 우연한 자연현상이거나

아니면 이집트의 마법사들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마술'에 불과한 일들로 묘사된다.

(이집트 마법사의 '따라하기' 쇼는 성경에도 그대로 서술되어 있다.)

 

히브리인들의 엑소더스는 신의 힘에 무릎꿇은 파라오의 마지못한 허락이 아니라,

'절친' 모세와 히브리인들의 민주적 의사를 존중한 합리적 군주 파라오의 관용으로 그려지고 있다.

 

기독교 입장에서 보자면 성경을 왜곡하고 깎아내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중대한 신성모독인 셈이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 속 모세가 신성한 호렙산에서 신을 영접하고 계시받는 것을 비롯한 모세의 행보를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는 3인칭의 건조한 관점으로 보여준다.

 

극중 사건의 진실 여부를 판단하지 않으며,

모세와 람세스의 행위 중 어떤 쪽이 더 가치로운 것인지 섣불리 결론짓지 않는다.

이집트 왕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다보니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집트인의 관점을 보여주려 노력할 뿐,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모세의 일대기를 크게 훼손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파라오의 공주가 강에서 건져내 키운 것으로 나오는 모세에게 갑자기 '형' 아론이 등장하는 성경의 이해불가한 대목을,

소설에서는 모세가 히브리 지도자 중 하나였던 아론을 만나 의기투합하는 것으로 처리함으로써 논리적 완결성을 부여해주기까지 한다.

 

아마도 유모로 영입된 친모에게서 자신의 정체와 가족의 존재에 대해 듣고 자랐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고,

"네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고 했던 것은 친형이 아닌 그저 형제와도 같은 동족 정도를 뜻한 게 아닐까 짐작할 수도 있다.

어쨌든 성경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고 갑자기 등장시킨 아론의 존재를 작가는 나름의 상상력으로 복원해낸 셈이다.

 

어차피 소설이라는 허구의 탈을 쓰고 있다는 점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작가가 천착했던 고대 이집트의 세계관을 드러내기 위한 효과적 도구로서 모세라는 유명한 소재를 잠시 빌려썼던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

물론 이윤기씨가 서평에서 지적하듯 모세의 역사적 실재에 관한 프로이트 등의 문제제기가 소설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유일신교의 불관용을 꼬집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잠재되어 있다는 점까지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난 수년 전 이집트에 잠시 다녀온 적이 있다.

피라미드 앞에서 (시간이 늦어 들어가보지는 못하고)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웅장한 고대 건축물이 석양에 물드는 것을 바라보고,

카이로에 있는 파라오 박물관에 들어가 금빛 번쩍이는 유물들을 1시간 정도 둘러본 게 짧은 이집트 여행의 전부였다.

 

거리에는 소총을 둘러멘 무심한 표정의 관광경찰들이 무료한 삶과 더위에 지친 표정으로 50m마다 하나씩 퍼져있고,

대부분의 집들이 세금을 피하기 위해 지붕을 완성하지 않고 철근이 삐죽삐죽 솟은 미완성 상태로 늘어서있다.

 

이집트를 파라오와 스핑크스의 이미지로만 알고 있던 동양의 이방인의 눈에 비친 오늘의 이집트는,

찬란하지만 무식하기까지 한 고대의 엄청난 유물로 간신히 먹고사는 가난하고 무력한 나라였다.

 

하지만 최소한 소설 람세스를 읽고 이집트를 방문했더라면,

인생에 다시 없을 지도 모르는 소중한 이집트 여행의 기억이 그리도 무기력하고 김빠지지는 않았으리라 하는 후회가 든다.

이집트 문명이 남긴 찬란한 유물의 겉모습 뿐 아니라,

그 안에 깃들어있는 고대인의 정신세계를 조금이나마 깊이 엿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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