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83년,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뒤꿈치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타렌툼(타란토) 앞바다에 10척의 로마 선박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 동안 줄곧 육상 민족이었던 로마도 나폴리 일대를 ‘로마 연합’에 끌여들였을 무렵부터 소규모나마 함대를 갖게 되었다. 그 함대 가운데 10척이 태풍에 쫓겼는지, 타렌툼 항구로 피해 들어온 것이다.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 가운데 우두머리겪인 타렌툼과 로마 사이네는 로마가 삼니움족과의 전쟁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부터 이미 서로의 세력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협약이 맺어져 있었다. 타렌툼 사람들은 이 사고를 협약 위반으로 받아들이고, 항구에 들어온 이유조차 묻지 않고 당장 실력행사에 나섰다. 다섯척은 당장 침몰하고, 승무원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나머지 다섯척은 간신히 달아날 수 있었다.
로마는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타렌툼 시민들은 손해배상 교섭에 응하기는 커녕 손해배상을 요구하러 방문한 사절단의 그리스어 발음이 엉터리라고 비웃으며 쫓아냈을 뿐이다. 로마는 전쟁을 결의한다.
타렌툼은 스파르타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건설한 도시국가였다. 도시국가로서는 로마와 거의 같은 나이였다. 기원전 3세기 전반의 이 시대, 본토인 그리스에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및 테베 같은 유력한 폴리스들이 차례로 사라지고, 마케도니아 왕국의 지배에 복종했지만, 알렉산더 대왕이 요절하는 바람에 다시 이전의 혼란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을 통틀어 ‘대 그리스’(마그나 그라이키아)라고 부른 것도 본국의 쇠퇴와는 반대로 계속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당초에 그리스계 도시들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타렌툼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의 로마는 삼니움 전쟁을 겨우 끝내고, 넓어진 세력권에서 기반을 다지는 시기에 들어가 있었다. 실제로 타렌툼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의하긴 했지만, 군대를 당장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타렌툼에서는 로마의 결의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말았다. 스파르타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치고는 불가사의하게도 타렌툼 사람들은 싸움을 싫어하여, 자국의 방어를 외국 용병에게 맡기는 관습이 있었다. 타렌툼은 당시 최고의 용병인 북부 그리스의 왕국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를 택했다. 타렌툼은 피로스왕에게 이탈리아에 와서 로마를 공격해 준다면 35만 명의 보병과 2만 명의 기병을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도 특히 동쪽에서는 ‘알렉산더 증후군’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현상이 만연해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지 아직 4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대왕의 위업은 그의 원정에 참가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야심만만한 그리스 남자치고, 자기도 알렉산더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많은 그리스인들 가운데 알렉산더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주목받고 있었던 자가 바로 피로스였다.
병법의 천재 피로스
태풍으로 2천명의 병사와 2마리의 코끼리를 잃은 피로스를 맞은 타렌툼의 거리는 임전태세가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다. 야외극장이나 체육관은 시민들로 가득찼고, 약속한 37만 명의 병력은 그림자도 없었다. 그는 당장 극장과 체육관을 닫으라고 명령했는데 타렌툼 시민들은 피로스를 용명으로 고용했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조치에 불만을 가졌다.
로마가 남하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피로스는 그리스에서 데려온 휘하 별력만 이끌고 싸우기로 결심한다. 통틀어 2만 6천 500명의 병사와 코끼리 18마리가 전부였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볼 때 타렌툼의 모든 행동은 자만과 안일로 뭉친 모습으로 비쳐진다. 전쟁을 할 마음도 아니면서 전쟁강국인 로마를 무시하고 감정을 건드린 이유는 무엇이며 이미 전쟁선포가 있었는데고 자만에 빠져 안일하게 무방비상태로 있었던 것은 어떻게 변명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대단한 타렌툼이어도 결국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스인은 타민족을 모두 ‘바르바로이’, 즉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결국 그들의 자만이 자멸를 초래한 것이다.
피로스는 훗날 한니발이 병법의 스승으로 삼은 장수답게, 용맹하고 과감하게 공격하는 무장과 침착하고 냉정한 전술가의 양면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우면서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투의 전모를 머리에 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마가 피로스에게 패하자 이 소식은 당장 이탈리아 남부 일대에 퍼져, 로마 세력권에 편입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자들이 피로스쪽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로마로 진군하는 동안, ‘로마 연합’에 가담하고 있는 부족들이 로마에 등을 돌리리라는 것을 계산하고 수도 로마로 북상하던 피로스는 난처한 상황에 봉착했다. ‘로마 연합’의 가맹국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토록 끈질기게 로마와 싸우다가 마침내 굴복한 삼니움족까지도 피로스의 유혹을 거절했다. 바로 이것이 로마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쳐들어간 피로스의 기세를 꺾어 버렸다.
로마는 당시 병역이 면제되어 있었던 무산자들조차도 소집할 만큼 이번 사태의 중대성을 심각하게 인식했다. 그러나 당황하여 허둥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독재관도 임명하지 않았다. 이때도 역시 로마인의 평소 방식대로 피로스와의 서전에서 패한 집정관 레비누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고, 집정관 자리에서 해임하지도 않았다. 이 상황에서 로마에 다행스러웠던 것은 피로스가 다른 모든 것은 갖추고 있었지만, 인내심만은 갖지 않은 사나이였다는 사실이다. 피로스는 ‘로마 연합’이 해체되지 않는다는 것과 수도 로마에서 무산자 계급까지 소집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 회군해 버린 것이다.
타렌툼으로 돌아간 피로스는 타렌툼의 입장에서 로마에 강화를 제안했다. 조건은 첫째, 로마가 앞으로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를 존중하고 불가침을 선언할 것. 둘째, 그리스계 도시들과 로마 사이에 쌍방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중립지대를 두기위해 그 지역에 사는 삼니움족과 루카니아족을 ‘로마 연합’에서 해방하여 다시 독립시킬 것.
만약 로마가 두번째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이 지역에 전략적 이유로 건설한 루체리아(오늘날 루체라)와 베누시아라를 두 식민지는 철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베누시아까지 건설이 끝난 아피아 가도도 그 정략적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로마인들은 피로스가 제의한 강화를 진지하게 토의한 모양이다. 이번 전쟁은 원래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을 정복하려고 시작한 전쟁도 아니었다. 그리고 소문으로만 들었던 피로스의 교묘한 전술과 코끼리 부대의 파괴력을 직접 체험한 지금은 로마인도 주눅이 들어 있었다. 원로원 의원의 대다수는 강화를 맺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알고 격분한 인물은 노령 때문에 은퇴해 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다. 아피우스 가도를 건설한 아피우스는 다른 아피우스와 구별해서 ‘재무관 아피우스’나 ‘장님 아피우스’라고 부른다. 노령에 시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원로원에 나타나 호되게 원로원 의원들을 꾸짖었다. 그 결과 원로원의 분위기는 바뀌었다. 그러나 로마는 피로스의 제안을 거절할 결심까지는 서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선 포로의 몸값을 가진 특사를 타렌툼의 피로스에게 파견하였다.
피로스는 몸값을 받지는 않고 포로가 된 로마 병사들을 강화체결을 미리 축하하는 뜻으로 석방한다고 풀어주었다. 그러나 로마의 특사는 600명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가는 것은 받아들였지만 강화가 성립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 포로들을 다시 피로스에게 돌려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귀국한 특사를 맞아 로마 원로원은 다시 토의를 시작했다. 결국 피로스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600명의 로마병사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다시 헤어져 타렌툼으로 돌아갔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고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민족인지 너무 놀랍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인의 핏줄로 유전될 수 있는 기질이 아니었다. 왜나하면 로마가 이런 강대한 나라를 이루게 된 때에 보여준 이런 기사도와 신사적인 태도는 고대 로마가 망한 뒤 로마의 후손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기대 이상으로 신사적인 모습이 로마에서 나타난다.
거의 같은 무렵, 로마 원로원을 몰래 찾아온 외국인이 있었다. 피로스의 시의(侍醫)가 보낸 밀사였다. 그는 피로스를 독살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 대가로 무엇을 해줄 것이냐고 물으러 온 것이다. 원로원은 이 일의 자초지종을 피로스에게 알렸다. 피로스는 너무 고마운 나머지, 그 보답으로 로마군 포로 600명을 다시 돌려보냈다. 로마쪽도 그냥은 받을 수 없다면서 로마에 포로로 잡혀와 있던 그리스 병사들을 송환했다. 참 너무나 놀라운 모습이다. 로마는 이무렵 얼마나 높은 자존감(Self-image)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피로스도 상당히 높은 자존감을 가진 인물이었음이 틀립없다.
다시 로마와 피로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로마가 패배했다. 그러나 피로스도 지쳤다. 패주하는 적도 뒤쫓지 않고 타렌툼으로 돌아온 피로스에게 시칠리아섬의 시라쿠사에서 사절이 왔다. 카르타고의 공격으로부터 시칠리아의 그리스인을 지켜달라는 요청이었다. 로마인과의 싸움에 염증이 나있던 피로스는 자세히 물어보지도 않고 이 요청을 수락했다. 그러나 시칠리아를 수중에 넣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3년 동안 피로스를 괴롭힌 것은 카르타고인이 아니라 시칠리아의 그리스인이었다.
로마와 거의 같은 시기에 건국되었지만,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는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 건국 초기부터 이들의 힘은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번영은 사람들의 정신을 자만과 안일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리스인들 특유의 강한 독립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들은 동포인 그리스인끼리도 협조하는 정신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피로스는 이들의 내분이나 배신에 우롱당하고 말았다. 마지막에는 신변의 위험까지 겪어야 했다. 피로스가 3년후 시칠리아를 포기하고 타렌툼으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절반으로 줄어든 휘하 병력뿐이었다. 타렌툼 시민들도 시칠리아의 동포와 다를게 없었다. 돌아온 피로스를 전보다 더 백안시할 뿐, 그가 군대를 재건할 수 있도록 원조하는 것조차 아까워했다.
한편 로마는 이 3년을 허송세월하지 않고 ‘로마 연합’을 단단히 굳히는데 활용했다. 가맹국은 이제 모두 확고한 로마편이었다. 다시 한 번 피로스가 로마에 쳐들어왔을 때 로마는 승리했다. 피로스는 자신의 왕국인 에페이로스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3년 뒤에 피로스는 스파르타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이름높은 장수였던 피로스를 귀국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은 이 사건으로 로마는 일약 국제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라틴 민족의 일개 부족에 불과했던 로마는 이 전쟁을 계기로 지중해 동부 국가들까지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이집트에서 특사가 도착했다. 지중해 세계에서 카르타고와 어깨를 겨루는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있던 이집트가 로마에 사절을 보낸 것이다. 이 특사의 임무는 로마와 우호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273년 타렌툼에 대한 공격이 개시되었다. 남에게 의지할 가망도 사라진 타렌툼은 간단히 함락되었다. 함락된 타렌툼을 로마는 6동맹국으로 만들었다. ‘로마 연합’의 다른 동맹국과는 달리, 타렌툼에는 자치권을 주지 않았다.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제일 좋은 이 항구를 직할 해군기지로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군항인 이 타란토에서는 1991년의 걸프 전쟁 때도 중동으로 가는 함대가 출항했다. 아피아 가도는 곧 타렌툼까지 연장되었다. 몇 년 뒤에는 타렌툼에서 브린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까지 연장되어, 가도의 여왕이라 불리는 아피아 가도가 완성되었다.
우연히 일어난 사건은 이리하여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이라는 역사적 필연이 되었다. 기원전 270년 무렵인 이 시기에 이르러, 로마는 북쪽으로는 루비콘 강에서 남쪽으로는 메시나 해협에 이르는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완성했다. 기원전 753년에 건국된 뒤부터 헤아리면, 무려 500년에 이르는 긴 세월이 걸린 사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