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계의 차세대 리더와 부흥강사로 주목받고 있는 주성민 담임목사가 시무하는 일산금란교회는 김홍도 감독님(기독교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의 일산 성도들을 향한 영혼구원의 바램을 시작으로 2004년 12월 3일에 세워진 교회이다.
특별히 짧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비약적으로 급성장하고 있는 감리교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교회인데 이곳 주성민 담임목사는 이 모든 교회의 역사가 금란교회의 김홍도 감독님으로부터 배운 성령화 운동과 영혼구원 운동이라고 말한다.
주성민 목사는 부모님이 감리교 목회자이셨기 때문에 모태로부터 아버지의 교회인 충주 방주교회를 섬겼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시간이 지나 성장하면서 그에게 큰 시련이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어머니가 중 3때 백혈병으로 투병하시다가 고3 졸업하던 해에 돌아가시게 된 것을 시작으로 그다음 해에는 아버지도 위암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연이은 신학대의 낙방은 그를 절망으로 빠뜨리게 하였다. 끊이지 않는 시련들은 그가 결국 죽음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그는 농약병 하나를 챙겨 들고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오산리기도원으로 향했는데 그때 주성민 목사는 ‘지옥은 있는가?’라는 김홍도 감독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만 명이 넘는 기도원의 성도들에게 ‘여러분 자살하면 지옥에 갑니다’라고 세 번이나 외치시며 설교하시는 감독님의 말씀이 주성민 목사에게는 그 말씀이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는 그 즉시 농약병을 집어던지고 그 후 일주일동안 오산리기도원에서 집회에 참석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신학교를 들어가면 김홍도 감독님을 찾아가 훈련을 받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10수 끝에 신학대에 입학한 그는 그가 결심하였던 대로 감독님을 찾아갔고 교역자로 6년간 훈련받아 지금의 목회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주성민 담임목사는 “저의 영적 스승이자 지금의 부흥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금란교회 김홍도 감독님을 만나게 된 것은 나의 목회 인생에 큰 전환점이자 축복이었습니다.” 라고 고백한다.
주성민 목사의 부모님은 충주지방의 방주교회라는 시골 목회지에서 농촌 목회를 하셨다. 15년 동안 공식적인 목회 사례비 한번 받지 못하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헌신하는 삶을 사셨다.
그는 부모님이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셨다고 회고했다. “학비가 없어 뽕나무에서 뽕잎을 따서 팔아 누나들 학교를 보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25년간 목회하시면서 15년은 목회사례비를 받지 못했습니다. 고생도 심했어요. 동네청년들에게 제사를 드리면 안 된다고 말했더니 밤에 술을 먹고 와서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시궁창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저희 가족들에게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행패 부리고, 핍박하는 그런 일이 수도 없이 반복됐습니다.” 라며 힘들던 시기를 떠올렸다. 주성민 목사의 부친은 그때의 후유증으로 평생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셨다고 한다. “그런 부모님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주성민 목사는 부모님을 떠올리며 잠시 회한에 잠겼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목회를 하며 힘들게 생활하시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영혼을 구원하셨던 부모님의 모습은 주성민 목사 역시 가야 할 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입시 철이 다가온 10월, 신학대 입학원서를 접수하면서 그동안 돌보아 주셨던 큰아버지의 집을 나왔다. 큰아버지는 그의 신학대 입학을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왕십리 서울신문 보급소에 들어가 신문을 돌리며 재수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신문배달, 일용직막노동, 독서실 총무 등 신학교 입학을 위해 11년 동안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는 모진 고난에도 오직 자신의 길은 주의 종의 길이라고 생각하며 오직 한길만을 위해 걸었다.
주성민 목사는 “그때의 그 연단이 현재의 목회에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그때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저를 연단시켜주신 귀한 시간 이었고 하나님께서 저에 대한 계획이 있어서 그렇게 저를 키우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교회 부흥이 힘겨울 때마다 떠올리는 기억이 있다. 그의 어머니는 힘든 암 투병 기간 동안 미음도 못 드실 정도로 쇠약해져 있으셨지만 매일 새벽 3시마다 꼭 일어나 간이침대에 누워 자는 아들의 손을 붙잡고 울며 기도드리셨다.
주성민 목사는 “어머니는 내 가슴에 손을 얻고 나를 위해 기도해주셨습니다. ‘진실한 주의 종이 되게 해주소서. 세계적인 목사가 되게 해 주소서’라고. 저는 ‘엄마 내려오지 마. 다쳐. 다치면 어떻게 하려고 내려와’ 라고 하면 어머니는 ‘아들아,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해주는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한시간이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그는 회상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깊은 잠을 못 자고 뒤척이고 있는데 어머니가 또 내려 오셔서 기도해주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날은 어머니께서 힘이 드셨던지 손만 올리는 게 아니라 몸 전체를 가슴에 기대고 기도를 드리시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손발이 저려 와도 ‘엄마가 나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고 했는데 이까짓 것 참지 못할까’하며 쥐가 나도 참았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던 어머니는 힘이 드셨는지 주 목사의 품에서 주무시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주성민 목사가 주무시는 어머니를 침대에 올려 드리려고 어머니를 안는 순간 어머니의 고개는 넘어가고 그때야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신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 마지막 기도 소리가 항상 귓가에 들려옵니다. ‘하나님 제 아들 성민이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진실한 주의 종으로, 세계적인 주의 종으로, 세계적인 부흥강사로 꼭 쓰임 받게 해 주옵소서.’ 지금도 그 어머니의 마지막 기도소리가 귓가에 들려옵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내가 교만해질 때 나를 다시 겸손의 자리에 있게 합니다.
주성민 목사는 신학교에 붙은 즉시 김홍도 감독을 찾아갔지만 12만 성도의 금란교회 담임목사님을 만나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사무 장로를 10번 넘게 찾아가도 모두 퇴짜를 놓아서 목사님을 만날 수가 없었다. 금란교회에서는 당시에도 수백 명의 신학생들이 전도사가 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그는 결혼한 지 1년이 안된 신혼이었지만 부인과 함께 금란교회의 전도사가 되기 위해 일주일 동안 금식을 했다. 일주일 금식기도가 끝난 후 주 목사는 부인에게 흰 천을 끊어오라고 한 다음 김홍도 감독님 앞에서 “내 사명을 다하리라” 라는 혈서를 쓸 결심을 하고 김홍도 감독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성령이 인도하셨는지 그렇게 만나기 어려웠던 분을 쉽게 만나게 되었고 김 감독 또한 만나자마자 “재수를 왜 이리 오래했는가. 하나님께서 크게 쓰실 테니 걱정 말아라. 고등부에 가서 교사를 하고 있으면 전도사로 부를 테니 걱정 말아라”라고 그를 크게 반겼다.
그는 “사명을 다하리라!” 라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드리며 주어진 곳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그가 가는 모든 부서마다 부흥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다.
그가 일산금란교회를 개척하기 전 처음으로 단독목회를 했던 노원구 중계동에서 사역하던 교회 역시 크게 부흥하여 안정된 목회를 이루어 나가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에 일산금란교회를 새로 개척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잠시 망설였지만, 그는 김홍도 감독님께 은혜를 받아 걸어온 자로서 영적 스승인 김홍도 감독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일산금란교회 개척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교회의 부흥의 길이 열렸고 처음 개척 당시 김홍도 감독님이 지원해준 50여 명의 성도들로 현재 5,000여 명이 넘는 성도들을 이루게 되었다.
주성민 목사는 “부흥은 오직 주님의 방법이며 또한, 김홍도 감독님께 배운 성령화운동이 교회 부흥의 핵심이다. 김홍도 감독님 교회에 가서 영혼구원을 하는 방법을 배웠고, 지옥 가는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그 뜻을 일찍 깨닫고 일산금란교회 개척 시에도 이런 방법을 적용하여 초신자 중심으로 전도하고 기도하며 훈련시킨 것이 제 부흥의 모든 것이다”라고 주님에게 모든 영광을 돌렸다.
그의 북한 사랑은 황해도 아낙군에서 태어나 주를 믿기 위해 월남하였던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 6·25 전쟁 때 포로로 잡혔지만, 신앙의 자유가 허락된 한국에서 신앙의 꿈을 펼치기 위해 남쪽을 택하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그가 북한 선교의 비젼을 꿈꾸게 하는 데 큰 영향력을 끼쳤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북한 선교에 대해서 남달랐던 아버지의 비전을 이어 받아 주성민 목사는 지금 북한선교에 큰 비전을 꿈꾸고 있다.한편으로 그는 지역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책임을 잊지 않기 위해 늘 섬기며 봉사하고 있다. 어려운 지역주민을 위한 불우이웃 돕기와 소년소녀 가장 돕기, 독거노인 돕기 등을 하고 있으며 교도소 선교도 참여하여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주 목사는 “아직까지 저희 교회가 역사가 짧아 노력에 비해서 지역과 사회에 그리 많은 활동을 보여 드리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 파주에 새 성전이 세워지면 본격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센터로 저희 교회가 쓰임 받을 것입니다” 라고 전했다.
전도와 교회 부흥
세계로금란교회의 교회 부흥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영혼구원이기에, 밤낮 쉬지 않고 전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자 노력하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 가운데 더욱 감사한 것은, 전도한 영혼들의 85%이상이 초신자, 불신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수하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구나!” 하는 기쁨 때문입니다.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며,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진 세계로금란교회 부흥의 방법을 몇 가지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세계로금란교회 부흥의 방법
1. 개척멤버 20명을 모으라
※ 개척멤버를 모으기 위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 나선다.
① 지방에서 서울로 입학, 취업하는 청년을 모은다.
ex) 강원도 평창, 경기도 파주, 강원도 철원 등
② 아무리 먼 곳이라도, 전도할 영혼만 있다면 기도하면서 찾아간다.
- 기도의 씨를 뿌리면, 성령께서 먼저 그 마음을 움직이신다.
ex) 심방 가는 차 안에서 쉬지 않고 기도회를 하면서 감.
“하나님 박현선을 우리교회로 꼭 보내주세요.”
2. 노방전도
※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영혼구원, 바로 전도이다!”
1) 전도의 동기부여
- 전도의 동기부여로 지옥 가는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정이 일어나게 한다.
2) 전도의 훈련
① 전도의 훈련을 통해서, 전도의 일꾼을 양성한다.
- 처음 전도 시에는 군중 심리를 이용하여 무리로 나가서 전도하게 한다.
- 끊이지 않는 전도의 훈련을 통해 전교인을 전도체질 교인으로 만든다.
② 다양한 전도 이벤트를 통해 전도가 축제이고, 기쁨이라고 느끼게 한다.
ex) 전도페스티발, 전도구호, 전도가 등
③ 선의의 영적 경쟁으로 지치지 않는 전도효과를 본다.
- 전도 시상을 통해, 천국의 면류관과 영적욕심을 가지게 한다.
ex) 교구 시상, 개인 시상 등
3) 끈질긴 전도, 밤낮 쉬지 않는 전도 열정!
① 끝까지 전도
- 노방전도 시에 만난 전도대상자는 다음 심방이 이루어지도록 끝까지 전도한다.
ex) 이름, 연락처 등 심방할 수 있게 알아야 한다.
② 전도한 영혼은 절대 놓치지 않도록 철저리 심방한다.
③ 전도, 심방용품은 개인이 부담하도록 훈련한다.
- 이유? (A) 한 영혼을 위해 시간, 물질을 헌신하게 해 영혼 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운 다.
(B) “심은 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 임을 체험하고 느끼게 한다.
3. 심방
※ 무작정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심방을 한다.
① 정성들인 심방으로 마음을 감동시킨다.
- 심방대상자에 대한 개별적인 선물과 철저한 이벤트를 준비한다.
ex) 특별히 생일, 경조사 등
② 심방용품의 과감한 투자로 마음을 움직인다.
③ 끝까지 포기하기 않고 심방한다.
4. 새신자의 관리
※ 새신자는 무조건 잘해 준다.
① 새신자는 왕자와 공주처럼 대한다.
② 새신자에 대한 1:1 대인마크
- 매주 2명씩 대인마크하는 사람을 교대하여 새신자에 대해 관심갖음을 느끼게 한다.
- 이유? 교회 와서 6명만 알면 소속감을 느끼고 교회에 정착하게 된다.
③ 초신자는 첫날에 승부를 건다.
- 초신자라고 하더라도 빨리 교회분위기에 익숙해져야 빨리 정착할 수 있다.
5. 준비된 예배
※ 예배리허설로 준비된 예배, 살아있는 예배를 드린다.
① 예배리허설로 준비된 예배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② 찬양단의 활성화로 예배분위기를 활기차게 한다.
- 꺼지지 않는 교회의 불빛과 교회활동으로 활동하는 교회분위기를 만든다.
③ 계속적인 기도회와 통성기도로 기도의 불씨를 지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