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 기독교 선교사의 입국
1. 칼 구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네델란드
개신교 선교사로서 최초로 한국을 방문한 사람은 구츨라프 선교사다. 그는 1832년 7월 황해안인 충청도 앞 바다에 와서 섬주민에게 복음을 전했다. 구츨라프는 독일 경건주의의 요람인 할레(Halle) 대학에서 수업했다. 당시 할레 대학은 스페너에 의해 설립되어 프랑케와 같은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18세기 세계선교의 센터의 역할을 했다. 성경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일에 힘쓰고 부랑아와 고아를 위해 학교를 세우며 할레 대학은 독일의 가장 큰 신학교가 되었다. 6,000명 이상의 경건주의 성직자가 배출되었고 프랑케는 할레 대학에서 키운 인재들을 세계로 파송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구플라프는 할레 대학에서 수업하면서 부흥하는 교회를 경험했고 영성이 깊은 곳에서 훈련을 받아 선교에 눈을 뜨게 되었다.
구츨라프 선교사는 먼저 사이암(현 태국) 선교에 나섰으나 큰 성과 없이 아내와 딸을 잃은 채 중국을 향했다. 그는 중국의 영파, 상해를 거쳐 천진에 이르렀고, 다시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지나 마카오에 도착하여 모리슨의 집에서 여장을 풀었다.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은 중국복음선교회(China Mission Socialization)을 설립하여 중국선교에 대한 도전을 많이 했다. 허드슨 테일러가 나중에 이 단체를 통해 중국에 들어간다. 모리슨에 의해 구츨라프는 중국선교에 불이 붙었다. 그는 언어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서 사이암어로 신약성서를 번역했고, 모리슨과 중국어 구약 성경 번역 및 수정에 참여하여 완성시켰다.
그는 한문을 알았고 상당한 의술을 겸비했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군함 암허스트(Lord Amherst)호를 마련하여 중국 북쪽과 한국, 일본 오키나와 및 타이완 등을 순방케 할 계획이었는데 구츨라프가 여기에 동승한다. 모리슨은 구츨라프에게 한문성서를 주어 나눠주도록 했다. 암허스트호가 광동을 출발한 것은 1832년 2월 27일이며 타이완, 복주, 영파, 상해 및 산동반도의 위해위를 거쳐서 황해를 가로질러 한국 해안에 나타난 것은 7월 17일이었다.
처음에 황해도의 서해안 장산곶 부근에 도착한 듯하다. 구츨라프 일행은 그곳에서 노인을 만나 한문으로 필담을 나누며, 가지고 간 책과 물건을 주며 접근했다. 그들은 한국인과 무역을 하기를 원했고, 지방관을 통해 조정에 청원서를 보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서양인과의 접촉이 없었던 한국인들은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한편에서는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받았던 책을 돌려주기고 했고, 구츨라프 일행을 지방관에게 제대로 알선해 주지도 않았다.
7월 23일경 배는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 앞에 정박하였다. 홍주만은 1816년 바실 홀(Basil Hall)이 이곳을 측량하러 와서 자신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곳이다. 구츨라프 일행은 그곳에 머물면서 홍주목 관리인듯한 지방관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을 통해 국왕에게 보내는 청원서에 한문성서 2권, 전도지, 서양포, 시진표(시간, 일진 나타낸 표), 천리경 등을 선물로 함께 보냈다.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구츨라프 일행은 그곳 사람들과 접촉하여 성경과 의약품을 나눠주었다. 한국인들은 답례로 입담배 몇 개를 주었다.
구츨라프는 이 기간에 주기도문을 우리 말로 번역했다. 관리들이 검문을 마치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일기불순으로 못 가고 배에 머물 때 홍주 목사 이민회의 서생 양씨에게 한자로 주기도문을 써주고 그 옆에 토를 달게 하여 주기도문을 번역했다. 또 섬 사람들에게 감자씨를 주면서 심는 법과 재배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선원들이 먹으려고 가져온 감자를 해안에 100군데 심어주면서 한문으로 재배법을 써서 나눠주었다. 그러나 섬 사람들은 외국의 식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국법 위반이라며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하여 감자가 마령서(馬鈴薯)라는 이름으로 충청도 일대에 퍼졌다. 가난과 기아에 시달리던 우리 민족이 감자를 재배하여 배고픔을 모면할 수 있게 된 것은 구츨라프 선교사의 공이었다. 결국 서울에서 무역청원을 거절하고 성경이나 선물도 되돌려 보냈다. 그러나 구플라프 선교사를 통해 강경 인근의 모든 관리와 많은 사람이 성경을 받았다. 구츨라프 일행은 한국 해안에 한 달 남짓 머물다 갔다.
구츨라프는 8월 17일 제주 해협을 지나면서 일본, 조선, 만주, 중국까지 쉽게 무역할 수 있는 전략적인 요지이며, 만일 상업적인 목적이 달성될 수 없다면 선교기지로도 좋다고 추천했다. 그는 난파한 일본 선박의 한 선원과 친해져서 1838년에는 요한복음을 일본어로 번역 간행한 일도 있다. 구츨라프는 언어에 대단히 뛰어난 달란트를 가진 선교사였다.
2.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
윌리암슨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중국 책임자였다. 1855년 중국에 와서 그리피스(John Griffis)와 함께 상해에서 선교했다. 1863년 산동성에서 사역했는데 여기서 한국이 상인을 만나면서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66년 선교보고서에는 “작년에 한국에서의 종교적 상황에 대해서 흥미있는 소식을 들었다”고 적혀있다. 그는 1865년 중국 지푸에서 김자평과 최선일이란 조선인을 통해 조선 가톨릭 교우들의 상황을 들었다.
조선의 교우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나님이 죄사함 뒤에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주셨다. 조선 천주교인 모두가 그렇게 신앙고백을 한다는 말을 듣고 놀라움을 느끼며 감탄했다. 천주를 믿고 난 후 생활이 변화되어 첩을 두고 있던 자가 첩을 내보내고, 자기 부인을 다시 귀하여 여겼고, 천민도 한 인간으로 존중하는 양반이 나왔으며, 신앙생활을 위해 관직을 사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에게 음식을 대접했더니 공손이 먼거 기도하고 먹었다. 모든 생활 하나하나에 이미 신앙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다. 교리 문답서를 보여주며 자신들뿐 아니라 조선의 대부분의 교우들이 성경이나 교리 문답서를 갖고 싶어한다고 했다. 윌리암슨은 이들에게 묵주와 십자가상, 교리문답서를 보내주었다.
이들을 접한 윌리암슨은 “분명 조선은 위대한 가능성의 나라이다”고 갈파했다. 한국인의 지성과 성품, 우수한 윤리적 생활, 명민한 판단력과 담 큰 결단력을 지적하고는 지리와 지하자원까지 언급하고 수운의 편리함도 서술한 후 이 나라에 없는 것은 다만 서양의 종교와 그 문명의 박차와 인도라고 갈파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은 강경한 쇄국 정책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전도 가능성은 그리 낙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선교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던 토마스(R. Thomas)를 영적으로 회복시킨 후 성서공회 자격으로 일하게 해주고,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1865년 한국을 방문하는 그에게 다량의 한문성경을 주면서 전도활동에 적극 협력했다. 이듬해 다시 한국선교에 나서는 토마스에게 역시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토마스 목사는 그때 순교하고 만다.
1867년 9월 한국인들과 청나라의 교역지인 고려문까지 가서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그곳에 거주하는 한국인에게 한문 성경을 나눠주었다. 그는 또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가 만주에게 사역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즈음 중국 정부가 산동인을 만주로 이주시켰는데 이 새로운 지역 선교를 위해 로스 파송을 건의했다. 1871년 결국 로스도 만주에 왔다. 매킨타이어도 산동에 있다가 만주로 왔다. 이들을 통해 만주에서 로스판 성경이 번역되어 서상륜과 같은 권서인을 통해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도 많은 한국인들에게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윌리암슨 선교사가 직접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렇게 토마스 선교사나 로스 선교사가 한국선교를 위해 일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로버트 토마스는 1863년 7월 21일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중국 상해를 향했다. 그러나 상해에 도착하여 책임자(총무)였던 무어헤드와 다른 선교사들과의 사이에서 토마스는 큰 상처를 받고 선교에 환멸은 느낀다. 무어헤드나 다른 선교사들은 중국어를 배우려 하지 않고 영어만 썼는데 이에 토마스는 실망을 한다. 심지어 무어헤드는 자기 집을 세놓고 토마스의 집을 같이 쓰자고 했다. 게다가 무어헤드의 부인이 너무 이기적이라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학원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라고 했으며, 주일에는 중국교회에서 사역하지 못하고 하고, 자신이 인도하는 교회에서 영어예배를 인도하며 봉사하라고 했다.
1864년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얼마 안 되어 부인이 유산 후 앓다가 소천하여 선교본부에 보내는 최초의 편지에 토마스는 아내 캐롤라인(Caroline Godfery)의 사망 소식을 전해야 했다. 이때 토마스는 25세였다. 위로가 필요한 그에게 무어헤드는 자기 집이라며 오히려 방을 더 쓰자고 했다. 토마스는 결국 선교부를 떠나 세관장 로버트 하트경(Sir Rober Hart)의 통역관으로 일했다. 그는 러시아어, 중국어, 몽골어를 능통하게 하는 등 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무어헤드는 본부에 토마스가 세속 직업을 갖고 있다고 비난했고, 그는 선교 의지가 전혀 없다고 폄하했다.
윌리암슨을 만나 선교 열정을 다시 회복한 토마스는 한국교회 박해 상황을 천주교인들에게 듣고 1865년 7월 황해도 연안 창린도에 도착하여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에 두달 반 동안 머물면서 성경은 나눠주고 한국어를 배워 열심히 전도했다. 1866년 7월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안내자 자격으로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도착했다.
1866년 2월 미국 범선 서프라이즈호가 난파되었을 때 옷과 약품까지 주며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잔치까지 벌였다. 그러나 제너럴셔먼호는 상업차 왔다고는 하지만 중무장한 배로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도발을 했다. 결과적으로 불행을 초래한 셈이다.
배가 머물 때 토마스가 서툰 말로 통역을 했는데 물러가라는 말을 무시하고 계속 평양까지 들어가면서 조사하러간 중군 이현익을 억류하고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배가 서해안의 조수간만의 차를 알지 못하여 썰물 때 급격히 물이 줄자 오도가도 못하게 되자 당시 평양 감사는 연암 박지원의 손주인 박규수는 배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토마스 목사는 성경 몇권을 품에 품고 강으로 뛰어들어 헤엄쳐 나왔는데 퇴교(退校) 박춘권이 칼로 쳐죽였다. 이로서 그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 성직자가 되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에게도 성경을 주었다. 처음엔 받지 않다가 되돌아갈 때 집으로 가지고 갔다. 나중에 박춘권은 예수 믿고 안주교회의 영수(領袖, 오늘날의 장로)가 되었다.
이때 군중 속에서 12세 소년 최치량이 3권의 성경을 주워가졌는데 두려워 그중 한 권을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에게 주었다. 그는 성경을 찢어 벽지로 발랐는데 나중에 박영식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다.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가 박영식의 집에 왔다가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 감동하여 예수 믿고 후에 평양숭실전문을 졸업한 후 미국남장로교 선교사인 레이널즈(William Reynolds)의 조사(助事, 오늘날의 전도사)가 되어 한국 인 성서번역 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홍신길이란 청년은 배에 초대를 받아 구경을 했다. 그때 성경을 받아 가지고 갔는데 천주교 책이라는 말을 듣고 강에 던졌다. 그러나 나중에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리(칠동) 교회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김영섭이란 청년은 토마스 목사에게 성경과 <진리이지>(眞理易知, Easy Introduction to the Truth)란 전도책자를 받았는데 아들 김종권과 친척 김성직에게 읽도록 권유하여 둘은 뒤에 장로가 되었다. 또 최치량은 평양신학교 출신 한국인 최초의 7인 목사 중의 하나인 한석진 목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어 장대현 교회를 세우는 장본인이 되었다. 토마스 목사가 뿌린 성경을 주워 예수를 믿은 여인들도 있었다. 한 여인은 성경을 읽고 예수를 영접한 뒤 아들 이덕환이란 사라마도 믿게 되었는데 그는 장대현 교회, 사리원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토마스는 칼에 맞아 죽은 후 시체가 토막이 나서 강변에서 불태워졌다. 그때가 1866년 9월 2일 그의 나이 약관 27세였다. 그는 이렇게 숨져갔지만 그가 전해준 복음은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그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물을 마시고 산 많은 평양인들이 예수 믿어 평양은 한국교회의 중심이 되었고 동양의 예루살렘이란 이름을 듣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1927년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그의 묘지가 있는 뚝섬에 1천여명의 교인이 모여 추도예배를 드렸고 1932년 토마스 목사의 이름 첫 자인 T자 모형으로 예배당을 지어 토마스목사 기념예배당을 봉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