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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요한복음의 시간관

작성자신동|작성시간08.03.29|조회수1,133 목록 댓글 0

낮 12시 vs 오후 6시
수가성 여인은 한낮에 물을 길러 온 ‘더러운 여인’이었는가


 

송창원
서울신학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에모리대학교에서 석사를
드루대학교에서 박사학위(신약과 초기기독교 전공)를 취득하였다.
뉴저지 주립대학교(Rutgers)와 드루에서 강의하였고,
현재 드루의 연구원(Research Fellow)으로서 성결대학에 출강하며
안산영광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저서로는『로마서를 수사학으로 읽기』(영문판, 피터랑 출판사, 2004) 등이 있다.

 


예수께서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셨을 때 곤하여 우물 곁에 앉으셨다. 요한은 “그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요 4:6) 하였다. 이 시각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유대 시간을 따르면 낮 12시이고, 로마 시간을 따르면 오후 6시 정도이다. 그러나 이 시각에 대한 대부분 목회자들의 이해는 정오이다.
그 이유는?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교회 부교역자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그는 유대 시간과 로마 시간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고, 두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자기도 설교할 때는 한낮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더 은혜롭기 때문이란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한복음의 시간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막연하게 ‘은혜롭다’ 는 이유 때문에 수가 여인이 물을 길러 온 시각을 한낮으로 이해하려는 것 같다. 다섯 명의남자를 거쳐 여섯 번째의‘남편 아닌 남자’와 살고 있는 그 여인은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뜨거운 한낮에 물을 길러 왔고, 거기에서 예수님과 만남으로 인생의 방황은 종료되고 영원한 생수를 누리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그 여인은 한낮에 물을 길러 왔을까? 혹시 요한은 로마 시간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는 그 복음서에 없는가?

성경의 기본적인 시간 이해
성경의 기본적인 시간 이해는 현대 시간과 다르다. 유대인들의 하루는 해 지는 때, 약 6시부터 시작하여 다음 날 해 지는 때까지이므로 그때를 0시로 기준한다. 따라서 유대 시각 0시란 현대 시각(로마 시각) 6시에 해당한다. 3시는 현대 시각 9시, 6시는 12시, 9시는 3시이다. 구약에서는 이론의 여지없이 이 유대 시간제가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도 상황은 같아 보인다. 마태복음 20장에서는 품꾼을 고용하는 주인이 3시에서 11시까지 사람들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11시에 온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다고 한다. 그 11시는 당연히 로마 시각 오후 5시이고 따라서 마태가 유대 시간을 사용하고 있음은 명확하다. 또한 마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제 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9시까지 계속되었다고 기술하는데(27:45), 마가와 누가도 동일한 시각을 기록한다(막 15:33, 34; 눅23:44). 따라서 공관복음의 시간은 유대 시간을 따르고 있음이 확실하다.

요한도 유대 시간개념을 사용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요한은 어떤가? 요한복음의 시간도 유대 시간인가? 이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논쟁이 있어 왔으나 현재까지의 대세는 요한도 유대 시간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요한이 유대 시간을 따르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그 복음서 어디에도 없다.

요한복음에는 시간에 대한 기록이 네 군데 있다. 1:39에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 함께 거한 “때가 제 10시쯤 되었더라”고 한다. 4:6에서는 예수께서 수가 우물 곁에 앉으신 “때가 제 6시쯤 되었더라”하였다. 4:52에서는 왕의 신하의 아들이 나은 때가 “어제 제 7시”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19:14에서는 예수께서 ‘박석’ 이란 곳에서 재판을 받기 시작하신 시각이 “제 6시”라고 증거하고 있다. 앞의 세 사건에서는 그 시각을 로마 시간으로 볼 수도 있고 유대 시간으로 볼 수도 있다. 그 사건들은 로마시간과 유대 시간 어느 쪽에도 결정적 증거를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의 경우는 면밀히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시각은 요한이 사용하고 있는 시간에 대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유월절의 예비일인가, 안식일의 예비일인가
요한복음 19:14의 정확한 문구는 “이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이다. 여기에서 “제 육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월절의 예비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날을 지적하고 있는지가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 “유월절의 예비일”, 곧 예수께서 수난당하신 날은 복음서 안의 난구 중의 난구로 여겨지며 성서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쟁과 고민거리가 되고 있는 구절이다. 하지만 이 구절을 복음서의 조화의 관점에서 볼 때 결론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리고 그 결론은 적어도 필자에게는 유일한 대안으로 보인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수난당하신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 아닌 “유월절”(무교절)의 첫날이다. 마태와 마가는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셨다고 한다(마 26:17-19; 막 14:12-16). 누가도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이 이르렀을 때에 큰 다락방에서 유월절을 드셨다고 하여(눅 22:7-16), 마태, 마가와 맥락을 같이 한다. 즉 예수께서는 7일 동안 계속되는 유월절 절기의 첫날에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고, 바로 그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고, 잡히셨고, 심문받으신 후 십자가형에 처해지셨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이 유대 시간으로 제 3시부터(막 15:25) 9시, 로마 시간(현대 시간)으로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였다.

반면에 요한은 “유월절의 예비일” 에 예수께서 재판을 받으셨다고 한다. 이는 유월절의 전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공관복음의 기록과는 조화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이 피상적인 차이는 이 “유월절의 예비일” 이라는 헬라어 어구의 의미를 넓혀 해석하는 동시에 예수의 수난사건과 관련되어 있는 날짜들에 대한 표현들을 종합적으로 관찰할 때 해결될 수 있다. 먼저, “유월절의 예비일”은 꼭 유월절 전날로 해석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표현을 해석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은 유월절 절기 안의 예비일이라는 어떤 특정한 날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이 예비일은 유월절 전 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 절기 안의 다른 어떤 특정한 날의 전날을 의미할 수 있는데, 이것이 복음서를 조화롭게 이해하기 위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날은 어떤 날의 예비일인가? 그 답은 복음서 자체 안에 있다. 당시 유월절 안의 안식일은 특별한 안식일로 여겨졌고, 따라서 유대인들은 그 날을 안식일의 예비일, 심지어는 단순히 예비일이라고만 칭하였다. 마태는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날이라”(27:62) 하는데, 이는 곧 다음날이 유월절 안의 큰 안식일이라는 뜻이다. 이날에 대해 마가는 “이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15:42)이라고 보다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누가도 “이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23:54)고 설명한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요한을 읽으면 요한이 유월절 전날이 아닌 안식일 전날을 유월절의 예비일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이 명확해 지는데, 그는 예수께서 운명하신 날에 대해 “이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19:31)라고 하고, 다시“이날은 유대인의 예비일”(19:42)이라고 하여 ‘예비일’ 이란 표현은 그 큰 안식일 전날에 대한 전형적인 표현임을 스스로 분명히 하고 있다.

요한복음의 시간이 로마 시간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결정적 이유
지금까지의 논의의 결론은 예수께서 수난당하신 시간은 공관복음이나 요한복음이나 동일하게 안식일 전날 즉, 현대 시간개념으로 목요일 밤부터 금요일 오후까지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로 할 때에 요한복음이 말하는 예수께서 ‘박석’ 앞에 서신 시각인 제 6시는 요한의 시간개념을 확정하는 데 결정적이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밤에 심문을 받으시고 “새벽에” 빌라도에게 넘겨지셨다(마 27:1; 막 15:1; 눅 22:66-23:1). 그 시각은 현대 시각으로 새벽 4-5시, 이르면 3-4시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요한의 6시는 과연 몇 시 정도를 말하는 것일까? 유대 시각으로 본다면 밤 12시 아니면 낮 12시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다. 밤에는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넘겨지지 않으셨으며, 낮 12시는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과정 중의 한가운데이다. 따라서 그 시각은 로마시각인 새벽 6시로 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볼 때에만이 전체 복음서의 기록과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따라서 복음서들을 종합적으로 관찰해 볼 때 요한복음의 시간개념에 대한 선택은 유일하다. 요한의 시간개념은 로마적이다!

수가성 여인은 저녁 6시경에 물을 길러 왔다
요한복음 19:14에 근거한, 요한이 로마 시간을 쓰고 있다는 결론은 요한복음의 다른 부분에까지 적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좇아가 거한 때는 오후 4시가 아닌 밤 열시쯤이었고,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이 낫기 시작한 때는 1시가 아닌 일곱 시이다(오전과 오후는 분명치 않다). 뿐만 아니라 수가의 여인이 물을 길러 온 시각도 한낮이 아닌 저녁 여섯 시쯤이었다.

어떤 독자는 이 해석이 그 여인이 부끄러운 삶을 사는 여인이었다는 사실과 잘 부합되지 않는다고 지적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선입견을 배제하고 본문을 읽을 때, 그 여인은 여러‘죄인’이었던 여인들, 즉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요8장)이라든가 예수께 향유 부은‘죄인인 여인’(눅 7장)과는 달리 명확하게 죄인이라고 지적되고 있지 않음이 분명히 상기되어야 한다. 당시는 전쟁 등으로 재혼이 적지 않던 시대여서, 바렛(C. K. Barrett) 등이 제시하듯이 여자들이 법률적으로 이혼한 다섯 남편을 가질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 랍비들은 세 번까지의 이혼과 결혼은 인정했고 그 이상은 인정하지 않았다(S. B. II, 437). 따라서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신 바는 그 여인이 법률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 결혼했고, 지금 살고 있는 남자는 법률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지적으로 볼 수도 있다.

사실 예수께서 여인에게 그 말씀을 하신 이후 여인의 반응은 부끄러움과 회개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예수의 초자연적 직관에 놀라고 예수께서 선지자이심을 인정하게 된다. 따라서 그 여인이 손가락질받던 ‘더러운 여인’ 이어서 사람들을 피하여 한낮에 물을 길러 왔다고 주장할 수만은 없다.

여전히 은혜로운 수가성 여인의 사건
그 여인은 모리스(Leon Morris)가 주장하듯이 그 많은 남자들을 이혼시킬 수있는 재력과 사회적 지위가 대단한 여자였을 수도 있다. 사실 그 여인의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며 나아오게 되었다는 계속되는 기록(4:28-30, 39-42)은 그 여인이 그 사회에서 손가락질받으며 언제든지 돌로쳐 죽임당할 위험에 놓여 있던 더러운 여인이 아닌, 오히려 그 세속화된 사회에서 돈과 지위와 미모로 여러 남자들을 휘둘렀던 여인이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게 한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볼 때에는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던 그 여인의 내면은 지쳤고 메말랐고 갈급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참 선지자이신 예수를 만나게 되고 그 분을 통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얻게 된다. 그래서 이 수가 여인의 사건은 그 여인이 더러운 여인이 아니면서도 여전히, 아니 모든 만족과 향락의 홍수 속에서 성적 방종에 탐닉하는 이 현대 사회를 향하여 더욱 은혜로운 메시지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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