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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연구

계백장군

작성자신동|작성시간06.03.31|조회수308 목록 댓글 0
계백- 웅진위인전기3, 지은이 윤기현, 그린이 김수자

계백은 백제의 마지막 충신이자 명장이었다. 기울어 가는 나라를 구하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계백의 삶은 우리에게 나라 사랑의 깊은 뜻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계백은 뒷날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된 의자 태자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며 신라를 치고 중국과 왜나라에게 잃은 옛 땅을 찾아 백제의 부흥을 이룩하려는 꿈을 다져 갔다. 의자 태자가 왕위에 오른 뒤에 그는 사비성을 지키는 백제군의 선봉장이 되어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660년 의자왕의 방탕으로 운명이 기울어 가고 있던 백제에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스스로 자기 가족의 목을 베어 비장한 각오를 다진 뒤,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로 나가 싸우다 장렬하게 숨졌다.

사진 설명

1. 기우는 백제의 마지막 충신이자 명장으로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계백의 영정

2. 충청남도 부여의 낙화암- 나당 연합군을 피해 백제의 3천 궁녀가 이곳에서 백마강으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3. 부여에 있는 의열사로 백제 충신 성충, 흥수, 계백과 고려와 조선 시대 충신들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4. 부여에 있는 삼충사로 백제 말엽의 세 충신 성충, 흥수, 계백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5. 의자왕 때 창건된 충청남도 공주의 마곡사, 의자왕은 백제 마지막 왕이 되어 방탕하게 지냈지만 계백과 벗하던 소년 시절과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백제 부흥에 힘썼다.

6. 계백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싸우는 모습.

7. 충청남도 예산의 봉수산에 있는 임존성. 사비성이 함락된 직후 복신, 도침, 흑치상지 등이 이곳을 거점으로 백제 부흥 운동을 하였다.

8. 방탕한 왕과 간신들로 얼룩진 역사에서 끝까지 백제의 이름을 빛내는 계백의 동상, 부여에 있다.

의자 태자와 소년 계백

계백은 7백년 역사의 백제를 지키려다 용감하게 전사한 백제의 마지막 장군이다. 이미 기울어진 백제의 운명을 잘 알면서도 신라에 항복하여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끝까지 싸우다 죽은 계백 장군이야말로 신의와 자부심이 대단했던 백제 사람이다.

계백은 616년경에 태어났다. 계백과 의자왕은 나이가 같다. 나이 40이 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한 무왕이 기다리던 왕자를 보았다. 그가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이다. 무왕은 신라에 대해 무척 전투적이었다. 554년에 성왕이 신라와 싸우다 전사했기 때문에 신라에 대한 백제의 원한은 뼈에 사무쳤다. 성왕이 전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백제는 바다 건너 중국과 왜에 많은 땅을 가진 나라였다. 신라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나라였다.

계백의 아버지 혜덕은 병관 좌평, 곧 지금의 국방부 장관이었다. 그래서 태자가 된 의자 왕자와 어울려 사냥을 할 수 있었다. 의자 태자의 활솜씨가 아누 뛰어났고, 계백 또한 못지 않아 사냥은 으레 두 소년의 솜씨 겨루기로 끝났다. 무왕이 가장 사냥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 상을 내리겠다고 약속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의자 태자는 꿩 3마리, 노루 1마리, 토끼 4마리 해서 모두 여덟 마리를 잡아왔다. 계백은 꿩이 2마리, 노루가 2마리, 토끼가 3마리, 거기에다 멧돼지 2마리를 더해 모두 아홉 마리를 잡았다. 계백이 이긴 것이다. 그러나 의자 태자는 계백의 솜씨를 시기하지 않고 진심으로 칭찬해 주었다. 계백은 부모님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두텁다고 칭송이 자자한 의자 태자를 마음 속으로 존경했다.

어린 의자 태자는 꿈이 신라를 멸망시키는 것이었다. 또 바다 건너 곳곳에 있는 백제 땅을 찾는 것이다. 요동과 요서뿐 아니라 왜에 있던 우리 땅을 회복하여 백제의 부흥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백제의 본토 뿐 아니라 바다 건너로의 진출을 꾀하는 것이다.

성왕

백제는 서해를 둘러 싼 해양국가였다. 바다 건너 중국 쪽으로는 요동 반도와 요서에 이르는 넓은 땅, 그리고 동쪽으로는 왜까지 백제군이라는 땅을 가진 커다란 나라였다. 보통 신라의 화랑도나 고구려의 기마민족 정신은 말하지만 백제의 전투적인 해양 정신은 대수롭지 않게 평가한다. 이것은 중국과 일본이 자기네 역사를 조작했기 때문이다. 자기네 나라의 땅이 과거에 백제 땅이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백제를 조그마하고 약한 나라로 만들었던 것이다. 삼국 중 제일 먼저 망했다고 해서 무조건 형편없는 나라로 보는 것은 올바른 시각이 아니다. 고구려가 대륙을 지배했다면 백제는 바다를 지배했다.

(이도학 교수는 이런 주장을 했다. 그러나 백제는 근초고왕 때도 마한 지역 즉 지금의 전라도 지방도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다. 그런데 해외 식민지를 경영했다는 것은 좀 의심스럽다. 이도학은 동남아시아까지 경영했다고 한다.)

고구려와 신라는 도교가 널리 퍼져 도사가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도교를 믿지 않았고, 얕은 재주를 믿지 않았다. 백제는 오로지 불교만 숭상했다. 이런 종교적 전통이 백제 사람들의 성품을 강직하고 의리있게 만들었다. 백제 사람들은 키가 크고 옷차림이 항상 깨끗했다. 걸을 때는 팔짱을 끼지 않았고, 웃사람에게 절을 할 때는 두 손으로 땅바닥에 댈 정도로 공손했다. 생활에 여유가 있었고, 문화 수준이 높았다. 오늘날 부여, 공주, 익산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절과 석탑,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들엔 세련되고 우아한 백제인의 솜씨가 담겨 있다.

백제 사람은 생식을 즐겼다. 몸에는 문신을 한 사람이 많았다. 문신은 바다에 나가 죽었을 때 그 사람의 신분을 밝혀주는 것으로 백제가 해양 국가였음을 나타낸다. 백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땅의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중국이나 왜와 좋은 관계를 맺어왔다. 그렇다고 비굴하에 고개를 굽히지 않았다. 대국답게 언제나 당당한 자세로 교역을 했다.

백제가 신라와 원수 지간이 된 것은 성왕 때의 일이다. 삼국 중 고구려가 가장 부강했는데 고구려는 중국과 맞붙어 싸워서 이길 정도였다.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공격해 왔기에 백제는 신라와 힘을 합해서 고구려에 대항했다. 백제는 동성왕 때부터 무령왕을 거쳐 성왕 땎지 번창했다. 백제는 서쪽으로 중국의 요동, 요수, 하북, 오월 지대를 점령했고, 동쪽으로는 남해상의 많은 섬과 왜의 서반부를 차지한 반월형의 국가였다. 성왕때 사비성은 인구 80만의 국제 도시로 중국과 왜를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한다. 왜에 대한 백제의 애정은 매우 컸다. 중국의 수준높은 문화와 학문, 불교, 달력 등이 백제를 통해서 왜에 전해졌다.

성왕은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고 싶었다. 그래서 신라의 진흥왕에게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치자고 했다. 이때 백제는 옛 도듭이었던 한성(광주) 등 한강 중류 지역 6군을 되찾았다. 신라는 고현(철령) 남쪽의 한강 상류 지역 10군을 빼앗았다. 그런데 신라의 진흥왕이 약속을 어겼다.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 지역을 욕심 내 쳐들어왔던 것이다. 성왕은 당황했다. 달기를 시켜서 신라를 막았지만 결국 그 땅을 신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진흥왕은 저기에서 그치지 않고 점점 더 백제 땅을 침입해 들어왔다. 성왕은 공주를 진흥왕의 후궁으로 보내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분하고 원통했지만 신라를 물리칠 수 없었다.

성왕은 복수를 하고자 554년 7월에 몸소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관산성(옥천)을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 관상성 싸움에서 성왕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사한다. 좌평(장관) 4명, 군사 2만 9천 6백명이 전사하고 말 한 필 살아돌아오지 못한 큰 패배였다. 성왕의 전사로 120년 동안 계속되어온 나제 동명은 깨졌다. 성왕의 전사를 계기로 이제까지 해양국가로 발돋움하던 백제는 점차 반도 안으로 활동 영역을 좁히게 되었다. 신라와의 싸움에만 정신을 쏟은 나머지 바다 건너의 땅을 다스릴 여유를 잃게 된 것이다.

무왕

당시 고구려는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싸움으로 백제와 신라에 대한 남진 정책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신라는 진흥왕 때 한강 유역을 빼앗아 반도의 중심을 차지했다. 그리고 또 다시 남쪽의 대가야를 정복해 영토를 넓혔다. 신라의 세력이 강해질수록 백제는 위협을 느꼈다. 무왕은 신라에 복수하기 위해 기회만 있으면 신라를 쳤다. 무왕은 왕위에 있는 동안 14번 신라와 싸웠다. 3년에 한번 꼴로 싸웠던 셈이다. 그러나 성왕의 원수를 갚을 만큼 통쾌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길 때도 있었지만 패하여 쫓길 때가 있었다.

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자 백성들은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땀 흘려 농사를 지어봤자 언제 불바다가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생활이었다. 그런 데다가 무왕은 점차 늙어가면서 호사하고 놀기를 좋아했다. 즉위 2년전부터 짓기 시작한 왕흥사를 완공하기 위해 많은 백성들을 동원했다. 세금도 많이 거두워 들였다. 왕흥사를 완공시키는데 무려 36년이나 걸렸다. 굶주린 백성들은 강제로 끌려 나와 성을 쌓고 길을 고쳐야 했다. 힘들여 짓는 농사는 세금으로 빼앗겼다. 그런데도 무왕은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노는 일에만 정신을 쏟았다. 634년 왕흥사가 완공되자 무왕의 방탕은 점점 더 심해졌다. 무왕은 왕흥사의 경치에 반해 날이면 날마다 배를 타고 드나들었다. 대신들을 태운 호화로운 배가 줄을 이었다.

왕흥사 나들이에 재미를 본 무왕은 그 해 봄에 사비궁 남쪽에 큰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연못을 채우기 위해 20여리 떨어진 곳에서 물을 끌어왔다. 연못을 빙 둘러 수양버들을 심었다. 연못 가운데는 섬을 쌓아 올려 호화로운 정자를 지었다. 힘든 공사에 끌려 나가 일을 해야 하는 백성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왕을 원망하는 소리가 날로 높아져 갔다.

백성들의 마음은 점점 의자 태자에게로 쏠렸다. 담이 크고 용맹스러우며 효성이 지극한 의자 태자야 말로 백성들을 보살펴 백제를 이끌어 갈 임금이 될 거라고 믿었다. 백성들은 의자 태자를 해동 증자라로 칭송했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로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의자 태자의 지극한 효도와 무예는 모든 백제 소년들의 본이었다.

당시 백제에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절에 들어가 수련을 쌓는 제도가 있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고 무예를 익히기 위해서였다. 주로 17,18세의 청소년들이 중심이 되었던 이 제도는 청소년들에게 임금에 대한 충성과 나라 사랑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계백도 수덕사에 들어가 몸과 마음을 단련했다. 하루 종일 계백의 손에서는 창이나 칼이 떠나지 않았다. 눈을 부릅뜨고 입을 꼭 다문 채 무예를 익히기에만 열중했다. 1년을 이렇게 훈련했다.

무왕의 방탕은 의자 태자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신라를 치고 나아가 바다 건너 백제의 옛 땅을 찾겠노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무왕이었다. 워낙 효성이 지극해서 의자 태자는 무왕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지 못했다. 무왕은 결국 병들어 누웠다. 지극한 정성으로 밥 한술 물 한 모금 입에 넣지 않고 무왕의 곁을 지켰지만 무왕은 세상을 떠났다. 641년 봄의 일이다. 의자 태자가 31대 의자왕이 되었다.

대야성 싸움

안타까운 것은 의자왕이 초기에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의자왕은 대야성 싸움에서 큰 승리를 했다. 40개 성을 빼앗았고, 대야성의 성주인 김춘추의 사위 품석과 딸을 죽였다. 642년의 일이다. 품석은 성품이 교만하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백제가 대야성을 공격할 그 시각에도 품석은 부하의 아내를 끌어다 놓고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다. 의자왕은 자만하고 방심했던 것 같다.

고구려는 그 해에 연개소문이 친당 정책을 펴던 영류왕을 내쫓고 보장왕을 앉히면서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했다. 김춘추는 원수를 갚고자 고구려에 원병을 청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진흥왕이 빼앗아간 죽령 북쪽의 땅을 먼저 돌려달라고 했다. 이에 응하지 않자 2달간 잡아가두었다. 당시 선덕여왕은 불안을 느꼈다. 김춘추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비단과 금은을 듬뿍 주고 고구려의 관리 선도해를 꼬였다. 돌아갈 방도를 찾자 선도해는 토끼와 자라의 옛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죽음 직전에 바다 속을 빠져 나온 토끼 이야기. 김춘추는 그 뜻을 깨닫고 보장왕에게 땅을 돌려주겠다고 거짓 약속을 했다. 김유신도 가만 있을 수 없느 상황이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처남매부 지간이었다. 김춘추를 구하기 위해 결사대를 뽑아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침범했다. 이 소식을 듣고야 고구려는 김춘추를 돌려보냈다. 물론 돌아가서는 땅을 돌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

연개소문은 의자왕에게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를 치자고 했다. 의자왕이 좋다고 하자 고구려와 백제는 급속히 가까워 졌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그 길목인 당항성(남양)을 공격하기 했다. 신라는 당에 도움을 구했고 당태종은 백제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 신라를 침입하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가겠다고 했다. 결국 당의 힘을 빌어 삼국통일이 이루어지나 백제와 고구려의 땅은 영영 중국에 빼앗기게 되었다. 이후 우리나라는 자주적인 외교권을 잃고 사대주의의 길을 걸었다.

아비지와 황룡사 9층탑

신라는 삼국 중 가장 약했다. 문화의 전래도 더디었고 학문의 발달도 뒤쳐져 있었고 무엇보다 군사력이 약했다. 대륙으로 진출하고 있는 고구려나 바다 건너 요동과 왜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던 백제에 비하면 신라는 아직 덜 익은 과일이었다. 신라는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가 힘에 겨웠다. 그래서 신라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 나라의 평안함을 우선으로 빌었다. 신라에는 3가지 보물이 있었다. 황룡사 장륙삼존 금불상과 진평왕의 옥대, 그리고 황룡사 9층탑을 말한다. 이 세 가지 보물이 나라를 지키는 힘을 가졌다고 믿었다.

장륙삼존 금불상은 574년에 진흥왕이 부처님의 힘을 빌어 신라를 부흥시키고 다른 나라의 침입으로 지키기 위해 금으로 만든 불상이다. 진평왕의 옥대란 진평왕이 즉위하던 579년에 하늘나라의 임금이 특별히 내려주었다는 허리띠를 말한다. 금과 옥으로 장식되어 찬란한 빛을 발했던 옥대는 7척 거구였던 진평왕의 위엄을 더했다고 한다.

황룡사 9층탑은 선덕 여왕 때 신라의 번영과 삼국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탑이었다. 이 황룡사 9층탑에는 삼국 통일을 바라는 신라 사람들의 염원과 그것을 만든 백제 사람 아비지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선덕여왕 때 자장이라는 유명한 스님이 있었다. 당나라에 가서 불경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어느 날 자장은 신선이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고 빌어보면 신라가 부강해 진다고 했다면서 황룡사 9층탑을 세우도록 선덕여왕에게 부탁했다. 643년의 일이다.

(이런 일은 거짓이다. 무슨 신선이 나타나서 자장에게 그런 말을 했겠나? 만일 조금이라도 근거가 있다면 어떤 영적 존재가 삼국통일에 개입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거의 사기라고 단정하고 싶다. 도대체 이런 사기가 버젓하게 성립할 뿐 아니라 그래서 신라가 통일되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니 이 나라는 참 무지한 나라다.)

선덕여왕의 허락을 받은 자장은 9층 목탑을 세우기 위해 백제의 아비지를 불렀다. 당시 백제는 건축술이 삼국 중 가장 발달해 있었다. 훌륭한 탑을 세우려면 온 몸과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 나무를 만져야 한다. 그런 정성이라야 하늘을 감동시켜 탑이 신통력을 지닌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신라를 위한 기도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한창 위세를 떨치던 이듬해였다. 아비지는 망설이다 결국 이 일을 맡았다.

공사에는 총 200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 황룡사 9층 탑에는 층마다 이웃 나라나 민족의 이름이 붙여졌다. 1층은 왜, 2층은 당나라,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백제, 6층은 말갈, 7층은 단국, 8층은 여적, 9층은 예맥이었다. 이것은 이웃 나라를 굴복시켜서 조공을 바치게 하려는 신라의 염원에서였다.

어느 덧 9층탑 공사가 시작된지 1년이 지났다. 자기의 나라 백제를 망하게 하려는 신라의 탑을 세우는 아비지의 마음는 편하지 않았다. 고향의 산과 강, 두고온 가족들의 얼굴이 어른거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비지는 돌아서서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공사가 무르익어 기둥을 세우던 날이었다. 아비지가 꿈을 꾸었는데 백제가 온통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그 불길에 싸여 울부짖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아비지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에 느러누웠다. 탑 쌓는 공사가 중단되자 공사 책임을 맡은 장군 김용춘은 이 사실을 자장에게 알렸다. 결국 자장은 이 문제를 5층 탑의 이름을 백제에서 응유국으로 바꾸는 것으로 결말을 지었다. 응유국은 서역에 있는 나라다. 그제서야 아비지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공사를 시작한지 2년이 지나 645년 탑은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다. 높이가 70m가 넘는 어마어마한 목탑이었다. 이 정도면 12층 정도의 건물 높이만하다. 탑을 세운지 15년 뒤 660년에 백제는 신라에 멸망을 당했다. 그런데 그후 9층탑은 다섯 번이나 벼락을 맞아 파괴된다. 첫 번째는 탑준공후 53년후 698년 6월 신라 효소왕 때다. 크게 파손되었지만 2년 뒤 다시 세워졌다. 그후 868년 신라 경문왕 때 953년 고려 광종 때 1035년 고려 정종 때 그리고 1095년 고려 헌종 때 벼락을 맞아 파괴된 것을 다시 세웠다. 그렇게 높은 탑을 만들면서 왜 벼락을 막는 장치를 안 했는지 모른다.

화랑 비녕자와 동잠성 싸움

647년 10월 백제 군사가 무산성, 감물성, 동잠성을 에워쌌다. 신라에서는 김유신이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싸움터로 향했다. 백제의 승리가 확실시 되었다. 김유신은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지략을 썼다. 겁먹는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는 것은 죽어도 좋다는 용기를 시어주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앞장 서 나가 싸울 군사가 열명만 있다면... 김유신은 평소 아끼던 화랑 출신의 장수 비녕자를 불러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비녕자가 선뜻 말했다. “장군님, 비록 적군의 수가 우리보다 많고 잘 훈련되어 있다고는 하나 우리가 죽기를 각오하고 대항한다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김유신의 허락이 떨어지자 비녕자는 자기의 종 합절을 불렀다. “지금 내가 적진으로 달려가면 살아돌아오지 못할텐데, 내가 죽는 것을 보면 거진이가 내 뒤를 따르려 할 것이다. 그때 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거진이를 말려다오. 우리 부자가 다 죽으면 장차 집안 일은 누가 돌보겠느냐?” 합절은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비녕자는 혼자 한 필의 말을 타고 달려나갔다. 몰려드는 백제군사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비녕자는 백제 군사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신라 진영에서 이 모습을 지켜 본 비녕자의 아들 거진은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며 말 고삐를 잡아챘다. 이것을 본 합절이 말고삐를 잡고 늘어졌다. “안 됩니다. 도련님! 참으십시오. 도련님마저 돌아가시면 장차 집안은 누가 돌보겠습니까? 제발 참으십시오.” 그러나 실랑이 끝에 거진은 합절을 힘껏 걷어차고는 쏜살같이 백제 진영을 향해 달려 나갔다. 거진도 결국 무참하게 죽고 말았다.

한꺼번에 주인 부자를 잃은 합절의 눈에서는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합절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말도 타지 않고 달려 나갔다. 백제 군사들이 합절을 에워쌓다. 합절의 칼이 부러졌다. 그래도 합절은 멈추지 않고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다. 팔이 잘려 나갔다. 마침내 합절은 온몸을 허우적거리다가 비참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이 광경을 자켜보던 신라 군사들은 더 이상 치솟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신라군이 돌격하자 백제는 당황했다. 이 싸움에서 백제는 3천명의 전사자를 내고 국경밖으로 밀려났다. 동잠성 싸움의 승리는 비녕자 부자와 합절의 죽음이 가져다 준 승리였다. 이로써 신라 화랑 정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으며 이를 전략적으로 이용한 김유신의 지략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간신들의 득세와 의자왕의 방탕

백제와의 싸움에 몇 번의 승리를 한 김유신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치자는 뜻을 비추었다. 진덕여왕은 김춘추와 그 아들 법민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돌아오는 뱃길을 지켜 김춘추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불행히 김춘추를 죽이지 못했다. 김춘추의 부하 온군해가 김춘추의 옷을 대신 입고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김춘추는 당 태종과의 약속대로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대신들에게 당나라의 옷을 입게 했다. 진덕여왕이 죽자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이 되었다. 무열왕은 왕위에 오르자 백제 정벌을 위한 계획에 박차를 가했다. 군사들을 훈련한다, 식량을 저장한다, 말을 길러낸다 하면서 무려 5년간 준비를 했다. 당에 매년 사신을 보내 당과의 관계를 굳건히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660년 3월 당은 소정방을 총사령관으로 13만 대군을 보냈다. 신라는 5만의 군대를 키워 백제를 쳤다.

의자왕 15년까지만 해도 백제의 군사력은 신라를 앞섰다. 그래서 한 두 번 졌다고는 하지만 싸움은 번번이 백제의 승리로 끝났다. 승리가 거듭되자 의자왕은 차츰 자만하여 신라를 우습게 보기 시작했다. 나라와 백성을 돌보기보다는 노는 일에 마음을 쏟기 시작했다. 백성들이 오랫동안 전쟁으로 시달려 왔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신라가 군사력을 키우고, 당과 백제를 치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의자왕은 방탕하게 지냈다. 간신들과 어울리며 백성들을 돌보지 않아 민심이 의자왕을 떠났다.

사치와 방탕만 일삼는 의자왕에게 계백이 간했지만 오히려 불쾌해했다. 주위에는 아첨하는 신하들이 모였다. 임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임자의 벼슬은 달솔이었다. 나이도 계백과 비슷했다. 계백이 묵직하고 말이 없는데 비해 임자는 가벽고 말이 많았다. 임자는 의자왕이 놀이에만 정신을 쏟게했다. 의자왕의 말이라면 무조건 예예하면서 비위를 맞추었다. 왕이 못마땅해하는 대신들을 모함하기도 했다. 임자의 모함으로 충신들은 하나씩 둘씩 조정에서 쫓겨나거나 귀양을 갔다. 조정에는 임자를 따르는 간신들로 가득 찼다. 간신들은 백성들의 아픔이나 나라의 장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부귀영화만을 탐했다.

의자왕 15년 655년 2월 임자가 의자왕에게 아첨하며 태자궁을 고치자고 말했다. 의자왕이 등극한 후 신라의 성을 100여개나 함락시켰기 때문에 신라에서는 백제의 군사들이 쳐들어온다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떤다고 했다. 지난 해의 농사가 풍작이라 백성들이 상감마마의 은혜에 보답할 날만 기다리는 줄로 안다고 했다. 임자는 태자궁을 고치고 사비궁 남쪽 연못에 아담한 정자를 지으면 신선와 와서 놀만한 경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임자의 말에 의자왕은 벌어진 입을 다물줄 몰랐다.

흉년에 지치고 전쟁에 시달린 백성들은 강제로 공사에 끌려 나왔다. 아껴 두었던 곡식은 세금으로 빼앗겼다. 가난에 찌들고 굶주려 쓰러지는 백성들이 늘어났다. 의자왕을 원망하는 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임자를 비롯한 간신들은 이런 사실을 의자왕에게 숨겼다. 태자궁은 사치스럽고 호화롭게 수리되었다. 망해정(바다를 바라보는 정자)이라 이름붙여진 정자도 비길데 없이 호화로왔다. 망해정이 지어지자 의자왕은 더욱더 놀이에 정신을 쏟았다. 백성들이 굶주리는지 원망하는지 도통 그런 것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멀리 서역에서 구해 온 이름난 술, 백성들에게서 세금으로 거둬들여 마련한 맛난 음식으로 매일 잔치를 벌였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아름다운 여자들을 뽑아 술 시중을 들게 했다. 사비궁 안에서는 춤과 노래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봄이면 사비수에 놀잇배를 띄우고 꽃놀이를 즐겼다. 여름에는 후궁과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물놀이로 해가 지는줄 몰랐다. 가을이면 단풍놀이, 겨울이면 사냥놀이로 사비궁은 언제나 태평 성대였다. 의자왕은 나라 일을 숫제 임자에게 맡기고 놀이에만 빠져 지냈다. 임자는 이때다 싶어 자기 마음대로 정치를 했다. 길은 산 조그만 절에서는 나라를 사랑하는 백성들의 기도가 그치지 않았다. 백성들의 기도에 아랑곳 없이 의자왕의 방탕은 점점 더 심해졌다. 임자는 독한 술과 어여쁜 여자와 진기한 음식으로 의자왕의 환심을 샀다. 의자왕은 갈수록 임자를 믿었다. 왕후가 죽자 임자는 자기 누이동생 은고를 왕후로 앉혔다. 의자왕과 임자가 처남매부 사이가 된 것이다.

같은 처남매부 사이라도 신라의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은 힘을 합쳐 백제를 칠 궁리를 했고, 백제의 의자왕과 임자는 나라를 망치고 있었으니 한심한 일이다. 은고는 임자에 못지 않게 간사하고 음탕했다. 오라비 임자와 간신들, 요사스러운 궁녀들과 한패가 되어 충신을 모함했다.

백제의 세 충신

성충과 흥수이 어렸을 적만해도 엄청난 군사를 실은 배가 중국으로 쳐들어가곤 했다. 백제의 땅은 중국의 요동반도를 지나 오월 지대 양자강 어구의 요수까지 이르렀다. 배를 타고 중국 땅 어디를 가도 본토 사람들에 대한 대접이 깍듯했다. 더구나 왜는 백제가 자기들의 조상이라 하여 때마다 특산물과 조공을 바쳤다. 그래서 백제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백제는 반도에서의 싸움보다 바다 건너에 식민지를 넓히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계속 했다. 그러나 성왕의 전사이래 그러한 전통은 차차 사라졌다. 왜는 여전히 핏줄이 같으니까 그런대로 왕래가 있지만 대륙과 교류가 끊어진 것은 거의 50년이 되었다. 그때의 부흥을 계백을 꿈꾸었다.

성충은 태자시절 의자왕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성충의 집에서는 흥수, 계백이 모여서 나라 일을 걱정했다. 흥수는 내두 좌평(재무부 장관), 성충은 내법 좌평(예식을 맡아보던 대신), 계백은 달솔이었다. 이들은 나라의 장래를 근심하던 중 성충이 의자왕에게 마지막 충언을 하도록 부탁했다. 성충은 눈물을 흘리며 간사스런 신하와 요사스런 계집에게 속지말라고 간했다. 성충은 성왕을 대신하여 어버이로서 상감에게 명령한다면서 반말로 책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성충은 옥에 갖혀 있으면서 이렇게 혈서를 썼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아니하옵니다. 상감마마께서는 소신에게 죽음을 주시오나 신은 상감마마의 만수무강과 이 나라의 흥왕을 비옵니다. 신이 세상 형편을 보건대, 반드시 얼마 뒤에 전쟁이 있을 것이옵니다. 신라와 당나라가 어마어마한 병력으로 쳐들어 올 것입니다. 군병을 쓰는 것은 지형을 가려야 할 것이오나 만약 적이 육지로 쳐들오오거든 탄현(추풍령 고개)을 막아 넘지 못하게 하시고 바다로 쳐들어오거든 기벌포(금강 어귀 군산)를 막아 나라를 보전하십시오. 이는 신의 마지막 충성이니 부디 헛되이 버리지 마시옵소서.’ 성충의 혈서를 받아 읽은 의자왕은 노하기만 했다.

성충이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 계백은 옥으로 찾아갔다. 나이 들어 노쇠한 몸에 매를 맞은데다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성충은 병들어 있었다. 성충은 계백에게 자신의 계책을 다시 한번 말해주었다. 계백은 흥수, 의직 등과 어울려 성충을 용서해달라고 의자왕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임자 일당에게 몰려 번번히 거절당했다. 결국 성충은 옥사했다.

의자왕은 이런 일에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 궁궐을 지을 생각을 했다. 더 호화롭고 웅장한 궁궐을 만들어 백제의 부강함을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껏 공사니 세금이니 전쟁이니 해서 시달린 백성들에게 그것은 죽으라는 말과 같았다. 흥수와 계백은 반대했다. 의자왕은 두 사람을 멀리했다. 임자가 모함하자 흥수를 고마미지현(전남 장흥)으로 귀양을 보냈다. 계백은 전쟁이 나면 나라를 지켜야 할 장군이라는 이유로 겨우 귀양살이를 면했다.

흥수를 몰아낸 후 임자는 달솔에서 좌평이 되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포악해졌다. 의자왕이 술잔치로 세월을 보내는 것을 기회로, 조정의 대신들을 자기 마음대로 갈아치웠다. 온갖 구실을 만들어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다. 조정은 간신들로 가득찼다. 계백은 묵묵히 군사훈련에 전념했다.

당시 여러 가지 변괴가 있었다고 하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의자왕 19년 659년 사비상 안에 여러 변괴가 있었다고 한다. 659년 2월 이른 봄에 여우들이 떼를 지어 궁궐 안에 들어왔다. 그 중 한 마리가 달솔 임자의 책상 위에 올라 앉아 몸소리치게 울다 사라졌다. 4월에는 태자궁에 있는 암탉이 조그만 참새와 어울려 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5월에는 백강 언덕에 길이가 30자나 되는 물고기가 죽어 있었는데 이 물고기를 먹은 사람든 모두 죽었다 한다. 9월에는 궁궐 안에 있는 느티나무가 사람처럼 곡을 하며 울었다고 한다. 변괴가 생길 때마다 임금님이 돌아가실거라는 둥 나라가 망할 징조라는 둥 난리가 날거라는 둥 흉측한 소문으로 인심이 뒤숭숭했다.

660년 2월에는 사비성 안의 우물물과 사비수 강물이 모두 새빨간 핏빛이 되었다. 4월에는 수만 마리의 두꺼비가 떼를 지어 나무 위에 올라 들끓어 댔다. 이것을 보고 공연히 놀라 달아나다가 짓밟혀 죽은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었다. 5월에는 천왕사, 도양사의 탑과 백석사에 벼락이 떨어졌다. 6월에는 왕흥사의 중들이 많은 배가 큰 물결을 따라 절 문까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배는 금방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큰 개 같기도 하고 노루 같기도 한 짐승이 사비성을 향해 짖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성 안에 개들이 한꺼번에 울어 대 사람들이 놀라 달아나기도 했다.

6월이 가기전 어떤 날은 귀신이 사비성 안에 들어와 “아, 백제는 망하는구나. 아, 백제는 망하는구나.”하고 부르짖다가 땅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깜짝 놀란 의자왕은 땅을 파헤쳐 보라고 했다. 사람들이 땅을 파보니 큰 거북 한 마리가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거북의 잔등에는 ‘백제 원월륜(百濟圓月輪) 신라 여신월(新羅如新月)’이라고 씌여 있었다고 한다. 학식있는 스님이 풀이하기를 백제는 둥근 달이요, 신라는 초생달과 같다는 말이다. 둥근 달은 다 찼으니 더 크지 못할 것이요 초생달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니 이제 백제는 망할 것이요 신라는 점점 부강해질 것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스님의 풀이를 들은 의자왕은 화를 냈다. 죄없는 스님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으리라 믿기 어렵다. 이런 일 중에 일부는 조작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변고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의 민심이 어떠했는지 말해준다.)

조미압과 임자

이런 상황에서 김유신은 백제에 첩자를 보내 백제의 사정을 낱낱이 듣고는 태종 무열왕에게 알렸다. 백제가 신라와의 싸움에서 사로잡은 포로 중에 조미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조미압은 신라 천산현의 현령이었다. 조미압은 좌평 임자의 종이 되었다. 영리하고 재빠른 조미압은 임자가 백제의 국사를 맘대로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내 임자의 신임을 얻었다. 얼마후 몰라 신라로 돌아온 조미압은 김유신을 찾아가 그 동안 보고 들은 것을 전했다. 임자가 백제의 군사를 마음대로 하고 있음을 안 김유신은 조미압에게 금은 보화를 싸주면서 백제로 돌아가 임자의 집 종 노릇을 계속하라고 했다.

조미압는 임자에게 신라에서 갖고 온 금은 보화를 잔뜩 주었다. 입이 딱 벌어진 임자는 백제의 사정을 김유신에게 알렸다. 의자왕이 국사를 소홀히 하고 술과 노래로 세월을 보낸다는 이야기, 성충이 옥에서 죽은 이야기, 흥수가 귀양 간 이야기며, 사비성에 괴변이 연달아 일어나 민심이 흉흉하다는 것까지 고스란히 알렸다. 임자는 나라가 망하건 만건 자기 욕심만 채웠다. 임금 바로 아래의 좌평 벼슬을 가진 사람이 자기 한 목숨 살려고 적에게 나라를 팔아먹었던 것이다. 임자를 통해서 백제의 형편을 환히 알게된 김유신은 태종 무열왕에게 빠른 시일 안에 백제 정벌에 나설 것을 권했다. 태종 무열왕은 당나라에 병력을 요청했다.

임자는 다시 돌아온 조미압에게 물었다고 하다. “어디를 다녀왔느냐?” “예, 실은 신라에 다녀왔습니다.” “뭐라고?” “이번에 신라에 가서 김유신 장군을 만났습니다. 제가 우리 주인님은 백제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지요. 그랬더니 김유신 장군은 주인님께 청을 하였습니다.” “무슨 청이더냐?” “두 나라는 늘 싸우고 있으니 언젠가는 한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럴 경우, 백제가 망할 때는 김유신 장군이 주인님을 구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라가 망할 때는 주인님이 김유신 장군을 도와달라는 청이었습니다.” “음.” “어찌 하시렵니까? 제가 다시 가서 주인님의 뜻을 전하기로 하였습니다.” “좋다! 그렇게 하자고 전해다오.” 백제는 의자왕의 심복이라는 작자가 백제를 이 정도 밖에 안 사랑한다면 백제는 이제 끝난 것이다. 백제가 망하면 자기 혼자만이라도 살겠다니 백제가 안 망할 수 있냐? 백제의 운명은 기운 것이다. 조미압은 신라로 탈출했다가 다시 백제로 돌아가면 죽을지도 모르는데도 조국 신라를 사랑했기 때문에 목숨을 아까와하지 않고 다시 임자에게 돌아갔다.

탄현과 백강

660년 3월 당나라의 13만군과 신라의 5만군대가 백제를 공격했다. 당고종은 소정방에게 백제를 정벌한 후 그 여세를 몰아 신라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당의 군사는 기벌포에서 백강으로 들어가 주류성을 거쳐 사비성의 서쪽을 공격하고, 신라군은 금돌성(상주 백화산)을 거쳐 탄현(추풍령 고개)을 넘어 황산벌로 진격해서 사비성의 동쪽을 공격하는 것으로 작전을 세웠다. 이처럼 당과 신라가 서해안에서 만나 백제를 칠 준비를 끝냈는데도 백제의 조정에서는 이같은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뒤늦게 다급해진 의자왕은 벌벌 떨었다.

늙은 장수인 의직이 당군을 먼저 치자고 주장했다. 신라는 당군만을 믿고 있으니 당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기면 감히 두려워서 진격하지 못할 것이며, 당군은 오랫동안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몹시 지켜있으니 승산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임자와 상영 등 간신들이 반대했다. 당나라 군사들은 싸우기 위해 온 군사들이라 사기가 충천해있으니 먼저 신라와 싸우자고 했다. 신라는 여러 번 패한 적이 있어 감히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정은 양편으로 갈려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의자왕은 귀양간 흥수에게 의견을 물었다. 당나라 군사가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기벌포를 막을 것이며, 신라 군사는 탄현을 못 넘어오게 막으라고 했다. 성충의 유언과 똑같았다. 그러나 임자가 반대했다. 계백이 흥수와 성충의 주장에 동조했으나 결정을 못하고 시간을 끌다가 이미 당나라 군사는 기벌포를 지나 백강으로 들어섰고, 신라 군사도 탄현을 넘어섰다. 의직에게 2만 군사를 주고, 계백에게 1만 군사를 주었다. 당시 백제의 군사는 총 9 만이었다고 한다.

죽임당하는 계백의 가족들

계백은 이 싸움이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어차피 죽을 수 밖에 없는 싸움이라면 계백의 아내와 자식들이 자기들을 죽이고 싸움터로 나가라고 부탁했다. 집안 걱정을 잊고 싸움터에 나가 끝까지 부끄러움 없이 싸워달라는 것이다. 계백은 5천은 사비성의 수비를 맡기고 5천명만 이끌고 황산벌로 나갔다.

황산벌 싸움

신라와 백제의 최후의 결전장은 황산벌이다. 백제의 계백장군과 김유신 장군이 황산벌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백제의 군사는 5천명. 신라는 5만명이다. 10대 1의 싸움이다. 그러나 신라가 밀렸다. 왜? 계백장군이 목숨을 내어놓고 싸웠기 때문이다. 그의 부하 5천명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결사대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대였기 때문이다. 신라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전세는 불리했고 사기도 떨어졌다. 그때 김유신 장군은 부장으로 품일 장군과 동생 김흠순 장군을 거느리고 싸우고 있었다. 동생인 김흠순 장군이 아들 반굴 화랑을 불렀다. “네가 나가서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울 수 있겠느냐?” 이게 뭐냐? 총알받이 되라는거다. 나가서 죽으라는 것이다. 반굴은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품일 장군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자기 아들을 불러냈다. 그 이름은? 화랑 관창. “관창아, 너도 나아가 싸울 수 있겠느냐?” “예, 아버지” “이제 반굴의 죽음으로 신라군의 사기가 오르고 있다. 너의 출전으로 승리를 거두게 하여라.” “예.” 관창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사로잡혀 계백 장군 앞에 끌려갔다. 근데 투구를 벗기고 보니 소년이었다. 16세. 말에 태워 돌려보냈다. 온몸이 묶인 채로 관창은 신라의 진에 돌아왔다. 관창이 아버지 앞에 다시 나아갔다. “살아 돌아오다니 부끄럽지 않느냐!” 품일이 관창을 꾸짖었다. 결국 관창은 다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두 장군의 아들이 모두 전사했다. 신라군은 격분하여 백제군을 향해 돌격 앞으로... 백제군은 계백 장군을 비롯하여 5천명의 군사가 다 전사했다. 무서운 전투였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런 댓가를 지불할 수 있나? 죽으라면 죽을 수 있나? 총알받이 되라면 총알받이 될 수 있나? 신라에는 이렇게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댓가를 지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부흥한다.

낙화암에 3천 궁녀가 떨어져 죽은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놀라운 것은 백제가 망한 후 흑치상지 장군, 왕족 복신, 승려 도침이 중심이 되어 임존성(충남 대흥)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운동을 했는데 그 세력이 대단했다. 백제 부흥군은 점차 조직적으로 뭉쳐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세웠다. 신라의 태종 무열왕은 백제 부흥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러나 부흥군내에 분열이 있었다. 복신이 도침을, 부여풍 왕이 복신을 죽여 세력이 약해졌다. 그때를 틈타 신라와 당나라가 총공격을 하니 660년에서 664년까지 계속된 싸움으로 백제 부흥군은 토벌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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