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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연구

황산벌의 결전을 앞둔 계백 장군의 행동

작성자신동|작성시간26.06.06|조회수0 목록 댓글 0

계백 장군은 황산벌에서 결전을 앞두고 가족들을 칼로 쳐죽였니?

 

네, 사실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비장하면서도 비극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사건은 야사나 전설이 아니라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 계백 편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서기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18만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하자 계백 장군은 결사대 5,000명을 이끌고 황산벌로 향하기 직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아내와 자식들을 베어 죽였습니다.

백제의 운명을 걸고 황산벌 결전에 나섰던 계백 장군. 출처: NamuWiki

 

1. 정사(正史)가 전하는 그날의 기록

 

《삼국사기》는 계백 장군이 출정하기 전 집에서 가족들을 모아놓고 했던 말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힘으로 당나라와 신라의 큰 군대를 당해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식이 살아서 잡혀 노비가 된다면, 살아 욕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시원하게 죽는 것이 나으리라." — 《삼국사기》 권47, 열전 제7 계백

계백은 이 말을 마친 후 마침내 처자식을 모두 죽였다(遂殺妻子)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현대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잔인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당시의 전쟁 패러다임과 계백이 처했던 절박한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 비장한 맥락이 이해됩니다.

  • 노비와 능지처참이라는 비극 방지: 당시는 전쟁에서 패한 패전국의 왕족과 귀족 가문의 여성, 아이들은 예외 없이 승전국의 노비로 끌려가 평생 굴욕을 당하거나 참혹하게 처형당하던 시대였습니다. 계백은 적의 손에 가족이 유린당하느라 고통받는 것보다 장수의 명예를 지키며 깔끔하게 죽는 것이 가족을 위하는 길이라 판단했습니다.

  •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결연한 의지: 5,000명의 결사대로 5만의 신라군을 상대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계백은 자신에게 돌아갈 집도, 지켜야 할 가족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배수의 진'을 침으로써 오직 전쟁과 국가에만 목숨을 바치겠다는 극한의 결의를 군사들에게 몸소 보여준 것입니다.

3. 역사적 평가: 찬탄과 비판의 공존

 

이 충격적인 사건을 두고 역사적 평가는 시대를 거치며 크게 엇갈렸습니다.

  • 조선 성리학자들의 찬사: 조선 시대 사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계백을 "국가를 위해 사사로운 정을 끊은 충절의 화신"이라며 극찬했습니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관점에서는 국가를 위한 최고의 희생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 신채호의 비판적 시각: 반면 구한말의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계백의 충심은 인정하면서도,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무고한 가족의 목숨을 빼앗은 것은 지나치게 잔인한 처사"라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결국 계백의 이 비장한 선택 덕분이었는지, 백제 결사대는 황산벌에서 신라 정예군을 상대로 무려 4번을 싸워 4번 모두 이기는 기적 같은 전투력을 발휘했습니다. 비록 관창과 반굴 등 신라 화랑들의 희생으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결국 전멸하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가족까지 번제물로 바치며 싸웠던 계백의 황산벌 전투는 백제 최후의 불꽃으로 역사에 영원히 각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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