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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연구

류관

작성자신동|작성시간03.08.26|조회수140 목록 댓글 0
류관- 권용철 엮음, 신은균 그림, 아이템풀 한국위인전기8
- 이 책은 류관(하정공)의 22대손 학암공의 16대손인 호담(浩倓)이 정성들여 출간했다.

맹사성, 황희와 함께 조선초 삼청(조선 초기 세 사람의 청백리란 뜻)이라 일컬어 진 인물이다. 청백리란 높은 뜻을 가지고 오로지 백성만을 생각하며 깨끗한 마음으로 가난하게 산 벼슬아치를 이른다. 모두 세종때 사람이다.

류관은 고려 충목왕 2년(1346년) 황해도 문화현에서 문화 류씨 류안택의 아들로 태어났다. 류관의 집안은 고려때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 거족이었다. 정당문학이란 벼슬을 지낸 류공원은 류관의 6대조 할아버지였고, 그의 아버지 류안택은 삼사판관을 지냈고, 죽은 후에 영의정으로 추서된 분이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류관은 어려서부터 영리했고 마음씨도 착했다. 이 마음씨 착한 어린이거 후에 고려에서 조선 세종때까지 57년간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보살핀 하정 류관 어른이다.

그는 여섯 살 때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천자문이란 자주 쓰이는 한자 천자를 골라서 책으로 엮은 것이다. 천자문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슬기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담고 있는 책이다. 또 자연과 우주의 신비 등에 대한 것도 다루고 있다. 류관은 할아버지가 천자문을 따라 읽게 하자 먼저 다음 자를 읽었다. 하늘 천하면 땅 지하고, 가물 현하면 누를 황이라 했다. 글의 의미를 물어도 척척 대답했다. 인자측은은 조차불리라. 이 말의 뜻으 해석해 보아라. 어질고 인자하여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잠시라도 자신에게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할아버지는 이미 류관이 큰 인물이 될 줄 알았다.

할아버지는 류관에게 아침 저녁으로 글을 가르쳤다. 글자 뿐 아니라 사람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 세상의 이치 등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책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사람이 되는 길도 가르쳐 주고, 모르는 것도 알게 해준다. 남자로 태어나 큰 뜻을 펼치려면 많은 책을 읽어야 하느니라. 또 글이란 벼슬을 하기 위해서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니라.” 어린 류관은 할아버지의 말에 따라 부지런히 글을 읽었다. 그는 한번 보거나 들은 것은 좀체초 잊어버리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류관은 소학은 물론 논어, 맹자까지 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류관은 글만 부지런히 읽은 것이 아니었다. 모든 행동을 책에서 배운대로 실천에 옮겼다. 그러니 마음씨가 곧고 어질었으며, 행동 또한 바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류관을 보고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한번은 겨울에 거지 아이가 마을에 왔다. 개구쟁이들이 골려주었다. 거지 아이의 바가지를 빼앗아 발로 차서 두 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바가지는 아이가 밥을 얻어먹는 밥그릇이었다. 거지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류관은 몹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류관은 집으로 급히 들어와 광으로 갔다. 광 벽에 걸려있는 바가지 중에서 한 개를 벗개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마침 나들이 갔다 돌아오신 어머니와 마주쳤다. “웬 바가지냐?” “거지 아이에게 주려고 합니다.” “그래? 참으로 기특하구나.” 어머니는 하인을 불렀다. “관이가 신던 버선과 작아서 못 신게 된 신을 밖에 있는 거지 아이에게 가져다 주어라. 이 바가지도 함께.” 류관의 어머니는 빈 바가지만 주도록 하지 않고 밥을 담아주게 했다.

류관의 어머니는 마음씨가 너그럽고 인정이 많았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불쌍한 이웃이나 마을 사람들을 항상 돌보아 주었다. 류관의 아버지 또한 마음이 곧고 사리가 분명했다. 남이 주는 것은 한사코 받지 않으면서도 남에게 무엇이든지 잘 주었다.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거만하거나 낮은 지위에 있는 벼슬아치들을 깔보지 않았다. 오히려 아랫 사람이 보면 민망할 정도로 겸손하고 말과 행동이 무거웠다.

류관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한 양반의 가문이지만 생활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성격이 너무 곧아서 재물에는 통 관심이 없었을 뿐더라, 설령 재물이 있더라도 주위에 있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데 썼다. 그렇다고 먹고 살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류관의 학문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그러나 좀체로 과거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 동안 결혼도 했고, 나이도 20세가 넘었지만 오직 그는 학문에만 몰두할 뿐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학문이란 백성들이 편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자기 한 몸을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가 어렵고 백성이 괴로운 때일수록 올바른 벼슬아치가 필요한 것이다. 류씨 가문은 대대로 백성들의 기상이 있다. 결국 류관은 학문을 포기하고 과거를 봐서 벼슬을 했다.

이후 얼마후 류관은 성균시에 급제를 했우묘 26세때 진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처음으로 비서교감이란 벼슬길에 나섰다. 그후 류관은 고려 말에는 예의정랑, 전리정랑, 전교부령 등 많은 관직을 거쳐 1387년 42세때 봉산 군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류관은 봉산군수로 발령을 받자 옛날 어릴 때 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벼슬이란 한 가문이나 자기를 위한다는 생각보다는 먼저 백성들을 생각해야 하느니라.’

벼슬길에 오른지 거의 20년이지만 백성들을 직접 돌보는 목민관이 되자 류관의 마음은 설레었다. ‘어떻게 하면 이 고을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도록 할 수 있을까?’ 류관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먼저 백성들이 사는 모습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그래야만 그들을 보살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류관은 백성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허름한 옷으로 변장한 후 마을로 찾아갔다. 밭에서 일하는 노인을 보자 류관은 괭이를 달라고 해서 밭일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물집이 잡혔다. 류관이 한 나절이 넘게 밭일을 해주고 나자 저녁이 다 되었다. 노인뿐 아니라 그 동네 사람들이 거의 점심을 거른다는 말을 듣고 그냥 가려는 류관을 노인이 강권하여 저녁상을 내놓았다. 좁쌀에 산나물을 넣어 쑨 죽이었다. 노인은 아침과 저녁을 죽으로 때운다고 했다. 점심은 건너뛰고.

관가로 돌아온 류관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착하고 어진 백성들을 배불리 먹게 할 수 없을까?’ 좋은 방법이 좀체로 떠오르지 않았다. 이튿날 다른 마을을 찾아갔다. 거기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시냇물도 거의 말라 한쪽으로만 조금 흐르고 있었다. “비록 양이 적더라도 저 물을 모아 놓으면 배농사를 지을 때 잘 쓸 수 있을텐데…….” 류관은 혼자 중얼거리며 산을 둘러보았다. 산은 땔감으로 쓰기 위해 나무를 자꾸 베어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지는 건 산에 나무가 없기 때문이다. 산에 나무가 우거져 있으면 그런 일을 막을 수 있을텐데…….’ 이렇게 생각하던 류관의 머리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기쁨 마음으로 관가로 돌아와서 일을 시작했다.

류관은 먼저 관가의 창고에 쌓여있는 곡식을 풀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빌려 주었다. 그리고 자기는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사또, 죽을 드시면 아니 됩니다. 고을 사람들이 알면 비웃음을 사게 됩니다.” 뚱뚱한 아전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게 어찌 비웃음을 살 일이냐? 백성들은 굶고 있는데, 나만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이 욕먹는 일이지. 벼슬아치란 백성들의 위에 서서 호령하는 사람이 아니다. 백성들이 낸 세금으로 먹고 사는 백성들의 심부름꾼일 뿐이다.”

류관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사람에게는 약을 구해 주었다. 그리고 류관은 개울 곳곳에 둑을 쌓아 보를 만들게 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귀찮아 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 믿고 농사를 짓는 것으로 알고 있던 그들에게 보를 막아 물을 얻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류관이 보의 필요성을 자세히 설명해주자 농민들은 고개를 끄떡였다. “사또 어른은 굶주리는 백성들을 형제처럼 보살펴 주시는 분이 아닌가. 그분의 말은 믿어도 돼.” “되고 말고. 절대로 거짓말을 하실 분이 아니야.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그래서 결국 이웃 마을이 가물어서 고생할 때 봉산 고을은 보에 물이 가득했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없이 모내기를 할 수 있었고 보를 막았던 농부들은 새로 부임한 사또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이렇게 해서 풍년이 들자 농부들은 논이나 밭에서 수확한 햇곡식을 모아 고맙다는 뜻으로 관가로 가지고 갔다. “여러분들이 여름 내내 피땀 흘려 지은 곡식인데 왜 여기로 가져 왔소?” “아닙니다. 사또 어른. 모두가 사또 어른께서 보살펴 주신 덕택입니다. 저희들의 뜻이오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농부들은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아니오. 벼슬아치들이란 여러분들의 심부름꾼이오. 내가 여러분들을 도와 준 것은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사람으로 당연한 것이오. 그러니 이 곡식들을 모두 가져 가시오.” 류관은 농부들이 가져온 곡식들을 모두 되돌려 보냈다. 이쯤 되니 어떤 농부는 몰래 밤중에 문밖에 갖다 놓고 갔다. 이렇게 들어온 곡식은 굶주리거나 병든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류관은 이번에 농부들로 하여금 산에 나무를 심도록 했다. “나무를 베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산에 나무가 많아야 가뭄이 들지 않는 법이오. 나무를 한 그루 베면 반드시 세 그루씩 심도록 하시오. 그래야만 가뭄과 홍수를 막을 수 있소. 벌거숭이 산을 그대로 둔다면 끝내 가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 류관의 말을 듣자 농부들은 산에 나무 심는 일에 앞을 다투어 나섰다. 노인과 부녀자는 물론 어린 아이들까지 산에 가 나무를 심었다. 이제는 누가 억지로 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또가 말만 하면 나머지 일은 백성들이 알아서 했다.

류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길을 넓히고, 다리도 놓게 했다. 산기슭을 일구어 밭도 만들고, 밭을 논으로 만들게 하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봉산 고을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류관은 나이 64세에 자청하여 길주도 영길 목사로 갔을 때 북쪽 오랑캐를 무찌르기도 했다. 64세면 환갑이 지난 노인이지만 류관에게는 젊은이 못지 않은 용맹과 지략이 있었다. 변방이었기 때문에 북쪽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백성들을 괴롭혔다. 조선이 개국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오랑캐들의 침입을 몹시 걱정했다. 그러나 한양에서 너무 먼 곳이었기 때문에 누구 하나 선뜻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한 때, 류관은 자청해서 영길 목사를 택했다. 북쪽 오랑캐들은 국경을 침략하여 곡식과 가축을 빼앗아 갔다. 뿐만 아니라, 부녀자들을 잡아갔으며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기도 했다. 나라에서도 노력을 많이 했지만 워낙 말을 잘 타는 오랑캐들이라 좀체로 잡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하면 오랑캐들을 무찔러 백성들을 편안히 살 수 있게 하나?’ 류관은 목사로 부임하지, 그들이 자주 쳐들어오는 곳의 지형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곤 오랑캐들이 있는 곳으로 첩보병을 보냈다. 사흘째 되는 날 첩보명이 돌아와서 다음 날 자정쯤에 쳐들어올 것 같다고 보고 했다. 류관은 군사들을 시켜 오랑캐들이 쳐들어온다는 쪽에 함정을 설치하고 군대를 잠복시켰다. 오랑캐들은 군사들에게 쫓기다가 우리 군사들이 쳐놓은 밧줄에 걸려 말들이 넘어지자 우리 군사들의 공격에 우두머리도 죽고 몇 명 남지 않은 오랑캐들은 허겁지겁 두만강을 건너 달아났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오랑캐들은 좀체로 우리나라 국경을 넘보지 못했다. 태종은 많은 선물과 함께 사람을 보내어 류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도읍지를 정할 때였다. 이성계는 오래 전부터 계룡산 근처를 도읍지로 삼으려고 했다. 많은 신하들도 눈치만 살피며 바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 류관이 상소를 올렸다. “태조 대왕께서 계룡산 부근을 도읍지로 삼으심은 옳지 않으시온 줄 아옵니다. 도읍지라 함은, 첫째는 땅이 넓고 편편해야 합니다. 그래야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배가 다닐 수 있는 강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거리가 어디든지 비슷한 나라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백성들이 나라의 혜택을 고루 입을 수 있습니다. 이와같은 조건을 갖춘 한양이 도읍지로 적당한 줄로 아뢰옵니다.” 이 상소를 읽고 이성계는 류관을 치하하며 그의 의견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류관은 여러 가지 벼슬을 두루 거쳤다. 1396년 51세 때에는 문과 고시관으로 많은 인재를 직접 뽑기도 했다. 55세 때에는 다시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직접 백성들을 돌보기도 했다. 또 60세에는 전라도 관찰사로, 62세 때는 개성 유후를 지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북쪽 국경 지대인 길주도 영길 목사로 자청한 것도 64세 때였다. 그는 편안한 자리보다는 언제나 일선에 나가 직접 백성들과 대하는 관직을 좋아했던 것이다. 말로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고 듣는 것을 택한 것이다.

류관이 세종 6년 1424년에 우의정에 올랐을 때 일이다. 하루는 중국 당나라 때의 한유라는 사람이 쓴 책을 읽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라 세종대왕께 글을 올렸다.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위해 일하려면 먼저 그들의 마음을 알고 그들과 가까워져야 합니다. 3월 3일과 9월 9일을 명절로 정해 벼슬아치들과 백성들이 한테 어울려 즐겁게 놀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기 바랍니다.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친다면 더욱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옵니다.” 세종대왕은 류관의 큰 뜻을 알고 즉시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는 높은 자리보다는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백성들이 편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나깨나 백성들만 생각했다. 재물을 탐하거나, 재물이 좋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류관은 평생을 비가 새는 초가집에서 베옷에 짚신으로 살았다. 그는 어디를 갈 때도 좀처럼 말이나 가마를 타지 않았다. 류관의 집은 홍인문(지금 동대문) 밖 지금의 숭인동에 있었는데 금륜사에서 일하게 되어 먼 길을 가야 하는데도 가마를 타지 않고 걸어서 다녔다. 그는 길을 갈 때면 즐거운 마음으로 걸었다. “쇠붙이로 만든 물건은 쓰지 않으면 쉬이 녹이 슨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다.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관절이 굳어 몸을 못 쓰게 된다.” 시조를 읖기도 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길에서 선비를 만나면 반갑게 이야기도 했다. 걸어가던 사람들은 류관 정승을 알아보고 절을 했다. 그러면 류관도 정중하게 맞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상대가 선비이든, 장사꾼이든 가리지 않았다.

또 사람들로부터 어느 집에 요즘 어려움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밤에 아무도 모르게 하인을 시켜 그 집에 곡식이나 다른 도움이 될만한 것을 가져다 놓도록 했다. 그렇지만 그런 소문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도록 하인에게 일렀다. 그러니 도움을 받은 사람은 틀림없이 류관 대감이 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했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별러서 인사라도 하면, “그 일은 난 모르는 일이오. 아마 다른 어떤 훌륭한 분이 한 것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오.”하고 다시는 말도 못하도록 시치미를 떼었기 때문이다.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4대문 안에 있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류관은 우의정이라는 높은 벼슬을 하면서도 동대문 밖에 있는 낡고 작은 오두막집에서 살았다. 누가 보아도 정승의 집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집에는 돌담은커녕 수숫대로 만든 울타리조차 없었다. 개와 닭들이 왔다가 텃밭을 헤집기도 하고, 마당에 똥오줌을 누기도 했다. 마당쇠는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울타리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대감 마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서 선뜻 만들 수가 없었다. 한번은 이웃집 닭들이 갓 뿌려 놓은 텃밭의 상추 씨앗을 모두 쪼아 먹었다. 그 날따라 개들도 몰려와 유난히 극성을 떨었다. “안 되겠어. 울타리를 만들어야지. 온 동네 닭과 개의 놀이터가 되니……. 그리고 우의정 대감의 집에 울타리가 없어서야 되겠어? 아무리 오두막집이라지만 울타리라도 치면 한결 아늑할 거야.”

마당쇠는 그 날부터 지게를 지고 산으로 가서 싸리를 한 짐씩 해 왔다. 며칠이 되자 싸리는 울타리를 치고도 남을 만큼 되었다. 마당쇠는 대감 마님의 눈을 피해 칡덩굴로 싸리를 엮었다. 싸리바자는 날이 갈수록 점점 길어졌다. 마당쇠는 싸리바자를 다 엮자 대감 마님이 집을 비우기를 기다렸다. 대감 마님이 울타리를 치는 것을 보면 꾸중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10일이 지나자 류관 대감이 먼 곳에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다. 그날 마당쇠가 울타리를 치자 아니나 다를까 대감은 얼굴에 못마땅한 빛을 지었다. “이웃집 개와 닭이 자꾸 드나들어서 그랬습니다.” “그게 무어 그리 대수로운 일이냐? 비록 짐승이긴 하지만 그것들도 산 목숨인데 함께 살아야지. 사람이 사는 집에는 사람이건 짐승이건 많이 드나들어야 좋으니라. 또 울타리란 이웃과 정을 가로막는 것이니 없애도록 해라.” 결국 애써 쳤던 울타리를 치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루는 겨울에 공조판서가 류관 대감의 집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날 따라 눈보라가 치며,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공조 판서는 눈보라 사이로 류관 대감의 집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담도 없는 오막살이가 금방 눈보라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정말로 너무나 깨끗하게 사시는 분이야. 우리도 그분의 뜻을 받들어 깨끗한 생활을 해야 하는데 …….” 이튿날 공조판서는 어제 본 일을 세종대왕에게 자세히 말씀드렸다. “대왕마마, 정말로 우의정 대감의 뜻은 그 누구도 따를 자가 없사옵니다.” “나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워낙 류 정승의 생각이 깊어서 한사코 싫다 하니 ……. 공판이 알아서 류 정승이 모르도록 담을 쳐주오.”

공조판서는 선공감(대궐이나 나라에서 새로운 건축물을 짓거나 수리하는 곳)의 우두머리를 불렀다. “눈보라가 치는 날 밤을 택하여 우상 대감의 집에 담을 치도록 하시오. 특별히 주의할 것은 절대로 우상 대감에게 들키지 않도록 하시오.”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면 담을 쌓는 것을 모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공감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하늘부터 쳐다보았다. 그러나 눈보라는커녕 구름조차 잘 끼지 않았다. 어쩌다 눈발이 날리다가도 해가 질 무렵이면 그치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덧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다. “겨울이 지났으니 이젠 틀렸구나.”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선공감 사람들은 밤이 깊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달구지에 돌과 장비를 잔뜩 싣고 류 정승 집으로 갔다. 숨소리조차 죽이며 서둘러 담을 쌓았는데 한번은 쌓은 담이 ‘와르르’하고 무너졌다. 담을 쌓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방문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 소리를 들었는지 방문이 열렸다. 바로 그때 번개가 치며 ‘꽈르릉’하고 천둥이 쳤다. 그러자 방문이 닫혔다. 아마 조금 전에 난 소리를 천둥소리로 안 모양이었다. 담쌓는 일은 새벽녘에야 가까스로 끝났다. 선공감 사람들이 기뻐하며 막 돌아가려 할 때 짐을 싣고 왔던 말이 ‘흐응응’하고 큰 소리로 울었다. 그와 동시에 방문이 열리고, 류관 대금의 모습이 나타났다. 상감의 명령 때문이라고 하자 어쩔 수 없이 보냈다.

그러나 류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마을의 다른 집에는 울타리도 없는데 자기 집에만 돌담을 쌓았으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또 담으로 말미암아 이웃들과 멀어진 것 같기도 해 서운한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항상 대문만은 활짝 열어놓도록 했다. 세종대왕은 류관에게 담은 번듯한데 집이 오두막이라 어울이지 않는다고 새로운 집을 지어 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좀처럼 화를 낼 줄 모르는 류관이 공조판서에게 얼굴을 붉히며 항의했다. “집을 새로 짓는데는 많은 돈과 물자가 필요할텐데, 그런 것들이 모두 어디서 나오는 것이오? 모두가 백성들이 낸 세금이 아니오? 세금이란 벼슬아치들이 잘 먹고 잘 살라고 내는 것이 아니오. 모든 세금은 백성들을 위해서 쓰여지는 것이 마땅치 않소? 공판, 좋은 집이건 오두막집이건 하룻밤을 자는데는 똑같은 것이오. 벼슬아치란 자기 등이 따습고 배가 부르면, 모든 백성들도 자기처럼 살고 있는 것으로 알기 쉽소. 조금이라도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런 일은 절대로 하지 마시오. 그리고 자꾸 그러면 내가 상감께 말씀드리겠소.”

그렇게 말하면서도 류관은 세종대왕의 배려에 감동했다. ‘정말로 상감의 뜻이 따사롭구나. 정말로 보기 드문 성군이시다. 온 백성과 벼슬아치들을 그토록 자상하게 보살펴 주시니……. 성군의 뜻을 받들어 내 한 평생을 백성을 위하는 일에 바치리라.’

류관의 오두막집 지붕은 이엉이 삭아 여기저기 골이 패어 비가 오면 빗물이 떨어졌다. 장마철이 되자 마당쇠는 걱정스러웠다. “대감 마님, 지붕이 썩어서 흘러내릴 것 같습니다. 지붕을 새 이엉으로 갈아입히는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집들은 어떠냐?” “대개가 우리 집의 지붕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로 두어라. 그런 것을 가지고 괜히 북새를 떨 것이 없느니라.”

8월이 되어 태풍이 불고 장대비가 내렸다. 빗물은 썩은 지불을 뚫고 방 안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씩 떨어지던 것이 빗줄기가 세어지자 여기저기에서 새기 시작했다. 몇 군데 그릇을 놓았지만 당할 수가 없었다. 류관 대감의 머리에도 빗물이 떨어졌다. 그러자 류관은 일산(큰 양산)을 꺼냈다. 옛날 과거에 합격했을 때 나라에서 하사품으로 내린 것이었다. “부인도 이리 들어오시오.”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손으로 훔치던 부인도 일산으로 들어왔다. “다른 집에도 비가 샐텐데……. 일산이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비를 피할까?” 류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류관 대감은 세종 3년 76세 때 청백리로 뽑혔다. 청백리게 뽑힌다는 것은 그 어떤 벼슬에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다. 청백리 관리가 있다는 것은 나라에는 영광이요, 가문이나 개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지금처럼 먹고 살기가 어렵지 않을 때도 청백리에 뽑힌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당시처럼 모든 사람이 먹고 살기가 힘들고, 물자가 귀할 때 청렴 결백하게 산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조선 명종 때 판서를 지냈고 <지봉유설>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이수광은 유달리 류관 대감을 우러러 받들었다. 이수광은 류관의 깨끗한 삶을 본받기 위해, 외가의 5대조 되는 류관의 집터에 집을 짓고 ‘비우당’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비우당’이란 이름은 ‘비가 집을 덮는다’는 뜻이다.

류관은 거듭 벼슬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세종대왕에게 간청하여 마침내 세종 9년 그의 나이 82세때 우의정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그가 관직에 나간지 57년만의 일이었다. 류관이 정승에서 물러나자 세종대왕은 한쪽 팔을 잃는 것보다 더 허전했다. 그래서 관직을 그만둔 그를 열흘이 멀다고 불러 나라 일을 의논했다.

류관 정승은 벼슬 자리에서 물러난 82세 이후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호미를 들고 채소밭에 가서 김을 매고, 벌레도 잡아주었다. 그와 같은 일은 그가 정승으로 있을 때에도 하던 일이었다. 세종대왕은 그가 벼슬 자리에 있는 동안에도 그를 위해 자주 어찬(음식이 내리는 음식)과 하사품을 내렸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내린 어찬과 하사품도 하루를 넘기기 힘들었다. 어찬을 내리시면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열었고, 하사품도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언제나 무엇이나 가리지 않고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류관의 성품을 잘 아는 세종대왕인지라 더욱 자주 하사품을 내렸다.

한번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대궐에서 일찍 퇴청한 후 채소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 새로 이사온 농부가 깜짝 놀라며 대신 밭을 가꾸어 주겠다고 하며 류관의 손에서 괭이를 빼앗으려고 했다. “괜찮소. 벼슬을 하는 사람이 괭이를 쥐고 일을 한다고, 그 손이 썩라도 하오? 밥을 먹고 산다면 누구라도 논이나 밭에서 일하는 법도 알아야 할 것이오.”

류관은 높은 벼슬아치가 방문해도 그 채소를 뽑아 대접했다. 류관의 집에는 높은 벼슬 자리에 있는 사람부터 이웃에 사는 농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러나 류관을 비롯한 식구들 모두가 누가 오든지 반갑게 맞이했다. 류관은 항상 식구들에게 말했다. “사람의 집에 사람이 찾아오지 않으면, 그 집은 무언가 잘못된 집이다. 있는 그대로를 대접하는데 반갑지 않은 손님이 없느니라.” 높은 벼슬아치가 오면 푸성귀에 막걸리를 대접하며 이렇게 말했다. “음식이란 무엇이든지 맛있게 먹어서 시장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오. 벼슬아치들은 내가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백성들이 그만큼 굶주리거나 어렵게 살게 된다는 것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

류관은 여든 둘이 넘은 나이인데도 낮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글을 가르쳤다. 누가 걱정이라도 하면 류관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기운을 잃게 되는 법이오. 사람이란 살아있는 동안은 무엇이든지 열심히 해야 되는 법이오.” 류관은 나이가 무척 많았지만 젊은이 못지 않게 열심히 살았다. 그에게 글을 배우기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마다하지 않았다. 양반의 자식이건 평민의 아이건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천한 신분의 아이도 배오고 싶어하면 받아들였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공부하고 싶어서 류관의 집 앞에서 서성이다 글방 옆에 기어가 글 읽는 소리를 들으려 한 일이 있었다. 그때 글 읽기를 끝낸 아이들이 방문을 열고 우르르 나오자 그 아이는 큰 잘못이라도 저지르려다 들킨 것처럼 골목으로 달아났다. 글방 아이들에게 붙잡혀 사연을 물은즉 재너머 산지기의 아들인데 글을 배우고 싶어 왔다는 것이다. 류관은 이 아이도 받아주었다. “글은 좋은 집안의 아이들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밥을 먹듯이, 글 또한 누구나 배울 수 있다. 아니, 꼭 배워야 하는 것이다. 글이란 벼슬을 하기 위해서 배워서는 안 되느니라. 글이란 모르는 것을 알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 배워야 하느니라.”

세종대왕은 류관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류관의 학문은 정․주에 미치고, 재주가 반고와 사마천보다 나으며, 마음가짐이 바르고 생활이 검소하여 온 나라의 큰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정․주란 송나라 때의 정호, 정이, 주희를 일컫는데, 모두 이름난 성리학자였다. 성리학이란 세상의 참 모습과 사람의 마음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학문이다. 반고는 <한서>, 사마천은 <사기열전>이라는 좋은 책을 쓴 사람이다. 세종대왕이 이렇게 칭찬했으니 그의 학문이 얼마나 깊었고, 인격이 훌륭했는지 알고도 남는다.

한평생을 이토록 높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웃과 백성들에게 깊은 사랑을 베풀며 살아온 류관은 1433년 5월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대왕은 풍년을 축하는 잔치를 경회루에서 벌이다가 류관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행사를 맡아보던 지신사 안승서는 예조에서 그 일에 대한 글이 올라오지 않았으니 문상을 미루도록 했으나 세종대왕은 빨리 잔치를 끝내고 문상을 갔다. 세종대왕은 흰옷으로 갈아입고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류관의 집 근처에 있는 홍인문까지 납시었다. 세종대왕은 먹는 것도 삼갔다. 고기나 맛있는 음식을 멀리하고, 채소나 산나물로 식사를 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세종대왕은 금천교에 장막을 치게 하고는 많은 대신들과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조정의 일과 백성들의 상업을 3일 동안이나 중지시켰다. 세종대왕은 그를 온 백성의 스승으로 여겼다. 류관 대감이 살았던 동대문 숭인동에 그의 호를 딴 ‘하정로’란 길이 있다. 류관은 하정공으로 불렸다. 그의 22대 존 학암공의 16대손인 호담(浩倓)이 이상의 내용을 책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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