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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물연구

백악관과 빌리그래함 A

작성자신동|작성시간10.12.17|조회수165 목록 댓글 0

낸시 깁스·마이클 더피 지음
CLC

서론
사자들과 양

아마도 모든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얻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며 앞으로 삶을 생각해야 할 장소로 교회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빌리의 삶은 다른 사람과 달랐다. 그의 삶은 현대 아니 시대를 넘어 그 어떤 사람보다도 충만한 삶이었을 것이다. 빌리 그래함은 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장소에서, 더 많은 사람에게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말씀을 전했다. 그는 50년 넘게 417번의 복음집회를 통해 185개국에서 2억 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사도바울의 모범을 따라 복음을 전한 빌리 선데이나 드와이트 L. 무디  또는 그 어느 복음전도자도 빌리 그래함만큼 그렇게 복음을 넓게 확장하지 못했다. 빌리 그래함은 무르익은 때를 만난 사람처럼 복음의 새로운 역사를 쓴 사람이었으며 그리스도를 위한 세계대사로서 그와 비교할만한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

빌리 그래함은 불빛이 약한 거실에 앉아 있었고 옆에는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방문한 손님인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병세가 심했다. 그는 파킨슨병과 전립선암을 앓고 있었고 뇌에서 남은 피를 빼내기 위해 인공혈관을 설치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는 무서운 고통에 시달려 왔으며 스스로 자신을 낙지와 같은 신세라고 표현했다. 무거운 감정이 그를 감싸며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손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장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때로 제한했다. 그 시간은 일반적으로 한낮이었다. 수년전 동맥경련이 일어나 눈에 영향을 준 이후로 시력도 급속히 약화되었다.

제1장 소명

1949년 9월 23일

백악관은 “최근 몇 주 전 소련에서 핵폭발 실험을 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발표했다.
순진무구한 기사들은 신문에서 사라지고, 「타임」은 “소련의 핵 실험은 전국을 삽시간에 공포의 충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전 세계가 1945년의 사건을 겪은 이후로 미국 국민도 이제 천둥소리나 해일의 공포처럼 다가와 순식간 모든 것을 파괴하는 핵의 위협 하에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일부 의회지도자들은 워싱턴 정부 관료를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퇴역군인들은 “옛날 군복을 다시 꺼내 입는 것이 좋겠어”라고 비꼬는 투로 말했다. 국방부장관 루이스 존슨은 신문들에게 경제공황 등의 선동적 기사를 내지 말라고 경고했다. 허스트(<1863-1951> 미국의 신문왕 - 역주)의 신문 「뉴욕저널-아메리칸」은 원폭으로 인해 완전히 죽음의 도시로 변한 맨해튼의 가상 모습을 신문 첫 페이지로 장식했다.

당시 소련은 핵폭탄을 갖게 되었다. 한 주 후인 10월 1일 전 세계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공산주의 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역사에 첫 걸음을 내딛었다. 이 사건은 미국을 마비시켰고 일순간 충격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미국이 정신적 충격에 빠진 것처럼 빌리 그래함의 마음도 혼돈 그 자체였다. 당시 31세의 빌리 그래함은 그해 아주 고통스러운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휘튼대학을 졸업한 후 5년간 대부분의 시간을 개인적 부흥운동과 청년들을 위한 복음집회로 전국을 동분서주하며 보냈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높아졌고 사역은 확장되었다. 그러나 절친한 일부 동료들이 그의 신앙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해 유능한 친구이자 동역자인 찰스 템플턴이 공동사역을 중단하고 지성적 신앙을 추구하기 위해 프린스턴신학교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빌리 그래함을 자기의 방향으로 끌어당기려고 노력했다.

빌리 그래함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선포할 때 나는 능력을 경험해왔어. 내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또는 ‘성경이 말하기를’하고 시작하면 성령이 나를 사용하셨어, 그때에 열매가 있었고 청중은 아멘으로 반응을 하지. 너나 나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들이 수세기동안 그런 문제를 가지고 논쟁해 왔어. 나는 시간도 없고 모든 신학적 논쟁을 검사할 수 있는 지적 능력도 지성도 없었어. 그래서 나는 최종적으로 결정했어. 질문은 더는 하지 말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말이야”라고 설명했다.

신학적인 괴리로 방황하던 템플턴은 집회장소로 찾아와 “빌리, 네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50년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야”라고 빌리 그래함을 책망했다. 템플턴은 “사람들은 더는 성경을 너처럼 영감의 책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네 신앙은 너무나 단순하고 너의 말은 시대에 뒤떨어졌어. 만약 성공적인 사역을 원하면 새로운 말을 배워야만 해”라고 말했다.

빌리 그래함의 인생과 사역에 결정적 전기가 되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내용은 로스앤젤레스 수양관 땅 바닥에 설치된 기념패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잠이 오지 않고 마음의 번뇌가 심할 때 늘 그랬던 것처럼 수양관 근처의 숲으로 산책하며 바람을 씌었다. 그는 달빛이 비추는 밤에 나무 그루터기 위에 앉아 성경을 읽고 기도를 했다. 성경 안에는 그가 이해할 수 없고, 혼동되고, 반박하고 싶고, 불가사의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마침내 그는 성령이 자신을 해방시키는 체험을 하고 결심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성경을 당신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 믿음으로.”

천막집회

빌리 그래함도 미국 안에 있는 스파이에 대하여 경고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이 가장 위험한 적에게서 미국을 보호할 수 있다고 설교했다. 그는 “서구 문명과 그것의 열매는 성경에 기초해 있습니다···반대로 공산주의는 하나님을 반대하며 그리스도와 성경 그리고 모든 종교를 대적합니다. 공산주의의 정신, 목표 그리고 동기는 사탄에서 기인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 전도집회는 예정된 3주가 아니라 8주간 지속되었다. 제인 러셀, 진 어츄리와 같은 스타를 포함하여 약 35,000명이 참석했다. 아직 회심을 경험하지 않은 무비스타가 퉁명스럽게 빌리 그래함에게 “빌리, 당신은 흥행성에서 결코 우리와 경쟁이 되지 않아요. 우리는 비결을 알아요. 당신이 무대에 올라 설교하는 매일 밤 내가 함께 있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희망이 시작

시간이 흘러 어떻게 무명의 설교자를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전도자로 알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빌리 그래함은 두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답했다. 한 사람은 허스트였고 다른 사람은 「타임」의 설립자이고 가장 영향력 있는 출판인이었던 헨리 루스였다. 허스트와 루스는 좋은 사이가 아니었으나 - 미디어의 황제자리를 놓고 다투는 사람들이었다 -그 둘은 빌리 그래함을 매우 좋아했다.

빌리 그래함은 변화의 흐름과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적응력을 미리 내다보는 직관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사진의 능력을 실감했다. 빌리 그래함은 1946년 폐허된 유럽으로 떠나기 위해 시카고의 오하레 공항에서의 일을 회상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환송하기 위해 모였고 수십 명의 사진기자들도 함께 했다. 그들은 공항 아스팔트에 무릎을 꿇고 이번 선교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였고 사진기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그들을 찍었다. 그들은 천사들의 도움을 찾으며 “여러분, 계속 기도합시다. 기도가 전부입니다. 계속 하십시오, 그리고 한 번 더 기도하십시오” 하면서 서로 독려했다. 사진기자들은 이것을 친절하게 사진으로 찍어 세상에 알렸다. 템플턴은 “그 사진에서 빌리와 내가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라고 회상했다.

루스는 빌리 그래함을 가장 신경 쓰이게 하는 대상이 귀빈 청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빌리 그래함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하여 준비한 자신의 설교가 그들을 당황케 할 수도 있어서 일부 원고 내용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면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걱정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은 권력자들에게 호감을 얻기 위하여 적당히 설교하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자기에게 떨어질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빌리 그래함이 준비한 대로 설교를 선포했고 루스는 매우 당황했다.

빌리 그래함은 루스와 만난 것이 얼마나 영예로운 일이었는지 그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 빌리 그래함은 자신이 다음 달 워싱턴 D.C.의 상원개원식에 기도 인도자로 청빙을 받았다는 것과 그곳으로 전도사역팀을 데리고 오라고 촉구하는 상원의원들의 명단을 적었다. 빌리 그래함은 루스에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은 일의 발단이 될 것입니다. 만일 워싱턴 D.C.가 영적 부흥을 경험하고 국가 지도자들이 우리가 당면한 딜레마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돌아온다면 역사의 방향은 달라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전도집회의 희망은 이제 시작했다. 그의 전략은 이런 것이었다. 즉,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심령을 먼저 변화시키고 그다음 그들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급진사회개혁주의자들의 노력은 곧 좌절될 것이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이 헨리 루스에게 전달해준 복음적 신앙은 결코 시들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목표는 “워싱턴 행정부와 국회의사당의 언덕에 그리스도를 심으라. 그러면 국가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될 것 이다”이었다.

제2장 해리 트루만과 빌리 그래함

트루만은 너무나 겸손하여 자신의 대통령직을 “하나님의 선택”이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기작가 데이빗 맥컬로우가 쓴 바에 의하면 트루만의 신앙은 예기치 않던 권력자의 죽음과는 관계없이 순수한 것이었다. 루스벨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1945년 4윌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자리에서 대법관 헬렌 스톤은 백악관 관리인의 책상에서 꺼내온 값싼 기드온 성경을 사용했다. 트루만은 취임식이 끝났을 때 그 조그만 성경 앞으로 다가가 성경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예상과는 달리 대통령 취임 초기 국정운영은 순조로웠다. 트루만은 자신의 일기에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신다고 믿었다”라고 기록했다. 트루만은 자주 백악관 밖 라파예트 공원을 가로질러 가면 있는 세인트존 교회에 참석해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뒷자석에 앉아 예배드렸다.

집회 진행위원회 이제 빌리 그래함이 대통령에게 전보를 보내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었다. 역사적인 전보의 내용은 “미국적 삶의 양식은 무신적 세력들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으며 또한 심각한 도덕 불감증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는 조상들이 돈에 새겨놓았던 하나님에 대한 그 신앙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대통령께서 직접 국민에게 기도와 회개를 촉구할 것을 요청합니다”였다. 미국은 재부홍의 기로에 서 있었다. 아마도 대통령들의 후원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빌리 그래함은 집회 때마다 위대한 부흥의 불길이 일 것이라고 셀 수 없이 외쳤다. 1950년에는 부흥의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계대전 이후 인간에게 안정을 찾으려고 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모든 교파의 교회들은 너나없이 부흥을 경험했으며, 성경의 판매량은 1947년과 1952년 사이에 배로 증가하였고, 신학교들은 차고 넘쳤으며, 새로운 교회들이 도시 근교를 따라 세워졌다. 빌리 그래함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보스턴에 있는 AP통신기자에게 “내가 원하는 것은 약간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단지 30분 동안만 트루만의 귀에 대고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 집무자리에서의 만남

평화를 위한 트루만의 노력과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시점에 운명의 장난처럼 면담이 성사되었다. 그해 6월 25일 북한의 군대가 38선을 넘어 남한을 공격해 들어갔다. 트루만은 공산주의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는데, 공산주의는 마치 미국이 자신들의 침략에 무방비 상태인 것을 보여주려는 듯이 아시아에서 전쟁을 확대해나갔다. 북한의 공격보고를 들은 날은 독립기념일이어서 트루만은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딸 마가렛이 “아버지는 그 보고를 들은 순간부터 3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대해 두려워하였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미국 국민은 일반적으로 강력한 대응을 선호했다. 빌리 그래함의 부인 룻은 그녀의 아버지가 중국 선교사로 봉사하였을 때 몇 년간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빌리 그래함은 자신의 의견을 제안했다. 곧 대통령을 만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빌리 그래함은 한국전쟁을 영적인 전쟁으로 여기고 트루만에게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위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의 정체를 밝히는데 강력히 대처해야 합니다. 남한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인구당 크리스천의 비율이 높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라는 전보를 보냈다. 전보에는 “북서부학교연합회 의장”이 아닌 “전도자 빌리 그래함”이라고 사인되었다.
빌리 그래함은 직관적으로 사람들의 불안감을 간파했다. 전쟁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일용품, 나일론 제품, 비누, 타이어, 세탁기, 심지어 화장지까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유엔의 지지결의를 받아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을 때, 트루만은 이것이 대통령 직무 중 가장 어려웠던 심지어 히로시마 원폭사건보다 더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용감무쌍하지만 경험은 미숙한 소규모의 미군 부대들이 증원부대가 오기까지 북한군을 저지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 짧은 시간에 당한 살육의 피해는 미국 전사상 가장 참혹한 것 중의 하나였다. 트루만은 미군의 참패를 지금까지 수행된 전투 중 가장 영웅적인 것의 하나라고 위로했다. 이 전쟁은 적극적으로 수행되어야 했지만 미국인들이 익히 경험했던 그런 방식의 전쟁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의 압력요인들로 인해 7월 14일의 역사적인 각료회의가 열렸다. 냉전시대 청사진을 조정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 68차 회의의 권고를 받아들여 트루만은 의회에 긴급 전비 100억불을 이미 요청했다. 당시 한 해의 국방예산은 130억불 정도였다. 그러나 그해가 지나가기도 전에 이미 전비 지출은 500억불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전쟁수행에 박차를 가해 그해 늦여름, 무장병력의 수를 300만으로 두 배로 늘릴 것을 요청했다. 이날 각료회의는 앞으로 다가올 수십 년 미국의 군사정책의 방향타를 알리는 군비경쟁을 결정지은 것이었다.

트루만은 온유하고 지성적인 모습을 가진 반면, 빌리 그래함은 180cm의 키에 야성적인 멋을 가졌고 보이지 않는 세계, 곧 영원한 왕국에 관해 설교할 때 그의 목소리는 다양한 음계를 가진 악기처럼 폭발적인 힘을 뿜어내었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었다. 빌리 그래함은 트루만에게 사람들이 거의 히스테리 증세를 보일 정도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을 안정시켜 한다”라고 재촉했다. 빌리 그래함은 또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 한” 우리는 이 위기를 넘어설 수 없다고 했다.
15분 정도가 지났을 때 빌리 그래함은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는 당시에 “나는 결코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트루만에게 그의 개인적 신앙에 관해 물어 본 후에 두려웠습니다”라고 회상했다.
빌리 그래함이 “대통령 각하, 당신의 신앙관과 좌우명에 대해 말해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트루만은 “글쎄요, 나는 산상수훈과 황금률에 따라 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수십 년이 흐른 뒤 빌리 그래함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라고 대통령에게 말한 것이 부끄러웠다고 회고했다. 빌리 그래함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상에서 죽음에 대한 신앙이라고 설명해 나갔다. 대통령은 일어섰다. 빌리 그래함은 시간이 이미 지나버린 것을 알아 차렸다- “우리는 20분만 시간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역시 일어섰다.
트루만이 문에서 우리를 배웅하고자 했을 때 빌리 그래함은 손을 내밀며 “대통령 각하, 제가 기도해도 될까요?”라고 묻자
트루만은 “글쎄요,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라고 대답했다.
벌리 그래함은 자신의 긴 팔로 트루만의 어깨를 감싸고 몸을 밀착시켜 그를 위하여 함께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우리가 여기 함께 있게 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여기 이사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는 이에게 당신이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이 혼돈스러운 시대에 대통령에게 지혜와 힘과 용기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나라를 긍휼히 여기시며 만약 당신의 뜻이라면 우리의 군대에게 승리를 주시옵소서. 아멘.”

빌리 그래함은 트두만과는 달리 그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비록 이것에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는 없지만 말이다. 사흘 후에 빌리 그래함은 사진을 찾기 위하여 매튜 코넬리에게 “저는 그것을 내 집무실에 흔쾌히 걸고 싶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7월 31일에는 트루만에게 감사를 표하고 자신을 일종의 정치적 탄광 카나리아(탄광에서 독가스 유출 여부를 알기 위하여 카나리아 새를 먼저 들여보내는 것을 비유함 - 역주)로 여겨 달라는 제안을 담은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대통령에게 다가가 진정으로 그를 도우려고 하는 빌리 그래함의 최초의 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편지는 그가 바라던 바와 같이 대통령과 관계를 맺는 데 실마리를 제공했다. 빌리 그래함은 두 사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공적 동맹을 제안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빌리 그래함 자신의 사역을 통해 대통령이 듣기 원하는 여론과 그것에 대한 특별한 통찰력을 제공하고자 하는 사적 제안이었다.

그는 국가 기도의 날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영적 조언을 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오직 공산주의와 대결을 위한 전 국민의 긴급 동원령과 정치적 지침들만이 난무했다. 빌리 그래함은 “미국 국민은 군사적인 안전이 보장된다면 세금을 많이 내는 것에 개의치 않습니다”라고 트루만을 확인했다.
빌리 그래함은 후임 대통령들에게도 하게 될 제안을 트루만에게 했다. 그는 마치 국민의 정서와 의식을 조사하는 여론조사위원처럼 행동했다. 빌리 그래함은 “저는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저의 신뢰는 며칠 전 당신과의 대화를 통해 확고해 졌습니다. 만약 제가 당신을 개인적으로 도울 수 있다거나 국가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다고 판단이 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저는 대통령의 정치적 결정에 충실히 따를 것이며 국민에게 설교할 때는 언제든지 당신을 위해 조언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빌리 그래함이 대통령의 관심을 얻으려고 줄기차게 노력했지만 트루만은 결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대통령들은 빌리 그래함에게 트루만과 동일한 저항을 보여주지 않았다.
  
제3장 트루만의 거절

1950년 7월 빌리 그래함과 만남 이후, 수개월 동안 트루만에게는 대통령직 수행이 거친 야생마를 조련하는 기간과도 같았다. 맥아더의 인천상륙 작전은 전쟁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260,000명의 중공군의 반격으로 한국전의 상황이 반전했다. 맥아더는 중국의 해상을 봉쇄하고 만주와 중국본토에 대한 핵 공격을 원하고 있었다. 「라이프」는 “세계 3차 대전이 임박했다"라고 경고했다.

캔자스 엠포리아의 감리교 은퇴 목사인 에드워드 린들리는 이 어려운 시기에 “젊고 담대한 침례교 목사”인 빌리 그래함을 가까이 하면 분명 용기를 얻게 될 것이라고 트루만에게 편지를 썼다. 빌리 그래함은 미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미국의 미래를 확신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린들리는 “당신의 ‘대통령 긴급교서’에 빌리 그래함의 제안을 수용할 것을 제안합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미 대통령들에게 빌리 그래함을 고문이나 위원회의 장, 장관, 대사, 대법관 그리고 두 세 차례나 있었던 미국의 부통령직을 맡기라는 수많은 추천서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편지였다.
  
12월에 빌리 그래함은 6주간의 애틀랜타 전도집회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자신의 설교 대부분을 한국전쟁을 언급하는데 할애했다. 그는 미 국무부가 극동문제에 관하여 현명한 사람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현명한 사람들의 리스트에는 맥아더, 루스 그리고 장개석이 포함되어 있었다. 빌리 그래함은 “국무부는 이 사람들의 말에 귀 기 기울이지 않습니다. 국무부는 술과 음식을 대접받는 것을 좋아하는 ‘약삭빠른’ 자들로 가득 합니다”라고 말했다. 빌리 그래함은 영국 수상에 대해서도 “트루만 대통령과 애틀리 수상이 말하는 것을 보면 기적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아시아를 보호하고 유럽을 지키는 일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 지 모릅니다’라고 하나님께 함께 기도한다면 문제가 풀리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빌리 그래함은 전면에 서서 행정부의 부패를 경고하고 나섰다. 그는 “도덕적 붕괴 - 당시 의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고위공직자들의 부도덕성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남 - 에서 내면을 깨고 나오는 결단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 경고들은 중공이 전쟁에 개입한 직후 ABC 라디오 방송의 ‘결단의 기간’에 의례적으로 방송되었다. 한 달 만에 빌리 그래함의 프로그램은 방송국에서 가장 높은 청취율을 나타냈다. 빌리 그래함은 “우리는 국민 여러분들이 사건을 신속하게 알 수 있도록 할 것이며 더불어 성경의 빛 안에서 그것들을 조명할 것입니다”라며 성경적으로 해법을 제안하기로 약속했다. 빌리 그래함은 “처음부터 저는 사회적인 이슈들 뿐 아니라 국내와 국제적인 문제들을 직접 다루기로 결정했습니다. 한동안 텔레타이프 기계를 집에 준비해 둔 것은 최신사건을 놓치지 않고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1951년 1월에 빌리 그래함은 비록 트루만의 이름은 거명하지 않았지만 그의 경제정책을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이제 모험 자본가들이 나라의 경제를 인플레와 빚더미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지난 15년 간 재정은 적자를 면치 못했고 국가의 빚은 심각한 수준으로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빌리 그래함은 맥카시의 ‘마녀사냥’이라는 썩은 물에 발을 담갔다. 비록 그들은 만나거나 교제한 적이 없었지만 빌리 그래함은 맥카시 상원의원이 “이 나라에는 공산주의자 또는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이 운영하는 유력한 사회기관들이 1,000개가 넘고 그들이 국민의 여론을 주도하고 있으며 이러한 좌익세력,        즉 핑크와 레드 계열이 미국의 지식계층에 침투하였고 교육, 종교 문화가 거의 회복 불능의 상태에 있다고 말하였을 때” 그것을 거의 지지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비록 맥카시의 열풍이 사라졌을 때에도 빌리 그래함은 악의에 찬 반공주의 운동을 변호했다. 빌리 그래함은 “어느 누구도 감시인을 좋아하지 않지만 저는 우리의 가장 위험한 적인 공산주의를 돕고 지지하기 위하여 미국의 보호아래 숨어 온갖 술수로 간첩 활동을 하고 있는 핑크계열, 자주색계열 그리고 레드계열을 폭로하는 일에 비난과 조롱을 무릅쓰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문민이 군대를 통제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는 신문사설과 일부 군 장성들의 지지를 업고 트루만은 1951년 4월 자신에게 고분거리지 않는 맥아더를 해임했다.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트루만은 지난 6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인내해 왔던 모든 것을 무로 만들 수 있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트루만은 후에 “나는 맥아더 장군이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해임했습니다. 나는 그가 말이 안 통하는 머저리이었기 때문에 해임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비록 그런 인간일지라도 그것은 장군의 역할과는 하등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맥아더의 오판을 비판하고 그의 자만심을 경멸하던 정치인들이나 시사평론가들조차도 어린애 같은 트루만이 당대의 거물인 맥아더의 목을 친 것에 대하여 경악했다. 갤럽조사에 의하면 70% 이상이 맥아더를 지지하였고 사람들은 트루만의 인형을 길거리에서 불태웠다.

한국전쟁 초기에 트루만을 지지했었지만 빌리 그래함은 한국전쟁을 “이 모호한 전쟁,” “반쯤 잊힌 전쟁,” “절반의 힘만 쏟는 전쟁,” “이 심각한 참상”이라고 비판했다. 빌리 그래함은 ‘결단의 시간’에서 미국의 청년들 “소모품”으로 전락시키는 “워싱턴의 사람들”을 공격하였고 군인들이 한국 전쟁에서 죽어가고 있는 동안 “워싱턴에서 각테일이나 마시고 있는 외교관들”을 비난했다.

워싱턴 대집회

빌리 그래함의 중요한 목표는 트루만이 집회에 참석하는 것과 정부의 모든 기관들과 양대 정당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것 그리고 삶의 영적인 차원이 정치적 의제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개회식은 1월 13일 오후 3시입니다. 만약 대통령께서 오셔서 몇 마디 환영의 인사말을 하시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신다면 저에게는 대단히 영예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바쁘신 줄은 알지만 대통령께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신앙과 인종, 피부색, 신조에 관계없이 지켜보는 이 집회에 참석하신다면 국민이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개회예배에 11,000여 명의 사람들이 운집했다. 수도 워싱턴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남부풍의 도시와 다르지 않았지만 집회는 인종차별의 벽을 깬 채 진행되었다. 빌리 그래함은 “교회 내에서는 피부색이 문제되지 않습니다”라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집회기간 중에 수십 명의 상하의원들이 참석했다. 빌리 그래함은 가정생활에 악영향을 주는 도색잡지를 비롯하여 미 육군사관학교의 90명의 사관생도들의 제명 처분을 가져온 부정부패 추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설교에 담았다. 부통령인 앨빈 바클레이는 경이로운 표정으로 빌리 그래함에게 “당신이 이 도시를 확실하게 뒤집고 있군요”라고 말했다.

“워싱턴 호텔에서 열린 오찬모임에 참여한 상하의원 100여명에게 공산주의와 그리스도라는 주제로 설교했을 때입니다. 오찬모임이 마치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제 앞으로 나오면서 지금까지 공산주의를 잘 알지 못했었다고 말했습니다”라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빌리 그래함은 “이 중대한 시국에 미국의 리더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 새롭고도 강력한 기회가 오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나는 그들의 사무실로 찾아가서 장시간 담화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제4장 영적 군인

빌리 그래함이 대통령 출마를 끝까지 내켜하지 않았던 아이젠하워 장군을 설득하여 끝내 1952년 선거에 출마하게 했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텍사스의 억만장자가 아이젠하워를 개인적으로 설득하기 위하여 빌리 그래함을 파리에 가도록 부탁한 놀랄만한 일이 있었다. 또한 빌리 그래함과 아이젠하워가 만나기까지 수많은 지지자들이 토대를 마련한 것도 사실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이미 뉴햄프셔주의 경선에서 유권자들과 악수 한 번 하지 않고도 승리했다.

빌리 그래함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서로 만나 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사람이 당시 다섯 명에도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처럼 그들은 세대가 달랐고 마치 다른 행성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한 사람은 전쟁을 다루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영혼을 다루는 사람이었다. 아이크(아이젠하워의 애칭 - 역주)는 힘을 신봉하는 사람이었고, 빌리 그래함은 영혼을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가장 강력한 사업가인 리차드슨은 그런 그들을 한 자리에 앉혔다. 리차드슨은 그들에게 각양의 선물과 휴가를 위한 별장, 골프 환담을 위한 개인 비행기까지 제공했다. 두 사람은 부자에게 꼼짝 못한다는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종종 별개의 일이었다. 당시의 빌리 그래함이나 아이젠하워는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직면한 강력한 도전을 넘어섰기 때문에 단순한 찬사가 아닌 절대적 명성을 얻었다. 아이젠하워는 서구세계를 구했고 빌리는 사람들을 영원한 세계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들이 한 일은 어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가 무거운 짐을 지도록 도울 수 있었을 것이다 빌리 그래함 역시 전략적으로 매우 유용하게 그를 도왔다. 냉전이 예기되는 상황에서 아이젠하워는 종교의 역할에 대한 확신을 갖기에 이른다. 그는 출마를 선언하면서 미국의 도전과 응전에 관하여 말했다. 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 이 단순한 가치들 - 성실, 용기, 자기 확신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확고히 품고 있다면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이 이 가치들을 결코 파괴할 수 없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러한 가치에 최선을 다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에 이르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상대방을 알아가기

그들은 미국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이젠하워 가문의 신앙의 뿌리에 대하여 말했다. 그들의 조상은 박해를 피해 온 스위스 메노나이트분파로 남자들은 수염을 기르고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는 근본주의 도강파 형제단이라고 설명했다. 빌리 그래함은 “아십니까? 당신이 주장하는 것이 우리 어머니의 신앙과 동일한 것입니다”라고 아이젠하워의 말을 회상했다.
이것은 단순한 것 같지만        매우 복잡한 이야기이다. 아이젠하워는 다른 대통령들보다 매우 엄격한 신앙적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지만 장로교나 성공회 계통의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그의 신앙배경은 말하기가 간단하지가 않다. 아이젠하워는 종종 독실한 부모가 고수했던 신앙적 가치를 흠모했다. 그중 어떤 것들은 매우 신중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특별히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후보로 나서는 것을 거절했던 어머니의 믿음을 존경하는 것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때 빌리 그래함은 모든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아이젠하워의 확신은 일부 극단적 그룹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이다의 신앙을 이용하여 아이젠하워를 “반기독교주의자”, “비애국주의자”라고 헐뜯기 시작했다. 아이젠하워가 도래하는 핵전쟁의 시대를 맞이하여 대통령 출마에 나섰을 때 그의 부모가 아마겟돈 전쟁의 공포를 주장하는 종교에 속했다는 사실은 상황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뜻했다. 아이젠하워 부모는 빌리 그래함 같은 19세기 부흥사 드와이트 무디를 따라 아이젠하워의 이름에 드와이트를 붙여주었다. 무디는 이렇게 말한 사람이었다. “이 세상은 파선한 배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구조선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무디, 할 수 있는 한 모두를 구원하라.”

두 사람 사이의 동맹은 그날 파리에서 맺어졌다 이틀 후에 아이젠하워는 “오늘날 세상의 절망적인 문제들에 대해 깊이 알면 알수록 해결책은 영적이고도 도덕적 가치에서 찾아야함을 더욱 확신합니다.”라고 그의 종교 담당 참모인 피어슨에게 길고도 확신에 찬 편지를 보냈다. 빌리 그래함은 파리에서 기자들에게 아이젠하워가 미국의 영적부흥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빌리 그래함은 기자들에게 정치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선거캠프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국민에게 크리스천의 의무는 투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독려하기 위한 방송 외에는 아무것도 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은 정치적인 혼돈기에 자신의 역할을 찾은 기쁨으로 충만하여 유럽에서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1952년 대통령 선거는 공화 민주 양진영 모두 뚜렷한 현역정치인이나 유력한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는 상태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빌리 그래함은 시카고에서 개최된 전국복음주의연합대회에서 설교를 했다. 이 대회는 10년 전에 완고한 근본주의를 벗어나 복음주의를 전면에 부각시키려고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목사들이 권력의 주의를 배회하는 것이나 세상의 주제에 관심을 갖는 것을 배제한 그룹이었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은 자신의 생각을 설명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선한 크리스천이 무대 뒤에서 뛰어나와 정치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시대를 말하고 있었다. 빌리 그래함은 “사람들은 도덕 운동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나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 인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빌리 그래함은 사람들마다 자신들의 다니엘을 찾아낼 것이라고 확신했다.

대장정

공화당이 전당대회를 하는 동안 빌리 그래함 역시 기자회견을 했다. 그 이유는 지지자들에게는 자신이 도덕적 의제에 집중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빌리 그래함이 너무 깊이 정치에 개입한다는 생각을 가진 일부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말 한마디로 1,600만 명의 유권자를 움직일 수 있다고 대담하게 말했다. 그는 상원의원이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라는 수많은 제안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쪽으로 조용히 비켜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민주·공화 양당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만약 그들이 도덕적 황폐와 싸우지 않는다고 느끼고 혹은 공산주의의 손을 들어 주는 행위를 한다면 그는 “나는 지체하지 않고 전면에 나설 것입니다. 나는 온 힘을 다하여 이 나라의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선물인 민주적 제도를 보호하는데 앞장서도록 호소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빌리 그래함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고 했던 정치 세력들은 빌리 그래함이 출마의 문을 항상 열어 놓고 있다고 말해왔다.

빌리 그래함은 아이젠하워가 농업정책, 노사관계, 국가예산에 관하여 벼락치기로 공부하기 위해 머물고 있던 덴버의 브라운 팰리스 호텔에서 그와 며칠을 같이 보냈다. 빌리 그래함은 그러한 정책들은 영적인 문제와 연관이 있다고 조언했다. 둘은 선거운동에 유용한 성경구절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빌리 그래함은 다시 한 번 자신이 걸어온 영적인 삶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교회와 등지고 살았던 것을 인정했다. 빌리 그래함은 아이젠하워에게 이러한 일은(사람들이 교회를 등진 것 ­역주) 목사들이 영적인 일보다는 사회적 이슈에 더 민감했으며 그 결과 그리스도 중심적 메시지의 약화, 주류교회의 쇠락에서 연유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는 “내가 당선되어 워싱턴으로 입성한다면 당신이 교회를 추천하겠습니까?”라고 빌리 그래함에게 말했다.

빌리 그래함과 그의 사역팀은 자신들의 상징인 실크로 짠 붉은색의 모로코 가죽성경을 언제나 소지하고 다녔다. 빌리 그래함은 그 성경에 자필 사인을        해서 그들의 사역에 헌신적으로 도와 준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다(빌리 그래함의 협력전도자로서 성격이 직선적인 그래디 윌슨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반드시 읽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붉은색을 골랐다”). 빌리 그래함은 아이젠하워에게 그 붉은색 성경에 서명을 한 후 선물했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백악관의 침실에 그 성경을 놓아두었다. 빌리 그래함은 그 성경 안쪽 여백에다가 꼭 읽어야 할 부분을 명기하였고 또 어떻게 그 부분을 공부해야 하는지를 써 놓았다.

아이젠하워 선거팀은 명백한 정치철학을 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가 경험했던 가장 최고의 악을 격퇴시킨, 도덕적 영웅 아이젠하워가 국민을 상대로 연설을 시작했을 때 시민들은 그를 거부하지 못했다. 선거구호는 이러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 그리고 국가에 대한 충성! 그것이 아이젠하워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0월 하순 투표일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 빌리 그래함은 교인들과 종교신문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지지율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아이젠하워의 지지율이 77%로 나타났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신문보도는 다음과 같았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정치운동에 있어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그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다.”
선거가 끝나고 빌리 그래함은 자신의 친구인 헨리 루스에게 편지를 써서 선거운동을 도와 준 「타임」의 기사에 감사를 표하고 한국 전도여행 후 뵙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빌리 그래함은 “아이크를 지원해준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나는 지난 몇 개월 동안에 아이크를 두 번이나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도덕적 원칙과 참된 성실성을 갖춘 인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밝았음이 분명합니다”라고 썼다.

1953년 이후의 빌리 그래함의 전도집회에는 아이젠하워가 소파에 앉아 빌리 그래함과 함께 성경을 읽는 한 장의 사진을 활용했다. 인기가 있는 대통령과 유대관계는 빌리 그래함에게 세속사회에서 어떠한 전도자도 가져 보지 못했던 국민적 신뢰를 주었다.

제5장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나라

행동하는 신앙

취임식 당일 날 75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새로운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하여 길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펜실베이니아 거리를 가득 메우고 마치 메시야의 승리의 입성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환호했으며 마분지로 만든 망원경을 통해 행사를 지켜보았다. 대통령 취임식에 처음으로 참석한 빌리 그래함은 2주전 자신이 말해준 성경구절 위에 손을 얹고 서약하는 아이젠하워를 지켜보았다. 그 구절은 역대기하 7:14의 말씀이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빌리 그래함은 아이젠하워가 예상을 뒤엎고 그의 호주머니에서 기도문을 꺼내들었을 때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도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국민 여러분, 이 순간, 취임사의 말을 하기 전에 제가 사적인 짧은 기도를 하도록 허락하시겠습니까?” 그는 청중에게 고개를 숙여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미국 국민이 국가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며 잘못된 것에서 올바른 것을 구별하며 인종이나 신분 그리고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봉사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재임 시 세례를 받은 첫 번째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캘빈 쿨리지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후로 교회에 출석한 두 번째 대통령이었다. 덴버에서 빌리 그래함과 약속한 대로 그는 내셔널 장로교회에 출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짧은 시간 동안 뿐이었다. 몇 주 후에 아이크는 매우 격노해서 자신의 일기에 “내가 자신의 교회에 출석한다는 사실을 목사가 사람들에게 공개하기 전에는 교회활동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라고 적었다. 엘슨 목사는 아이크의 교회출석이 결코 공개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었다. “나는 즉시 같은 교파의 다른 교회에 출석하고 싶다. 만약 목사가 다시 약속을 깨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그리할 것이다.”
뒤이어 미국에서 근래 볼 수 없었던 기독교 장려운동이 공식적으로 발생했다. 아이젠하워는 각료회의가 있기 전에 침묵의 시간이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한 번은 아이젠하워가 “맙소사 기도하는 것을 잊어버렸잖아!”라고 말했을 때 의전비서관인 톰 스테펜은 다시 각료들을 앉히고 기도를 하고 회의를 마쳤다). 최초의 국가 조찬 기도회가 1953년 아이젠하워와 빌리 그래함이 참석한 중에 열렸다. 1954년에는 “하나님 보호 아래”라는 구호를 충성의 맹세에 추가했다. 사회적 시민운동을 위한 종교활동연합이 아이젠하워의 신앙을 지지하는 각계의 중진들로 구성되었다. 빌리 그래함, 노만 빈센트 필, 헨리 루스, 헨리포드 주니어, 허버트 후버 그리고 제네럴 일렉트릭 사의 찰스 윌슨을 이사회 멤버로 포함했다. 1955년 워싱턴의 국회의사당 안에 기도실을 만들었고 모든 동전과 지폐에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문구를 새겨 넣기로 결정했다. 이후 하원의원들은 국가의 모토는 “다양성 중 일치”를 통한 전진이라고 생각했다.
그해 여름 제네바에서 열린 4개국 정상회담 전날 밤, 미 국무장관이 좀더 신중할 것을 요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미국을 전쟁에 광분하는 나라로 선전 선동하는 소련에 대항하기 위하여 전 국민을 병적부에 올리는 국가교서를 발표했다. 또한 그는 1억 6천 5백만 명에 이르는 전 국민이 주일에 교회에 나가 평화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요청했다. 빌리 그래함은 “제네바의 한 교회에 나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미국의 대통령을 보게 되니 내 눈에서 기쁨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4개국 정상회담에서 하나님은 대통령과 함께 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그에게 했다”고 그 당시를 회고했다.

위기 종식을 위해 단기 처방에 불과한 자본시장의 민주화를 주장하는 “우매한 사람들의 단견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고 아이젠하워는 매일같이 자신의 일기에 적었다. 국민에게 장기적 안목을 기르도록 요청한 그는 공산주의는 결코 무력으로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단기적인 이득을 최대한 얻으려는 목표를 계속 고수한다면 “소위 문명세계라는        서구 유럽과 영국 그리고 미국은 스스로 자멸하고 말 것 겁니다.” 그는, 신앙이란 인간이 본질적인 이기심을 극복하게 하며 영웅주의를 진작하고 선을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게 하며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대로 시민들이 자기의 역할을 충실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다. 아이젠하워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조화로운 하나의 세계” 사이에는 영적 연결선이 있다고 믿은 것이다.

빌리 그래함의 주도권

인기를 좋아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것이다. 빌리 그래함과 대통령들이 공유한 진기한 경험들은 일반인들의 흥미로운 관심의 대상이었고 때론 예찬의 대상이었다. 그 결과 그들의 사생활은 침해당했고 자부심은 시험의 대상이 되었다. 빌리 그래함의 야망은 두려움과 끝까지 싸우는 것이었다. 두려움은 너무나 효과적으로 빌리 그래함을 압박했다. 그때 빌리 그래함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그의 은사를 상실하기도 했다. 그의 심령이 부서진 것은 두려움을 겸손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야망은 너무나 당연히 하나님께 속했어야만 했다. 그는 명성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하고, 복음을 더 멀리 전파할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왜 한 인생이 행할 수 있는 설교보다 훨씬 더 많은 설교 요청을 수락해서 대통령들을 능가하는 유명세를 치러야 했는지, 그는 왜 공적인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지, 사람들로부터 받는 환호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빌리 그래함이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복음에서 얻은 교훈이었을 것이다. 빌리 그래함의 제자는 아주 많았다. 또 그래디 윌슨, 클리프 바로우, 베브 쉐아와 같은 자신과 평생을 함께 사역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빌리 그래함 편에 머물러 있어 그가 겸손하고 정직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함께 웃었고 때로는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그를 끝까지 신뢰했다. 특별히 쉐아는 90살이 다된 빌리 그래함이 머물고 있는 몬트릿의 산자락에 있는 그 집에서 지금도 여전히 살고 있다. 윌슨은 자신의 소명이 특별하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윌슨은 “주님께서 빌리를 여전히 기름 부으시는 한 나도 여전히 그를 겸손히 만들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친밀감의 증대

아이젠하워가 빌리 그래함을 처음으로 정치적 동맹자가 아니라 친밀한 친구와 같이 여기게 된 것은 1955년 어느 여름날이었다. 빌리 그래함이 유럽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워싱턴을 통과하고 있을 즈음에 아이젠하워가 전화를 했다. 아이젠하워는 그날 빌리 그래함을 게티스버그에 있는 자신의 농장으로 초대하고 차를 보내겠다고 말했다. 빌리 그래함은 이것은 아주 순수한 방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담소를 나누던 중 빌리 그래함은 대통령에게 자신의 두 명의 할아버지들이 남북전쟁 당시에 게티스버그에서 싸웠던 일화를 말했다.
“그래요” 아이젠하워는 제안했다. “당신을 그 곳으로 데리고 갈 수 있어요. 가서 한 번 둘러봅시다.” 아이젠하워는 사관학교 생도였을 때, 방대한 전쟁사를 읽어가는 중에 게티스버그 전투에 대하여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빌리 그래함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정확한 장소와 할아버지의 부대 등에 관하여 물어보았다. 그리고 둘은 수행원들이 뒤를 따르는 중에 골프카트를 타고 전쟁터를 둘러보았고 아이젠하워는 전투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담소했다.  

둘은 서재에 있었는데 빌리 그래함은 앉아 있었고 아이젠하워는 서서 벽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빌리. 사람이 죽을 때 어떻게 자신이 천국으로 가고 있다고 믿을 수 았는지 말하시오.”
약간 놀랐지만 빌리 그래함은 “한번 찾아볼까요?”하고 말하면서 자신의 신약성경을 꺼냈다. 그리고 구원에 관한 성경구절들을 함께 묵상하고 설명했다. 빌리 그래함은 구원은 “우리 스스로가 행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오직 은혜를 통해서만 온다는 사실을 학인하고 싶었다.

빌리 그래함은 집으로 돌아온 후 편지를 써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를 강하게 권유했다. 국민은 반드시 아이크를 원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를 대통령직으로 불렀다는 식이다. “각하와 부인께서는 말할 수 없는 개인적 희생을 치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신만이 미국 국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제가 보건대 앞으로 5년간은 우리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제 사견으로는 앞으로도 엄청난 개인적 희생을 치르시겠지만 당신의 리더십은 국민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말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각하는 이미 나라를 위해 당신의 생애를 전적으로 희생해왔습니다- 아마 미국 역사상 가장 특별한 방식으로, 미국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뿐 아니라 신의 섭리에 의해서 당신이 대통령직에 앉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6장 출세가도를 달렸던 사람

영적 일대기

종교는 가정생활의 중심이었다. 닉슨의 가족은 매일 기도하고 잠자기 전에 성경을 읽었으며 주일에는 4번의 예배에 참석했다. 닉슨은 교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으며 교회학교에서 가르쳤다. 그의 어머니는 골방에서 기도하고 자신의 신앙을 결코 자랑하지 말라는 마태복음의 명령을 문자적으로 따랐다. 그녀는 실제로 잠자기 전에 옷장 안으로 들어가 기도했다. 닉슨이 부통령이 되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에게 연설을 할 때마다 신앙적인 이야기를 삽입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닉슨은 자신의 어머니의 신앙은 이야기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신앙에 관하여는 말하지 않았다.

아이크는 정치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닉슨을 경계했다. 닉슨은 친구가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가 공적인 생활을 시작하기 이전에도 그랬다. 화목한 가정생활과 평온한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상실하고 회복하지 못했다. 닉슨은 워싱턴 무대에 등장한 후 필요한 만큼의 우호적 인사들을 만들었지만 권력을 상실했을 때에도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내부 그룹을 만들지 못했다. 한번은 아이젠하워가 병상에 있는 닉슨을 문병하고 돌아온 후 비서인 앤 휘트만에게 어떻게 사람이 친구없이 살아갈 수 있느냐고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휘트만은 자신의 일기에 두 사람의 차이점을 밝혀 놓았다. “대통령은 모든 행동을 신실하고 믿을만하게 하였고… 그것이 자연히 밖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것을 알고 그를 신뢰하고 존경했다. 그러나 부통령(닉슨)은 때때로 자기의 모습을 감추고 인위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1956 - 닉슨의 백악관 입성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닉슨은 여유만만하게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빌리 그래함과 닉슨은 이 승리로 더욱 결속했다. 서로 주고받는 편지는 “경애하는 빌리”, “경애하는 딕”으로 시작되었다. 닉슨에게 쓴 축하편지에서 빌리 그래함은 “이번 일이 당신의 위상을 높였으며 우리가 나누어 온 미래의 가능성을 더욱 명확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빌리 그래함과 닉슨은 1956년 1월에 장래 닉슨의 백악관 입성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7장 무임소 대사

아이젠하워는 자리에 앉아 심사숙고하면서 빌리 그래함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경애하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으로 시작하지 않고 “경애하는 빌리”로 시작했으며 어감이나 내용도 예전의 형식적이고 공손한 태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편지에는 상황의 긴박함과 그 일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젠하워의 진심이 담겨있었다. 그것은 법원이나 의회에서 담당하는 것보다 설교단에서 먼저 말해야 할 일이라고 아이젠하워는 생각했다.

아이젠하워는 행동해야만 했다. 그는 주방위군을 출동시켰고 101공수여단의 병력 500명을 한밤중에 리틀록에 투입했다. 다음날 공수부대의 철저한 보호 하에 9명의 흑인 학생들이 센트럴고등학교에 등교했다. 아이젠하워는 국민에게 자신이 군대를 동원한 것은 인종차별 철폐정책을 시행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법질서를 준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남부의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이것을 “침략”이라고 부르며 비난했다. 아이젠하워는 이날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날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남부의 온건주의자들에게 협력을 요청하며 리더십을 발휘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그를 도와준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59년 빌리 그래함은 리틀록에서 한 주간을 머물렀다. 폭탄이 터지는 사고로 시작한 그의 방문은 전쟁기념 스타디움에서 수차례의 전도집회로 끝을 맺었다. 주지사인 퍼버스는 집회에 참석했지만 좌석에는 앉을 수 없어 후미의 계단에 걸쳐 앉았다. 빌리 그래함은 “저는 어떤 선동을 하려고 이곳에 온 것도 아니고 또 인종문제에 관하여 설교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사회문제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나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청중 중에 핫 스프링스에서 온 한 소년이 빌리 그래함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는 주일학교 교사가 자기를 데리고 왔다고 말했다. 그 소년의 이름은 빌 클린턴이었다.

결정적인 승리: 뉴욕집회

뉴욕집회는 수년간에 걸쳐 준비되었다. 이 일을 위해 50개국의 나라에서 24시간 기도연합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는 매일 아침 동틀 무렵마다 기도한다고 알려온 인도 아쌈 부족도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한때 사람을 사냥하는 야만 부족이었다. 대규모 우편물을 가정마다 발송하였고 650개의 옥외 광고판을 걸었으며 4만 개의 오렌지색과 검은색을 사용한 차량부착 스티커를 만들었고 50만 장의 전단지를 뿌렸다. 「버라이어티」는 빌리 선데이의 1917년 뉴욕집회 이래 “대형 합창단, 할렐루야, 구시대의 기독교, 초대형 부흥회”의 특색을 가진 가장 큰 대회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영국에서 교회 밖의 세력까지 접촉한 것처럼 빌리 그래함은 자신이 속한 보수적 기독교의 도움을 벗어나 - 그를 도울 수 있는 교회는 극히 적었다 - 신학적 스펙트럼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들의 도움을 환영했다. 당시 뉴욕인구 800만 명 중에 절반이상이 아무런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종교의 분포도는 가톨릭 27%, 유대교 10%, 개신교 7.5%였다.

그 결과 밥존스대학교의 학생들에게는 빌리 그래함의 전도집회의 성공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심지어 빌리 그래함에 관한 영상영화들은 불탔다. 보수주의 진영은 빌리 그래함이 독실한 크리스천을 끌어가서 그들의 전통이 파괴되고 잘못된 습관이 형성될까봐 두려워했다. 실제로 「할리우드리포터」에 의하면 당시 4,300만 이상의 개신교인이 영화 관람을 비신앙적 행위로 인식하고 있었다.

스퀘어 가든의 빌리 그래함 쇼는 그가 도착하기 전날 밤부터 시작되었다. 강단은 풀밭과 꽃으로 장식되고 대형 설교단을 준비하였고 설교단 주위로 격자형 펜스를 만들어 마치 소돔의 심장에 감미로운 오아시스가 생겨난 듯했다. 모든 지역은 금연 표시문이 붙였고 안내인은 공손히 청중을 맞이했다. 맥주 광고판은 전단지로 덮어 감추었고 휴대품 보관소는 성경판매점으로 바꾸었다. 「뉴욕타임즈」는 빌리 그래함의 개막식 설교 전문을 마치 대통령 연두교서처럼 게재했다. 뉴욕집회는 97일간에 걸쳐 약 2백만 명이 참석했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복음 전도집회였다. 로얄석에는 제롬 힌스, 펄 배일리, 진 티어니, 에드 셜리반, 데일 에반스, 손저 헤니, 월터 윈첼 등이 얼굴을 내밀었다.
빌리 그래함을 비판하는 남부인사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어느 날 밤 집회에서 개회기도를 한 것이었다. 빌리 그래함은 「뉴욕타임즈」와 인터뷰에서 민권 운동가들은 “기독교 사랑의 모범적 사례를 보이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킹 목사는 빌리 그래함에게 “우리가 함께 토의했던 시간은 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의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라고 편지 한통을 보냈다.

6월 1일 밤에는 ABC 방송이 처음으로 이 집회를 생중계했다. 「버라이어티」는 빌리 그래함을 “거대한 흥행의 보증수표”라며 환호했다. 빌리 그래함은 불가능한 시간대에 재키 클레아슨과 페리 코모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능가하는 시청률을 확보했다. 약 700만 명이 뉴욕집회를 시청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 (페리는 “놀라운 시청률”이라고 말했고 재키는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뉴욕집회는 16주간에 걸쳐 타임 스퀘어에서의 집회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1,941,200명의 사람이 참석했고 56,426명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했으며 30,523명은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회심했다.

빌리 그래함이 아이젠하워를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그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15분만 자리를 비워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빌리, 게티스버그에서 나에게 말했던 것을 다시 한 번만 더 말하시오, 내가 천국에 갈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빌리 그래함은 다시 한 번 더 그에게 성경말씀을 설명했다. 그리고 함께 기도했다. 빌리 그래함은 그에게 지나간 과거는 모두 용서될 것이며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는 “나는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빌리 그래함은 “그리고 제가 방을 나가려고 할 때, 그는 환한 미소를 머금고 손을 흔들며 말했습니다. ‘모든 친구들에게 말하시오, 이 늙은 군인이 여기서 그대들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다고 말이오’”라고 회고하였다.

제8장 거룩한 전쟁

제9장 당신을 지지합니다

빌리 그래함은 닉슨에게 본인의 신앙관에 대하여 자주 공개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빌리 그래함 자신도 닉슨의 신앙의 깊이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960년에 전개된 그들의 친분의 관계를 볼 때 빌리 그래함이 닉슨의 정치적 요구에 도움을 크게 준 반면 닉슨에게 자신의 영적인 요구를 관철하지도 못했다는 것은 상당한 모순이었다. 빌리 그래함의 거대한 청중은 복음을 증언하는 자들에게 유권자들로 바뀌었다. 빌리        그래함은 자기의 인명록에 있는 2백만 성도 가정에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닉슨에게 말했다. 그러면 그들은 또 다른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이 명단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민주당 지지층이거나 독립성향의 유권자들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당신에게 호의적인 유권자들로 바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은 공식적인 언급을 통해서 “모든 국민은 투표장에 나가야 합니다”라는 주장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 제네바에서 빌리 그래함을 면담한 기자들은 그가 이번 선거에서 종교의 역할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대해서 설명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빌리 그래함은 그것은 “민감한 이슈”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하면서 “한 개인의 신앙은 그의 인격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결정을 해야 될 때에도 종교와 무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퀘이커 신앙이 가르치는 평화가 무엇을 말하는지, 크리스천 과학자는 의학적 도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교황청의 세속적 영향력에 대해 가톨릭 성도들은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국민은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필이 종교문제의 뇌관을 터뜨리다

시민모임에서 가톨릭이나 진보적 기독교 측에서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임은 언론에 자신을 개방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명의 기자가 몰래 숨어 들어가 회의의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 “미국 문명이 위기 앞에 있습니다. 미국의 문명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정체성이 상실될 것입니다.” 기자들은 필의 연설 내용을 자세히 보고했다. 참석자 중에는, 영향력 있는 신문인 「크리스천헤럴드」의 편집자이면서 오랫동안 케네디를 비판해온, 다니엘 폴링과 기독교가 가톨릭에 너무 관대하다고 말했던 빌리 그래함의 장인 넬슨 벨이 있었다. 벨은 “가톨릭이 공산주의를 비판하곤 있지만 둘은 유사한 방법론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비판은 아주 작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며 로마와 모스크바에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제10장 인생의 의미

닉슨이 빌리 그래함의 사역을 보호하려고 애를 썼다는 사실은 l년도 채 안되어 드러났다. 빌리 그래함의 기사사건에 대해 빌리 그래함이 닉슨은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고 증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자서전『여섯 번의 위기』에서 모든 책임을 스스로 떠맡았다. 또한 종교적 이슈의 선거판 중심에 서 있는 빌리 그래함을 보호하기 위하여 닉슨은 “자신이 직접 지지선언을 요청했지만 빌리 그래함은 과감히 거부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빌리 그래함이 “친밀한 친구”인 닉슨을 무제한적이며 열정적으로 지지하면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닉슨의 참모들은 생각했지만 닉슨은 그것을 자제를 촉구했다. 닉슨은 “비록 빌리 그래함의 지원이 종교영역 밖에서 이루루어지고 있지만 반대편은 그의 지원을 종교적 편협함의 증거로 몰아세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크게 걱정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 결전

빌리 그래함은 이번 선거는 중요한 영적 전쟁의 하나라고 말했다. “이번 선거는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여론조사와 통계로만으로는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설교했고 닉슨과 국가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를 위하여 자신과 함께 기도하자고 요청했다. “딕, 지금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던져버리고 그분만을 의지할 때입니다. 시편 18편 6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당신은 지금 시험을 통과하고 있고 하나님은 당신이 진심으로 그분 앞에 서있는지 보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이번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호수아의 하나님 약속을 인용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
그것이 선거일을 앞두고 한 빌리 그래함의 마지막 말이었다.

제11장 14캐럿 가치의 사진

빌리 그래함은 그날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골프를 마치고 클럽으로 돌아가는 길에 케네디는 빌리 그래함에게 신학적인 질문을 던졌다. 신호등 앞에서 차를 멈추면서 케네디는 물었다. “빌리, 당신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으십니까?”
빌리 그래함의 사역에 익숙한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그의 설교의 중심주제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케네디의 질문은 빌리 그래함에게 묘하게 들렸다.
“저는 매우 충격을 받았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회고했다. “저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럼요, 예수님의 재림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내가 다니는 가톨릭교회는 그것을 가르치지 않지요?”
“그 가르침은 가톨릭의 신조 안에 들어있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대답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케네디는 응답했다. “저는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케네디는 사람들의 전문영역을 파고들기로 유명했다. 그것을 통해 배우고 그들을 기쁘게 했다. 빌리 그래함은 걸으면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재림의 약속에 관한 성경의 교훈을 설명했다.

킹은 다음과 같이 썼다. “사실 나는 인종차별이라는 질병으로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하는 것처럼 적절한 시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킹은 동료 목사들, 백악관 그리고 진리의 순간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백인 온건주의자”에게 저항했다. “저는 참으로 유감스런 결론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흑인들의 자유를 향한 걸음에 거부감을 느끼는 그룹들이 백인시민연합 회원들이나 극우단체인 KKK가 아니라 정의보다는 질서를 앞세우는 백인온건주의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나는 당신이 추구하는 목표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직접시위라는 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계속되는 길거리 시위의 흉흉한 모습과, 거침없이 타오르는 도덕적 요구를 텔레비전을 통해 모든 가정이 시청하자, 갑자기 국가의 양심이 작동하면서 인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백악관은 “만약 킹 목사를 잃어버리면 더 과격한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공공의 장소에서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포괄적인 시민 권리 장전을 내놓았다. 빌리 그래함은 “피부색으로 인해 공용의 식당에서 흑인들을 쫓아내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로부터 3주 후, 케네디는 암살당했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의 버밍햄 전도집회는 취소되지 않았다". 1964년 부활절 날, 전도집회를 취소해야한다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와 인종주의자들의 테러 위협에도 불구하고, 빌리 그래함은 집회를 계속 강행하였고 버밍햄 메인 스타디움에는 35,000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정부당국은 그 집회가 앨라배마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모임이었다고 말했다.

제12장 비극과 전환

곧이어 재키가 도착하였고 그녀는 존슨의 손을 들어 선서를 할 때 그의 부인과 함께 옆에 서 있었다. 선서가 끝나고 존슨은 돌아서서 두 여인을 포옹했다.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첫 번체 명령을 내렸다. “됐습니다. 이제 비행기를 워싱턴으로 돌리시오.”
비행 중 존슨은, 만약 갑자기 조종사에게 무슨 일이 발생하고 “지도나 계기판을 해독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비행기를 대신 조종하는 사태가 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케네디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사망 뉴스가 발표되었을 때, 그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려는 사람들로 교회당은 가득 찼다. 조종이 울리고 국가의 모든 일은 중지되었다.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법원도 모든 재판을 중지했다. 극장들은 무대의 빛을 끄고, 의사들은 진료실을 떠났으며, 미식축구도, 모든 파티도 취소되었다. 전화국 교환수들도 업무를 중지하여 전화 시스템도 모두 불통이었다.
케네디의 죽음으로 인해 빌리 그래함의 사역에 묘한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빌리 그래함이 정확하게 다가올 일을 내다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두주 전 휴스턴에서 설교할 때 그는 이상한 예감에 관해 이야기했다. 텍사스 주지사 코넬리가 호텔로 찾아와서 빌리 그래함과 담소하는 중에 코넬리는 케네디의 이번 방문은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즉, 텍사스의 분위기는 대통령에게 점점 적대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대화는 빌리 그래함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빌리 그래함은 친구인 스마더스를 통해 케네디에게 연락을 취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고 대통령을 텍사스로 내려오게 하면 안 된다고 스마더스에게 강력히 경고했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과 케네디는 연결이 되지 못했고 그 결과 빌리 그래함의 경고 메시지를 케네디가 받지 못했다.

빌리 그래함은 후에 “저는 당신이 막중한 그래서 두려운 대통령의 무한 책임의 일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존슨에게 편지를 썼으며 존슨이 좋아하는 성경적 권면을 덧붙였다. 빌리 그래함은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을 맡기면서 했던 말을 전했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신 33:25-27). 빌리 그래함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새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으며 자신은 존슨 대통령이 위대한 미국의 지도자들의 반열에 오르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포지계곡에서 워싱턴과 함께 하시고 남북전쟁의 캄캄한 시기에 링컨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이제 당신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결정이 너무 어렵고 책무가 너무 무거울 때, 바로 그때가 하나님이 당신 가까이 계신 때입니다.”
빌리 그래함이 대통령을 위해 축복기원을 했다는 소식과 함께 케네디의 사진들이 여전히 백악관 모든 집무실마다 걸려있다는 사실을 국민이 알고 난 후, 대통령을 향한 국민의 생각이 저주에서 축복으로 뒤바뀌었다. 국민은 빌리 그래함이 존슨을 “백악관의 역대 주인 중 가장 자격을 갖춘 사람이며 국가를 위해 도덕적 리더십을 보여준 사람”이라고 평한 것과 자신들의 생각을 비교했다. 빌리 그래함은 “대통령은 매우 신앙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저의 전도집회에도 수십 번 참석하였고 독실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그가 우리 국민에게 매우 유익한 모범을 보여줄 사람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존슨은 빌리 그래함에게 “나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라고 감사의 답장을 긴급으로 보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옳은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또 그것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지 않는다면 국민의 신뢰에 부흥할 수 없습니다”라고 간청했다. 편지 아래에 존슨은 친필로 “워싱턴에 오게 되면 꼭 찾아 주십시오”라고 썼다.

시간이 흘러 존슨의 대통령직에 위기가 오고 그의 지지도가 80%에서 38%로 추락했을 때, 빌리 그래함은 존슨의 관계에 위기가 옴을 느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사역이 자신의 인기도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적들이 사방으로 포위하고 있는 존슨이 더 공격받는 사태가 온다면 빌리 그래함 역시 불길 속에 들어있는 형국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빌리 그래함의 적들은 여전히 그를 시골뜨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엘리트들과 교회연합운동에 매진하는 그를 비판하는 근본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왜 사회정의에 관심이 없냐고 빌리 그래함을 비판하는 신앙인들 중에서도 적들이 생겨날 형국이었다.
빌리 그래함과 존슨은 질서유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급박한 문제가 아니면 보수적 방법을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존슨은 종종 “저는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대통합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그러나 시대는 불화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민권운동가와 인종차별주의자 간의 대립, 여성운동가와 가부장제도 신봉자, 노동자와 기업가, 환경운동가와 오염배출 기업인들 간의 대립의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아이젠하워의 시대에 주류였던 사람들은 한쪽으로 밀려나고, 뉴스의 전면에는 기성의 가치를 거부하는 청소년들과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목회자들, 학문적 성과를 이룬 중국인들, 흑인 인권운동가들 그리고 혁명가들의 갖가지 이론들이 등장했다. 빌리 그래함을 따르는 사람들은 구시대의 방법을 신봉하는 사람들로, 후에 닉슨을 지지하는 침묵의 다수로 변신한다. 이제 세상은 변화의 문 앞에 섰는데, 그것이 바로 존슨 대통령의 시절이었다.

기자들이 학교에서 기도하는 문제부터 자유연애에 이르기까지 떠오르는 시대적 이슈에 대한 여론의 이를 열고자 할 때, 그들은 어김없이 빌리 그래함의 견해부터 물었다. 1960년대 말, 빌리 그래함의 미니애폴리스 본부는 사무실 건물 규모가 160,000만 스퀘어 피트(약 4,500평 - 역주)에 이르렀고 거기서 그들은 한해 8천만 통의 복음편지를 발송했다. 빌리 그래함의 본부를 견학한 공화당과 민주당 전국위원회 관계자들은 그들의 업무처리 능력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최고의 친구

빌리 그래함은 그와 함께 성경을 읽고 그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존슨이 성구 하나를 택하면 빌리 그래함은 그것에 대해 설명하는 식이다. 존슨은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애쓰는 치료자인 빌리 그래함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겼다. 존슨은 “빌리 그래함은 새벽 3시에 일어나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6시에 우리는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국가가 직면한 문제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라고 말 한 적이 있다. 존슨의 딸인 루시는 빌리 그래함이 백악관에 들어오면 가정 전체의 분위기가 변했다고 말했다. “빌리 그래함 박사님이 우리와 함께 있을 때는 가정에 맴돌던 걱정과 긴장 지수가 언제나 감소했습니다.” 버드 여사는 빌리 그래함이 남편에게 가장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필요의 욕구가 매우 강했습니다. 자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의 닻을 필요로 했습니다. 빌리는 다음과 같이 그를 위로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절실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대통령직일 것입니다.”

어머니는 남편을 내조하는 일을 최우선 순위를 두었기 때문에 선거구 주민들에게 시간을 다 썼다. 그녀는 아이들을 대부분 마운트 버논 같은 명승지 관광에 보내고 거의 매일 밤, 사회적 모임에 참여했다. 존슨의 딸인 린다는 일요일에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오붓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리차드 러셀 상원의원을 아침식사에 초청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믿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물론 빌리 그래함은 존슨에게 위협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빌리 그래함의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서 연장통에서 연장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빌리 그래함이 권력투쟁의 상대자도 아니었으며 협상의 당사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잭 발렌티는 “미국의 정치현실에서, 대통령이 만났던 사람들 중에 빌리 그래함은 가장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또한 숨겨진 의도가 없었다. 모든 대통령들이 이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와의 만남을 즐겼다. 어느 누구도 그것의 가격을 매길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빌리 그래함이 워싱턴에 오는 일정을 미리 알게 될 땐, 존슨은 빌리 그래함에게 호텔예약을 취소하고 백악관에 머물라고 종용하였으며 주말은 캠프 데이빗 대통령 별장을 이용하라고 배려했다. 발렌티는 “빌리 그래함이 주일에 백악관에 머물며 기도하는 일이 수십 번 있었는데 거의 내가 수행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한번은 존슨이 빌리 그래함을 텍사스 농장으로 초청하면서 비행기를 보냈다. 침실은 존슨의 침실에서 빌리 그래함의 코고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에 배치되었다. 아침에 둘은 농장으로 걸어가 함께 닭의 숫자를 세기도 하고 달걀도 수집하고 옥수수 빵을 같이 먹었다. 또한 해리포트 품종의 돼지, 앙고라 품종의 염소 그리고 양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들은 덮개가 달린 차 링컨을 타고 농장일대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함께했다. 존슨이 성경을 이야기하면 빌리 그래함은 듣고 틀린 것은 교정했다. 이러한 만남으로 쌓은 친분으로 인해 존슨은 빌리 그래함의 전도집회에 최초로 참석하는 대통령이 되었다. 1965년 11월 10일간에 걸쳐 열린 휴스턴 부흥집회 마지막 날에, 존슨이 그곳에 참석한 것이다.

존슨의 아버지 샘 얼리 존슨은 직업이 소 검사관이었으며, 다섯 번이나 주 하원의원을 지냈으나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했다. 그는 거칠고 자존심이 강하고 정치적 야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 레베타 베인즈는 매우 교양 있는 여인이었지만 존슨이 출세해서 그녀를 기쁘게 하기까지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 그녀는 존슨이 3살 때 롱펠로와 테니슨의 시들을 암송하도록 하였고 가문의 유명한 선조들의 이야기를 했다. 특별히 그녀의 아버지요, 존슨의 외할아버지인 조셉 윌슨 베인즈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는 변호사요 교육자요 침례교 평신도 설교자였다. 그녀는 아들에게 신사다운 사람이 될 것과 고귀한 봉사에 종사하는 꿈을 불어 넣어주었다. 아들에 대한 그녀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 존슨이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였고 그 고민을 빌리 그래함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존슨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을 때, 그의 참모 중 하나가 빌리 그래함에게 “존슨은 당신의 격려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그가 어머니의 무릎 아래서 배웠던 것, 그가 종종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한 그것을 늘 그가 마음속에 새길 수 있게 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존슨은 매우 심각했고 숨김이 없었다. “이봐요. 빌리, 나는 그리스도를 진실로 그리스도를 영접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빌리 그래함은 알았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천국에 갈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빌리 그래함은 그때 존슨에게 정말로, 마음속으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했느냐고 매우 간명하게 물었다고 말했다.
“아, 빌리, 그렇게 고백했어요. 어린 시절 부흥회에 참석해서 고백한 이후, 그 후로도 여러 번 그렇게 고백했지요.”

존슨은 기껏해야 빌리 그래함을 통해 자신을 정화하려는 기본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었다. 존슨의 참모였던 마빈 핫슨은 “두 사람은 국가의 중대사에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기 위하여 함께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만약에 공적인 자리에서 빌리 그래함과 대담을 나누고 또 기도하게 될 때에는 존슨은 더욱 적극적이었다. 정부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중산층을 설득해서 인권이나 사회정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게 하려고 존슨은 고문변호사인 해리 맥퍼슨을 시켜 발표할 문안을 다듬었는데, 그 문안에 자신이 빌리 그래함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여러분들은 빌리 그래함 같은 존경받는 지도자를 갖고 싶어하고 ‘이런 지도자들이 하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 저는 빌리 그래함과 늘 이런 문제를 갖고 기도를 해왔습니다.

그들의 독특한 관계가 백악관의 참모들에게 눈에 띄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사평론가인 마리안느 민스는 “정치라고 하는 변하기 쉬운 사회에서, 점점 돈독해지는 현상을 보이는 아주 흥미로운 관계가 하나 있다. 그것은 민주당의 전도자인 린든 존슨과 침례교의 전도자인 빌리 그래함 간의 우정이다. 그들이 돈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린든 존슨 안에서 설교자의 욕구가 있었고, 빌리 그래함 안에는 정치가의 욕구가 있었다”라고 분석했다.

침례교 목사들을 대상으로 연설할 때 존슨은 “여러분들이 빌리 그래함과 빌 모이어스가 어느 날 함께 수영장 안에 있는 것을 보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수영을 한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번갈아가면서 서로 침례를 주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라고 농담을 했다. 캠프 데이빗의 수영장에서 존슨은 “빌리, 당신은 미국의 대통령이 될 만한 사람이요. 모든 사람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출마를 결심한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의 매니저가 되겠소”라고 빌리 그래함을 향해 말했기 때문에 함께 있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그것은 재미있는 농담의 하나였다. 또한 둘의 관계를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의 깊이를 보여준 하나의 일화이다. 존슨은 1964년에 자신의 힘으로 대통령에 출마를 하였고 마침내 케네디의 망령을 벗어났다.

제13장 빌리 그래함의 전쟁

그러나 그들의 분개는 룻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빌리 그래함에게 분명한 선을 그었다. “당신이 선거에 출마한다 해도, 국민이 이혼한 대통령을 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장인도 강력 반대했다. “장인이 말했지요, ‘자네, 당장 기자회견을 열게. 그리고 바로 그들에게 말하게.’ 저는 대답하기를 ‘지금은 한밤중에요! 지금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침이 되자마자 저는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만약 지명되어도 저는 출마하지 않습니다”라고 선언했다. “만약 당선되어도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설교자로 부르셨습니다.”그러나 빌리 그래함은 백악관에 있는 친구의 지도력을 확신하기 때문에 불출마하는 것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골드워터의 연설의 핵심이, 빌리 그래함이 설교에서 항상 강조해온 도덕적 타락이었다는 것이 그가 빌리 그래함에게 준 선물이라면 선물이었다. 두 사람은 이 나라와 국민이 풍요롭기는 하지만 행복하지도 평안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범죄는 증가하고 있었다(1964년 초반 6개월간 강도사건이 뉴욕에서 28% 증가했다). 매독 감염율의 증가로 청소년들의 도덕적 해이가 우려되었다. 술의 판매는 기록적으로 증가했으며 해변 가의 난동, 폭력배와 자살률이 증가 추세였다. 골드워터와 빌리 그래함이 보스턴에 함께 있게 되었는데, 골드워터는 빌리 그래함과 자신은        현 사회상에 대해 동일한 진단을 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다만 해결책에 있어 빌리 그래함은 하나님을 통한 영혼의 구원으로, 골드워터는 헌법을 통한 개선이 다를 뿐이었다. 골드워터는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했습니다”라고 경고하면서 만약 백악관부터 부도덕상태를 벗어난다면 전국적으로 범죄와 폭력이 하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음날 신문들은 빌리 그래함의 한 말을 실었다. “교회를 향한 빌리 그래함의 충언: 정치와 떨어져라.” 이것이 머리기사였다. 빌리 그래함은 “때때로 교회가 정치에 너무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와 거리를 두는 것만큼 더 좋은 일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권세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우리의 기도를 항상 명심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존슨이 압도적 승리로 마침내 당선이 확인되었을 때, 빌리 그래함은 그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그는 존슨에게 “저는 당신이 미국 국민의 선택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당신의 위대한 할아버지 베인스가 평신도 설교자로 봉사했던 것처럼, 당신도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확신합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후에 룻은 사람들에게 그해 빌리 그래함이 누구를 찍었는지 자신은 정말 몰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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