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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물연구

‘혼다(HONDA)’ 자동차의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

작성자신동|작성시간11.09.17|조회수684 목록 댓글 0

망치를 든 대장장이 아들의 아름다운 인생 연착륙

‘혼다(HONDA)’ 자동차의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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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HONDA)’ 자동차의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 1906 - 1991).

그를 추억하는 모든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이처럼 소탈한 그의 함박웃음 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혼다기연공업, 즉 ‘혼다(HONDA)’를 창업한 인물이다. 그는 대장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렸을 적 자동차와 비행기를 본 이후 기계에 대한 동경을 품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11살이었던 혼다는 비행기의 곡예비행을 보기 위해서 아버지의 돈을 슬쩍해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밤새도록 비행장까지 갔다고 한다. 190611월에 태어나 19918월 사망할 때까지 그는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가로 뛰어난 기술자로 그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다른 기업이나 재벌 업체와는 달리, 그의 혼다(HONDA)는 전후에 등장한 기업체로서 일본이 기술대국, 경제대국으로서 발돋움하는데 있어 커다란 브랜드 가치를 만든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장례식도 마다한 미련 없는 삶

 

태평양전쟁 패전 후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일본, 그 일본 경제계에 ‘하느님’이라는 닉네임이 붙은 두 명의 기업가가 있었다. ‘경영의 하느님’과 ‘기술개발의 하느님’. 앞은 세계적인 전기 메이커 마쓰시타의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요, 뒤는 역시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 혼다의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다.

 

1991년 여름, 일본 신문에 묘한 사진 한 장이 실렸다. 부음을 듣고 달려온 문상객을 문전축객하듯 돌려보내는 고약한 광경의 사진이었다. 장소는 도쿄 시내 아오야마에 자리 잡은 혼다의 모기업 혼다기연공업 본사 빌딩.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의 별세 뉴스가 세상에 알려진 다음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가뜩이나 자동차 탓에 길이 막혀 서민들이 애를 먹으니 절대 내 장례식은 치르지 말라!”는 소이치로의 별난 유언 때문이었다.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의 창업자가 문상객들이 승용차를 타고 몰려들 것을 염려하여 장례식 자체를 거절했다니 뉴스가 되고도 남았다. 유족과 지인들은 장례식 대신 ‘감사의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고인을 추모하는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는 교통체증을 우려해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혼다 소이치로. 영원한 기술자, 진정한 엔지니어. 타계하기 이틀 전에도 문병 온 후계자와 자동차 신기술에 관해 토론했다는 억척같은 ‘오야지’(그는 부하 직원들이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 구멍가게 같은 조그만 업체에서 친근함을 담아 주인에게 붙이던 ‘오야지’란 호칭을 더 반겼다. 한자로는 ‘親父’ 또는 ‘親爺’라고 적는다).

 

나중에 자전거포로 바뀌었지만 원래 소이치로의 집은 대장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망치를 두드려 뭔가를 만드는 광경에 익숙했던 셈이다. 게다가 소싯적 그는 방앗간에서 가솔린으로 정미기계를 돌리는 것과, 그때 풍겨 나오는 석유 냄새에 사족을 못 가눴다고 한다. 하필 방앗간이 집에서 10리나 떨어진 곳에 있어서 할아버지만 곤욕을 치른 모양이었다. 걸핏하면 소이치로가 할아버지를 조르는 통에 업고 방앗간 나들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反독서론’ 편 까닭


 

소이치로는 고향 시즈오카에서 오늘의 중학교라 할 고등소학교를 마쳤다. 하지만 학업에는 그다지 뜻이 없었다. 자전적 기록인 ‘털어놓고 하는 말(ざっくばらん)’에 이런 구절이 있다.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의 소년시절.

 

 

“학교는 싫었다. 이과나, 4~5학년에 배우는 식물과 곤충도 힘들었다. 6학년이 되자 전지니 천평, 시험관 등의 기계류를 만지작거릴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제일 싫어한 과목은 습자(習字, 서예), 그 다음이 읽기였다. 산수도 기하처럼 추리적인 것은 좋았으나 통째로 외워야 하는 것은 질색이었다. 좋아하는 이과도 선생님이 ‘이 문제를 아는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하면 말로는 대답을 곧잘 했지만, 시험을 치면 엉망이 되고 말았다. 표현방법이 서툰 데다 습자를 싫어했던지라 글자를 쓰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답을 적지 못하고 답안지를 내기 일쑤였다. 손재주는 그럭저럭 쓸 만하여 물건을 만드는 데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글로 쓰는 것은 도통 젬병이었다. 그러니 작문이나 습자 시간이 되면 너무나 싫은 나머지 교정 뒷산의 나무 위에 올라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잦았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소이치로는 독서 역시 기피했다. “책에는 과거에 관한 것밖에 나와 있지 않다. 나는 책을 읽노라면 거기에 얽매여 어쩐지 퇴보하고 말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견딜 수 없다”는 반(反)독서론을 폈다.

 

“대체로 나의 인생은 보고, 듣고, 시험해본 다음 그것을 종합하여 이렇게 되는 게 옳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려왔다. 만약 모르는 일이 생겨 책을 읽어야 한다면 나는 그럴 시간에 남에게 물어보는 쪽을 택하겠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소이치로는 중학을 마치자마자 도쿄에 있는 자동차 수리공장의 견습생이 되어 고향집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대장장이였으나 예사롭지 않은 인품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어린 나이에 고생길로 나서는 아들에게 ‘시간’의 공평함을 이야기한 것만 해도 그렇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왕이나 서민이나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것은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밖에 없다, 그러니 그 시간을 남보다 아끼고 귀하게 쓰라고 일렀다는 것이다.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가 고등학교 졸업 후 일했던

자동차 수리공장 '아트상회'

 

 

청년기에 이미 창업한 사업가가 된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 후 당시의 청년들이 하듯 취업을 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도쿄 분쿄(文京)구역에 남아있는 자동차 수리공장 '아트상회'에 들어가서 일했다. 남다른 재능과 열정을 보인 그는 6년 동안 근무하면서 실적을 인정받아 분점 형태로 독립하게 되었고 자동차 수리사업을 확장시켜서 중공업 분야에 뛰어들게 되었는데, 피스톤 분야에서 자신의 지식이 부족함을 깨닫고 바로 그 부족함을 메꾸기 위해서 대학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지금의 시즈오카공학부의 기계공학과에 들어가 3년간 금속학관련의 연구로 시간을 보낸 다음 자신의 공장을 종업원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중공업 분야의 경영에 매진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돈도 아니고 지위도 아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아버지의 가르침도 평생 소이치로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언젠가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버지가) 훌륭한 가르침을 남겨주신 것이 나로서는 억만의 부(富)를 뛰어넘는 위대한 유산이며, 그 유산에 대해서는 지금도 깊이 감사드린다”고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적이 있다. 가난 속에서도 의젓한 삶을 가르친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절절이 묻어나는 표현이었다.

 

 

 

 

‘인간 휴업’  선언

 

소이치로는 6년 동안의 견습생 수련을 거친 끝에 비로소 독립했다. 그의 자동차 수리 사업은 순조롭게 이뤄져 스물아홉에는 아내를 맞았다. 비록 전쟁통이었지만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아 수십건의 특허를 따는 등 착실하게 성장해나갔다. 그러나 지진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앗아갔다. 공장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는 깨끗이 손을 털고 일어섰다. 주변에 ‘인간 휴업’이라고 선언한 다음 1년을 푹 쉬기만 했다.

 

일본이 패전한 이듬해, 소이치로는 다시 기업을 일으켰다. 혼다기술연구소를 모체로 1948년에는 자본금 100만엔으로 20명의 종업원을 둔 현재의 혼다기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평생 고락을 같이한 영원한 동반자 후지사와 다케오(藤澤武夫)를 만났다.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의 동업자이며 고락을 같이한 영원한 동반자,

후지사와 다케오(藤澤武夫). 오른쪽 검은양복을 입은 사람이다.

 

 

이때부터 소이치로는 회사 경영은 부사장인 다케오에게 몽땅 맡기고, 자신은 오로지 기술개발에만 몰두한다. 그는 도쿄 본사에는 좀체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늘 공장에서 젊은 엔지니어들과 치고받고 어울리기를 즐겼다.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에피소드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느 날 혼다가 만든 부품 가운데 하나에서 문제가 발견됐다. 아이디어맨이기도 한 소이치로가 이렇게 고치면 어떨까, 저렇게 바꾸면 어떨까 하고 계속 의견을 제시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가는 생산 코스트가 너무 올라간다고 생각한 제작 담당자가 “1만개에 하나꼴이니까 고작 0.01%의 고장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냥 넘어가기로 하지요”라고 슬그머니 권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소이치로는 얼굴색마저 변하면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재수 없게 그 하나를 산 고객으로서는 확률이 100%잖아! 대관절 어디서 터무니없는 머리를 굴리려는 거야!”



 

오토바이 경주에 참가한

혼다 레이싱팀 선수들과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는 일본내에서 불량청소년들을 유발시키는 폭주족에게 오토바이를 제공하는 인물로 지명되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본의 학부형단체에게 비난을 받았던 이 시기에도 ‘일본 폭주족의 두목’이라는 소리에 굴하지 않고, "오토바이를 학생들에게서 빼앗기보다는 안전하게 타고 다닐 수 있는 교육을 하는 것이 교육기관이 가지고 있는 진실된 모습이지 않겠는가?"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밝혔다. 덕분에 그는 나중에 폭주족이 많았던 것으로 유명한 카나가와의 한 사립고등학교와 연계해서 오토바이를 비롯한 운전실습과 교육사업을 벌여 큰 호응을 얻었다. 이후, 국제 오토바이 경주나 포뮬러1과 같은 대회에 참가를 결심하고 결속을 다진 혼다 레이싱팀은 포뮬러국제대회에서 1987년에 1611, 1988년에는 1615승이라는 압도적인 결과를 내놓았고 자연흡기식 엔진이 채용된 이후인 1989년에도 1610승이라는 모습으로 챔피언 타이틀을 놓치지 않았다. 사진은 포뮬러1 오토바이 경주에서 우승한 혼다 선수다.  



 

소이치로 어록 가운데 ‘인간은 실패할 권리를 지녔다. 그렇지만 실패에는 반성이라는 의무가 따라붙는다’는 것이 있다. 그만큼 그는 도전정신을 높이 쳤다. 그의 또 다른 저서 ‘나의 생각’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은 앉거나 누워 있을 때에는 넘어지지 않는다. 무엇을 하느라 일어서서 걷거나 뜀박질하기 시작하면 돌부리에 걸려 벌렁 자빠지기도 하고, 가로수에 머리를 부딪힐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머리에 혹이 나거나 무릎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앉았거나 누워서 뒹구는 녀석들보다 훨씬 낫다. 큰 상처를 입어 병원으로 실려가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다음번에는 그런 실패를 저지르지 않고 달려야겠다는 뜻 있는 경험을 하게 되는 법이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앉거나 드러누운 인간이, 상처를 입거나 혹이 난 인간을 보고 비웃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자들은 마지막에 가서 자신들이 비웃음을 사리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바보천치들이다.”



 

1948년 자본금 100만엔으로 20명의 종업원을 데리고 시작한

혼다기연공업주식회사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성장한 것이다.

(사진은 1948년 당시의 모습)



 

소이치로는 싸고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이 기술자의 책임이라고 늘 강조했다. 그러나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같은 제품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기계인지라 성능을 철저하게 체크해야 하며, 그것이 이 분야에서 일하는 기술자의 숙명이자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자동차의 리콜과 같은 사태를 일부러 기피하려는 기업에 대해서는 ‘도덕의 결여’라며 호되게 나무라기도 했다.





 

“2등은 필요 없다

 

소이치로와 백년지기로 지낸 소니 명예회장 이부카 마사루는 소이치로가 타계한 ‘나의 벗 혼다 소이치로’라는 책을 펴냈다. 거기에 실린 ‘혼다씨의 골프 기술’이라는 항목이 웃음을 자아낸다.

 

소이치로는 환갑이 지나서야 골프를 배웠는데, 특유의 집중력과 탐구심을 발휘하여 실력이 금방 눈에 띄게 늘어났다고 한다. 어느 날 두 사람이 함께 플레이를 하게 됐다. 1번 홀에서 소이치로의 첫 티샷이 페어웨이 한가운데 서 있는 굵은 나무 아래로 굴러갔다. 그러자 소이치로가 대뜸 “이봐요, 캐디! 가서 톱 좀 가져와요!”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농담이었겠지만, 그것은 평소 장애물이 나타나면 그 장애물을 처치하고서라도 목표에 다가가는 소이치로의 삶의 철학을 반영한 에피소드로 들렸다. 그가 툭하면 “나는 설령 로빈슨 크루소의 외딴 섬에 떠내려가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으며, 기와 위에 씨를 뿌려도 싹을 틔우고 꽃이 피게 할 자신이 있다”고 장담했다는 이야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첫 공장을 세운지 13년 만인 1971스즈카 시에 설립한

혼다 스즈카 공장(Suzuka factory).



 

흔히 ‘혼다이즘’이라고 일컬어지는 혼다의 경영지침으로는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남의 흉내를 내지 마라. 둘째, 관공서에 의지하지 마라. 셋째, 세계를 겨냥하라. 여기에다 ‘만들어서 즐겁고, 팔아서 즐거우며, 사서 즐겁다’는 ‘세 가지 즐거움’이 보태지기도 한다. 그리고 ‘본업에 전념한다’는 사훈을 내세워 정치권과는 일절 교류를 거부한 것도 소이치로만의 고집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자신의 혈육을 끝내 기업으로 불러들이지 않은 것이 소이치로다운 가장 이색적인 기업관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은 주주들 모두의 것이지 어느 개인의 몫이 아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기업가는 물론이거니와 정치인들까지, 아니 하다못해 구멍가게에서도 세습이 일상화한 일본의 풍토에서 그것은 여간 돋보이는 고집이 아니었다.

 

당시 일부에서 소이치로의 동생이 중역으로 근무하는 것을 지적하며 은근히 비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동생은 회사를 차리던 초창기부터 함께 일해 왔던지라 소이치로의 지론에 배치되는 예외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나이 66세 되던 1973년 가을, 느닷없이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경천동지할 발표를 했다.

 

“내 역할은 이제 끝났습니다. 오늘부터 사장 자리를 45세의 젊은 가와시마 군에게 넘깁니다. 앞으로도 혼다를 잘 부탁합니다.”

 

아직 한창 일할 나이에 평생 동지 후지사와 다케오 부사장과 나란히 일선에서 물러났다. 남들처럼 회장 감투를 쓰지도 않았다. 다케오와 똑같이 ‘최고고문’이라는 명예뿐인 지위를 지닌 채 은퇴한 것이다.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경영에 간섭하지 않았고, 때가 되면 스스럼없이 물러나는 이런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2008년 현재 혼다는 이 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제6대 사장이 이끌고 있다.


 

소이치로가 자신보다 한 걸음 먼저 세상을 떠난 다케오의 장례식에 참석해 “(정열을) 불태울 만큼 불태운 뒤 우리는 함께 혼다를 그만뒀다. 행복했던 인생에 감사하네!”라고 한 추도사에는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나던 날의 소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미국 오하이오(Marysville, Ohio)

혼다 생산공장 설립을 추진하는 혼다 소이치로 회장.



 

소이치로가 쓴 책 가운데 ‘내 손이 말한다’는 것이 있다. 한시도 손에서 망치를 놓지 않았던 그이기에 왼손은 상처투성이였다. 또한 오토바이 레이스에 열중한 바람에 사고를 당해 몸에도 온통 상처가 남아 있었다. 소이치로는 그걸 빗대어 ‘상처투성이 인생’이라며 웃음 짓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천성이 남에게 뒤지길 싫어했다. 아무리 상처투성이에 기름때에 전 작업복 차림으로 살아도 1등 제품을 만들고자 애썼다.

 

일본 정부가 그의 공로를 평가하여 ‘훈(勳) 2등’ 훈장을 수여하겠노라고 타진해왔을 때의 일화다. 소이치로는 뜸도 들이지 않고 획 고개를 모로 꺾었다. 그러면서 “2등은 필요 없다”고 쏘아줬다. 머쓱해진 일본 정부는 훗날 소이치로 사후에야 ‘훈 1등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추서할 수 있었다.



 

혼다(HONDA) 자동차 조립공장.


 

도요타, 닛산과 함께 일본의 ‘빅3’로 불리는 자동차 메이커 혼다(HONDA)의 생산공장. 사진의 South Marston 공장은 축구장 180개의 크기이며 매 80초 마다 혼다자동차 1대가 생산되고있다. 1948년 혼다기술연구소를 설립해 모터사이클을 만들기 시작한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의 능력과 집념으로 오늘날 혼다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으며 세계 도처에 이와 같은 생산공장이 있다.



 

오늘날 세계 제일의 자동차회사로 꼽히는 도요타의 본거지 지명이 도요타시(豊田市)다. 원래의 동네 지명은 고로모였으나 대다수 주민이 도요타 덕에 생계를 이어가는지라 아예 지명마저 도요타로 바꿔버린 것이다. 1959년의 일이다.





 

“발명은 연애다"

 

혼다는 미에현 스즈카시에 공장을 지었다. 처음에는 스즈카보다 조건이 나은 기후현 오가키시 쪽이 유리했다. 그런데 현지를 둘러본 뒤 소이치로가 스즈카를 택했다. 그 까닭이 평소의 소이치로다웠다.

 

오가키 시청을 방문하자 냉방이 잘 된 방에서 오렌지주스 대접을 받았다. 반면 스즈카 시청에서는 담당 공무원이 떫은 차 한 잔을 내놓더니 성실하고 열성적으로 유치 설명을 했다고 한다. 소박하면서도 열의에 넘치는 그 태도가 소이치로를 반하게 만들었다. 그 후 공장이 완공되기 직전, 스즈카시가 도요타시를 흉내 내듯이 지명을 혼다시로 변경하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해왔다. 보고를 받자마자 소이치로는 즉석에서 이런 논리를 내세워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전통 있는 지명을 일개인의 이름으로 바꾼다는 것은 얼토당토않다.”

 

하기야 그는 회사 이름을 자신의 성을 따 혼다라고 지은 것조차 두고두고 후회했다. 걸핏하면 오랜 친구 이부카 마사루가 회사 이름을 소니로 한 것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혼다(HONDA)가 생산한 실용적인 자동차들.

 

 

“발명은 연애와 마찬가지다. 괴롭다고 여기면 괴롭다. 즐겁다고 여기면 이토록 즐거운 일이 따로 없다!”면서 공장의 엔지니어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다그쳤다는 소이치로. 두 바퀴(오토바이)에서 세계 정상에 서자 네 바퀴(승용차)로 시야를 넓힌 그는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89년 미국의 자동차전당에 모셔지는 영예를 누렸다.

 

그렇게 세상의 이목을 끈 인물이 되고서도 “비행기는 이륙할 때보다 착륙할 때가 더 어려워. 인생도 마찬가지야!”라고 엄살 아닌 엄살을 떤 괴짜 영감, 그는 너무나 아름답고 멋지게 착륙의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세인들로 하여금 또다시 감탄하게 만든 뒤 먼 길을 떠났다.

 

 

/ 조양욱(일본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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