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언제나 시거(여송연)를 입에 물고있다.
현대극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서사극, 소외효과가 그를 설명하는 중요 단어들이다.
그는 극작가이기 전에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브레히트 자신의 생가 앞에서 포즈
인류를 발전시킨 창조적인 원동력은 노동이며,
노동은 개인을 위한 땀방울이 아니라 인류라는 씨, 종(種)을 위해 쏟아 붇는 노력이라고 믿는
그는 마르크스주의1자다.
연극적 환상을 일으키는 전통에서 벗어난 그의 서사극(敍事劇)2을 통해
나치를 조롱하고 반나치주의에 앞장 섰다.
그는 드라마를 좌익운동을 위한 사회적·이데올로기적 토론장으로 발전시켰다.

언제나 그의 손가락에는 시가가 있다.
시가가 없는 시간에는 펜이 쥐어 있든지.
내 방 벽에는 일본제 목제품인
황금색 칠을 한 악마의 가면이 걸려 있다.
그 불거져 나온 이마의 핏줄을 보고 있노라면
악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 <악한 자의 가면>3이라는 시다.

물질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생산이 그 원동력이고 노동은 인간을 이상사회로 운반해가는 도구일 것이다.
이 창조적인 노동 에너지의 땀과 눈물에 의한 소작을
하찮은 임금을 주고 도둑질하는 부루주아지 계급을 경계했다.
세계는 자본가 계급에 의해 소유되고 있다.
노동력에 참여하지 않은 그들은 임금이라는 장치로 착취한다.
마르크스는 이런 현실적인 모순을 '소외'라고 표현했다.
브레히트도 그의 소외효과에서 ‘소격’ 대신 헤겔의 ‘소외’라는 말을 쓴 적이 있다.

소외 (疏外, alienation)4란
자신의 주변으로 부터, 노동이나 노동의 산물들이 자아로부터 멀어지거나
분리된 감정 상태를 가르키는 말이다.
그가 연극에서 처음으로 주창한 소외효과(疎外效果)라는 것은
말하자면 마르크스적 사고의 환경에서 시작 되었다.
‘소격 효과' 혹은 이화효과(異化效果)’5는
간단히 말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이상스럽고 낯설게 보이도록 거리를 만드는 수단이다.
관객이 스토리에 빠져들면 연극에 <동화(同化)>되자만, 그렇게 되면 비판을 잃어버린다. 적당한 거리를 만들어 연극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이론이며 기술이다. 브레히트의 장치들은 이 목적에 부합된다. 브레히트는 자주 관객에게 회상에 젖거나 연극에 빠져들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밤 장면조차 강한 조명을 썼다. 무대를 낯설게 함으로써 객석과 거리를 두기를 희망했다. “희곡의 묘사는 내용과 사건을 하나의 소외 과정에 종속시켰다”고 했다.

브레히트는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에서 무대 위에 도덕 문제와 현대의 사회현실을 재현하여 관객의 지성에 호소하려 했다.
그는 관객의 감정적인 반응을 차단하고자 했으며 관객이 등장인물과의 감정이입을 통하여 연기에 사로잡히는 경향을 방해하고자 했다.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그는 '소외효과(이화효과)'를 사용하여 관객들이 연극에 공감하는 것을 막고,
연극에 대하여 몰입하는 대신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연극의 주제를 심사숙고하게 하여
그것을 이해하며 그 주제에 대해 지적인 판단을 내리도록 유도했다.

초기의 희곡에는 표현주의적인 경향도 남아 있었다. 처녀작인 <바알>, 출세작이 된 귀환병극(歸還兵劇) <밤의 북>, 인간소외의 문제를 앞세운 <도시의 정글>에는 아직 안비바렌트한 도취나 익살, 조소의 빛이 강하지만 차츰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어져, 대상에의 거리적(距離的)인 태도는 사회적인 인식을 구하는 새로운 서사적 연극의 주요한 수법인 이화효과(異化效果)를 낳았다. <사나이는 사나이다> 그리고 실지교시(實地敎示)를 중시한 일련의 교육극의 시도는 이미 그러한 지향(志向)을 보인 것이다. 단순한 정감에 흐르지 않는 음악과 극의 새로운 종합을 구하는 방향은 작곡가 바일의 협력을 얻어 <싸구려 오페라>(1928)와 <마하고니시의 흥망>(1930)을 낳았다. <도살장의 성 요한나>와 <모친>은 정치적으로 가장 첨예한 극이다. 불우한 망명생활 중 그의 연극론은 차츰 체계화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걸작 <배짱 센 어머니와 그 아이들> <푼틸라 나리와 하인 마티> <세추안의 선인(善人)> <코카서스의 백묵원(白墨圓)> <갈릴레이의 생애> 등을 연달아 집필, 전후에는 동베를린으로 넘어가 베를리나 앙상블을 결성하고 실제의 연극활동을 통해서 그의 연극의 혁신적인 의의를 무대 위에서 입증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모았으나 변증법적 연극으로 발전시키는 도상에서 세상을 떠났다.

젊은 날의 브레히트,
의사가 되기 위해 뮌헨대학 의학부 재학 중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이 무렵 그는 위생병으로 소집되어 육군병원에서 근무하였다.
아우구스부르크 군병원에서 위생병으로 일하면서 첫 희곡 <바알신Baal>과 첫 성공작 〈밤의 북소리 Trommeln in der Nacht〉(1922, 클라이스트 문학상 수상), 시와 노래 모음 〈가정용 설교집 Die Hauspostille〉(1927), 최초의 본격 희곡 〈에드워드 2세 Edward Ⅱ〉(1924) 등을 썼으며, 이 당시에는 베데킨트, 랭보, 비용, 키플링과 같은 작가들을 숭배했다.

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와 그의 아내인 여배우 헬레네 바이겔(Helene Weigel)이
5월 1일 메이데이(노동자의 날) 퍼레이드에 참가하고있다.
브레히트 부부가 평생 일구었던 베를린 베르너 앙상블 극단 (Berliner Ensemble)6표지가 보인다.
브레히트는 1922년 처음으로 결혼한 뒤 1924년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여배우인 바이겔을 만나게 된다. 브레히트는 1927년 첫 아내와 이혼한 뒤 1929년 바이겔을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한다. 브레히트는 히틀러에 격렬하게 맞서며 오랜 기간 망명과 도피를 거듭했는데 바이겔은 평생 브레히트의 동반자 역할을 했다. 부부는 1949년 베를린에 '베를리너 앙상블(Berliner Ensemble)'이라는 극단을 함께 세웠다.

서푼짜리 오페라 The Threepenny Opera (Die Dreigroschenoper) 1928년 초연 포스터
대본은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이 번역한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 Beggar's Opera〉를 각색한 것이다. 서막과 8개 장면으로 구성되었으며 1928년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 원작의 줄거리를 따르되 배경을 빅토리아 시대 런던의 슬럼가로 바꾸었고, 1920년대 베를린의 사회적 상황을 풍자했다.

1980년 서푼짜리 오페라의 무대
브레히트는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 함께 성공을 거둔 풍자적인 민속 오페라 〈서푼짜리 오페라 Die Dreigroschenoper〉(1928)와 〈마하고니 시(市)의 흥망 Aufstieg und Fall der Stadt Mahagonny〉(1930)을 썼다.

1950년 브레히트 자신이 연출했던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 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1941)의 무대
30년전쟁을 배경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며 세 아이를 차례로 잃어버린 억척어멈의 운명을 통해 무의미한 파괴력을 지닌 전쟁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참혹한 전쟁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는 억척어멈의 모습을 보며 관객이 도리어 교훈을 얻게 되는 내용으로, 교훈극을 강조한 브레히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브레히트 바이겔 기념관7은 바로 이 베를리너 앙상블 인근에 자리를 잡고 있다.
브레히트와 그의 아내 무덤 표석.
기념관의 전시공간은 실제 부부가 1953년부터 살았던 거주지였으며 두 사람이 1956년과 1971년 각각 생을 마감한 장소이기도 하다. 기념관 안에는 부부가 사용했던 가구와 생활 용품 등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또 브레히트의 소장 도서 4000권도 보관돼 있다.

1923년 칼 발렌틴이 공연한
이발소의 미스터리

에드워드 2 세
The Life of Edward II of England
1982년 리버사이드 세익스피어 극단의 뉴욕공연 포스터
에드워드 2세 (Edward II)8는 16세기 크리스토퍼 말로의 역사비극을 브레히트가 각색한 작품

리버사이드 셰익스피어 극단은 1977년 뉴욕에서 찰립된
셰익스피어 레퍼토리 전문 극단이다.
브레히트는 우선 많은 양식과 서법(敍法)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극작가로서는 아주 강도 높은 연구자로, 잠시 떠오른 착상이라도 끊임없이 엮어갔는데 이러한 그의 착상은 항상 자신의 것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서푼짜리 오페라〉는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 Beggar's Opera〉에, 〈에드워드 2세〉는 말로의 〈에드워드 2세〉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는 또한 냉소적인 유머와 아울러 드물게 음악적·시각적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생동적인 성격을 창조한다거나 극에 긴장과 구체적 형식을 부여하는 데는 종종 실패했다. 연출자로서 그는 밝고 분명하고, 단단하게 짜여진 서사적 구성을 좋아했으며, 독일 연극을 그 본성에 반하여 소극적으로 연기하게 한 완벽주의자였고, 자신이 선호하는 것뿐 아니라 결점에서도 원칙들을 이끌어낸 이론가였다.
베를린의 베를리너 앙상블 극장 야외에
브레히트의 기념 동상

1988년 독일연방정부가 발행한 브레히트 기념 우표

브레히트의 연극미학- 변증법적 연극 9
이재진 (단국대학교 독문과 교수, 극단 우리극장 대표)의 글 하나를 비망록에 올려둔다.
베르톨드 브레히트 ( 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 ) 생애10에 관한
가장 야무진 설명을 아래 미방록에 주석으로 달아 놓는다.
041 베르톨트 브레히트
- 마르크스주의 (Marxism)
인간 셰게의 유토피아를 향한 19세기 중반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발전시킨 일단의 학설체계이다.
인간학, 역사철학, 정치·경제 이론의 3부분이 상호연관을 맺고 있다.
이들을 결합시켜 일관된 논리체계를 형성하려는 마르크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말년, 특히 사후에 내려진 다양한 해석과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로서 채택된(1917) 이후의 정치적 요청으로 말미암아 많은 타협과 절충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는 공산주의·사회주의 제정당의 이념과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여러 사상가들의 정치·사회·경제 이론을 포괄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창조력에서 인간만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을 발견한다. 창조력이란 필요의 충족을 위해 자연이라는 대상에 쏟는 인간의 노력과 노동력이며, 여기서 노동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인류라고 하는 하나의 종(種)을 위한 노력이다. 인간의 통제범위를 벗어나기도 하는 복잡다단한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이와 같은 이상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창조적인 에너지 혹은 노동력을 투여하는 개인군(프롤레타리아트)과 임금을 주고 이 노동의 산물을 도용하는 계급(부르주아지)이 따로 존재하며,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창조된 세계가 실제로 노동에 참여하지 않은 자본가 계급에 의해 소유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러한 현실의 모순을 ' 소외'라는 말로 표현했다. 노동자 계급이 노동의 결실을 회복하게 되는 그날이 도래할 때, 소외는 극복되고 모든 계급의 구분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계급투쟁과 계급 없는 사회의 이념은 마르크스 이전에 이미 제창되고 있었다. 공동체 내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갈등을 유발한다는 착상은 멀리 투키디데스의 저작에까지 소급되며, 기존 경제체제의 비판 위에 계급없는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갖가지 사상들이 19세기의 첫 10년 동안 꽃을 피웠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 2가지 이념을 색다른 방식으로 결합시켰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는 자신이 생각하는 유토피아가 어떠한 것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도달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데 있었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을 역사의 추진력으로 간주한 뒤 인류의 역사는 계급 없는 사회의 출현으로 정점에 오를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고 시작되는 〈공산당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의 - 에픽 드라마 혹은 서사극 (敍事劇, epic theatre (독)episches Theater)
오늘날 서사극은 대부분 1920년대부터 독일의 극작가이며 감독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전개한 연극의 이론 및 실제와 관련되어 있다.
전통적인 희곡 구성방식(시간이나 긴장감·반전·경악·폭로 등)과 관계 없이 일련의 사건들을 전개하는 희곡 양식.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극론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생겨났다.
서사극이란 정통연극에서처럼 카타르시스를 통해 우리의 정신을 정화하고 스스로 승화된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관찰을 통해관객 스스로에게 판단력을 부여해야 한다는 이론으로 감정보다 이성에 호소하는 연극이다. 브레히트는 <사실주의 예술이란 투쟁의 예술이다. 그것은 현실의 그릇된 개념과 싸우며 인류의 진정한 이익에 거스리는 모든 충동과도 싸운다>라고 주장하며, 연극의 현실참여를 강조했다. 브레히트는 현실개혁의 방법을 연극을 통한 교육에서 찾았는데, 이러한 점에서 그의 연극론은 <변증법적 연극> <교육적 연극>이라고 한다. 교육방법으로는 이화(異化) 기법을 중시하는데 브레히트에게 있어서 이화효과란 희곡의 서사화(敍事化)를 위한 예술기법으로 대상을 인식하게 하되 그 대상을 낯설게 하는 묘사방법이다. 즉, 대상을 인식시키되 그 인식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일상적이고 평범한 측면을 생소하게 만들어 비일상적이고 낯선 것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이화효과의 성립과정에서, 브레히트는 동·서양을 포괄적으로 받아들여 그의 연극론을 완성시켰으며, 특히 중국과 일본의 연극기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기법의 발전과 아울러 예술적 사고의 원리, 즉 기법의 사용에 우선한 사고의 원리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브레히트의 이러한 관점은 어떤 사상적인 측면을 떠나서 진정한 예술의 사회적 기능, 연극의 사회적 기능을 재인식시켰다고 할 수 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러시아의 감독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가 발전시킨 서사극과는 완전한 대조를 이루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연출방식과 자연스러운 연기로써 관객들에게 무대 위에서의 행위가 '현실'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중국 연극의 전통에 영향을 받은 브레히트는 배우들에게 그들 자신과 그들이 연기하는 극중인물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가르쳤다. 그의 배우들은 내적 생활과 감정을 무시하고 사회적 관계의 표시로서 틀에 박힌 외적 행위를 부각시켜야 했다. - <악한 자의 가면> 브레히트의 시, 김길웅 옮김, 청담사 (1991 )
- 소외 (疏外, alienation)
사회과학에서 자신의 주변, 노동 및 노동의 산물, 자아로부터 멀어지거나 분리된 듯한 감정상태를 가리키는 말.
현대 사회생활을 분석하는 데 많이 쓰이지만 이 소외라는 개념은 여전히 난해한 개념으로 남아 있다. 가장 보편적인 의미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무력감:자신의 운명이 자기 스스로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외적인 힘이나 숙명, 또는 운이나 제도의 작용에 의해 결정되는 듯한 느낌, ② 무의미성:세상사나 대인관계와 같은 모든 활동영역에서의 이해가능성 또는 일관된 의미의 부재, 또는 삶에 대한 전반적인 목적상실감 등, ③ 무규범성:공유된 사회적 행위규범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광범위한 비행의 확산, 불신, 무제한적인 개인의 경쟁 등을 초래하는 것, ④ 문화적 소외:사회의 기존가치들로부터 멀어져 있는 듯한 감정으로, 예를 들면 관습적인 제도에 대한 지식인이나 학생들의 저항에서 볼 수 있는 감정, ⑤ 사회적 고립:사회적 관계에서 느끼는 고독감이나 배척감, 즉 소수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고립감, ⑥ 자기소외:정의하기가 가장 어려운 개념이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중심주제가 된다. 여러 가지 점에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괴리감을 말한다.
서구 사상에서도 소외개념은 항상 인식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1935년 이전에는 사회과학의 주요참고 서적에 소외에 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19세기와 20세기초에 이미 카를 마르크스, 에밀 뒤르켐, 페르디난트 퇴니에스, 막스 베버, 게오르크 지멜의 사회학 고전들에는 소외개념이 암시적 또는 명시적으로 나타났다. 그중 자본주의하의 소외된 노동을 얘기했던 마르크스의 소외개념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하의 노동은 자발적·창조적이기보다는 강제적이며, 노동자는 노동과정을 거의 통제할 수 없다. 노동의 산물은 타인이 전유(專有)함으로써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데 사용되고, 노동자 자신은 노동시장에서 하나의 상품이 된다. 소외는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신의 '종적인 존재'(species being)를 실현할 수 없으며 노동 속에서 인간의 본질이 실현되지 않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현대사회의 소외에 관한 사상 가운데 한 가지 흐름을 대표하고 있을 뿐이다. 2번째 흐름은, 탈소외(dealienation)의 전망에 관해 마르크스주의보다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지만, 이른바 ' 대중사회' 이론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입장이다. 1 - 소외효과 (疏外效果, alienation effect)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기법.
끊임없이 가상(환상)과 실제를 구분하도록 인간의 의식을 자극하는 것.
인간은 자발적으로 환상과 실제의 거리감을 무너뜨릴 수 있고, 어떤 영화나 연극에서 그 사람이 그러한 상태에 빠져들었다면 그것은 그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해 다른 사람이 의도적으로 그의 선택을 방해하는 행위는 거부감을 낳을 수밖에 없다. 연극에서 현실의 친숙한 주변을 생소하게 보이게 하여, 극중 등장인물과 관객과의 감정적 교류를 방지하게 하는 것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소외효과를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하여 충격적인 것, 즉 설명이 필요하며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제시하는 수법이라고 정의했다.
소외효과의 목적은 관객이 무대의 사건에 대해 연구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다. 즉 일상적인 것을 예기치 못한 것으로, 극적 환영을 깨트림으로써 무대 위의 사건에 대한 새롭고 친숙하지 않는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다. 브레히트는 소외효과로서 관객이 극적 사건에 대해 거리를 갖게 하고 지금껏 당연히 받아들이는 일을 비판적 사건으로 바라보게 한다. 관객의 감정이입을 거부하고 관객의 냉철한 이성과 비판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극으로부터 관객을 멀어지게 하고, 관객들이 극중 연기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킬 수 있게끔 고안된 기법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기법의 예로는 스크린 위에 해설 자막이나 삽화를 투영하는 기법, 배우들이 장면과는 관계없이 작품의 개요를 설명하거나 강의하고 노래를 부르는 기법, 어떤 특정 장소를 나타내지는 않지만 조명과 밧줄을 노출시킴으로써 관객들이 연극을 관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무대장치 등이 있다. 관객들이 등장인물과 극중 사건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정도를 제어함으로써 관객이 극중에 반영된 '현실' 세계를 더욱 명확히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 베를리너 앙상블(Berliner Ensemble)1949년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동베를린에 세운 극단.
이 극단은 브레히트가 1949년 1월 자신의 작품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 Mother Courage and Her Children〉을 연출한 독일 극단의 지부로 출발했다. 원래는 순회극단으로 계획되어 이 극단의 주연 여배우이자 조감독인 브레히트의 아내 헬레네 바이겔을 비롯해 주로 독일 극단의 젊은 단원들로 구성되었다.
1949년 11월 〈푼틸라 씨와 그의 하인 마티 Mr. Puntila and His Servant Matti〉의 제작을 시작으로 주로 브레히트 자신이 쓰거나 각색한 작품들을 공연했다. 1954년 자체 극장인 테아터르 암 시프바우어담으로 옮겨 동독의 독립적인 주립 극단으로 확립되었다.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1954)과 〈코카시아의 백묵원 The Caucasian Chalk Circle〉(1955)으로 파리를 2차례나 방문한 것을 비롯해 유럽 곳곳에서 여러 차례 순회공연을 하여 국제적인 명성과 높은 평판을 얻었다. 1956년 브레히트가 죽은 뒤 헬레네 바이겔이 감독으로, 가끔 다른 감독과 함께 1971년 죽을 때까지 일했다. 그녀가 죽은 뒤에는 루트 베르가우스가 그녀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 브레히트 바이겔 기념관 (brecht-weigel memorial house)은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와 아내 바이겔에 관한 자료를 주로 전시하는 기념관이다.
1978년 2월 10일에 설립 되었고 독일 베를린 카우제 거리 125에 있다.
20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진보적 사상가로 존경을 받고 있는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와 그의 아내 헬레네 바이겔(Helene Weigel, 1900~1971)에 관한 자료를 주로 전시한다.
주요 전시물은 브레히트 부부가 남긴 다양한 유물들이다. - 에드워드 2세 [Edward II, 1284.4.25~1327.9.21]
플랜태저넷왕가의 잉글랜드 왕(재위 1307∼1327). 아버지가 쌓아올린 대외·대내적인 왕권의 신장을 축소시켰고 스코틀랜드 정벌에 실패하였다.
웨일스 카나번 출생. 에드워드 1세의 아들. 카나번의 에드워드(Edward of Caernarvon)라고도 한다. 의지가 강하지 못하고 적극성이 없어, 아버지가 쌓아올린 대외·대내적인 왕권의 신장을 축소시킨 결과를 초래하였다. 1314년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스코틀랜드 정벌을 도모하였으나 대패하여 실패하였다. 1326년 9월 왕비 이자벨라가 총신(寵臣) 모티머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켜, 퇴위를 강요받아 폐위되고 아들 에드워드 3세가 그뒤를 이었다. 그뒤 투옥되었다가 살해되었다. 영국 황태자의 칭호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부왕이 웨일스 정벌기념으로 황태자 시절의 그에게 붙여 준 데서 비롯되었다.
[출처] 에드워드 2세 [Edward II ] | 네이버 백과사전 - 브레히트의 연극미학- 변증법적 연극
1. 서사극의 등장
브 레히트로 대표되는 서사극은 사실 많은 작가와 연출가들이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실험했던 보편적인 연극운동으로, 사실 20세기에 갑자기 등장한 연극적 실체가 아니다. 이 실험은 로마시대의 플라우투스의 희극이나 중세 도덕극, 꼬메디아 델 아르떼, 동양연극 등 여러 연극형태에 이미 들어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자연주의 연극운동에 이어 등장한 표현주의 연극운동도 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점차 그 열기가 수그러들고, 20세기를 주도한 희곡작품들은 대부분이 서사극적 기법과 구조로 짜여지게 된다. 이야기체(epic)의 일부 기능을 극적(dramatic)의 구조 속에 차용하는 데 성공한 서사극(the epic theatre)은 이로써 가장 애용되는 20세기의 연극형태가 되었다. 브레히트가 30년대 후반 서사극을 정립하기 이전에 연출가 피스카토아는 서사극 무대를 실험하였고, 우리의 경우 처음 소개된 본격적인 서사극도 손톤 와일더의 ????우리 읍네????이지 브레히트의 작품은 아니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서사극을 다른 사람들의 서사극과 구별한다. 그렇기 때문에 브레히트는 자신의 서사적 연극을 ‘非아리스토텔레스 연극’이라고 부르다가 때로는 ‘자연과학시대의 연극’, 만년에는 ‘否定의 否定을 통한 변증법적 연극’ 등으로 불렀다. 서사극 기법을 사용하거나 작품의 구성 등에서는 다른 서사극 작가들과 큰 차이가 없지만 서사극을 통해서 관객과 만나려는 그 목적에서 일반 서사극과의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즉 전통연극기법에 식상한 관객을 서사극이란 새로운 기법을 통해 계속 무대 앞으로 유혹하려는 목적에는 차이점이 없지만 서사기법으로 무장한 무대를 통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관객과 함께 토론하며, ‘변화시켜야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관객을 설득하고 선동하는데 브레히트의 특징이 있다. 이런 기본입장이 브레히트 작품의 주제이다.
2. 변증법적 연극
이 런 주제를 담고 실체화시키기 위한 브레히트의 변증법적인 연극기법이 바로 ‘생소화’(지금까지는 주로 ‘소외’라는 이름으로 번역됐음)이다. ‘생소화’ 개념은 헤겔의 인식과정에서 출발한다: ‘어떤 사실을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대상이 바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정의 부정을 통한 변증법적인 과정을 통하면 올바르게 인식의 길에 도달하게 된다. 생산적이고 비 - 브레히트(Bertolt Brecht)
본명은 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
1898. 2. 10 독일 아우크스부르크~1956. 8. 14 베를린.
독일의 시인·극작가·연극개혁가.
바이에른 지방에서 태어나 뮌헨에서 의학을 공부하고(1917~21), 군 병원에서 복무하면서(1918) 1924년까지 바이에른에서 살았다. 이 시기에 첫 희곡 〈바알 신 Baal〉(1923 공연)과 첫 성공작 〈밤의 북소리 Trommeln in der Nacht〉(1922, 클라이스트 문학상 수상), 시와 노래 모음 〈가정용 설교집 Die Hauspostille〉(1927), 최초의 본격 희곡 〈에드워드 2세 Edward Ⅱ〉(1924) 등이 나왔으며, 베데킨트·랭보·비용·키플링과 같은 작가들을 숭배했다. 이 시기에 또한 반부르주아적 태도가 격렬해졌는데, 이런 태도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무너져버린 서유럽 문명에 대한 그 세대의 깊은 실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브레히트의 친구 중에는 조롱과 인습타파적인 풍자를 통해 부르주아 예술의 잘못된 표준이라 여긴 것을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다다이즘 운동의 일원들도 있었다. 1920년대 후반 그에게 마르크스주의 원리를 가르쳐준 사람은 제국의회의 공산당원이었다가 1926년 독일 공산당에서 쫓겨난,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카를 코르슈였다.
베를린에서는(1924~33) 잠시 막스 라인하르트 감독과 에르빈 피스카토르 감독을 위해 일하기도 했으나 주로 자신의 동인들과 함께 일했다.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 함께 성공을 거둔 풍자적인 민속 오페라 〈서푼짜리 오페라 Die Dreigroschenoper〉(1928)와 〈마하고니 시(市)의 흥망 Aufstieg und Fall der Stadt Mahagonny〉(1930)을 썼다. 또한 자신이 '교훈극'(Lehrstücke)이라고 부른 정통 연극의 테두리 밖에서 상연하기 위한 매우 교훈적인 작품들을 썼는데, 후에 바일, 힌데미트, 한스 아이슬러가 이 작품들에 곡을 붙였다. 이 시절 자신의 ' 서사극' 이론과 부정형 운문으로 된 간결한 형식들을 발전시켰으며, 그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1933년 스칸디나비아로 망명했으며(1933~41), 주로 덴마크에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1941~47) 할리우드에서 영화제작에 참여했다. 한편 독일에서는 그의 책이 불태워지고 시민권이 취소되었으며 독일 연극계에서 작품 상연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1937~41년에 대부분의 위대한 희곡을 비롯하여, 주요 이론적 평론과 대담, 그리고 〈스벤보르거 시집 Svendborger Gedichte〉(1939)으로 출판된 많은 시들을 썼다. 이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