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에버하르트 호르스트,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
오늘은 가볍게 사랑얘기 하나 해보도록 하죠.
중세시대의 한복판이었던 1079년 프랑스 브르타뉴에서 ‘피에르 아벨라르’라는 남자가 태어납니다. 천 년 전 시대의 기록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이 남자에 대한 어린 시절은 딱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대략의 정보는 일찌감치 고향을 떠나 저명한 학자인 샹포의 기욤 문하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정도죠. 문제는 이 친구가 너무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특히 논리학 부분에서 실력이 워낙에 출중하여 일찍이 스승을 넘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을 이뤄냈고, 중세시대의 핵심교과목인 신학은 아예 혼자 독학해서 유명세를 날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114년, 그는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로 당시 철학과 신학 분야의 최고봉인 파리 노트르담 성당 부설 학교의 강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천재였죠, 천재.
헌데, 뭐랄까, 이 친구는 30대 중반이 되도록 여자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없이 공부만하여 달려온 그런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사회성도 꽤나 떨어졌는지, 자신의 이런 무지막지한 재능으로 거침없이 출세하면서 뒤로 재낀 동료나 스승들에게 미움을 샀지요. 뭐, 예나지금이나 뛰어난 사람이 시기와 질투에 시달리는 일은 일반적인 현상입니다만, 중에서도 아벨라르는 퍽이나 고지식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실력대로 승부한 것이니 거기에 딱히 감정이 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더군요. 뭐, 글자 그대로 보자면 이게 딱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세상일이란 게 더러워서 꼭 그렇게만 돌아가지도 않죠. 때로는 잘하고도 죄송하다고 사과해야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게 세상이라는 희극ㅡ혹자는 비극이라고도 합니다ㅡ상의 무대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결론은 아벨라르는 적이 많았어요. 자신이 쓴 고백록에선 아예 “세상이 날 증오하기 된 것은 논리학 때문이오.”라고 적어놓기도 했죠.
자, 잠시 얘기를 돌려서 1100년, 그러니까 아벨라르가 스물 내지 스물 한 살이었고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한창 철학자·신학자로 성공을 거듭할 무렵, 파리에서 ‘엘로이즈’라는 여자가 태어납니다. 그녀는 출생신분이 나쁘지 않았는데, 퓔베르라고 하는 대성당 참사회원의 조카딸이었지요. 그리고 숙부 퓔베르는 그녀를 끔찍이 아껴서 조카딸의 교육ㅡ중세니까 당연히 신학이었겠죠ㅡ에 유익한 일이라면 물불가리지 않고 적극적인 지원을 해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고가의 교육들 때문인지 그녀는 일찍이 지성에 눈을 떴고, 기록에 따르면 그 박식함 못지않게 미모로도 유명세를 달렸다고 합니다.
이쯤 적으면 대강의 그림이 그려지지요. 한창 성공가도를 달리는 당대 최고의 삼십대 중반의 철학자와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19살의 숙녀. 둘 다 파리에서 살았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소문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어쩌면 교회에서 몇 번 마주치면서 서로 낯에 익은 얼굴들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공부만 하고 살아온 샌님 아벨라르가 자신보다 근 스물 살 연하인 엘로이즈에게 홀딱 빠져버렸다는 것이지요.
진짜 수도사처럼 삼십 평생 사랑을 모르고 살았던 아벨라르는 이 사랑이란 감정에 완전히 도취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았던 시대가 사랑과 정분을 그토록 혐오스러워했던 시대라는 것을 완전히 망각해버린 채, 또한 자신이 일궈낸 위치와 신분을 망각해버린 채 엘로이즈에 대한 사랑에 투신해버리게 되지요. 꽤나 철저했던 그는 자신의 철학자로서의 유명세를 이용해서 퓔베르에게 조카딸의 과외선생을 자처합니다. 당시 엘로이즈의 숙부 퓔베르는 아벨라르의 평판이 워낙에 뛰어났기에 설마 이 남자가 자기보다 스물 살 연하인 자신의 조카딸 엘로이즈와 어떻게 해보려는 속셈으로 과외선생을 자처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죠. 또한 당대 최고의 철학자가 선생을 자처했다는 점도 굉장히 흡족했고요.
그래서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의 과외선생으로 엘로이즈를 만나게 됩니다. 어떤 마법을 부렸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엘로이즈도 곧 아벨라르를 사랑하게 되지요. 훗날 고백록에서 아벨라르는 이 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책은 펼쳐져 있었지만, 철학 공부보다는 사랑에 관한 질문과 대답이 줄기차게 오갔으며, 학문에 과한 말보다는 입맞춤이 더 많았네.” 캬ㅡ. 집안사람들의 눈치를 피해 이뤄진 선생과 제자의 은밀한 사랑이 눈앞에 그려지지 않습니까?
아, 근데 이 시기엔 일방적인 ‘섹스하지마!’와 같은 주먹구구식 성교육 이외의 또 다른 성교육이 없었던 관계로, 또 콘돔도 없었고,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임신시키고 맙니다. 뭐, 자연스럽게 배가 불러왔을 테니까 조카딸을 끔찍이 아끼던 숙부 퓔베르가 난리가 났죠. 곧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이 허락한 과외선생 아벨라르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 시대가 중세시대라는 점을 가만했을 때, 이정도만으로도 전 파리가 떠들썩한 스캔들이 되었겠죠. 아무튼, 숙부 퓔베르의 입장으로썬 머리가 돌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오늘날도 일단 임신해가지고ㅡ일명 ‘임신공격’이라 부르던데ㅡ결혼허락을 받으러 들어오는 자식들에게 부모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결혼을 허락하지 않습니까? 이때도 그 전통(?)은 유효했던지라 아벨라르는 대범하게 숙부 퓔베르에게 결혼을 요구하고 퓔베르는 별수 없이 결혼을 허락하게 됩니다. 좋아요, 사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비해선 여기까진 별 문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일단, 엘로이즈가 이 결혼에 결사반대를 하게 됩니다. 뭔가 이상하죠? 엘로이즈의 입장에선 당연히 기분 좋아해야할 일인데, 결혼을 반대하니? 이 엘로이즈는 이상한 태도를 이해하려면 이들이 살았던 중세시대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중세시대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사랑을 중시하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모든 학문이 신학으로 통합되어 있었고, 신학외의 다른 학문을 하는 것 자체가 조금만 잘못하면 이단으로 찍혀버릴 위험이 산재했던 시기였던지라, 사실상 학문이라고 하면 신학을 의미하는 시대였습니다. 이는 곧 아벨라르가 학자로서 명예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당연히 신학에 속해있어야만 한다는 얘기였고, 자리가 좀 더 올라가려면 신부가 되어야만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신부의 신 앞에 독신서약을 하지요. 고로 중세시대에 딱히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는 한 학자로써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으로 결혼을 해선 안됐다, 이겁니다.
아벨라르는 날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대신 그녀가 무슨 명예를 얻을 수 있겠느냐고 엘로이즈가 물으며 결혼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잃게 될지를 따졌다고 전한다. 아벨라르가 교회를 잃을 것이고, 철학자들은 이런 손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할까! 어린 엘로이즈는 자신도 모르게 합의한 결혼 계획을 강하게 비난한다. 결혼은 아벨라르에게 어느 모로 보나 불쾌하고 부담스러운 일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1
그래서 엘로이즈는 결혼에 반대한 겁니다. 아벨라르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미래를 망칠 순 없었던 것이지요.2 그래서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보낸 서한 중에 이런 말을 합니다. “신을 걸고 맹세합니다만, 세상을 다스리는 황제가 제게 결혼의 영예를 바치며 온 세상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해도, 저는 그의 황후로 불리기보다는 당신의 창부로 불리는 게 더 감미롭고 가치 있습니다.” 차라니 창부가 되겠다……아벨라르 못지않게 엘로이즈도 이 사랑에 모든 걸 걸었던 것이죠.
그래서 아벨라르와 퓔베르가 결혼을 강행했을 때도 엘로이즈는 결혼에 반대하는 언사로 숙부 퓔베르와 자주 다투게 되었는데, 이때의 상황을 아벨라르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엘로이즈가] 저주의 말을 하면서 이 결혼은 사기라고 말하자 퓔베르는 심하게 격분하여 엘로이즈에게 수차례에 걸쳐 모욕을 주었다네.” 근데, 이 모욕이 꽤나 심했던 모양입니다. 이미 사랑에 눈이 먼 아벨라르는 자신의 사랑이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고, 야밤에 몰래 엘로이즈를 수도원을 빼돌려버립니다! 그리고 수도원ㅡ무려 신성한 수도원에서!ㅡ밀애를 나누게 되지요. 고백록엔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방문에서 내가 정욕에 눈이 어두워 자제력을 잃고 당신과 그것도 수녀원의 식당 구석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당신은 알고 있을 거요. 그곳말고는 우리가 단 둘이 있을 만한 장소가 없었던 거요.”
문제는 숙부 퓔베르입니다. 잠시 그의 입장에 되어보자면, 애지중지 키운 조카딸을 샌님한테(그것도 자신이 고용한!) 일방적인 임신공격으로 뺏겼고,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리 결혼도 공개결혼식이 아닌 친족들만 모인 비밀결혼식에 부쳐져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닌 상태에서, 아벨라르가 엘로이즈를 수도원으로 빼돌려버렸습니다. 그의 입장에선 납치였죠, 납치. 결국 참고참던 숙부 퓔베르가 완전히 돌아버립니다. 아벨라르의 하인을 돈으로 매수한 다음, 아벨라르가 자고 있는 동안 급습하여 그를 “거세”해버립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저주 중에 가장 끔찍하고 잔혹한 짓을 저질러버렸죠.
과다출혈로 오락가락하던 아벨라르는 겨우 살아나지만, 복수가 그에게 남긴 상처는 너무 컸죠. 그는 너무나도 작아 저렸습니다. 그리고 엘로이즈에게는 수도자 서원을 받도록 하여 수녀로써 살아가도록 명령해버렸죠. 이 책의 저자 에버하르트 호르스트는 이런 아벨라르의 행동은 엘로이즈를 다른 남자가 아닌 오직 하느님에게 넘기려는 시도외의 다른 식으론 해석될 수 없는 행동이라 풀어놨습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거세된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만나고 싶지 않아 스스로 은둔해버렸고, 또한 연인을 수도원에 유폐당하도록 종용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충실한 종이었던 엘로이즈는 울면서 연인의 말에 복종하게 되지요.
나이 사십 줄에 사랑에 대한 스캔들과 자신의 명성을 질투한 이들이 벌인 온갖 모함들에 시달리다 마침내 거세까지 당한 철학자 아벨라르는 모든 것을 접어버리고 그저 수도생활에 조용히 몰두하게 됩니다. (신을 모시는데 딱히 성기는 필요 없으니까.) 이런 그의 행동도 이해가 되는 게, 원래 사람이 진짜 힘들 일을 당하면 종교에 기대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말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정작 진짜 문제는 엘로이즈였습니다. 이제 막 스물 중반으로 들어선 엘로이즈는 졸지에 수도원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수녀가 돼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님을 밖에 둔 채로요. 참고로 아벨라르에 대한 엘로이즈의 사랑은 아벨라르가 죽고, 엘로이즈가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무한한 사랑’이었죠.
엘로이즈가 진짜 대단한 게, 거세당한 이후로 아벨라르는 근 10년 동안 엘로이즈에게 연락을 하지 않습니다. 아벨라르가 워낙에 적이 많았던 관계로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이리저리 법정을 오가면서 고통 받았던 이유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엘로이즈를 만났을 때의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비참했고, 또한 엘로이즈를 만나면 찬란했던 자신의 미래가 꺾이게 돼 버린 아픔 등을 떠올리게 되어 사랑하는 엘로이즈를 도리어 원망하게 될까하는 마음이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아벨라르는 삶이 평탄치 않았고, 결국엔 자기혼자 황무지로 나가 파라클레 수도원이라는 수도원을 아예 혼자 개척하기에 이르게 되죠. 원래 은둔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만, 워낙에 유명했던 관계로 제자들이 따라오는 바람에 수도원으로 개조하게 된 케이스였죠.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재회는 아이러닉하게도 이 파라클레 수도원 덕분이었습니다. 엘로이즈가 있던 수도원이 망하면서 오갈 때 없는 엘로이즈에게 아벨라르가 자신의 파라클레 수도원을 아무런 조건 없이 양도해줬거든요. 파라클레는 사실상 아벨라르가 가진 전부였는데,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를 사랑하는 엘로이즈에게 줬던 것입니다. 이때가 아마 아벨라르 나이 오십에서 육십을 왔다 갔다 하던 때였을 것입니다. 나중에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위해 모금을 한다고 한평생 거의 하지도 않았던 모금 설교를 하기까지 하죠. 쉽게 말해서 구걸까지 마다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론 이때 아벨라르가 엘로이즈와 재회했을 때 그녀에게 꽤나 많은 원망을 들었던 것으로 추리합니다. 엘로이즈의 원망은 꽤나 정당했죠. 아벨라르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엘로이즈의 입장에서도 아벨라르를 위해 자기 인생을 통째로 던진 일이었거든요. 그런데 10년 동안 잠수를 타다니. 또한 이 10년 만의 재회도 아벨라르의 사정상 서너 번에 그치게 됩니다. 견우와 직녀도 매년 7월7일마다 만나는 판국에 엘로이즈에게 10년의 기다림 끝에 주어진 것이라곤 자신의 사랑을 거우 서너 번 만나는 것 뿐이었던 것입니다. 원망할 만도 합니다.
헌데, 이 엘로이즈의 원망에 뭔가 억울한 구석이 있었던 모양인지, 아벨라르는 이 시기 즘에 <나의 불행한 이야기>라는 자신의 서간체 고백록을 출간하게 됩니다. 취지는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너희들보다 힘든 삶을 산 사람이 있다는 식의 힐링(?)이었다고는 합니다만, 제 생각엔 그냥 엘로이즈의 원망에 대한 반박이 아니었을까하네요. 아무튼 이 책은 식자층이 썩 두껍지 않았던 중세에서 이례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됐고, 또한 입에서 입으로 민중들 사이에서 큰 방향을 일으키게 되지요. 나중에 아예 이거에 관한 노래가 나돌았을 정도였습니다.
당연히 이 책을 엘로이즈도 입수해서 읽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떨어져 지냈기에 만날 수 없었던 이 둘이 서로 편지로써 얘기를 나누게 됩니다. 1132년부터 1137년까지 오간 12통의 편지 가운데 아벨라르가 보낸 것은 8통, 엘로이즈가 보낸 것은 4통이었는데, 이것들은 오늘날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편지’로 전해지게 됩니다. 이는 연애편지의 대명사가 되었죠. 편지에 적힌 내용들도 재미있습니다. 자신의 고백록에 적힌 것 마냥 과거에 대한 후회의 어조를 보이는 아벨라르와 달리 엘로이즈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식지 않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수녀라는 신분에서 도저히 쓸 수 없는 시적인 언어들을 구사하며, 또한 딱히 구원받을 생각도 접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글을 읽어보시죠.
“나에겐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는 회개의 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금욕한다 하더라도, 마음이 죄에 대한 뜻을 여전히 품고 있고 온갖 욕망으로 불타는데 어찌 진정한 회개에 대해 말할 수 있으리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만, 엘로이즈를 보면 또 꼭 그렇게도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와 아벨라르에게 가혹한 시련을 준 하느님이 원망스럽다는 어조의 얘기도 합니다. 이에 반해서 아벨라르는 좀 착잡한 어조입니다. 물론, 엘로이즈에 대한 그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전부인 파라클레를 그녀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양도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다만, 그는 엘로이즈의 시간이 지나도 식지 않는 사랑고백을 읽으면서 거세당한 자신의 고통스런 과거가 자꾸만 회상되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또한 오랜 수도원 생활을 통해 진짜 진리를 하느님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사랑하는 그녀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그녀를 옳은 방향으로 인도하려는 마음이 들었던 걸지도 모르고요.
아무튼 아벨라르가 엘로이즈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그녀에게 진정하라는 말과, 과거일은 그만 꺼내라는 둥의 말들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사랑의 말을 속삭여주면서도 하느님에게 귀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둥의 설교를 하지요. 현대의 시각에서 이를 읽으면 아벨라르가 비벅하다, 쫀존하다 식의 비판들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저는 딱히 거기에 동조할 생각은 없습니다. 뭐랄까……아벨라르 입장에선 이게 최선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엘로이즈는 이런 아벨라르의 말에 사랑을 격정적으로 퍼뜨리면서도 한편으로 조용히 복종합니다. 그러다 이 둘이 꽤나 지성을 사랑하는 수도사와 수녀의 관계였던 이유로 신학적인 질의응답을 하기도 하며, 나중엔 수도원 회칙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편지연애는 1140년으로 접어들면서 다 끝나게 됩니다. 별 시답지도 않은 이유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라는 작자가 아벨라르를 이단으로 몰아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상스 공의회가 열리게 되고 여기서 아벨라르는 교황측에 딱히 인맥이 없었던 관계로 그대로 이단 판정을 받게 됩니다. 중세시대에 이단이란 사실상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진배없는 처벌이었죠.
하지만 아벨라르가 이단으로 생을 마감한 것은 아니고, 아벨라르를 도와주는 사람들 중에 가경자 페트루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베르나르에 반대파였기도 했고 또 아벨라르를 좋아했던 관계로 겸사겸사 아벨라르를 도와주게 됩니다. 교황의 이단결정은 결정은 났으나 실제로 적용되진 않았으며, 이후 2년 뒤 페트루스가 직접 자리를 마련해서 아벨라르와 베르나르의 화해를 주선해주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기록은 정말 짧습니다. 비록 효력이 발휘되진 않았지만 이단이라는 유죄판결을 받았을 정도면 이 사건을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당대 가장 유명한 신학자이자 철학자가 이단으로 내몰린 사건이었고, 이를 고발한 원고 또한 십자군 전쟁의 핵심인물 중 하나이자, 후대에 양봉가·양초제작자·모래채취장·일꾼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 당대 만만치 않은 유명세를 달리던, 또한 강력한 권력도 가지고 있었던 수도원장이었습니다. 여기에 중재자로 반(反)십자군 파였던 가경자 페트루스까지 개입되면서, 철학적 입장을 떠나서 정치적으로도 굉장한 빅매치가 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록이 작습니다. 페트루스도 몇 마디 문장을 제외하고는 이 사건의 내막에 대해서 함구했고, 당사자인 아벨라르도 이 사건 이후 2년 뒤 수도원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합니다.
페트루스가 마련한 화해의 자리에서 이단 아벨라르와 고발자 베르나르 사이에서 무슨 말이 오고갔을까요? 신학적 인생 전체를 부정당하는 이단죄를 가지고 기소한 상대방에 대해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화해를 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아마도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여기에 대한 어떠한 근거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록이 전무하거든요. 당사자들이 모두 함구하고 죽어버렸습니다. 제 생각엔 고발자 베르나르의 아벨라르에 대한 고발 자체가 애매했기에, 또한 이를 빌미로 자신에 반대하는 반대파들이 자신을 공격을 할 것을 두려워했던 베르나르가 이 사건 자체를 덮어버리고 싶어 했으리라고 봅니다. 실제로 아벨라르는 훗날 이단이 아닌 사람으로 평가받게 되니까요. 그래서 베르나르는 이단 아닌 사람을 이단으로 몰았다는 것은 반대파의 생각에선 정치적 흠집 내기를 넘어서 아예 정치판에서 베르나르를 끌어내릴 수단으로까지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아벨라르는 베르나르에게 자신의 이단죄에 대한 효력을 정지시켜 안정을 보장하는 것 외에 자신이 사랑하는 엘로이즈가 수녀원장으로 있는 파라클레 수도원에 대한 정식인가를 받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화해가 있은 후 1147년에 교황 오이겐 3세는 파라클레를 교회의 정식 재산으로 인정하고 또한 엘로이즈의 것임을 보증해주거든요. 또한 이 시기엔 베르나르가 완전히 교회정치에서 득세하여 제2차 십자군 전쟁을 주도하는 권력을 휘둘렀을 정도이니, 교황을 설득하여 파라클레를 정식화하는 일은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건 옛날 아벨라르와 한 약속을 지킨 것이었을 테고, 아벨라르 사후에 이 약속을 지킨 이유는 그때 같이 화해의 자리에 있었던 일종의 보증인 가경자 페트루스가 살아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가경자 페트루스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와 두터웠던 사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1142년 아벨라르가 조용히 세상을 떠난 뒤에 엘로이즈는 페트루스에게 아벨라르의 시신을 파라클레로 운구해줄 것을 간청하는데, 여기서 페트루스는 친히 아벨라르의 시신을 파라클레로 운구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이상 자세한 것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만, 약간의 상상으로 검은 공백을 메워보자면 이럴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 물론 베르나르의 고발부터 지금까지 적은 부분은 책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순전히 제 생각이에요. 궁금해서요.
참고로 아벨라르가 베르나르와 화해를 한 후 죽기 1년 전쯤에 적은 교훈시 중에는 이런 게 있습니다. 읽으면서 아벨라르가 무슨 생각을 하며 곧 다가올 죽음을 기다렸을지 생각해봤습니다. 아마도 그는 후회가 없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엘로이즈에게 하느님에게 귀의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편지글로 적으면서도, 만일 다시 엘로이즈를 처음 만났던 적으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판단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만끽한
저 기쁨이 너무도 감미로워서
생각만으로도 너무도 사랑스러운 것이 행복하게 해주네.
얘기를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오는 군요. 1142년에 아벨라르가 죽은 뒤, 이후 엘로이즈는 22년을 더 삽니다만, 엘로이즈는 철저히 침묵을 지킵니다. 이때 그녀의 심정을 알려주는 기록은 없어요. 자신의 간청으로 파라클레 수도원으로 이장한 아벨라르의 무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엘로이즈는 수녀들과 함께 아벨라르의 무덤에서 그녀가 만든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노래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나는 가혹한 운명을 당신과 함께 전부 견디어냈나이다.
청하오니, 이제 당신과 함께 잠들게 해주소서.
시련이 끝나게 하시고,
빛이 있는 쪽을 햐하게 하시며,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소서!
젊은 날 만났던 시간은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로인해 떨어져 지내야만 했던 시간은 30여년이었던 기구했던 사랑. 저 같이 펑범한 사람은 엘로이즈의 심정이 상상이 가질 않네요. 슬펐을까요? 어쩌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만……역시나 잘 모르겠네요. 뭐, 아무튼 얘기를 계속하자면, 1164년 엘로이즈도 결국 눈을 감습니다. 그녀 역시 파라클레에 묻혔지요. 이후로 시간은 근 6백년을 훌쩍 뛰어넘어서 1792년 수도원이 해체되면서 노장슈르센 본당으로 유골들이 양도되었고, 19세기 초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이 두 사람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사람들은 1817년에 이 둘을 파리의 페르라셰즈 공동묘지에 최종적으로 나란히 같이 묻어주게 됩니다. 둘 다 죽어서야 비로소 영원히 함께하게 된 거죠.
뭐랄까, 숙연해지군요. 사랑은 기묘합니다.
이만 마칩니다. 총총.
[출처] 310.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작성자 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