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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물연구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펌)

작성자신동|작성시간06.11.02|조회수424 목록 댓글 0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미국) | 세계의 명장
2006.10.04 23:29

美 남북전쟁서 나라 구한 영웅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사진)는 미국 남북전쟁에서 북부연방 정부군 총사령관으로 남부동맹군을 격파하는 데 주역을 담당한 장군이다.

그랜트가 남북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그의 전략·전술이 남부동맹군 총사령관 로버트 에드워드 리 장군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그랜트의 남북전쟁 승리가 미국을 분열에서 통일로 이끌었고 이 통일이 미국으로 하여금 오늘의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랜트는 때로는 술주정꾼 혹은 전쟁터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듣기도 하지만 모든 군사력·경제력을 총력전에 투입해야 한다는 전략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남북전쟁 승리로 미합중국은 분열되지 않고 통일국가로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었다. 남북전쟁 승리는 그에게 두 번 임기 대통령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 시대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이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다.

그랜트의 유년과 소년 시절 민간인 및 군인생활의 시작은 둘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는 1822년 4월27일 오하이오 주 포인트 플레전트에서 피혁제품을 다루는 가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랜트는 1839년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한 후 히람 율리시스에서 율리시스 히람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유는 석 자 이름을 약자로 표시할 때 ‘포용한다’는 뜻의 ‘hug’가 되기 때문에 아이들로부터 놀림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다 자기를 웨스트포인트 생도로 추천한 오하이오 주 연방하원의원이 그의 이름을 율리시스 심프슨으로 잘못 표기해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이를 고치려면 혼란과 번거로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피하기 위해 이름의 오기(誤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의 이름은 마침내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로 낙착된 것이다.

그랜트는 1843년 웨스트포인트 동급생 39명 중 21번째 성적으로 졸업함으로써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는 나중에 대통령을 2회 연임한 정치가로 변신했지만 그의 초기 군인생활은 빛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뛰어난 승마술 장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첫 장교 임관 후 보병에 배치됐다. 웨스트포인트 졸업 후 첫 배치부대는 미주리 주 제퍼슨 배락스 연대였다.

1846년 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자 그랜트와 제퍼슨 배락스 연대는 리오그란데 국경을 따라 재커리 테일러 장군 부대와 합류했다. 테일러 장군 역시 직업군인에서 후에 대통령(1850~53년)이 된 인물이다.

그는 40년간의 군생활 끝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보다 4대 앞선 선임 대통령으로 재임 중 식중독으로 사망했다. 그도 대통령 재임 중 노예해방과 남부 11개 주 분리 문제를 둘러싸고 고민했으나 결국 연방국가의 분열을 막는 데는 군사력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는 남부 루이지애나 주 출신으로 미시시피에 목화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노예제도와 남부 주 분리주의에 반대, 미 합중국 연방노선을 고수한 강력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랜트는 초기 멕시코 전쟁에 참전해 몬테레이 전투에서 용맹스럽게 싸운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의 부대는 1847년 윈필드 스콧 장군이 지휘하는 멕시코 베라크루스 침공에 참가하기 위해 남부로 이동했다. 스콧 장군은 그랜트의 대선배로 인디언 소탕전쟁에서부터 멕시코 전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에서 싸웠고 미국·멕시코 전쟁 총사령관으로 활약했다.

그랜트는 미국-멕시코 전쟁 때인 1847년 4월부터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가 함락될 무렵 그랜트는 대위로 명예진급, 정규군 중위 진급의 길을 열었다.

그랜트는 1848년 미주리로 돌아와 줄리아 덴트와 결혼했다. 그녀는 지방 농장집 딸로 그랜트가 제퍼슨 배락스 부대에 배치될 때부터 사귀어 온 애인이었다. 그랜트는 그후 인사이동에 따라 미시시피·뉴욕· 미시간 주를 비롯, 태평양 연안을 전전하다보니 그녀를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랜트는 1854년 정규군에서 대위로 진급, 캘리포니아 주 훔볼트 요새로 전근됐다. 그는 이때 새로운 임지로 부인을 데려갈 수 없자 또다시 과음하게 됐고 이것이 문제가 돼 그는 군대를 떠나지 않으면 안됐다.

美연방 초강대국 토대 마련


그랜트는 군대를 떠난 후 6년간 미주리 주에서 농사를 짓거나 이것저것 다른 사업에 손을 대봤으나 모두 신통한 결과 없이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는 1860년 새로운 기회를 잡을까 해서 미주리 주에서 일리노이 주 갈레나로 이사했다. 그랜트는 그곳 아버지의 피혁가게에서 사무원으로 일했다.

드디어 1861년 남북전쟁이 터지자 그랜트는 정규군에서 장교로 재입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그야말로 대규모 로비전을 벌였지만 군은 그에게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랜트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긴 노력 끝에 마침내 대령으로 제21 일리노이 주 지원군 보병연대장으로 임명돼 다시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군에 복귀한 지 2개월 만에 준장으로 고속 승진, 미주리 주 동남지역군 사령관으로 발탁되는 행운을 잡았다.

그는 1862년 2월 육군과 해군의 슬기로운 합동작전을 통해 남부군의 헨리·도넬슨 요새를 한꺼번에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랜트는 이때부터 링컨 대통령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그는 도넬슨 요새 점령 때 남부군 사령관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 이를 관철시켰다. 이때부터 그에게 ‘무조건 항복’이라는 별명이 따라붙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트는 1862년 봄 소장으로 진급, 테네시 주 군사령관을 맡게 된다.

그랜트는 실로 지역 전투 후 독창적 전략·전술을 발휘할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 그의 독창적 전략·전술은 작전부대의 신속한 이동과 선제공격 작전술이었다. 그는 이런 작전술로 미시시피 주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남부군과 싸워 다섯 차례 연승을 거뒀다.

그랜트는 미시시피 강에서 또 다시 육군과 해군의 합동작전을 조직, 자기 부대의 공격을 성공시켰고 그해 6월에는 남부 요새인 빅스버그를 강과 육상 양쪽에서 완전 포위했다. 빅스버그 시는 7월4일 그랜트 장군 부대에 항복함으로써 오랫동안 쌍방 각축장이었던 미시시피 강을 북부군이 완전 지배하게 됐다. 이 전투 승리로 북부군은 남부 11개 주를 2개 지역으로 쪼개 효과적으로 분리, 장악할 수 있었다.

링컨 대통령은 꼬박 3년간 그랜트 장군을 지켜보면서 그랜트야말로 남북전쟁을 승리로 끝내고 미 연방을 온전하게 보호해줄 사람으로 확신하게 된다. 링컨 대통령은 1864년 3월9일 그랜트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지도자임을 거듭 확신하고 그를 중장 진급과 동시에 북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 남북전쟁의 운명을 그에게 맡기게 된다.

그랜트는 막중한 사령관 임무를 맡은 즉시 부임, 일선에서 또는 전보통신을 통해 전 북부군을 총지휘했다.

그랜트는 1864년 6월 버지니아 주 피터즈버그에서 남부군 총사령관 리 장군 부대를 포위했다. 이 포위작전은 이듬해인 1865년 4월1일까지 이어졌다. 이때 그랜트의 전술은 리 장군 부대의 측면에 공격을 가해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들었다. 그랜트는 리 장군의 퇴로를 차단했고 1865년 4월9일 리 장군은 드디어 아포마톡스 법원 청사에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랜트군에 항복했다. 나머지 남부군도 남부전역에 걸쳐 몇 주 안에 모두 리 장군을 따라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은 마침내 북부군의 최종 승리로 막을 내렸다.

미국 의회는 1866년 그랜트 장군의 대장 승진안을 승인한다. 당시 대장은 1799년 이후 유일한 최고 군 계급으로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1868년 그랜트 장군은 두 번의 임기 중 첫 번째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가 임명한 고위직들의 스캔들로 인해 대통령직 수행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는 1877년 세 번째 대통령직 도전에 실패한다. 은퇴 후 뉴욕으로 옮겨 금융사업에 손댔다가 모든 재산을 날렸다. 그랜트는 이때 설상가상으로 기관지암까지 걸렸다. 그는 노년에 빚더미에 올라앉아 이 빚을 모두 갚고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자서전 집필을 시작했다. 그는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나흘 전 자서전을 완성했다. 그 자서전은 당시로서는 큰 재산인 45만 달러를 가족들에게 남긴다.

그랜트 장군은 남북전쟁에서 승리, 미 연방을 분열 없이 하나로 뭉치게 했다. 그의 공로 덕택으로 미국은 그후 통일국가로서 노예해방과 민주화·근대화 작업을 통해 오늘의 초강대국으로 비약할 수 있는 튼튼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조지 워싱턴과 아이젠하워·맥아더 등 여러 명의 장군과 나란히 승전장군으로서 미국을 빛낸 영웅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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