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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물연구

동양의 비스마르크 오쿠보 도시미치

작성자신동|작성시간08.12.05|조회수517 목록 댓글 0

1871년 약 100명의 정부사절단이 요코하마항을 출발해 구미 각국을 돌며 견학했다. 사절단에는 메이지 정부 전체 관리의 절반에 가까운 고위관리 49명이 포함되었다. 이 밖에도 58명의 유학생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중 5명은 일본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었다. 성립된 지 3년 밖에 되지 않은 메이지 정부는 그해 재정수입의 2퍼센트를 이 사절단에 쏟아부었다. 1년 하고도 10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구미 12개국을 돌며, 100권에 달하는 견학 실록을 작성했다. 일본은 물론 아시아와 서양 세계의 교류사를 통틀어도 이와쿠라 사절단만큼 정부가 거액을 투자하고 고위 관리가 대거 포함되었으며, 또 시찰 기간이 길었던 사절단은 없었다.


이와쿠라 도모미가 이끄는 사절단은 구미각국을 돌아보고 처음에는 놀랐고, 다음에는 도취되었으며, 마지막에는 거의 미쳤다. 그들은 서약의 발달한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미친듯이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사절단은 서양에서는 근대 과학 지식과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고 유형의 학문을 강조하는 반면 동양에서는 무형의 학문을 강조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동서양의 빈부 격차를 초래한 원인이라 보았다. 다시 말해 일본은 과거 2,000년 동안 꿈속에서 산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탄했다. 사절단은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연설을 듣고 그의 강권정치에 감탄했고, 국가가 나서서 산업발전을 주도하는 독일의 발전모델에 완전히 심취했다. 비스마르크는 사절단에게 “약소국이 자주적으로 독립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군사력을 증강해야 하고 내무와 외교 중에서는 내무를 우선으로 돌보아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귀국 후 일본의 산업화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사절단 부단장이자 동양의 비스마르크를 자처하는 오쿠보 도시미치였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귀국 후 참의 겸 내무경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메이지 정부의 실권을 쥐고 현대화를 향한 강하고 빠른 발걸음을 내딛었다. 식산흥업계획에 따라 서양에서 직접 프랑스식 제사공장과 독일식 광산 제련소, 영국식 군수공장을 도입했다. 기계 도입뿐 아니라  많은 기술자들을 초빙해서 기술을 배웠다. 당시 외국인 기술자들의 월급이 최고 2,000엔으로 메이지 정부 고위관리의 3배가 넘었다. 당시 정부 지출 가운데 5분지 1이 기업 설립에 투입되었다. 오쿠보는 공영공장 설립 외에 민간 기업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초기에는 사업을 직접 경영하다가 민명기업에 매각해 계속 발전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등이 모두 정부로부터 관영기업을 사들여 성장한 기업이다. 정부의 지원 아래 미쓰비시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일본은 신속한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선진기술을 배우고, 서양의 생활방식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사용하고, 구정 대신 신정을 설날로 택했다. 천황이 솔선수범하여 쇠고기를 먹고 관리들이 서양식 예복을 입었다. 이발관에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남자들이 서양식으로 머리를 짧게 깍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1,000여년 전 중국 당나라의 도읍인 장안을 본따서 나라(奈良)를 지었던 것처럼, 도쿄의 긴자에 서양식 거리를 만들었다. 서구 양식을 본떠서 거리를 꾸미고 길 양편에 서양식 건물을 지었으며 전차가 지나다녔다. 밤이 되면 가스등이 거리를 환하게 밝혔다. 일본의 면모가 완전히 달라졌다. 메이지 유신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러나 바로 이 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오쿠보 도시미치가 피살된 것이다. 1878년 5월 14일 아침 8시의 일이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의지가 매우 강한 인물이었고 언제나 강하고 결연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타협하지 않았다. 오쿠보 도시미치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전국적으로 적지 않았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그들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사족들은 그를 제거한 후 그가 가지고 있던 정권을 순식간에 손에 넣었다.


부국강병, 식산흥업, 문명개화라는 유신의 3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강인한 성격의 오쿠보 도시미치는 서양의 제도를 도입해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하고 의욕만 앞선 탓에 정부의 재정이 버틸 수 없었다. 문명개화도 너무 성급하게 추진하는 바람에 일본의 전통문화가 완전히 몰락할 위기에 처했다. 심지어 국민 모두가 영어를 배우고 서양인들과 결혼하여 일본 민족을 개량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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