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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

작성자신동|작성시간08.12.05|조회수192 목록 댓글 0

태양중심설을 수학적으로 완성한 케플러

 

독일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는 가난하고 문제가 많은 가정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케플러는 어렸을 적에 몸이 허약해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집에서 책을 읽거나 기구들을 만들며 지냈다. 시력이 나쁘고 여러 가지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던 케플러는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 자신을 '비루 먹은 개'에 비유할 정도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케플러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레온부르크에 있는 수도원에서 예비 학교 교육을 받았다.

 

  1589년에 장학생으로 튜빙겐 대학에 진학한 케플러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가족과 주위 사람들의 권유 때문에 신학을 공부했지만 기하학과 천문학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케플러는 학생들 사이에서 우상이었던 매스트린 교수의 천문학 강의를 들으면서 그의 강의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1591년에 석사학위를 받은 케플러는 그를 신임했던 매스트린 교수의 추천으로 그라츠에 있던 루터파 중학교의 수학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케플러는 일찍이 점성술과 수학적 신비주의에 매료된 신비주의자였다. 그는 점성술의 몇몇 측면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점성술이 유서 깊고 타당한 과학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케플러는 수학교사로 재직하면서 교사의 월급으로 생활하기 어려워지자 점성술 달력을 만들어 판매했다. 그 달력은 그해의 강추위와 전쟁 발생에 대해 예언했는데, 그 예언들이 기상이변이나 농민봉기 등의 모습으로 그대로 맞아떨어지가 달력의 인기가 상승했다. 케플러는 예언이 기록된 달력을 제작하여 정기적으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달력 판매로 생활의 안정을 얻은 케플러는 행성의 거리와 속도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푸는 천문학 연구에 매진했다. 1595년 7월경 케플러는 기하학 수업시간에 정육면체, 정사면체, 정팔면체, 정이십면체, 정십이면체를 논하면서 특이한 상상을 했다.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케플러는 태양에서 각각의 행성 궤도까지 거리의 비율을 수학적 관계로 설명하는 우주의 기하학적 구조에 관한 이론을 개발했다.

 

  케플러는 자신의 주장을 담아 1596년에 우주론에 관한 최초의 저서인 <우주의 신비(Mysterium Conmographicum)>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케플러는 우주는 기하학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만들 수 있는 정다면체가 다섯 가지이기 때문에 행성도 오로지 다섯 개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 주장에 근거해 정이십면체 속에 각각의 행성을 끼워넣었다. 케플러의 생각은 기발했지만 행성이 원운동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서만 성립했기 때문에 관측 결과와 일치하지 않았다. 그는 순수한 과학적 의미보다 신비주의적 통찰로 각 행성의 거리와 속도 사이의 산술적, 기하학적 관계를 구해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증명했던 것이다.

 

  케플러는 브라헤의 조수로 일하면서 그의 정확하고 자세한 관측 자료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는 <우주의 신비>가 출판되자 "신의 정교한 솜씨와 전능의 놀라운 기적으로 이루어진 위대한 천계의 장관을 황홀히 바라보며..."라는 시와 함께 그 책을 브라헤와 갈릴레오에게 보냈다. 브라헤는 케플러의 책을 보면서 그가 자신이 20여 년 동안 관측한 기록들을 정리해 우주의 구조를 체계화시킬 수 있다고 여겨 케플러를 자신의 조수로 초대했다. 케플러는 브라헤의 관측 자료가 탐이 나기도 했지만, 신교도라는 이유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박해 속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브라헤의 초청을 수락했다. 그는 2년 동안 브라헤의 조수로 일하면서 브라헤가 오랫동안 수집한 관측 자료들을 신뢰하게 되었다. 브라헤가 죽가, 브라헤의 유언대로 그의 귀중하고 치밀한 관측 자료들은 케플러의 손에 넘겨졌다.

 

  케플러는 브라헤의 관측 자료에 기초해 행성의 궤도를 연구하면서 원궤도 대신 '일그러진 모양'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처럼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을 신봉한 케플러는 일정한 속도를 가지고 완전한 원운동을 한다고 처음에는 믿었다. 이러한 가정 아래 케플러는 원운동을 하는 지구의 궤도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브라헤의 관측 자료를 가지고 수십 번이나 계산했다. 그러나 지구의 원궤도 운동과 브라헤의 관측 자료가 일치하지 않았다. 케플러는 이러한 상황에서 행성의 원운동을 포기하거나 브라헤의 관측 자료를 무시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브라헤의 관측 자료를 절대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에 의문을 가졌다. 케플러는 오랜 고민 끝에 지구의 궤도는 완전한 원이 아니라 '일그러진 모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케플러는 지구의 궤도 문제를 보류한 채 자료가 더 풍부한 화성으로 눈을 돌려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했다. 브라헤의 관측 자료에 따르면 화성의 공전 속도는 일정하지 않았고, 화성의 속도는 태양에 가까워질수록 빨라지고 멀어질수록 느려졌다. 그 문제를 풀 수 없었던 케플러는 일명 '화성의 전투'라고 불리는 6여 년의 기간 동안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료와 싸우면서 미친 듯이 일했다. 그는 900쪽 분량의 계산 원고를 남길 정도로 수학적 계산을 반복한 끝에 "행성의 궤도가 등속 원궤도가 아닌 부등속타원궤도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타원궤도는 단 몇 분의 오차도 없이 케플러의 계산 값과 브라헤의 관측 자료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605년 2월 케플러는 플라톤 이후 2,000년 천체운동을 지배해 온 주장을 버리고 모든 행성의 궤도는 원운동이 아닌 타원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경이로운 전환점을 이끌었다.

 

  1609년 케플러는 행성운동에 관한 법칙을 수록한 <새로운 천문학(Astronomia nova)>을 출간했는데, 그 책에서 타원궤도의 법칙과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 등 행성운동에 관한 법칙을 제시했다. 그는 두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두 권으로 된 <새로운 천문학> 중 1권에서 777개 항성의 위치 표와 태양과 달의 운동을, 2권에서 1577년에 나타난 혜성과 태양의 관계들을 브라헤의 관측 자료와 자신의 수학적 재능을 최대한 활용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먼저 행성들은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그리며 운동한다는 것이다. 케플러는 "브라헤의 관측과 프톨레마이오스의 계산을 비교한 결과, 화성의 궤도는 8분의 오차가 생겼다. 사람들이 이 8분(1분=60분의 1)의 오차를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8분의 오차는 천문학 개혁의 길잡이가 되었다."라고 자신이 원운동을 포기하고 타원운동을 수용하게 된 배경을 밝혔다. 다음으로 케플러는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을 주장했다. 그는 원운동에 대한 절대적 믿음 때문에 타원궤도를 발견했다는 기쁨보다 성서에 위반되는 불경스러운 타원궤도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브라헤의 관측 결과를 신뢰한 케플러는 타원궤도를 인정하면서 다른 법칙을 주장했다. 그것은 그가 타원궤도를 발견하기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이었다. 면적속도일정의 법칙은 "행성과 태양을 잇는 선분은 같은 시간 동안 같은 면적을 휩쓸고 지나간다"는 것으로 행성운동의 불규칙성을 해결해 주었다.

 

  케플러는 우주체계의 통일성, 즉 조화를 설명해주는 '조화의 법칙'을 주장했다. 그는 면적속도의 일정의 법칙을 주장한 후 "왜 행성과 태양 사이의 거리가 일정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케플러는 태양에서 행성까지 거리와 각 행성이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주기를 나타낸 수치표를 보면서, 거의 10여년 만에 그 문제의 해답을 찾았다. 그것은 "태양에서 행성까지 평균거리의 세제곱이 공전주기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조화의 법칙이다. 케플러는 자신의 주장을 1619년에 출판한 <우주의 조화(Harmonicem Mundi)>에서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 책에서 그는 점성술적 관계들, 행성과 물질의 대응관계, 천구들의 음악 등을 계산했다. 즉 "우주는 음악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자신의 신비주의적 생각을 천구들의 음악으로 보여 조화의 법칙을 구체적으로 말했다.

 

  학문에서 '의문'을 제기할 줄 알고 그 의문을 풀어나갈 수 있었던 케플러는 천문학자로 명성을 누리기보다 오히려 기이한 신비주의자로 알려졌다. 과학에서 적절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다. 케플러는 천문학에서 행성의 운동을 이해한 후 그 운동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 답으로 코페르니쿠스와 브라헤의 우주론을 벗어나 우주의 간결함과 수학적 조화를 강조하는 새로운 천문학을 강조했다. 하지만 당시 케플러의 연구를 접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의 주장을 수용하기보다 그를 신비주의자로 여겼다.

 

천문학에서 역학으로 가다

 

  케플러 이전의 천문학자와 물리학자들은 천체의 운동에 관한 전통적인 생각(행성들의 원운동)을 신뢰했다면,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수용한 후 타원궤도라는 새로운 궤도를  주장했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처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며, 지구는 태양계의 행성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와 더불어 수정체 천구가 존재하지 않고 행성들은 광대한 공간 속에서 일정한 궤도를 따라 운동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행성의 궤도 그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 케플러는 원운동에 대한 오래된 집착에서 벗어나 다른 과학자들이 선택하지 못한 타원궤도를 수용했다.

 

  타원궤도를 선택한 후 "행성이 왜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궤도로 움직이는가?"에 대해 고민하던 케플러는 초기에 그 원인을 "태양이 성령과 유사한 '움직이는 영혼'을 가지고 있어서 행성들이 움직인다"고 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움직이는 영혼을 '신비주의적 특성을 가진 자기'로 대체해 설명했다. 즉 행성들이 원운동을 벗어나는 것은 태양의 자석과 행성의 자석이 서로 당기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케플러의 자기에 대한 설명은 천체의 행성 운동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을 제공했지만 널리 수용되지 않았다.

 

  케플러의 주장은 새로웠지만 다른 과학자들처럼 아리스토텔레서의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케플러는 아리스토텔레서의 역학적 기본 명제들로 이루어진 물리학적 원리들을 가지고 지상계에 사용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천상계의 현상들을 설명함으로써 행성의 운동법칙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행성의 운동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설명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태양에서 나오는 힘이 어떻게 접선방향으로 작용하는가, 행성이 어떻게 타원궤도를 돌면서 그 공간을 움직이는가?" 등이 있다. 이러한 케플러의 한계는 케플러 이후 출현한 갈릴레오를 근대 물리학을 향한 첫걸음으로 보는 근거가 되었다. 케플러의 방대한 업적 이후 정점에 이른 천문학은 행성의 운동을 일으키는 힘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남기면서 역학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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