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첸
웨스트민스트 신학교 창설자 그레함 메이첸 박사는 총각으로 일생을 지내 자손이 없다. 하지만 그의 영적 자손은 미국 도처에 깔려 있다. 그래서 20세기 미국 보수 복음주의 개혁신학자들의 스토리는 메이첸의 영적 아들들의 스토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 이첸은 존스 홉킨스 대학교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독일에서도 공부했다. 그곳에서 독일 성경 비평 신학자들의 자유주의 성향, 특히 Wilhelm Herrmann에 충격을 받았다. 프린스턴에서 가르칠 때 찰스 핫지, 워필드, 게르할더스 보스와 같은 불굴의 보수신학자들이 가르친 고백적 장로교리를 강력하고도 설득력 있게 방어했다.
메이첸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론', '바울 종교의 기원'에서 신약의 역사적 진정성을 논하며 독일 성경 비평가들을 공격한다. 1923년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출판하면서 미국과 독일 비평학에서부터 배태한 자유주의와 모던니스트들을 공격한다. 자유주의가 잘못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종교라는 것. 신론, 인간론, 성경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에 있어서 자유주의와 기독교는 전혀 반대라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교리가 경험보다 앞서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구원하고 상관없는 아버지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인간들의 증거일 뿐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단지 도덕적 본으로 삼을 분이란다. 구원이란 도덕적 본을 따르기만 하면 된단다. 교회는 이러한 자유스런 복음을 정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프린스턴 신학교가 PCUSA 총회 산하 신학교였다. 1928년 총회가 당시 교회들이 수용하고 있는 폭넓은 의견을 대변하기 위해 신학교를 재편하기로 결정한다. 물론 메이첸이 저술과는 상반되는 자유주의 내용을 수용하는 거다. 이에 대응하여 메이첸이 신학교를 떠나면서 동료 교수 Robert D. Wilson, Oswald T. Allis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운다. 곧 젊은 교수인 R. B. Kuiper, Ned B. Stonehouse, Allan A. MacRae, Paul Woolley, Cornelius Van Til, John Murray도 합류하게 된다. 새 신학교 웨스트민스터는 고백교회 장로교, 즉 Old Princeton 전통을 잇는 것이 메이첸의 뜻이었다.
1936년 당시 장로교 해외 선교부의 독립 이사회에 간여했다는 이유로 교단이 메이첸을 정직시키자 그는 PCUSA 교단을 떠난다. 메이첸과 같이 했던 이사들은 자유주의와 일체의 타협 없이 성경적인 복음 증거를 한다고 믿을만한 자를 선교사로 보냈었다. 메이첸은 교단이 내린 정직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탈퇴하여 새교단, OPC를 창설한다. (원래 PCA였으나 그 이름을 법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보수 개혁주의자들 중 많은 이들이 PCUSA에 남아 있었던 관계로 메이첸이 주도한 운동은 미국내 개혁진영 안에서도 숫자상 아주 미미했었다. 전통은 더 있지만 작은 교단인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 (RPCNA), 스코틀랜드 언약파 후예들의 Associat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ARP)에 속한 이들도 메이첸 운동에 꽤 있었다.
미국 내 중요한 날개를 담당하는 화란 후손들의 칼빈주의자들도 있었는데, 이를테면 The Reformed Church in America (RCA)는 1626년 New Amsterdam (나중에 New York)을 세운 뿌리이기도 하다. Christian Reformed Church (CRC)는 1822년 RCA에서 분리한 교단이고 당시 상당한 기간 더 보수적 입장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지난 40년 사이 성경무오설, 여성안수, 동성애 문제로 교단 내 몸살을 앓다가 보다 보수적인 인사들이 탈퇴하여 새 교단 Orthodox Christian Reformed Church (OCRC)과 the United Reformed Church (URC)을 만들었다.
PCUSA 안에 남아 있던 보수적 인사들과 함께 이런 스코틀랜드와 화란 계통이, 각기 소속된 교단 신학교를 지지하기는 했어도, 메이첸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하는 일을 주목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독 일 계통의 작은 개혁 교단, Reformed Church in the U. S. (RCUS)은 목사 후보생들을 훈련하는 학교로 수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택했다. 또 개혁주의 성향을 가진 회중교회, 독립교회, 성공회교회, 침례교회에서 온 많은 학생들이 웨스트민스터에서 훈련을 받으며 그 영향을 받아왔다.
메이첸이 이탈한 PCUSA와 닮은 남부지역 장로교 Presbyterian Church U. S. (PCUS) 교단에 분리가 있었다. 본질상 메이첸 때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 문제 때문에 분리가 일어나, 1973년 PCA가 탄생한다.
물론 메이첸 운동이 이 모든 개혁주의 진영을 대변한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데는 그 운동이 신학적으로 선도했기 때문이다. 메이첸 자신이 미국과 스코틀랜드와 화란 전통을 웨스트민스터에서 묶으려고 노력했었다. 1세대 교수인 R. B. Kuiper, Ned Stonehouse, Cornelius Van Til가 모두 화란 계통의 CRC 출신이고, Geerhardus Vos도 비록 프린스톤에서 가르쳤지만 웨스트민스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코틀랜드 계통으로는 John Murray가 1967년 은퇴하기까지 가르쳤다. 머레이는 비록 OPC였지만 RPCNA 같은 스코틀랜드 언약파의 영향을 받은 미국 교회에 독특한 면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예배 중 시편 구절만 찬양에 사용했던 것이다.
메이첸 운동에 신학적 다양성이 또 있다. 아마 메이첸이 의도한 바 같은데, Allan A. Macrae는 전천년론자로서 나중에 New Scofield Reference Bible (1967) 편집 책임을 맡기도 했다. 스코필드 관주 성경은 세대주의 신학의 핵심 출판물이다. Paul Woolley도 전천년론자이지만 세대주의에는 냉담했다. 메이첸은 자신이 후천년론자인데, 구 프린스턴 교수 대다수의 입장이기도 하다. 머레이는 나중에 후천년론으로 돌아섰지만, 나머지 웨스트민스터 교수들은 대부분 무천년론자들이었다. 전천년론자들은 메이첸의 독립선교부 이사들이었는데, 고백적 장로교회주의와 폭넓은 미국 복음주의 흐름과 연계자들로서 역할을 한 셈이다.
메이첸 운동은 출신과 교리에서부터의 다양성은 웨스트민스터와 OPC를 아우르는데 많은 영향력을 미치게 되고 웨스트민스터가 개혁진영 단체와 복음주의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구 프린스턴이야말로 저들에게는 신학적 선도자였던 거다. 심지어 칼빈주의자가 아닌 사람들도 워필드, 윌슨, 메이첸의 저술을 성경 권위와 무오 방어에 학술적으로 사용했다. 달라스 신학교의 Lewis Sperry Chafer는 메이첸과 교류하면서 두 신학교가 긴밀한 공조를 원했다. (메이첸은 원하지 않는 교류였지만). 웨스트민스터는 또 CRC 내 보수파 (나중에는 OCRC, URC), Reformed Episcopal Church, RPCNA 같은 스코틀랜드 그룹, PCA, Reformed Baptist 교회와 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웨스트민스터 출신 교수들이 커버넌트, 고든-콘웰, 트리니티, 비블리컬, 미드아메리카, 리폼드 에피스코팔에서 가르쳤다. 풀러 신학교가 1947년 개교할 당시 커리큘럼은 웨스트민스터의 그것과 흡사했고, RTS도 1966년 미시시피 잭슨에서 문을 열 때 커리큐럼과 신학 기조와 교수 구성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터에 진 은혜를 인정하고 있다.
메이첸의 웨스트민스터가 큰 신학교는 아니지만 20세기에 보수적 개혁진영 신학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할 수 있다.
메 이첸이 1937년 폐렴으로 죽기 전에 이미 새 교단의 분열 조짐에 실망했었다. 메이첸의 후예들은 신학적 투사였던 거다. PCUSA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싸움이 끝났을 때 다른 신학 논쟁거리를 찾은 거다. 지금까지도 그러한 메이첸 운동 안에서 그 싸움은 진행형이다. 이것이 20세기 미국 개혁신학의 스토리다.
http://blog.daum.net/philbu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