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과학의 수호자인 브라이언 의원에 대해 알려줘
질문하신 인물은 20세기 초 미국 정계와 교계를 뒤흔들었던 기독교 근본주의의 대표적 정치가이자, 진화론 반대 운동의 상징이었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1860~1925)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의 엄청난 정치적 위상 때문에 흔히 ‘상원의원’으로 오인되곤 하지만 공식 직함은 연방 하원의원 및 우드로 윌슨 행정부의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이었습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만 무려 세 번(1896, 1900, 1908년)이나 지명되었을 만큼 당대 미국 대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위대한 평민(The Great Commoner)’이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렸습니다.
변론과 웅변의 대가였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출처: Universal History Archive / UIG via Getty Images
그가 현대 창조과학 및 근본주의 진영에서 '수호자'로 기억되는 핵심 역사적 사건과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결정적 사건: 스코프스 재판 (원숭이 재판, 1925년)
브라이언의 생애 마지막을 장식한 사건이자 역사에 그를 각인시킨 계기는 1925년 테네시주 데이턴에서 열린 스코프스 재판(Scopes Trial)입니다.
당시는 공립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금지하는 '버틀러 법'이 통과된 직후였습니다. 고등학교 생물 교사였던 존 스코프스가 이를 위반하고 진화론을 가르치자 재판이 열렸습니다.
브라이언은 진화론 교육에 반대하는 검사 측 특별검사로 자원했고, 반대편 변호인단에는 당대 최고의 무신론자 변호사 클래런스 대로우(Clarence Darrow)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 재판은 단순한 형사 재판을 넘어 ‘성경과 과학, 보수와 진보’가 정면충돌한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상적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2. 그가 진화론과 싸운 진짜 이유
그를 단순히 '맹목적인 종교 광신도'로만 해석하는 것은 당시 역사를 반쪽만 보는 것입니다. 브라이언은 평생 약자와 노동자, 농민의 편에 섰던 진보적 포퓰리스트였습니다. 그가 진화론을 혐오했던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깊은 사회적 우려가 있었습니다.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 경계: 브라이언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라는 진화론적 논리가 자본가들의 탐욕, 우생학, 인종차별, 그리고 강대국의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무기로 쓰인다고 보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충격: 그는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군국주의의 도덕적 타락 배후에 니체 사상과 다윈주의가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인간이 동물의 후손이라고 가르치면 기독교적 박애주의와 도덕성이 붕괴할 것이라 염려했습니다.
교육의 민주주의: 세금을 내는 학부모(대중)가 기독교적 가치관을 원한다면, 엘리트 과학자들이 아닌 다수 대중의 뜻에 따라 교육과정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철저한 민주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 현대 창조과학과의 차이점 (의외의 사실)
브라이언은 성경의 권위를 수호하려 했지만, 재미있게도 오늘날 주류 창조과학이 주장하는 '젊은 지구론(지구 나이 6천 년, 24시간의 6일 창조)'을 엄격하게 고수하진 않았습니다.
재판 당시 상대 변호사 대로우의 날카로운 유도신문에 피고 측 증인으로 유례없이 증언대에 섰을 때, 브라이언은 "창세기의 하루(Day)는 리터럴한(문자 그대로의) 24시간이 아니라, 수백만 년에 이르는 긴 시대(Age)일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즉, 지구의 나이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과학적 발견 자체는 수용하는 '오랜 지구론(Day-Age theory)'에 가까운 입장이었습니다.
씁쓸한 퇴장 재판 자체는 스코프스 교수의 유죄가 인정되어 브라이언 측이 승리(벌금 100달러)했습니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근본주의 진영의 문자주의적 성경 해석이 언론(특히 냉소적인 저널리스트 H.L. 멩켄 등)의 혹독한 조롱거리가 되면서, 대중적 이미지에서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브라이언은 이 치열했던 공방이 끝나고 불과 닷새 뒤, 재판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을 자던 중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