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의 누락된 알파벳들을 메우고, 리처드 도킨스 특유의 정교한 상찬과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의 시적인 문체를 살려 한국어 수필처럼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다시 번역했습니다.
서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마지막 르네상스인’이라는 말은 이제 진부한 표현이 되어버렸지만, 그 표현이 한 치의 거짓 없이 딱 들어맞는 보기 드문 순간만큼은 그 진부함을 기꺼이 용서하게 된다. 그리고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야말로 그 왕관을 쓰기에 가장 완벽한 인물이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과학자 중에서도 예술에 대해 깊고 폭넓은 지식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이들이 있고, 심지어 어떤 학자는 최고 수준의 과학적 성취와 세계적 권위의 중국 문명사 연구를 동시에 일궈내기도 했다. 하지만 브로노우스키처럼 역사와 예술, 문화인류학, 문학, 그리고 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과학과 결합하여 ‘단 하나의 매끄러운 직물’로 짜내려간 이가 또 있을까? 더욱이 그 방대한 지식을 조금의 허세도 부리지 않고 그토록 가볍고 자연스럽게 풀어낸 이가 또 있을까?
브로노우스키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그렇기에 이 사실은 더욱 경이롭다—마치 거장이 붓을 쥐고 거대한 캔버스에서부터 정교한 세밀화에 이르기까지 자유자재로 화폭을 채워나가듯 영어를 구사한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에서 영감을 받아, 《인간등정의 발자취》 다큐멘터리 도입부에 등장하는 윈저 성 왕실 소장품인 ‘자궁 속 아기’ 스케치를 언급하며 책에 이렇게 적었다. 아마도 레오나르도는 인류 최초이자 가장 위대한 르네상스인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특별한 이유는 과학을 하기 때문도, 예술을 하기 때문도 아니다. 과학과 예술 모두 인간 정신이 지닌 경이로운 가소성(외부 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하고 변화하는 능력)의 발현이기 때문에 인간은 특별하다. 〈모나리자〉는 그 훌륭한 예시다. 레오나르도가 평생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생각해보라. 그는 자궁 속 아기를 그린 해부학적 인물화에 몰두했다. 뇌, 그리고 아기야말로 인간 행동의 가소성이 태동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브로노우스키는 레오나르도의 스케치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속의 인류 조상 표본인 ‘타웅 아기(Taung baby)’의 이야기로 물 흐르듯 유연하게 넘어간다. 브로노우스키가 그 작은 두개골을 수학적으로 분석할 당시에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 아기가 200만 년 전 거대한 독수리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책의 모든 페이지에는 마음속에 보물처럼 간직할 만한 문장, 문 앞에 붙여두고 모두와 나누고 싶은 경구, 혹은 위대한 과학자의 묘비명으로 삼아도 손색없는 격언들이 가득하다.
“지식이란… 불확실성의 가장자리에서 벌이는 끝없는 모험이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차고 영감을 주는 말인가. 그러나 이 문장을 온전한 문맥 속에서 읽어내려갈 때, 우리는 이내 깊은 충격을 받게 된다. 그 묘비명이 가리키는 무덤은 다름 아닌, 히틀러와 그의 동맹국들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처참히 파괴되어 버린 유럽 지성사 전체의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은 더 이상 상상력을 품어주지 않았다. 비단 과학적 상상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화를 바라보는 하나의 거대한 관념 자체가 후퇴하고 있었다. 인간의 지식이란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책임감이 따르는 것이며, 불확실성의 가장자리에서 끊임없이 벌이는 모험이라는 그 위대한 관념 말이다. 갈릴레오의 재판 직후가 그러했듯, 유럽 대륙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거장들은 위협받는 세계를 향해 망명길에 올랐다. 막스 본, 에르빈 슈뢰딩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 토마스 만,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마르크 샤갈이 그들이었다.”
이토록 준엄한 시대의 목소리에는 과장된 웅변이나 억지 눈물이 필요치 않다. 브로노우스키의 언어는 오히려 차분하고 인간미 넘치며 절제된 어조 덕분에 더 강인한 힘을 얻는다. 특유의 굴러가는 R 발음을 구사하며, 어둠 속의 등대처럼 번쩍이는 안경 너머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던 그의 모습이 선하다.
이 서글픈 대목은 늘 빛과 감동으로 가득한 이 책에서 드물게 마주하는 어두운 터널이다. 책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지면을 뚫고 나오는 브로노우스키만의 독특한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를 단칼에 베어내듯 단호하게 움직이던 그의 손짓을 보게 된다. 그는 조각가 헨리 무어의 위대한 작품인 〈칼날(The Knife Edge)〉 앞에 서서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손은 정신의 최전선이다. 문명이란 완성된 유물들을 한데 모아놓은 수집품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정교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다. 결국 인류의 행진은 ‘행동하는 손’을 끊임없이 세련되게 다듬어온 역사다. 인간을 등정하게 만든 가장 강력한 원동력은 스스로의 기술에서 느끼는 순수한 즐거움이다. 인간은 자신이 잘하는 일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잘해내고 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잘해내기를 열망한다. 인간의 과학이 그러하고, 위대한 건축과 조각을 세워 올릴 때 깃드는 장엄함과 정성, 유쾌함과 대담함이 그러하다. 기념비들은 흔히 왕이나 종교, 영웅, 도그마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다고 믿어지지만, 결국 그 기념비가 영원히 기억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그것을 지어 올린 ‘건축가(인간)’ 자신이다.”
브로노우스키는 철저한 합리주의자이자 기존의 우상을 타파하는 성상파괴자였다. 그는 과학이 이룩한 달콤한 성취에 안주하는 것을 경계했으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안일한 지성을 자극하고 도발하고자 했다.
“과학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발칙하고 무례한 질문을 던져라. 그 순간 당신은 가장 적절하고 명쾌한 해답을 얻는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이 명제는 비단 과학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의 영역에 흐르는 진리다. 브로노우스키는 마침 독일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위대한 대학 중 하나를 예로 들며 대학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했다.
“대학은 학생들이 완벽한 믿음 대신 ‘어느 정도의 의구심’을 품고 찾아오는 메카다. 학생들이 배움의 임할 때 약간은 부랑자 같고, 맨발로 걷는 듯한 불경함을 지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들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지식을 숭배하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라, 그것에 당당히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브로노우스키는 원시 인류가 지녔던 마술적인 사색들을 깊은 동정과 이해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결코 이성적인 선을 넘지는 않았다.
“…결국 마술은 단어일 뿐, 해답이 될 수 없다. 마술 그 자체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공허한 단어에 불과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과학 안에는 마술이 존재한다. 물론 ‘올바른 의미의 마술’이다. 또한 이 책의 모든 페이지에는 시(詩)가 숨 쉬고 있으며, 실로 마술 같은 시가 가득하다. 과학은 다름 아닌 ‘실재하는 현실의 시’다. 비록 그가 이 문장을 직접 남기지는 않았을지라도, 명석하면서도 박학다식했던 이 온화한 현자라면 능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의 지혜와 눈부신 지성은 인류가 걸어온 ‘인간 등정’의 역사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알맹이만을 상징하고 있다.